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구름 -->
"고맙소. 이 비단은 서 귀비와 잘 어울리겠군. 자, 술 한잔 받으시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바친 대신에게는 어김없이 황제가 직접 치하하며 술까지 한잔 따라준다. 두 사람의 바로 앞에는 이번에 새로 봉해진 대승상과 우승상이 자리하고, 외명부가 모여 앉은 곳 가장 앞자리에 앉은 이 역시 서 귀비의 모친인 승상부인이다. 그렇게 다음 황후궁의 주인이 서 귀비라는 사실은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져 있었다. 굳이 환관장이 소중하게 품에 안고 온 상자가 아니더라도.
"짐이 귀비에게 직접 내리는 선물이다. 열어 보아라."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호화로운 연회와 끝없이 밀려드는 선물에 얼이 빠져 있던 화연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필두의 손에서 현의 손으로, 다시 화연의 손으로 건너간 상자는 그것만으로 이미 사합원 한 채는 족히 살 만한 물건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화연이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폐하, 이것을... 정녕 신첩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황금을 정교하게 세공하여 조각한 몸체에 온갖 보석으로 눈과 깃털을 만든 봉잠. 햇빛이 스칠 적마다 꼬리에 매달린 진귀한 보석이 눈물처럼 반짝인다. 황제궁의 한 해치 예산에 버금가는 그 귀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모양을 가진 봉잠은 도합 세 개가 새하얀 비단 위에서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하지. 마음에 드느냐?"
태자를 낳은 황귀비조차 봉잠 하나를 꽂을 수 없건만, 세 개의 봉잠이라니. 놀라움에 커다래진 화연의 눈동자를 기쁨으로 오인한 현의 입가에 더없이 환한 웃음이 번졌다.
"한참 전부터 널 위해 준비한 것이다. 이름난 장인들이 한 달을 넘게 매달렸느니. 내 직접 꽂아주마."
화연은 몰랐으나, 그녀의 머리에 이미 꽂혀 있던 장신구들 또한 웬만한 갑부들이 하나를 사기 힘든 귀한 물건이었다. 그것들조차 현이 들어올린 봉잠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현의 손길에 머리를 내맡긴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화연의 떨리는 시선 속에 한 사람이 잡혀들었다. 후궁들이 꽃밭마냥 모여 앉은 자리 가장 앞에서 산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안은 윤 첩여.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찌 그러하지 않을까. 똑같이 회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황후가 나타나 망쳐버린 연회와 내명부에서 의무적으로 내린 패물 몇 가지 뿐이었는데. 화연이 온갖 생각에 빠져든 사이, 아까보다 한결 더 묵직해진 머리에서는 보기 좋게 꽂힌 세 개의 봉잠이 저마다 영롱한 소리를 내며 화려하게 빛났다.
"회임을 경하드리옵니다, 귀비마마."
"경하드리옵니다, 귀비마마!"
화연의 친부인 서 이흥이 먼저 허리를 숙이자 그 뒤로 고관대작들과 그 부인, 후궁, 한낱 궁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화연에게 깊숙히 절했다.
이것이다. 천자의 여인이 받아야 할 대우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모든 이들의 위에서, 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아야만 했다. 언젠가 마주친 윤 첩여에게 예를 갖추던 화연을 보았을 때의 못마땅함이 씻겨 내려가며 달콤한 입맞춤이 곁에 앉은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
"잠시 나갔다 오마."
"네, 폐하."
"어딜 가느냐 묻지 않느냐?"
현이 서운한 얼굴로 화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금방 오실 테니까요."
"그야 그렇지. 졸리면 먼저 자거라."
마지막까지 화연을 눈에 담은 현이 뒤돌아 침전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화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친 몸을 침상에 뉘이다가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꿈에서 나왔던,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이 조각된 천장.
"... 한 마리네."
꿈에서는 분명 용이 두 마리였는데, 실제로 조각된 것은 한 마리였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대신 낮에 있었던 연회로 생각을 돌렸다. 그만치 큰 연회를 열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예산이 들어갔을까. 또한 머지 않아 있을 황후 책봉식은 도대체 얼마나 성대하게 치르려 하는 것일까.
암담함에 빠진 화연이 어떻게 현을 타일러 규모를 좀 줄여볼지 고민하는 사이, 그는 어두운 황궁을 가로질러 황후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고생하는군. 열어라."
현이 턱짓하였으나 문을 지키고 섰던 병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저,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께오서 보시기에는 좀...."
"열어라."
