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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78화 (78/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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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피...!"

늘 흉배에서 꿈틀거리던 황금빛 용이 핏빛으로 물든 채 나타나자 놀란 화연이 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한 걸음 뒤로 훌쩍 물러난 현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내 피는 아니다. 네가 손을 댈 만한 깨끗한 피 또한 아니다."

당장이라도 화연을 끌어안고 지친 몸을 쉬고 싶지만 그 계집의 피가 화연에게 묻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 선 채 눈으로 정인을 안았다.

장신구 하나 달지 않고 성글게 땋아 곱게 내린 머리타래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달콤한 과실마냥 향기로운 입술을 한입 머금고, 너무 놀라 신도 신지 않고 맨바닥을 디딘 새하얀 발등에 입을 맞춘다. 그 뜨거운 눈빛에 화연의 숨이 조금씩 가빠오기 시작할 때 밖에서 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욕간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막 살구빛 치마 속에 감추어진 다리를 훑어 올라가던 시선이 아쉽게 거두어졌다.

"씻고 오마."

"폐하, 내가!"

현이 돌아서자 다급한 외침이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제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같이 가요."

"마음만 받지."

"그거... 황후마마의 피죠. 아닌가요?"

화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혜국의 태양, 불세출의 성군이다.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휘둘러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이야기는 평생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화연이 입궁한 이후 늙은 환관장을 시작으로 객잔의 술주정뱅이, 태후와 제운. 자신에게 해를 끼친 이들은 그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두 죽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그렇다면 이번 차례는 아마 매질을 한 황후이리라. 등 뒤에서 불안을 느낀 현이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불결한 계집의 피다. 네가 손을 대도록 할 수 없지."

"그 또한 여인의 흔적이잖아요. 내가 씻겨 드릴래요."

화연이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현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결국 나란히 들어선 욕실에서 스스로 옷을 벗은 다음 몸을 한 차례 헹궈낸 후에야 화연의 손을 허락했다.

서투른 손길이 단단히 매어진 상투를 풀어내고 여러 일들로 지끈거리던 머리를 부드럽게 주무른다.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기댄 현은 오늘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폐하는 머리 푼 것도 예뻐요."

"예쁘다고?"

난생 처음 듣는 신선한 칭찬에 현이 낮게 웃었다.

"머릿결도 예쁘고, 이마도 예뻐요. 눈썹도 예쁘고 코도 예뻐. 속눈썹 긴 것도 예뻐. 눈꼬리 긴 것도 예뻐. 입술 얇은 것도 예뻐."

예쁜 부분들을 쪽쪽 소리내며 짚어 내려오던 입술이 현의 미소까지 삼킨다. 흘러내린 머리타래가 얼굴을 간지럽히는 감각을 기분좋다고 느끼며, 현이 손을 올려 위에서 입을 맞추어 오는 화연을 쓰다듬었다.

"손가락도 예뻐."

화연이 고개를 돌려 제 뺨을 감싼 솓끝을 장난스럽게 물었다. 집게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혀로 장난치다 가운뎃손가락도 한번 빨고, 조금 내려가 손바닥을 할짝대던 그녀가 문득 입술을 떼어냈다. 혈향이 섞인 비릿한 맛. 거친 것에 쓸린 상처가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다쳤어요."

"그랬나."

기분좋게 손을 탐하던 혀끝이 아쉽다. 현은 눈을 감은 채 화연의 얼굴을 더듬어 자그마한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으며 성의 없이 중얼거렸다.

"후궁의 몸으로 다른 사내와 통정한 죄, 열 대. 천한 씨앗을 용종이라 속여 국모의 자리를 유린한 죄, 열 대. 천자를 누워서 맞이한 죄, 열 대. 감히 내 정인의 옥체에 흠집을 낸 죄, 삼백 대."

"통정에... 용종이요? 아니, 그보다 그리 때리고 오셨다구요?"

"당연히 아니지."

그래도 조금은 제정신이라 다행이다. 아무리 그래도 회임한 여인이 아닌가. 그리 안심하던 화연의 심장이 이어지는 다음 말에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은 아흔두 대 때리고, 이제 이백서른여덟 대 남았다."

"폐하."

물컹한 것이 현의 얼굴에 닿았다. 걷잡을 수 없이 쿵쿵 뛰는 심장이 내려감긴 속눈썹을 타고 곧장 머릿속을 울린다. 현의 머리를 감싸안은 화연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다가 그가 알아듣기를 바라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차근차근 말을 꺼내들었다.

"누구의 씨앗이라 한들, 태중에 새 생명을 품은 여인입니다. 어린 생명을 해친 이는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죽어서도 삼도천을 건너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였으니, 더는...."

"네가 함께 가 주겠지. 그 나락."

현이 옷 위로 부드럽게 그를 내리누르는 살덩이를 장난스레 물었다.

