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89화 (89/152)

<-- 검은 구름 -->

화연이 과거 던졌던 한 마디 한 마디가 돌이킬 수 없는 화살이 되어 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그 섬뜩함 때문인지, 어느 새 벌어진 다리 사이를 깊숙히 파고드는 감각 때문인지. 그녀는 호흡이 점점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단단한 등에 팔을 감았다.

-네가 바로 경국지색이구나. 나라를 기울게 할 여인.

고민 끝에 회임한 민씨를 해치려 하였던 현이 조용히 읊조린 말이 귓가를 스친다. 그 때의 현은 틀림없는 성군이었다. 적어도 화연이 환관복을 입고 정전에서 지켜보았던 그는 틀림없이 그랬다.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현이 변한 것일까. 내가 경국지색이라면 지금 현은, 혜국은. 최악을 향해 치닫던 생각이 농도 짙은 쾌락에 안개처럼 흩어진다. 하읏, 몽롱하게 터지는 신음 속에서 아름다운 사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마마?"

오늘도 어김없이 월화궁에서 화연을 가르치던 상서령은 결국 책을 덮고 물었다. 어렵다고 징징댈지언정, 늘 열의에 가득 차 이것저것 질문을 해대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던 서 귀비께서 종일 다른 곳을 보고 계시질 않는가.

"... 스승님."

"예, 마마."

현이 믿는 이들은 극소수로 정해져 있다. 흑운, 필두, 전 상궁, 호부좌랑. 그리고 눈앞의 상서령이자 화연의 스승. 이런 것을 논의해도 괜찮을까.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결국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사였던... 하 대감이 죽었을 때 정전에 계시었습니까?"

"예. 소신 또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제가, 나라를 기울게 할 여인입니까?"

유한 역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충신이었다. 세력 싸움에서 밀려났을지언정, 단 한시도 충심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죽은 하씨 역시 그랬다. 어리디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음에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들을 직접 처리해 나가며 잘한 일에는 과한 상을, 잘못된 일에는 엄한 벌을 내리던 황제였다. 그들이 충성을 바친 이는 그런 성군이었다.

허나 어느날 밤, 황제는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고 쉬 납득할 수 없는 황명을 내렸다. 오밤중에 신하의 집을 찾아와 벼슬을 내릴 터이니 후궁을 밀어달라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점점 변해갔다. 충신들의 마음처럼.

"소신이 답해드릴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스승님."

"소신은 그저 황명을 받들어 마마께 지식을 가르치고 무사히 황후궁에 드시도록 도울 뿐입니다."

말을 아껴야만 한다. 유한은 서 귀비의 간절함을 뿌리치고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자신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음을 서 귀비가 이해해주길 바라며.

"천자는 항시 상벌을 분명히 해야 하며, 애증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혜국의 21대 황제셨던 곤천제께서는... 마마?"

진도가 나가지 않은 부분인데도 부러 골라 읽던 책이다. 헌데 한 줄을 채 읽어나가기도 전에 귀비가 눈을 감고 고개를 툭 떨구어 버리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조심스레 그녀를 깨우려는 스승의 목소리에도 화연은 일어나질 못했다.

"송구합니다, 대감. 근래들어 어찌 이리 잠을 주무시는지...."

뒤에 있던 소소가 민망해하며 화연을 부축하여 침상에 눕히고, 유한은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정리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저 멀리서 월화궁을 향해 오고 있는 황금빛 물체는 틀림없는 황제의 연. 낮것상을 서 귀비와 함께 드시려나보다,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유한의 앞에 연이 멈추어 섰다.

"어찌 벌써 나오느냐? 내 서 귀비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려 왔건만."

"송구하옵니다. 귀비마마께오서 수업 도중에 잠이 드시었습니다."

"아아. 어젯밤이 좀 피곤하긴 하였지."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현이 오른손을 들자 다시 연이 움직였다. 서 귀비를 깨우지 말라 이르고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서니 방안을 가득 메운 화연의 체취가 그를 웃음짓게 만든다. 세상 모르고 새근새근 잠든 얼굴이 어찌나 어여쁜지. 손끝으로 뽀얀 뺨을 톡 건들던 현이 깜짝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갑자기 반짝 눈을 뜬 화연이 마치 처음 보는 사람마냥 그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깼느냐?"

"어... 스승님은요?"

"네가 수업 도중에 잠들었다며 나가던데."

"어떡해요. 그새 잠이 들어버렸네."