그의 목소리에는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뜻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울상이 된 병사가 앞장서서 겹겹이 닫힌 문을 열자 불빛 하나 없던 내실에 등불이 밝혀지고, 코끝으로 훅 끼쳐드는 역한 냄새에 현이 얼굴을 찌푸리며 영견을 꺼내 코를 막았다.
"수발 들던 아랫것은 어디 갔느냐?"
"황후께서 유산하신 연후 목을 매어 자결하였나이다. 폐하께 보고를 올렸사온데...."
"아. 들은 것도 같고."
저 짓이겨진 고깃덩이가 예전의 풍만하고 요염하던 여인이라고 그 누가 믿을까. 쓸 수 없게 된 양 다리는 오물로 범벅이 되었고, 몸은 썩은 핏자국이 가득한 침상에 힘없이 늘어진 채였다. 시체처럼 누워 있던 그녀가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현을 노려보며 무어라 웅얼거렸으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대충 치료하고, 내일 폐비 교지가 내려오거든 지체없이 출궁시켜라."
"출궁이라니요!"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를 중얼거리던 민씨는 출궁이라는 말에 제정신이 든 것 같았다. 갑자기 버둥버둥 일어나 앉으며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외쳤으니.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칼을 다오, 내 자결할 것이니! 내가 이 나라의 황후일진데!"
"시끄럽구나. 혀 좀 잘라라."
황후궁이 빈 사이 윤 첩여가 황자를 생산하여 귀찮은 일이 생길까, 허수아비로 채워두었을 뿐이다. 허나 화연이 회임을 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리 더러워졌으니 황후궁도 허물고 다시 지어야겠군. 현이 공사 기간을 대강 가늠하는 사이 병사가 휘두른 칼에 떨어진 살덩이는 꿈틀꿈틀 바닥을 헤집고 있었다.
"죽음을 바라다니, 욕심이 과하구나. 네게 어울리는 곳이... 보자."
병사들이 달라붙어 정신을 잃은 민씨를 지혈하고 죽지 않도록 조치했다. 개중에는 황제의 잔혹함에 혀를 내두르는 이 또한 분명 있었다.
"다리를 못 쓰니 노비짓도 안 되겠고. 아, 무천도로 보내라."
"폐, 폐하, 그 곳은...."
"본디가 색에 미친 년이었다. 그 좋아하는 짓거리 실컷 하게 해 줘야지."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살인과 패륜 등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내들만 모아 평생 가두어 놓는 척박한 바위섬이었다. 그들을 돌봐줄 하늘조차 없다 하여 무천도. 다리를 쓸 수 없으니 바다에 몸을 던질 수조차 없으리라. 현은 자신이 내린 결정에 만족하며 코를 막았던 영견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침전으로 돌아갔다.
"서 귀비는?"
"서책을 읽고 계시옵니다."
"욕간 준비하여라."
"이미 준비되어 있사옵니다. 안으로 드소서."
"역시. 잘 하였구나."
여전히 일을 잘 하는 전 상궁이다. 현은 성큼성큼 목욕간으로 들어가 역한 냄새가 밴 옷을 벗어던지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어찌 이리 찜찜한 것이지.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힌 현이 얼굴에 물을 끼얹었을 때,
"폐하, 들어가도 되나요?"
바깥에서 그가 달가워 마지않는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너라."
새하얀 침의 차림의 화연이 모락모락 오르는 뿌연 김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현의 머리를 풀어 천천히 빗질하는 손길이 이제는 제법 능숙해졌다. 현의 시중을 들던 궁인들은 별다른 명 없이도 화연이 들어오는 순간 뒷걸음으로 빠져나갔기에 지금 욕실 안에는 단 둘 뿐이었다.
"곤하지 않느냐. 쉬고 있지."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기댄 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더운물에 붉게 달아오른 입술이 천천히 달싹이는 모습은 퍽 매혹적이었으나 평소와 달리 화연의 눈길을 붙잡지 못했다.
"괜찮아요. 오늘, 고맙습니다. 연회도 열어주시고, 귀한 선물도 주시고."
조금 지쳐 보이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미소로 메워진다. 화연이 고맙다 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은 눈을 뜨고 목 뒤를 부드럽게 주무르는 화연의 손을 더듬어 쥐었다.
"네게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 하지 않았느냐."
"제게는 그리 많은 것들이 필요없어요. 폐하가 제 세상 모든 것이니까요."
"그래... 네 것이지. 너 또한 내 것이고."
"내 것이 아니라 정인."
헌이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정인."
천천히 허리를 숙인 화연이 현의 입술에 나비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할짝, 고양이가 장난치듯 혀끝이 담백하게 얽히다가 다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