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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93화 (93/152)

<-- 검은 구름 -->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일까. 화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께오서 황성에 가옥을 하사하신 일은 아실 것입니다."

"예. 본디 황후를 배출한 가문에는 그리 한다 들었습니다. 책봉식이 열흘도 남지 않았는데, 혹여 그것이 해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는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다만...."

엽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감에 따라 화연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가 이내 당혹에 물들었다. 그 큰 집을 화려한 세간으로 가득 채운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다. 다음에 나온 오라버니의 말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였으니.

"말 몇 마디 했다고, 무고한 백성들을 그리 잡아 매질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본디 황실의 일을 입에 담아서는 아니 된다 국법으로 정해져 있으니, 이는 상소를 올리지도 못합니다. 허나 과한 처사임에는 분명합니다."

"... 하아."

화연이 밀려오는 두통을 가라앉히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단정하게 쪽지어 올린 머리 한가운데서 금으로 만들고 은으로 도금한 나비 뒤꽂이가 살아있는 듯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서 이흥이 찻잔을 내려놓고 어렵게 입을 떼었다.

"이왕 입 연 김에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뭔가요?"

"귀비마마께서 입으신 의복과 장신구 모두 지나치게 값나가는 것들입니다. 안즉 책봉식을 치르지 아니하였다곤 하나 황후나 다름없는 위치가 아니십니까. 그리 사치를 즐기셔선 아니 됩니다."

"제가 지나치게 값나가는 것들을 하고 있다구요?"

화연으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아침마다 궁녀들이 가져오는 옷을 입고, 궁녀들이 꽂아주는 장신구를 할 뿐. 침전에 틀어박혀 있는 그녀가 어찌 그것들이 모두 현의 지시로 만들어지고, 현이 침전에 들어오기 전 골라 놓는다는 사실을 알까.

"모르셨습니까?"

"폐하께 비싼 것이 아니냐 여쭈었더니, 그냥 황궁에 널려 있는 것들이라 하셨습니다."

"게다가... 또 있습니다."

"또요?"

화연이 침전에서 스승과 마주앉아 황후가 될 공부를 하는 동안 바깥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풀어도 풀어도 계속해서 나오는 두 사람의 말에 그녀는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등청을 하지 않고, 술, 기녀, 양인, 겁간. 당장 벼슬을 빼앗고 유배를 보내도 할 말이 없을 듯 한데,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고?

"제가... 폐하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또 있습니까, 아버님?"

"예. 또 있습니다."

***

화연이 가족들을 만났음에도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다. 불편한 분위기에서 석수라를 물리고 난 현이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하였으나 그보다 화연의 딱딱한 목소리가 더 빨랐다.

"폐하. 제게 주신 옷과 장신구가 비싼 것인가요?"

"황궁에 널려 있는 것들이래도."

현이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질문이 잘못되었구나. 화연은 잠시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세뇌시켰다. 아홉 살이다. 나는 지금 아홉 살 어린아이와 대화하고 있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다.

"그 값으로 따지자면 얼마나 되나요?"

"내가 어찌 알겠느냐. 아, 그 접꽂이 만든 장인에게 포상으로 은자 오십 냥과 곡식 열 섬 내렸다. 아주 잘 만들었더구나. 해서 다른 것도 여러개 만들라 시켰지."

아버지께서 지적하셨던 나비 뒤꽂이다. 금이 아닌 은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금으로 만들고 은으로 도금하여 정교하게 세공한. 고작 장신구를 만든 장인에게 정5품 관료의 일년치 녹봉보다 더 많은 재물을 내린 것이다. 화연의 머리가 띵하게 어지러워왔다.

"게다가... 제 사가에 황성에서 가장 큰 저택과 값비싼 세간들을 내리셨다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가끔 네가 사가 나들이를 갈 텐데, 어찌 저급한 것들로 집을 채우겠느냐."

"사병은 또 왜요."

"혹시 모르니까. 큰 권력에는 큰 위험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무고한 백성들 잡아 두들겨 패려는 것이 아니구요?"

"무고한 백성이라니? 감히 황실을 능멸한 죄인들을 말하느냐?"

