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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77화 (7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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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놈! 환관 나부랭이 따위가 감히 뉘의 수족을 잘라가는 것이냐!"

우직하게 서서 교지를 읽어내려가는 필두에게 달려들던 황후가 병사들에게 붙들려 버둥거린다. 귀한 비단옷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찢어지고 그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장신구는 돌멩이처럼 바닥에 굴렀다.

"놓지 못할까! 이 몸은 황손을 품었다!"

"아이고, 마마, 마마!"

개처럼 질질 끌려나가는 궁인들의 비명소리가 황후궁 가득히 넘실거린다. 비명의 파도 한가운데서 바닥에 주저앉은 황후는 필두를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었으나 그뿐, 황제의 대리인으로 이 곳에 온 환관장에게는 손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금일 오전만 하여도 여느 때처럼 일어나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조수라를 들고 몸단장을 하였으며, 무료한 시간은 배 상궁과 잡담을 하거나 차를 마셨다. 헌데 낮것상이 들어오기도 전에 천지가 뒤집힌 것이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수라장이 된 내실을 바라보던 민씨의 머릿속에 문득 배 상궁과 나누었던 대화 중 한 자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젯밤 황제께서 전에 없이 노화를 내며 집무실을 뒤집어 엎고 곧장 월화궁으로 가셨다는.

"황상! 그 년입니까! 천한 후궁 계집 하나로 신첩을 이리 박대하십니까!"

그녀의 외침에 대답할 이는 누구도 없었다. 상궁도, 환관도, 궁녀도, 하다못해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들까지도 끌려나간 드넓은 황후궁에는 오직 배 상궁과 민씨, 단 둘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홀로 바락바락 악을 쓰던 황후가 결국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자 혼비백산한 배 상궁이 달려나가 금위대장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이보시오, 황후께서 혼절하셨소!"

"쥐새끼 하나 들이지 말라는 황명이시오."

"저러다 태중 용종이라도 잘못되면 어찌 하시려오, 제발 태의를 좀 불러 주시오."

하기사 맞는 말이니, 잠시 고민하던 금위대장은 수하를 보내어 황제께 상황을 보고하였으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오히려 뜨겁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태의 대신 황제가 직접 자리를 차고 일어섰으므로.

"용종? 허면 태의보다는 아비가 가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말은 아비라 하나 눈빛은 제 것을 건드린 자에 대한 분노로 이글거린다. 일거리들을 내던지고 황후궁으로 향하던 현은 중간에 걸음을 멈추고는 커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들었다.

화연이 피 맺힌 종아리로 절룩절룩 걸어왔을 길을 되짚는 발자국 옆으로, 질질 끌리는 나뭇가지가 그려낸 선 또한 함께 따라갔다.

"황제 폐하 납시오!"

혼절한 황후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대어주던 배 상궁이 화들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그래도 쓰러졌다 하니 걱정이 되어 오신 것일테다, 그리 생각하던 그녀는 곧 자신이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히 누워서 짐을 맞이하다니."

"황공하오나 폐하, 황후마마께서는...."

"닥쳐라. 네 목은 민씨년 다음이다."

그 낮고 소름끼치는 옥음은 배 상궁의 입을 단단히도 꿰매어 버렸다. 현은 조금 전까지 영건을 적시는 데 사용되던 물대야를 통째로 들어 황후의 얼굴에 쏟아부었다. 아푸푸, 난생 처음 맞아보는 물벼락에 놀라 투레질을 하던 민씨는 누가 자신에게 물을 퍼부었는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폐하...?"

"일어서."

환상이나 헛것이 아니었다. 눈 앞에 나타난 이는 틀림없는 황제였다. 그것도 얼굴 가득히 살의가 넘쳐흐르는.

"폐하, 신첩에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신첩은 용종을, 아악!"

미친년. 황후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뒤로 꺾은 현이 이를 갈며 속삭였다.

"네년이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용종을 지껄이느냐."

"폐... 폐하...."

"태후궁의 나인들이 짐의 코앞에서 증언했지. 네년이 침수시중을 들었던 날이면 반드시 셋이 함께 붙어처먹었다고. 죽은 여 씨와, 그 년의 개새끼까지. 날짜를 맞춰야 하니까."

차라리 혼절한 채 누워 있어야 했다. 머리채를 잡혀 앉지도, 서지도 못한 민씨의 색기 넘치던 눈은 흉측하게 위로 찢어져 미친 듯이 흔들렸다.

"짐은 결단코 네년에게 씨앗을 준 적이 없는데, 어찌 회임을 하였을까. 감히 그 더러운 씨앗으로 용종을 지껄여?"

