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구름 -->
"스승을... 붙여 주었다고?"
그녀에게 닦달당해 위험을 무릅쓰고 월화궁에 다녀온 측근이 서 미인의 동향을 전하자 윤 첩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들키면 경을 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월화궁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현이 붙여둔 그림자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더 이상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환관장이 한 아름의 책을 안고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상서령 영감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그런 듯 합니다. 상서령 표 유한이라면 태자태사로서 폐하를 가르쳤던 이가 아닙니까."
그간 황궁에 떠돌던 소문은 모두 사실이었다. 차기 황후는 자신이 아니라 서 미인이라는 말. 게다가 아버님의 말씀대로 대신들의 출입을 완전히 막은 이후 서 미인의 세력은 점점 힘을 불려가고 있었다.
어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아까까지 그리 활발하게 태동하던 황손 또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낱 후궁에게 서책을 내리고 스승을 붙이지는... 않겠지?"
상궁은 침묵을 지켰으나 그것이 곧 긍정이다. 아버님께서 사내란 제 자식 낳은 여인을 돌아보지 아니하곤 못 배긴다 말씀하셨으나, 이러다 서 미인이 덜컥 회임이라도 한다면 그 실낱같은 희망조차 말짱 끝이 아닌가.
윤 첩여는 부풀어 오른 배를 어루만지며 우울한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가, 이 어미가 못나 미안합니다. 힘없는 중얼거림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
두 사람은 평소처럼 나란히 붙어앉지 않았다. 화연이 그가 정녕 황제임을 깨닫는 순간이라면, 문득문득 이렇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넘칠 때다. 어쩐지 긴장하여 자세를 바로한 그녀에게 묵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육부."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
"거기서 형부란."
"사법, 처결, 복심."
"승상부 내에서 장사(長史)가 관할하는 조."
"서조, 동조, 주조, 사조, 위조, 적조, 금조, 창조, 황합주부."
"꽤 하는군."
현이 무심하게 흘린 칭찬에 득의양양해진 화연은 어깨를 펴며 방긋이 웃었다. 배워야 할 것들이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지금 화연이 이레간 머리를 싸매고 외운 이것들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 저리 웃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그 사실을 굳이 일러줄 필요는 없었다.
"오교위."
"효기교위, 월기교위, 보병교위, 장수교위... 음...."
아무리 꼽아 보아도 하나가 모자란다. 오교위가 아니라 사교위 아닐까,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보지만 딱딱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는 현의 얼굴은 계속해서 하나를 더 말해보라며 재촉하고 있었다.
"폐하아... 나아, 배가 고픈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썹 끄트머리를 내려본다. 거기다 입술을 살짝 내밀고 몸을 비비꼬면 완성. 평소 현은 화연이 이리 바라볼 적이면 모든 생각이 사라지는 듯 보였더랬다. 당장에 씩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대곤 하였으니.
"오교위."
틀렸다. 울상이 되어 데굴데굴 굴리던 화연의 눈동자가 문득 현의 뒤편을 스쳐지나갔다. 서너 걸음 뒤에서 필두가 무어라 입을 벙긋거린다. 아... 아... 아성.
"아성교위!"
"사성교위."
딱, 한 대를 맞았을 뿐인데 이마가 벌써 발갛게 부어오른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것을 보니 아프긴 아픈 모양이라, 현은 웃음이 나는 것을 참으며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필두가 뒤에서 입모양으로 알려주고 있음을 알고도 눈감아 주었건만 그마저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삼사."
"태사, 태부, 태보."
몇 가지는 척척 대답하고, 몇 가지는 뒤에서 슬금슬금 알려주는 필두의 도움을 받아가며 시험을 끝내고 나니 벌써 석수라 들어올 시간이다. 합격일까 아닐까. 처음 나타날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현의 표정에서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저 잘했나요, 폐하?"
"처음이니까 이 정도로 합격. 앞으로 필두는 내 뒤가 아니라 네 뒤에 세워놓겠다."
"히이잉."
화연이 자세를 풀고는 서안 위에 철푸덕 엎어졌다. 그 바람에 벼루를 건드려 큰 사고를 칠 뻔 하였으나, 재빨리 그것을 받쳐든 현 덕분에 귀한 벼루를 깨먹는 일은 면하였다.
"조심 좀. 다치지 않느냐."
"벌써 다친 것 같은데요."