정전에서는 분명 대신들이 하나를 말할까 말까, 입술 달싹이는 모양만 보고도 백을 아시던 분이다. 그러나 화연이 목욕간에서 했던 말은 아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값비싼 패물 필요없다 하였더니 사오는 대신 황궁에서 만들고, 죽이지 말라 했더니 죽지 않을 정도로 패고. 게다가 책봉식 거하게 치르지 말라 했더니, 뭐? 황후궁을 부숴?

"그럼, 멀쩡한 황후궁은 왜 허무셨어요?"

"더러운 계집이 쓰던 전각이다. 그런 곳에 너를 재울 수 없느니."

화연이 취조하듯 묻는 말에 현은 반쯤 웃음을 물고는 잘도 대답한다. 듣고 있는 화연은 기가 막힐 뿐. 분명 뚜렷한 연유가 있는 행동들이긴 한데, 그 연유가 죄다 화연이고 그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를 어찌할까. 화연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가장 시급한 안건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청이 하나 있습니다. 들어주실건가요?"

"물론."

웃음 문 입가와는 다르게 싸늘하던 눈꼬리가 청이라는 말에 살짝 휘었다.

"제 둘째 오라비의 벼슬을 거두고 정무를 게을리한 일과 양인 처녀를 겁간한 일에 대해 처벌을 내려주세요."

휘어졌던 눈꼬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네 피붙이다. 처벌을 받는다면 네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공과 사잖아요."

"그러니까, 아프단 말이지?"

"뭐...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겠지만."

"그 청은 불가한다."

"폐하, 제가 마음아플까봐 그러시는 거라면...."

그때까지 의자에 앉아 옆에 선 화연을 약간 올려다보던 현이 싱긋 웃으며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농밀하게 맞닿은 입술에서 현의 맛이 난다. 오늘은 넘어가지 말아야지. 화연은 이 새끼를 밀쳐낼까, 잠시 생각하였으나 일단 적당히 받아주기로 하고 눈을 감으며 그의 혀놀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허리를 세게 끌어안으며 치마 속으로 손을 쓱 집어넣었을 때에야 그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깨달았다.

"이제 반응이 빠르구나."

촉촉히 젖은 음부를 만족스럽게 어루만진 현이 손가락을 빼어 맛있게 핥았다.

"이리 내게만 반응해야지. 네가 오라비를 걱정하고, 오라비로 인해 마음아픈 것은 싫다. 네가 슬퍼한다면 오직 나 때문이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미친놈이었다. 화연은 이제 감탄을 넘어 박수갈채가 나올 지경이었다. 사람이 이다지도 한결같을 수가 있나.

"그러니까, 제가 슬픈 것이 싫은 게 아니라 제가 오라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싫다는 말씀이세요?"

"방금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그렇군요. 화연은 자신이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깨달으며 현의 팔 안에서 빠져나와 침상에 걸터앉았다.

"허면 일단 벼슬이라도 거두고, 근신령을 내려주세요. 그 처녀에게는 아버님께 말씀드려 보상해달라 하겠으니."

"내 알아 하겠다. 또?"

"이미 부순 황후궁은 어쩔 수 없고... 백성들을 잡아들이지 마시고, 제 사가에 더 이상의 재물을 주지 마세요."

"알았으니 더는 신경쓰지 말거라. 볕이 좋더구나. 잠시 산보나 하겠느냐?"

산보라면 조금 더 얘기할 수 있을 것이었다. 화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현은 다시 눈꼬리를 접으며 싱긋 웃었다. 도저히 이상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 말간 웃음. 화연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풀어지던 마음을 다잡으며 현이 내민 손을 잡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

"저, 폐하. 산보라 하지 않으셨나요?"

화연이 애써 숨을 가다듬으며 속삭였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주변에 궁인들이 가득하니 티도 낼 수가 없었다. 밖에서 차나 한잔 들자며 누각 위에 오른 현이 그녀를 안아 허벅지 위에 앉힐 때 느낀 쌔한 기분을 그냥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새어나오는 신음을 가리려 입가에 가져다 댄 찻잔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도 마시고, 경치도 좀 보고 하는 것이지. 여기가 한눈에 황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좋지 않으냐?"

"네... 좋아요."

"좋아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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