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88화 (88/152)

<-- 검은 구름 -->

"그만 가 보세요. 오래 머물러 좋을 일이 없습니다."

"예, 귀비마마."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인 윤 첩여가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먼 곳에 붉은 노을이 휘장마냥 내려앉고 있다.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월화궁의 화원은 듣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웅장하며 한적하였다.

액정궁을 비롯한 후궁들의 처소가 다닥다닥 붙어 여유롭게 산보를 하려 하여도 다른 후궁들과 수십 번씩 마주치는 후원과는 하늘과 땅 차이.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금원의 아름다운 궁에서, 서 귀비는 밤이면 밤마다 폐하의 시침을 든다지.

자괴감에 빠져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던 그녀는 별안간 눈앞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 멈춰섰다.

"네가 왜 이곳에 있느냐."

여태 들어본 적도 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가 윤 첩여의 목을 졸랐다.

"화... 황제 폐하를 뵈옵...."

"어찌 예 있느냐 물었다!"

인사 한마디 올릴 시간도 없이, 황제가 윤 첩여의 어깨를 거칠게 쥐고 흔들었다. 이러다 경을 치르겠구나, 윤 첩여의 상궁이 목숨을 걸고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귀비마마께서 차나 한잔 나누자, 첩여마마를 찾으셨사옵니다."

"서 귀비가? 내 허락도 없이?"

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윤 첩여를 아래위로 훑었다. 후궁들끼리 차 한잔 나누는 일이란 굳이 황제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일상적이다.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할 만큼 서 귀비를 총애하시는 것이리라. 윤 첩여는 또다시 자신에게 보여준 태도가 절대 진정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실감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하옵니다. 서 귀비께 확인하시옵소서."

그제서야 윤 첩여의 어깨에서 억센 손이 떨어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놀란 탓에 윤 첩여가 뭉친 배를 안고 허리를 약간 숙였으나 황제의 눈길은 그녀를 흘긋 스칠 뿐, 의무적으로 건넬 만한 걱정 한자락 없이 그저 월화궁을 향해 곧장 떠났다. 이제는 정말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황제에게 있어 그저 정치적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을.

***

"승상 자리가 오래도 비어 있었군."

"그러하옵니다, 폐하."

대신들의 눈빛이 저마다 기대감으로 빛났다. 본디 승상부는 우승상, 좌승상, 그리고 대승상. 공식적으로는 세 개의 자리가 있으나 그 권력이 너무나 강해지는 탓에 그중 단 한 자리만을 채우는 것이 관례. 지금 정전에 있는 이들 중 하나는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 어찌 기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심하게 이어지는 다음 옥음에 그들의 기대감은 파도를 만난 모래성마냥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선대황의 충신 서가 이흥을 정1품 대승상에 봉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당장 들고 일어서고 싶으나, 지금 황제에게 반기를 드는 자는 황명 불복이라는 죄목을 달아 당장 목이 베어짐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월화궁의 서 귀비 때문이라는 소문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있었다.

"또한."

또한, 이라니. 대신들의 등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그 아들, 서가 주찬은 정2품 우승상에 봉한다. 예부는 모든 격식을 모자람없이 갖추어 서 이흥의 집으로 직접 교지를 전하라."

"폐... 폐하!"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황명이었다. 권력이 치우치고 말고 할 문제를 떠나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아닌가. 한 집안의 아비와 아들에게 황제와 대적할 만한 권력을 한꺼번에 쥐어주다니. 그러나 정작 그 말도 안 되는 황명을 내린 황제는 태연하기만 했다.

"무슨 문제 있는가? 불만 있으시거든 말씀하시게들."

"그는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폐하! 삼승상은 한 자리만을 채우는 것이 관례이거늘, 두 자리를 채우는 것도 모자라 한 집안으로 채우시다니요!"

"흑운."

무심하게 읊조리는 말에 검은 그림자가 보이지도 않게 움직였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조금 전까지 옳은 말을 하던 대신은 그대로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장사 자리가 비었군. 서 이흥의 차남, 서 기한을 정4품 장사에 봉한다. 또 황명에 불복할 이가 있는가?"

더 이상 목숨을 내놓는 이는 없었다. 황제가 눈썹을 까딱하자 검은 그림자가 시신을 들쳐업고 정전에서 사라졌으나 쏟아진 피는 천천히 흘러 대신들의 신발을 적셨다. 역한 피비린내가 정전을 가득 메우고, 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안건들을 처리해 나갔다. 화연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

"그것이 참말이세요, 폐하? 저희 아버님을요?"

화연이 햇살처럼 피워올리는 웃음에 현 또한 차갑던 용안 가득히 미소를 머금었다. 우는 얼굴도, 화내는 얼굴도 좋지만 역시 이리 환하게 웃는 얼굴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저리 좋아할 줄 미리 알았다면 더 빨리 벼슬을 내렸을 터인데.

