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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면 저 계집은 누구란 말이냐?"
현이 턱짓한 곳에는 벌벌 떠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황후 민씨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으나 전혀 닮지 않은, 그저 밋밋한 낯색과 후덕한 몸매를 가진 여인이었다.
"민씨 집안의 양녀로 아옵니다."
금위대장의 답변에 현이 한숨을 쉬며 민 대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놈이 말해 보아라. 저 계집이 누구인지."
"집안에 여식이 하나라, 황후마마께오서 적적하시니 동무 대신 들인 양녀이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현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흘렀다.
"저년의 얼굴에 낙인을 새겨라."
"예, 폐하!"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들어간 인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공포에 잠식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은 인두가 숯덩이 사이로 빠져나오자 비로소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아버지! 살려주세요!"
"아가, 아가! 안 됩니다, 폐하! 다, 다 말하겠습니다! 아가!"
비명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현이 계집을 지목했을 때부터 세차게 떨던 민 대감의 처는 정작 계집보다 더 처절하게 외치며 몸부림쳤다. 민 대감이 다급히 소리를 질러 입을 막았으나 소용없었다.
인두가 살을 태워들어가기 직전, 현이 한손을 들어 병사의 손을 멈춰세우자 온 얼굴에 눈물을 줄줄 흘리던 민씨의 처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불기 시작했다.
"제, 제 친딸입니다."
"무슨 짓이오! 닥치지 못하겠소!"
"저 새끼 입 닫게 해."
시끄럽게 떠들던 민 대감의 목소리가 재갈에 막혀 읍읍대자 좀 조용하다. 현이 다시 말해보라며 턱을 까딱하자 울음 반, 애원 반인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미모가 출중하지 못하다 하여 저 불쌍한 것은 양녀로 살고, 멀리서 데려온 양녀가 저 아이를 대신하여 입궐하였습니다. 허니 이년의 목숨을 거두시고 제발, 우리 딸은 살려주십시오. 폐하...."
"어머니, 안 돼요, 어머니! 폐하, 저를 죽이시고 어머니는 살려 주십시오, 제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나 황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아니, 조금은 있었다. 이 새끼들이 아주 작정을 하고 미쳤구나, 하는 잔잔한 분노가 미간에 드러났으니.
"임부들은 어찌하여 광에 가두었느냐."
목이 달아나도 입을 열어서는 아니 되었으나, 하나뿐인 여식이 걸린 일이다. 차피 남이나 다름없는 부부사이이니 민 대감의 목숨 따위는 알 것이 무어람. 조금도 망설임도 없이 술술 나오는 목소리가 여인들의 증언에 힘을 보태 주었다.
"감히 말씀드리옵니다, 황후의 진통이 시작되면 소인이 친정어미로서 산실청에 드는 바. 그들이 낳은 젖먹이 중 사내아이를 감추어 데려가서 만일 황후가 계집아이를 낳거든 그 아이와 바꿔치기하라, 대감께서 그리 명하였습니다!"
"감히 천한 계집을 친딸로 위장하여 후궁으로 들여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황자마저 바꾸려 했다 이거지."
하, 가소로운 웃음이 입꼬리를 타고 흘렀다. 현이 손을 까딱하자 화로에 얌전히 들어가 있던 인두가 다시 빠져나왔다.
"죄인의 눈을 지져라."
"예, 폐하."
치이이익,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냄새 사이로 겁에 질린 식솔들의 끔찍한 비명까지 한데 어우러져 지옥을 방불케 한다. 말로는 친국을 한다 하였으나 증좌와 증인이 명명백백한 지금은 그저 죽기 전에 고통을 보태주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황후 민씨가 친딸이 아니라는 것은 좀 의외였지만.
"여식을 바꿔치기하여 천한 핏줄을 황궁에 들여보낸 것도 모자라, 그 년의 자식까지 바꾸려 하였더냐."
물 흐르듯 잔잔한 목소리는 분노보다 더 큰 분노였다. 저 늙은이가 악독하고 천한 계집을 입궐시키지만 않았던들, 화연이 그 수치를 당하고 매를 맞는 일은 없었으리라.
"친국하고 말고 할 것도 없군. 민 무천의 남은 눈과 혓바닥을 도려내어 황후전의 민씨년에게 먹여라. 또한 사흘에 걸쳐 천천히 사지를 자르고 소금에 절여 돼지우리에 던진다. 식솔들은 북쪽 최전선으로 보내어 사내는 고기방패로 삼고 계집은 병사들 노리개로 주어라."