대여섯 대는 족히 맞은 이마가 새빨갛다. 나름 살살 때린 것인데도 그렇다. 현이 약간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 이마를 살살 쓸어주고는 그 위에다 호호 입김을 불어주었으나 툭 튀어나온 입술은 들어갈 줄을 몰랐다. 그 입술 사이로 장난스러운 혀가 파고들었다가 꽉 다문 치아를 한 차례 할짝이고 나갈 때까지도.
"잘 했다. 열심히 공부했구나."
칭찬은 거북이도 춤추게 한다 하였던가, 고목도 춤추게 한다 하였던가. 삐죽 나왔던 입술이 혼자 오물오물 위로 올라갔다가 애써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사슴이다. 한 품에 사슴을 가득히 안고 잠시 체취를 들이마시던 현은 마지막으로 발간 이마 위에다 쪽, 입을 맞추고는 천천히 팔을 풀어내었다.
"석수라 챙겨먹거라. 나는 다시 가 보아야 하니. 자기 전에 공부하는 것 잊지 말고."
"이제 안 오시게요?"
"오늘만."
"그럼 나, 폐하 저기까지 데려다 드릴래요."
장난스럽게 한쪽 팔에 매달린 화연이 현을 올려다보며 또 방긋 웃었다. 급작스런 애교에 준비되지 않은 마음이 쿵 떨어지며 현의 얼굴에 붉은빛이 떠오른다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빨개요. 걱정스런 목소리로 고개를 갸웃하는 화연을 탁 털어낸 그는 서둘러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에 있거라."
문을 나서다 보니 그래도 같이 가요, 하고 쫄래쫄래 따라와야 할 화연이 조용한 것이 허전하다. 슬쩍 돌아보니 또 삐죽 나온 입술, 저놈의 입술. 이번에도 현이 졌다.
"잠시 산보할까?"
"신첩은 안에 있겠사옵니다. 괘념치 마소서."
"괘념같은 소리하네. 이리 오너라."
다시 성큼성큼 돌아간 현이 앵돌아진 어깨를 감싸안았다. 넓은 소매가 자그마한 몸을 다 덮을 듯 감싼 모습이 썩 마음에 드니, 그는 못 이기는 척 따라오는 화연에게 맞추어 그녀가 세 걸음을 걸을 때 두 걸음을 걸었다. 그 속도로 월화궁에서 나와 발치에 소복소복 떨어진 낙엽을 차며 가을빛에 물든 후원을 지난다.
황궁의 가을이 이리도 아름다웠던가. 어느 새 삐쳤던 것을 잊은 듯, 팔 안에서 종알대는 사슴을 놓칠새라 꽉 부여잡은 채 거닐던 현은 자신이 후원을 벗어나 집무실 부근까지 다다랐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유난히 말라 배가 더 나와 보이는 윤 첩여였다. 현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화연을 뒤편으로 감추었으나 이내 그와 한 걸음 떨어진 화연은 황궁의 예법대로 저보다 품계가 높은 윤 첩여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황후궁에 앉히기 전에 품계부터 올려야겠군, 생각한 것은 물론이다.
"어쩐 일로 예까지 왔느냐."
"날이 좋아... 산보를 하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후궁전에서 집무실까지 거리가 얼만데, 단지 산보로 나왔을 리가 없다. 먼발치에서 그림자나 볼까 서성대던 와중에 운 좋게도 황제의 행차를 마주칠 수 있었던 것뿐.
허나 서 미인을 보물마냥 안고 오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은 정녕 아니었다. 애써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수그린 윤 첩여의 옆으로 흑룡포 자락이 휙하니 지나쳐갔다.
"해가 금세 진다. 들어가거라."
"예, 폐하."
조그맣게 중얼거린 대답은 아마 듣지 못하셨을테다. 고개를 들고 멀어져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 첩여는 문득 그가 무척 느리게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 미인의 종종걸음에 맞추는 듯, 혹은 영원히 이 길을 함께 걷고 싶다는 듯.
그 다정한 모습 위로 자신과 걸을 적에 늘 앞서 나가다가 가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 주시던 모습이 겹쳐진다. 어느날 갑자기 성총이 옮겨간 것이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과거, 침전 부근에서 마주쳤을 때 흑룡포에 감싸져 있던 여인은 황후 민씨가 아니라 서 미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