"참이지. 또한 네 큰오라비에게는 우승상의 벼슬을 내주었다."

"우... 승상요?"

아버님께서 대승상에 오르셨다는 소식에 그저 구름마냥 두둥실 부풀던 가슴이 약간 싸해졌다. 그녀는 한창 혜국의 관직과 그에 따른 체계를 배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에 따르자면 분명 승상부의 으뜸인 삼승상은 하나만 채운다 하였는데.

"아버님께 대승상을 내주셨다 하셨잖아요."

"허니 네 오라비에게는 우승상을 내주었지."

"아니아니, 어찌 승상이 둘... 그것보다, 대신들이 반발하지 않았나요?"

"그다지. 아, 한 명이 반발하긴 하였지."

그저 그녀가 예뻐 죽겠다는 듯 싱글싱글 웃는 현의 얼굴에서 무언가 섬뜩함이 느껴진다. 화연은 치밀어오르는 불안을 억누르며 조심히 다시 물었다.

"승상의 자리는 기존 대신들이 만장일치하여야 뽑을 수 있다 들었습니다."

"만장일치였다."

"한 명 반발하였다면서요."

"죽었지. 그래서 빈 자리가 하나 난 김에 네 둘째 오라비에게 내주었다. 정4품 장사."

불안한 예감은 어쩌면 이렇게 정확히도 들어맞는지. 조금 전까지 기뻐하던 화연의 얼굴은 이제 돌처럼 굳어 턱마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둘째 오라비에게 장사라니요. 오라비는 겨우 약관 스물 하나입니다. 정4품을 받을 만한 그릇이 아니...."

"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하지 않았느냐."

"저는 오라버니들에게 벼슬을 달라 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없이 환하게 웃고 있던 화연이 소리치자 현 또한 웃음기를 지우고 미간을 좁혔다.

"내게 집안을 일으켜달라 할 생각이었다면서. 기왕 일으키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폐하를 은애하지 않는다 생각했어요. 그저 폐하의 총애를 이용해서 내 원하는 것들을 모두 가지리라고. 아버님의 벼슬도 되찾고, 집안도 일으켜 세우고.

-그래도 좋다. 네가 원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분명 그리 말한 적이 있었다. 허나 화연마저도 그리 뱉어놓고 까맣게 잊은 말이었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화연이 끔찍한 결과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 사이 그는 이미 화려한 비단옷을 벗겨내리고 있었다.

"폐하...."

"아, 연회.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순서가 좀 바뀌긴 하였다만, 이참에 네 친인척은 물론이고 고관대작까지 모두 참석하도록 할 것이다. 내 탄일 연회보다 더 크게 열어주마."

"그건 또 무슨 소리세요."

달콤한 꿀이라도 바른 듯, 어깨부터 천천히 핥아 내려가던 현이 피식 웃었다.

"황후궁에 당당히 서고 싶다면서. 지금 내게 있어 너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모두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그렇다 해도, 탄일 연회보다 더 크게라니요. 예부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을진데...."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예산 굴러가는 일까지 알 정도라니."

현은 스승까지 붙여준 보람이 있다 생각하며 꽃봉오리마냥 흔들대는 유실을 입에 물고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리 영민하고 어여쁜 여인이 내 여인이다. 뿌듯함에 솜털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양 세심하게 몸을 어루만지던 현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던 화연이 별안간 벌떡 일어나 앉으며 그를 잡아 흔드는 것이 아닌가.

"폐하. 제 청을 들어주시려 무고한 이를 해치시다니요. 게다가 한낱 후궁의 연회를 그리 크게 여시면 민심이...!"

"나락이든 지옥이든, 같이 가자 하지 않았느냐."

"그렇다고 앞장서서 나락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역사에 폭군으로 남고 싶으세요?"

"남아도 괜찮다."

"괜찮긴 뭐가...."

현이 싱긋 웃으며 더 말하려는 화연의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자그마한 혀를 붙잡아 부드럽게 핥았다가 뽑아버릴 듯 세게 빨아당겼다가, 또 고른 치열을 하나하나 훑고 다시 깊숙히 엉켜든다. 한참 후에야 입술을 떼어낸 그는 쪽, 가볍게 입을 맞추곤 다시 화연을 침상 위에 눕혔다.

"폭군이어도 변함없이 은애하겠다, 네가 그리 말하였으니까. 역사가 어찌 보든 상관없다."

화연이 과거 던졌던 한 마디 한 마디가 돌이킬 수 없는 화살이 되어 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그 섬뜩함 때문인지, 어느 새 벌어진 다리 사이를 깊숙히 파고드는 감각 때문인지. 그녀는 호흡이 점점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단단한 등에 팔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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