"황명을 받드나이다."
***
민씨 일파의 처결이 있고 난 후 사흘이 지났건만 황후전의 민씨는 그대로 유폐되어 있을 뿐, 폐비되거나 사사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 가운데 가장 유력한 가설은 다름아닌 서 미인.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황후로 올리고자 황제께서 칼을 뽑아 민씨 세력을 쳐내고 서 미인의 세력이 다듬어지기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깊은 고민에 빠진 병부상서는 평소보다 더욱 억눌린 분위기에서 조강을 마친 후 곧장 여식을 찾아갔다.
"아버님, 예는 어쩐 일이시옵니까?"
부쩍 말라있던 윤 첩여는 반가운 얼굴을 보고 모처럼 웃음을 머금었다. 황후만을 노려보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기에 어찌 생겼는지조차 모르던 서 미인이다.
헌데 그런 여인이 황후전에서 회초리를 맞고 나간 일과, 그 직후 급작스레 불어닥친 피바람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제께서 그녀의 처소에 발길을 뚝 끊으신 것 또한.
"다과는 내오지 마십시오. 황궁 분위기가 흉흉하여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반가움이 무색하게도 병부상서는 딱딱하게 자리에 앉았다. 오랫동안 검을 잡아 온통 굳은살이 박힌 손이 여식의 손을 단단히 감싸쥐고 건네는 당부 또한 단호했다.
"납작 엎드리십시오. 절대 서 미인을 건드려서도 아니되고, 폐하의 눈에 띄어서도 아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얼마만에 만난 소녀에게 하실 말씀은... 고작 그뿐이십니까?"
시뻘겋게 익은 원망의 열매가 엉뚱한 곳을 향해 터진다. 병부상서는 여식의 얼굴에서 눈을 돌리며 이마를 감싸쥐고 한탄처럼 읊조렸다.
"이 아비의 마음이라 어찌 편하겠습니까. 하오나 마마, 마마의 신변이 걸린 문제입니다. 서 미인에게 잘 보이셔야 합니다. 또한 절대 황후궁을 욕심내셔도 안됩니다. 황자를 낳으세요. 황자를 낳으면 품계 또한 황귀비로 올라갈 것이고...."
"제 마음은요. 아버님, 제 은애는 어찌합니까."
"마마."
굵은 눈물방울이 턱을 타고 부친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져 어룽졌다.
"폐하를 은애하는 제 마음은 어찌하냔 말입니다. 황자가 다 무어고, 황귀비가 되면 무엇 합니까. 황자를 생산하면, 그분께서 저를 한번 더 봐주시겠습니까? 그리 된다면 열 손가락을 끊어서라도 천지신명께 빌고 빌어 황자를 낳겠습니다. 아버님, 소녀가 이리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애닳는 심정이 끝끝내 윤 첩여를 어린아이마냥 울부짖게 만들었다. 하나뿐인 외동딸, 목숨보다 귀한 여식을 바라보는 병부상서 또한 차마 함께 울지 못하여 눈을 감았다.
충신이라 자부했다. 한낱 병사부터 시작하여 무관으로 숱한 공을 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황제와 국정을 논하는 병부상서까지 올라왔다.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나듯 변방으로 가서도 이를 악물고 오랑캐를 토벌했다.
헌데 돌아온 것은 지금 눈앞에서 울부짖고 있는 여식의 파리한 안색과 핏기없는 입술인 것이다.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욕심내지 않았던 권력이, 자신은 물론 여식의 목숨마저 쥐어짜고 있었다.
"백일홍이 곱다한들 열흘 붉은 꽃 어디 있으리오. 사내란 제 핏줄 가진 여인을 돌아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법입니다. 허니 그저 가만히 계십시오. 모든 대신들의 출입을 막고, 어떤 행동도 취하셔는 아니 되십니다. 아비도 이제 가 보아야 합니다. 마마, 부디 이 아비의 당부를 명심, 또 명심하소서."
병부상서는 윤 첩여를 더 달래주는 대신 마지막으로 손을 꽉 붙잡았다 놓고 누가 볼새라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손등 위에 묻은 눈물방울이 송곳마냥 가슴으로 파고든다. 때마침 쏟아지는 소나기가 그것을 씻어내었음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