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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86화 (86/152)

<-- 검은 구름 -->

"더. 더 움직여라."

목덜미에 화살을 꽂은 사슴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터질 듯 부풀어오른 남근을 거의 다 쑤셔박은 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광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과 비릿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괴기스럽게 어우러짐에도 불구하고 화연의 눈에 비친 현은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사내가 허리를 움직이자 전혀 젖지 않은 내벽이 고통을 호소한다.

"폐하, 제발, 너무 아파요. 그만...."

"더 움직여 보래도."

"아파요, 아프다고."

"더 아프거라. 울고 소리를 질러라."

화연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자 추삽질은 더욱 강하고 빨라졌다. 그만큼 고통도 커졌다. 그러나 바깥에는 백여 명의 대신과 병사들, 그리고 궁인들이 있기에 화연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현이 다시 집어든 단도가 자신을 찌를 듯 닥쳐오기 전까지.

"아아악! 폐하!"

하필이면 왜 이 미친놈을 선택했을까. 왜 이 미친놈을 마음 깊이 은애할까. 화연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현은 그 비명소리에 만족한 듯, 자그마한 생채기만을 남긴 단도를 화연의 머리 옆에 꽂으며 부어오른 옥문에 양물을 박아대었다. 어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던 화연이 갑자기 새하얀 팔로 현의 목을 끌어당겨 이미 송골송골 피가 맺힌 유두를 입에 물렸다.

"하아... 폐하...."

화연이 고통에 잠식된 신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를 꽉 안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현의 뒤에, 흑운이 서 있었다.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한 손은 검손잡이를 꽉 쥔 채.

***

한동안 잘 볼 수 없었다. 황제는 의도한 듯 그와 봄이 마주치지 않도록 침전 내가 아닌 문 밖에 있으라 명했고, 종종 두 사람이 궁인들의 눈을 피해 산보를 할 적에나 보는 뒷모습이 전부였으니. 해서 조금씩 사그라든다 생각했다. 사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황제가 그에 대한 경계를 푼 듯 보였던 것이. 아마 봄이 월화궁을 하사받은 그 즈음인 것 같다. 종종 황제는 봄의 호위를 그에게 맡겼고, 투기심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일도 없어졌다. 오늘도 그랬다. 평년과 같이 황제를 호위하여 사냥터에 나서려는 그에게 서 귀비의 막사를 호위하고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라. 그리 명하였다.

평소 데면데면하던 후궁들이 봄에게 접근한 일도, 말리는 그를 뿌리친 봄이 청아한 향기만을 남기고 앞서 걸어나간 일도, 고요한 숲속에 단 둘만이 남은 일도 우연이었다. 단 한 번도 손을 내민 적 없었던 봄이 그의 팔을 꼭 잡고 매달린 일도 우연이었다.

켜켜이 쌓인 우연들은 우연히도 그의 마음을 깨뜨리고 그녀의 입술을 훔치도록 만들었다. 한겨울, 메마른 섶에 불씨를 당기듯 그 입맞춤이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평생동안 그를 지배하던 흑운으로서의 세뇌까지도.

허니 우연들이 만들어낸 지금 이 순간은 우연이 아니었다. 괴로운 듯 피를 흘리고 비명을 지르는 그의 봄을 무참히 짓밟고 있는 주군에게, 주군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검을 들이대려는 이 순간은.

"단번에 베어야 할 것이다. 나와 화연이 모두를."

황제를 꼭 끌어안은 화연이 제발 돌아가라며 그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저을 때였다. 웃음기마저 섞인 옥음이 타들어간 세뇌를 다시 조각하여 그에게 밀어넣었다.

"나를 베고 내 것을 훔쳐보아야 훔쳐지지 않을 터이니. 너는 그저 죽어가는 껍데기를 붙들고 오늘의 행동을 평생 후회하게 될 테지. 허니 지금 한꺼번에 베어라. 우리가 떠날 적에 함께 떠날 수 있도록."

그의 주군은 농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었다. 옥음의 무게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혜국의 태양이었다. 또한 사내였다. 봄의 품에 안겨서, 그 봄이 자신만을 위한 것임을 완벽하게 확신하는 봄의 주인이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봄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연모할 것이니 구태여 흑운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의 주군과 그의 봄은, 이미 하나였다. 검은 뽑혀지지 않았다. 밤의 허리가 조용히 숙여졌다가 다시 들어올려졌다.

"베지 않을 생각이라면 나가라. 나는 괜찮은데 화연이는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다더구나."