"폐하... 모... 모함이옵니다, 그년들이 거짓을...."

"가만히 있었다면 그저 목이 베이는 정도였다. 운이 좋았다면 사약을 내려 온전한 시신이나마 건지게 할 수도 있었겠지. 허나 그새 짐의 역린을 건드렸더구나."

반듯하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가는가 하였더니, 뒤에 선 병사들을 향해 싸늘한 명을 뱉았다.

"세워서 매달아라."

민씨는 이미 다리가 풀린지 오래라 서 있을 수 없었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 건장한 병사들이 그녀의 손목을 묶어 천장에 매달아 주었으니까. 치마를 걷어 줄 생각도 없었다.

현이 거칠게 찢어낸 비단치마가 걸레짝이 되어 발 아래 나뒹굴고 속곳과 버선만 걸친 하체가 수십의 병사들 앞에 드러나자, 창백하던 민씨의 얼굴이 수치심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후궁의 몸으로 다른 사내와 통정한 죄, 열 대. 천한 씨앗을 용종이라 속여 국모의 자리를 유린한 죄, 열 대. 천자를 누워서 맞이한 죄, 열 대. 감히 내 정인의 옥체에 흠집을 낸 죄, 삼백 대. 세어라. 하나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치겠다."

옥체. 한낱 후궁에게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서 미인이 바로 황후궁의 다음 주인임을 예감한 민씨의 시선이 황제가 질질 끌어온 가시투성이의 나뭇가지에 가 닿았다. 말도 안 된다. 자신은 고작 물푸레나무를 매끈하게 깎은 회초리로 이십 대를 쳤을 뿐인데, 저것으로 삼백삼십 대라니. 허나 억울하다 외칠 수 있을까, 그저 울며불며 싹싹 비는 수밖에.

"폐하, 부디 용서를, 아악!"

사내의 힘으로 휘둘러진 나뭇가지가, 다리를 부러뜨릴 듯한 고통과 함께 살갗에 거친 생채기를 내었다.

"세지 않았다. 다시 처음부터."

휘익, 다시 나뭇가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종아리를 쳤다.

"아악, 하나!"

휘익, 벗겨진 살갗에서 피가 흘렀다.

"둘!"

휘익, 현의 얼굴에 피 한 방울이 튀었다.

"아악, 폐하, 제발!"

"처음부터."

삼백삼십대 중 오십 대를 채웠을 때 민씨는 다시 혼절했다. 종아리는 이미 살이 문드러지고 찢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물을 부어라."

누구보다 거친 훈련을 받아온 병사들조차 그 잔혹함에 눈을 돌렸으나 현은 처음 이 곳에 들어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냉정했다. 민씨의 머리부터 엎어씌워진 우물물이 피와 섞여 바닥으로 뚝뚝 흘렀다.

"사십한 대부터. 시작."

휘익, 물에 젖은 살이 아까보다 더 날카로운 고통을 느꼈다.

"아악! 사... 사십하나!"

휘익, 거친 나무껍질에 붙은 살점이 덜렁거린다.

"사십... 둘...!"

혼절하고, 물을 붓고, 치고, 다시 혼절하고의 반복이었다. 이국에서 바친 화려한 융단은 핏물로 시뻘겋게 물들고, 궁녀들이 정성껏 세답한 흑룡포 역시 핏물이 잔뜩 튀어 엉망이 되었다.

"폐하, 하혈을 하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필두가 조심스레 고하자 현이 처음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하얀 속곳 사이로 배어나와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것은 분명 하혈이었다.

"재수가 없긴 하군. 죽으면 안 되니 치료해 주어라. 조 환관, 몇 대나 남았지?"

"도합 아흔두 대를 치셨고, 이백서른여덟 대 남았나이다."

"태의를 보내어 절대 죽지 않게 한다. 또한 자결하지 못하도록 사지를 결박하고 재갈을 물려 두어라. 조금 살아나거든 내게 보고하라 이르도록."

"예, 폐하."

필두는 대답을 하면서도 재게 움직여 깨끗한 물에 영건을 적시고, 현은 그것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내곤 아무렇게나 던졌다.

"욕간을 준비하오리까?"

"월화궁에 준비해라. 바로 거기로 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혼절해 있는 민씨를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본 현이 피묻은 흑룡포를 탁 털며 돌아섰다. 빨리 화연에게 가서 이 피와 불결한 냄새를 씻어내고 그녀의 체취를 가득 채우고 싶다.

바닥과 한몸이 된 듯 엎드려 있던 배 상궁은 그제서야 벌벌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그저 상전이 천장에서 풀려나 침상으로 옮겨지는 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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