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96화 (96/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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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봉식을 치르고 화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와 오라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화연을 지지하는 세력의 중심이며, 가장 믿을 수 있는 정보통인 까닭에. 소소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가면 두 사람이 번갈아 나와 정전 회의의 내용과 대신들의 동향을 알려주었다. 열흘에 한 번은 아버지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다시 짓고 있는 황후궁이 문제입니다. 그 규모도 규모이건만 멀리서부터 물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고, 그 파낸 흙으로는 산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여 군함을 띄울 수 있을 정도라 합니다. 게다가 이름난 석공들을 모아 금과 은으로 조각상을 만들고 있다는 풍문 또한 들립니다.”

“... 세상에.”

차차 골조가 세워진 황후궁은 멀리서 보기에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에 안심하고 있었건만. 화연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고픈 심정이 되었다.

“그 노역은 누가 하고 있습니까?”

“각지에서 차출한 노비들과 병사들입니다.”

노비와 병사라니. 생산력과 국방력이 함께 떨어지고 있으리라. 그것도 이 흉흉한 시기에. 눈을 살짝 찌푸리는 화연의 얼굴을 본 이흥은 대견함과 동시에 씁쓸함을 느꼈다. 제멋대로에 겁없고 마냥 밝기만 하던 여식이었는데, 언제 이리도 자라 완전히 품을 떠나버렸을까.

“아버님께서 인력을 조정하실 수 있으십니까?”

“예. 그 또한 소신의 업무이옵니다.”

“알겠습니다. 사흘 후에 연통하겠습니다.”

이흥이 떠나자마자 화연은 패물함을 가져오라 소리쳤다. 끝없이 들어오는 각종 금은보화에서 처분이 손쉬운 작은 장신구들만을 골랐다. 그래도 모자란다. 물론 더 크고 비싼 장신구들이 많았으나 국내에서 처분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기에 급전은 되지 않았다. 내탕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쩌지.

“마마, 폐하께서 이리로 오고 계시옵니다.”

“이것들을 물려라.”

상궁들이 급히 상자들을 들고 사라지자마자 환관장의 목소리가 월화궁 전체에 울려퍼졌다.

“황제 폐하 듭시오!”

무거운 옥보에 따라 문이 차례로 열리고, 두 사람은 그 끝에서 만났다. 근래 더더욱 지쳐 보이는 현의 모습이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곱게 허리를 숙이는 화연에게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금일도 잘 보내시었소, 황후?”

“예, 폐하.”

“황손은?”

“그만 하옵니다.”

화연은 더 이상 현이 들어오자마자 따스한 품에 뛰어들 수 없었다. 그의 무릎에 앉아 수라를 할 수도, 서류를 들어다보는 그에게 어리광을 피울수도 없었다. 현이 지금까지 홀로 짊어져 온 삶의 무게를, 반려인 그녀 또한 나누어 짊어져야만 했으므로.

그런 지금에 와서야 화연은 보통보다 조금 더  묘하게 어긋난 현을 진정으로 이해했다. 아홉 살부터 평생을 이리 살아온 그를.

“청이 있습니다, 폐하.”

현의 맞은편에 단정하게 앉은 화연이 차분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오.”

“황후궁의 내탕금을 올려 주셨으면 합니다.”

“얼마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지금의 배로 올려 드리지. 내일 바로 호부에 명하겠소. 또?”

“신첩은 번다한 것을 싫어하옵니다. 새로 짓는 황후궁에 조각과 장식들이 최대한 없었으면 합니다.”

“그건 마음에 안 드는데.”

“폐하.”

“그대가 원한다면 또 어쩔 수 없고.”

화연이 작게 웃자 현도 따라 웃었다.

“곤하시지요?”

“그대를 보니 덜하오.”

일어서서 화연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현이 동그란 배 위에 손을 얹었다.

“희야. 자느냐?”

본디 황손에게는 태명을 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현은 화연의 앞에서만 뱃속 아이를 희라 불렀다. 어째서 화연의 양친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희라 불렀는지 마음 깊이 공감하며.

“어, 희가 움직였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희가 꼬물꼬물 배를 두드리자 현의 얼굴에 더없이 환한 웃음이 번져다. 얼굴 한번 못 본 이 조그만 생명이 무엇이기에 이다지도 가슴이 뛰는 것인지.

“건강하구나. 장하다, 희야.”

현이 허리를 숙여 배 위에 살짝 입을 맞추자 희가 조금 더 바동거렸다. 화연은 손을 들어 현의 뒷목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예서 오수 드세요, 폐하. 신첩이 토닥토닥 해 드릴 것이니.”