남이었다. 철저한 남이었다. 그녀가 벗은 몸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주군을 베고 그 아래 쓰러진 화연을 끌어내서, 그 다음은? 운이 좋아 모든 병사들과 그림자들을 따돌리고 도망친다 하여도 평생 그를 원망하고 정인을 그리워하며 죽어갈 화연에게 무어라 할 생각이었을까. 내 곁에 있어달라고 빌기라도 할 작정이었을까. 밤이 조용히 물러갔다. 그제서야 긴장을 놓은 화연의 팔이 현의 등에서 미끄러져 툭 떨어졌다.

"함께 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운 중얼거림과 함께 현이 입에서 놓았던 유두를 부드럽게 핥는다. 조금 전까지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이던 손이 침상에 떨어진 손을 위로하듯 쥐어 화연의 어깨 부근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아프도록 빨거나 씹는 대신 혀끝과 입술만으로 그녀를 느끼며 천천히 위로 올라와 싱긋 웃었다.

"진심이었어요?"

"당연하지. 딱 너와 함께 죽고 싶은 기분이었거든."

그냥 흑운을 진정시켜 내보내기 위한 말인 줄 알았는데. 화연의 입술을 가볍게 핥으며 대답하는 현은, 놀랍게도 진심이었다. 미친놈아. 나는 아직 안 죽고 싶다고. 방금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에 오싹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일단 살았으니 이제 다른 사람을 걱정할 차례였다.

"안 죽이시는거죠?"

조심스러운 질문에 주어는 없었으나 누구를 말하는지는 뻔하다. 아직도 광기가 사그라들지 않은 눈꼬리가 아주 조금 휘었다.

"왜? 너를 건드린 것도 아닌데."

무섭도록 맹목적이던 집착이 미묘하게 방향을 틀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해를 입힌 이들에게 잔인하리만치 복수한 이유는 화연이 다쳐서라기보단 자신의 것을 건드린 자에 대한 응징이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화연은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그가 보였던 과격한 행동들이 불안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여나 떠나갈까, 행여나 빼앗길까. 누군가 그녀의 눈길을 자신으로부터 거둬가지 않을까. 모든 것을 가졌으나 단 한번도 온전한 제 것을 가져본 적 없던 황제는 누구도 모르게 아홉 살에 멈춰 있었다.

"현."

아직도 혈향이 가시지 않은 입술이 그를 부르는 화연의 목소리를 받아 삼켰다. 어미의 입에서 먹이를 받아 삼키는 아기새처럼 화연의 입에서 청량한 향기를 흡입하고 타액을 마셨다. 달콤한 입맞춤에 조금씩 긴장이 풀린 화연이 녹진하게 풀어졌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깊숙히. 현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아픈데...."

"아프면 나를 연모하지 않으려느냐?"

"그럴 거면 처음부터 폐하를 은애하지도 않았을걸요."

살아있는 사슴의 피가 일깨운 가학적 본능이, 흑운이 본래 서 있어야 했을 막사 대신 엉뚱한 곳에 서 있었을 때의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든다. 아무리 짓밟고 피를 내고 고통을 주어도, 코앞에 칼을 들이대어도 이 검은 눈동자는 공포에 질릴지언정 현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동자가 현에게 새긴 것은 선명한 믿음이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화연은 현을 바라볼 것이라는.

"그럼 좀 참아라. 나중에 복수할 기회를 주마."

"칼도 주시나요?"

"당연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이 다시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부드러운 애무와 황홀한 입맞춤으로 흘러나온 음액이 그를 도왔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있는 힘껏 고통을 참아내면서도 원망을 숨기지 않는 눈동자는 현을 응시했다. 하아,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쾌락에 흠뻑 젖은 신음을 뱉은 현이 군데군데 붉게 얼룩진 나신 위로 쓰러진다. 아직도 결합되어 있는 음부에서 탁한 액체가 엉덩이를 타고 흘렀다.

"아윽."

잠시 만족감에 젖어 화연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몰아쉬던 현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래도 날카로운 손톱은 그의 엉덩이를 꽉 꼬집고 비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건 좀 아픈데."

"복수할 기회. 지금."

잔뜩 독이 오른 화연은 옥체 구석구석,  손이 닿는 모든 곳을 꼬집고 비틀었다. 보기 좋게 갈라진 허벅지 안쪽, 군살이 없는 옆구리, 길고 모양이 좋은 목까지. 그 때마다 현이 잘 생긴 이마를 찡그렸으나 입가에 머금은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약올리듯, 해볼 테면 더 해보라는듯.

"입술."

화연의 말에 웃음기 물린 입술이 당장 다가왔다가 거칠게 물어뜯겼다. 핏방울이 점점이 맺히는 것을 보니 좀 낫다. 아직도 침상에 꽂혀 있는 단도를 뽑아들까 말까, 생각하던 화연은 그것을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 피는 봤으니까.

"이건 붓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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