미안한 마음에 울상이 된 화연이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묵직한 팔에 눌리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곤하지 않느냐. 잠시 누워 있거라."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어루만지니 또다시 잠이 밀려온다. 이러면 안 되는데. 공부할 것이 많은데. 생각과는 다르게 눈은 점점 감겨오고 정신마저 아득해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월화궁이 아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천장. 둘레둘레 주변을 살폈으나 사방이 어둡고, 신기하게도 천장만이 불을 밝힌 듯 환하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화연이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폐하."

어둠이 소리마저 삼킨 것일까.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천장을 올려다본 화연은 문득 여기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고 있는 저 천장은, 황궁에 단 하나밖에 없을 것이니.

"전 상궁. 게 있습니까?"

침전에 전 상궁이 없을 리 없는데. 화연은 불안해하면서도 캄캄한 아래를 발끝으로 더듬었다. 차가운 바닥이 있다. 용감하게 또 한발을 내려놓은 화연이 조심조심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꺄아악!"

"화연아, 화연아."

눈을 번쩍 뜬 화연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월화궁의 내실이었고, 자신은 현의 품에 안전하게 안겨 있다. 꿈이었구나. 화연이 멍하니 일어나 앉자 현이 물을 가져다 입가에 대어 주었다.

"고마워요, 폐하."

"악몽을 꾸었느냐."

하아, 물을 한 번에 마신 화연이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궁 침전에 누워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폐하를 찾으려고 침상에서 내려왔더니 천장에서 용이 물고 있던 여의주가 툭 떨어져서 바닥이...?"

중얼중얼 방금 꾼 꿈을 말하던 화연이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품에 보듬고 내려다보던 현 또한 같은 표정이다. 설마. 다음 순간, 현이 바깥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태의를 들여라, 지금 당장!"

**

"외람되오나, 마마께오서 달거리를 언제 하시었는지요?"

찬찬히 날짜를 꼽아보던 소소가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태의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난달 초입니다, 영감."

달이 중반을 넘어 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이번 달 달거리는 건너뛴 셈이다. 현은 재촉하는 것도 잊고 숨을 죽인 채 태의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귀비마마께서 태기가 있으시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바닥에 엎드려 경하를 외치는 태의 뒤로 궁인들 또한 줄줄이 엎드렸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화연이 꺄악, 작은 비명을 질렀다. 현이 그녀를 번쩍 안아올려 춤추듯 내실을 돌고 있는 것이다. 잘 하였다, 장하구나. 그녀가 알아듣기도 힘든 온갖 말들을 쏟아내며.

"지금부터 서 귀비의 침소를 짐의 침전으로 옮긴다. 흑운, 짐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절대 귀비에게서 열 보 이상 떨어져선 안 된다. 조 환관, 너를 제외한 모든 환관들의 침전 출입을 금하고 서 귀비가 먹는 것이라면 물 한 모금까지 지밀이 직접 기미하도록 하여라. 태의,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오직 서 귀비를 돌보는 데에만 성심을 다한다. 하루에 세 번씩 들러 서 귀비를 진맥하고 털끝만큼의 이상이라도 발견되면 지체없이 당장 짐에게 보고해라. 짐이 정전에 들어 있을 때는 물론, 다른 어떤 중요한 일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존명."

"황명을 받드나이다, 폐하."

화연의 회임 소식은 순식간에 온 황궁을 헤집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분명 좋은 소식일진데, 저자에 떠도는 소문들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황상께서 후궁의 치마폭에 싸여 밤이고 낮이고 헤어나오질 못하신다더라, 산중에서 혼례 행렬을 습격한 자가 실은 황상이라더라, 그 후궁을 차지하기 위해 천인공노할 패륜까지 저질렀다더라.

십여 명의 이야기꾼의 입에서 시작된 그 소문들은 눈덩이처럼 부풀어선 화연을 위한 연회가 시작될 즈음엔 서 귀비를 나라 통째로 말아먹을 요부로 만들고야 말았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귀비마마!"

나라의 가장 중한 행사에나 사용하는 정전 앞마당이 오직 서 귀비를 위한 호화로운 연회로 떠들썩하게 부풀었다. 가장 높은 곳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가림막이 드리워지고, 그 아래에는 황제나 앉을 수 있는 황금 용상 두 개가 놓였다. 하나는 황제의 것, 하나는 당연함과 거리가 먼 서 귀비의 것.

황후가 앉기에도 망극한 그 자리에 한낱 후궁이 온갖 치장을 하고 앉은 모습에 몇몇 대신들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 누가 감히 불만을 표할까. 게다가 그 와중 꿀바른 말을 잘 하는 몇몇은 산더미같은 선물을 바리바리 그녀의 발밑에 풀어놓으며 굽신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리 잘 어울리는 한쌍은 처음 보옵니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고맙소. 이 비단은 서 귀비와 잘 어울리겠군. 자, 술 한잔 받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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