***

“여기 있습니다, 폐하.”

“고생했다.”

태준이 새로 정리한 몇 장의 종이를 받아든 현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것을 담담하게 읽어 내려갔다. 점점 커져가는 화연 쪽의 세력을 병부상서 측이 견제하고 있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내용.

“특이점은?”

“황명을 철회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황후마마라 소문이 돕니다. 허나 그 소문이 황궁을 빠져나가면 황후가 황상을 한 손으로 쥐고 흔든다 변질되옵니다. 또한 무천도로 유배보낸 민씨에 대한 동정론까지 일고 있습니다.”

“그렇다더군.”

그림자들이 보고해오는 상황과 얼추 비슷했다. 후궁이었던 서씨가 회임한 민씨에게 약을 먹여 유산시키고 억울한 모함으로 입에 담지 못할 형벌까지 받게 하였다, 게다가 황자를 낳은 후궁 윤씨마저 죽여버렸다. 하늘마저 노하여 우박과 전염병을 내렸다.

분명 중간에 손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자극적인 소문으로 민심을 조작하여 황권을 위태롭게 하던, 태후 쪽의 수법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때는 현을 향한 직접적인 공격이었고, 지금은 그의 유일한 약점인 화연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이 쪽이 훨씬 더 위험했다.

“저쪽으로 합류한 자들은.”

“맨 뒷장이옵니다.”

손끝으로 낯익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어 내려가던 현이 어느 부분에서 멈칫했다.

“표 유한.”

“직접 합류하진 않았습니다. 허나 접촉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옵니다.”

“네 부친이다. 어찌 언질하지 않았느냐.”

“폐하께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황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현은 종이를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우직한 자였다. 모두가 올리길 망설이는 망극한 상소를 겁없이 써서 올리고는 목을 치시라 하던 그때처럼.

“지금 발을 빼어야 한다 전해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물러가라.”

필두가 어두운 집무실을 나간 후,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현이 나지막히 읊조렸다.

“흑운.”

소리없지만 무게감 있는 발자국이 걸어나와 그의 앞에 복했다.

“급박한 상황이 생기면 황후를 호위하여 뒷문으로 빠져나가라. 이곳으로.”

현이 품에서 작게 접힌 종이를 꺼내 흑운에게 건네었다. 황궁 뒤에서부터 그려진 지도였다. 간단하지만 그렇기에 더 알아보기 쉬웠다.

“이 자에게 맡길 생각이십니까.”

“믿을 수 있는 자이니까.”

화연의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현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너 또한 그렇다는 말은 굳이 꺼내놓지 않았다. 화연을 위해 자신을 향해 칼을 빼들었던 흑운보다 믿을 수 있는 이가, 또 세상 어디에 있을 것인가.

***

유달리 힘든 겨울이었다 .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 사이에 전염병마저 돌았다. 현이 급히 태의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의원들, 황궁에 비축해둔 약재들을 풀어 막았으나 단 열흘 사이 수많은 목숨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와중 화연이 비단과 장신구를 처분한 돈과 새로이 배정받은 내탕금들은 죄다 이흥에게 건네지고, 이흥은 가난한 백성들을 넉넉히 고용해서 황후궁을 짓는 공사현장에 투입했다. 그렇게 풀린 돈으로 그들은 혹독한 겨울, 자식들에게 먹일 쌀 한 줌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개의 다리를 거쳤기에 그 돈이 황후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저 황후가 사사로이 쓰는 국고를 배로 늘렸다는 소문만이 거리를 무겁게 덮을 뿐.

“내 지난주에 황궁 공사에 가서 임금을 받아오지 않았남? 세상에, 새로 짓는 황후궁이 얼마나 큰지!”

“아무렴. 또 호화롭기는 얼마나 호화로운지 알어? 후원 끝에 서면 저 끝이 안보일 정도래도.”

“연못이 아니라 바다를 파고 있더구먼.”

“아무리 황후궁이라지만, 어휴. 우리 폐하께서 어찌 그런….”

“쉿, 입 잘못 놀렸다가 경을 치르려구!”

약속이라도 한 듯, 공사에 투입되었던 자들은 하나같이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사치스러운 후원에 대해 떠들었다. 황후가 그 사치로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고. 이번 전염병 또한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그래도 화연은 괜찮았다. 현이 다시 성군으로 칭송받기 시작했고, 저에겐 쓸모없는 패물들이 어린 백성들을 위한 양식이 되지 않았나. 그 생각이 조금 안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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