"나는 반역을 도모한 우승상과 그 식솔들, 샌님까지도 죄다 살려 주었다. 적어도 네 몸에 손을 대지는 아니하였거든. 허나 그 계집은 다르다. 감히 네 살을 찢고 피를 내었지. 그것이 반역보다 더 큰 죄다. 나를 해할 수 있는 이가 너뿐이듯, 네게서 피를 볼 수 있는 이 역시 나뿐이다."

천천히 말을 이어가는 동안 손끝의 감각으로 풀어낸 옷자락이 찰박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화연이 예쁘다고 했던 얇은 입술이 살며시 유두를 찾아 입안 가득 빨아들이자 달콤한 숨소리가 따라 들어온다. 한 쪽을 그리 다 빨아먹은 후에는 옆으로 옮겨가 남은 한 쪽도 마저 물었다. 숨넘어가게 울던 어린아이가 어미의 젖을 물고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듯, 그렇게.

"... 후우."

이윽고 상기된 얼굴을 젖가슴에서 떼어낸 현이 밭은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나른하게 풀린 눈동자와 타액으로 젖은 입술도 색정적이지만 물방울이 흘러내린 날가슴과 단단하게 일어선 남근 또한 탐이 난다. 잠시 홀린 듯 그를 내려다보던 화연이 재빨리 영건에 팥가루를 묻혀 너른 어깨부터 닦아내었다.

"왜 갑자기 서두르지?"

"폐하를 빨리 데려가게요."

"어딜?"

"침상에."

"오늘은 너를 안지 아니할 것인데."

현의 몸을 약간 밀고 등을 닦아내리던 화연이 멈칫했다.

"어째서요?"

답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현이 손끝으로 물을 튕겼다.

"아무래도 너까지 나락으로 데려가는건 싫어서."

삼도천이니, 나락이니. 해마다 자신이 올리는 제삿상의 주인인 옥황상제조차 현은 믿지 않았다. 허나 늘 코웃음치던 그 미신들이 화연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진실이 되었다.

"하혈을 하였다. 하지 않았더라도 태아는 살아 나오지 못할 운명이고. 해서 오늘은 너를 안고 싶지 않구나. 너까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게 할 수는 없으니."

찰랑, 물의 표면에 떨어진 영견이 아른아른 춤을 추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현의 목을 감싸안은 화연의 목소리처럼.

"같이 가요. 지옥이든, 나락이든."

현이 뒤로 손을 올려 화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오밀조밀한 입술이 바로 코앞에 있다. 깃털마냥 부드러운 혀놀림이 그 입술을 열고 안으로 침범해 들어갔다.

"그럴까, 그럼. 네 있는 곳이 내 쉴 곳이니."

**

"죄다 잡아들이고 집안을 샅샅이 수색해라!"

금위대장의 호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혼비백산한 민 대감부터 처첩들, 자식, 노비들까지 죄다 끌려나와 마당에 꿇어앉혀지고 모든 세간살이들이 매던져지니 대궐마냥 번듯하던 집은 간 곳이 없었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민 대감이 포박된 채 소리를 질러 보지만 금위대장에게 먹힐 리가 없다. 귀라도 먹은 듯 눈앞만 응시하던 그에게 병사 하나가 달려왔다.

"광에 여인들이 가득합니다! 죄다 임부들입니다!"

젠장. 민 대감은 얼굴이 시퍼렇게 얼어붙고, 그 부인은 이미 혼절했다. 병사들이 광에서 끌고 나온 여인들은 하나같이 배가 나온 임부들. 금위대장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진 그녀들이 연신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였으니, 절대 제 의지로 광에 들어간 것은 아닐테다. 살아있는 증좌였다.

"너희들은 어찌 광에 있었느냐?"

"모릅니다, 영감. 소인은 자식과 지아비가 있는 몸이온데, 나물을 캐러 갔다가 괴한들에게 붙들려서...."

"소인 또한 밤에 변소에 가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집에 가고 싶습니다, 집에 젖먹이가 있습니다요, 영감!"

저마다 억울함을 토로하는 여인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영문도 모르고 잡혀 소달구지에 한참을 실려왔고, 한 달을 넘게 광에 갇혀 주는 음식만 받아먹고 살았다.

처음에 몇몇이 반항하였으나 끌려나간 뒤 소식이 없으니, 아마 죽었을 것이라는 증언까지 나왔다. 금위대장은 즉각 그녀들의 증언들을 취합하여 황제께 나아갔다.

"미친놈. 가자. 짐이 직접 친국할 것이다."

금위대장의 보고를 받은 현이 당장 흑룡포를 떨치고 벌떡 일어섰다. 황후 민씨와 비슷한 개월수의 임부들이 언뜻 보아도 스무 명 가까이라, 그들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얼음이 뚝뚝 떨어질 듯한 눈으로 눈앞에 꿇어앉은 죄인들을 내려다보던 그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민 무천의 식솔들이 어찌 되느냐."

"정실과의 사이에 여식이 하나 있으니 황후 민씨이옵고, 양녀가 하나, 그 외 첩실 소생의 아들이 둘이옵니다."

"허면 저 계집은 누구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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