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97화 (97/152)

<-- 추락 -->

“일어나십시오, 마마!”

평소보다 조금 더 다급한 흑운의 목소리가 깊이 잠든 화연을 깨웠다. 분명 잠들기 전에 현이 있었는데. 피곤에 젖어서도 화연이 발이 저린다고 중얼거리자 벌떡 일어나 그녀가 다시 잠들 때까지 발을 주물러 주었는데, 넓은 침상은 텅 비어 있었다.

“흑운?”

“가셔야 합니다. 밖에 가마가 있습니다.”

“무슨…? 아니, 폐하께서는….”

“폐하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빨리.”

"폐하를, 폐하를 먼저!"

"폐하께서는 안전하십니다."

다급히 뛰어들어온 궁녀들이 침의를 벗길 새도 없이 화연에게 옷을 입혔다. 황후의 의복이 아닌, 그저 명주로 만들어진 솜옷을. 화연은 다급한 와중에도 현이 선물한 세 개의 봉잠을 챙겼다. 그것이 값져서가 아닌, 그가 직접 머리에 꽂아준 소중한 물건인 까닭이었다.

"다른 궁으로 피신해라. 절대 이 근처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황후마마!"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위험하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부디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라. 알겠지?"

월화궁을 빠져나와 샛길을 타고 나가는 길에는 소소만이 뒤를 따랐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흑운의 말이 아니어도, 화연은 돌아보지 않았으리라. 멀리서 외치는 반란군들의 목소리만으로 이미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므로.

“황후를 내놓아라!”

“구미호를 잡아라!”

평소의 무겁고 화려하던 황후의 팔인교가 아니었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흑운처럼 검은 가마 안에서, 화연은 의연하게 허리를 펴고 앉았다. 네 명의 가마꾼이 발을 맞추어 가는 걸음에 따라 심장이 올라갔다 다시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사가는 무사한 걸까. 황후를 잡겠다며 백성들이 불을 놓지는 않았을까. 아버님은, 어머님은, 오라버니들은. 수없는 생각들이 떠오르고 스러지는 가운데 그가 있었다. 현은. 현은, 무사한걸까.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가마가 별안간 멈추어 섰다. 너무나 갑자기.

"안에 계십시오."

분명 긴박한 상황인 것 같은데도 흑운은 차분했다. 늘 그렇듯, 듣는 이에게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 화연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배에 손을 얹었다. 어째서 윤 첩여가 불안할 적마다 배부터 감쌌는지 알 것만 같았다.

"황후를 내놓아라."

으르렁거리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식의 마지막 청을 들어 달라며 울부짖던 그를 어찌 잊겠는가.  스릉, 바깥에서 칼이 뽑히는 소리가 천지를 울릴 듯 느껴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도대체 몇 개의 칼이 뽑히는 것일까. 날카롭게 부딪히는 칼날 사이에 더 이상의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덜컹, 가마의 문이 다급하게 열렸다.

"나오세요, 빨리."

새하얗게 질린 소소가 가마 속으로 손을 뻗었다. 화연이 그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안 됩니다!"

흑운이 다급하게 외쳤다. 뭐지. 화연이 무슨 상황인지 깨달을 틈도 없이, 놀랄 만큼 강한 힘으로 화연의 손을 붙잡은 소소가 뒤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소소, 소소야!"

"빨리 뛰세요!"

뒤에서는 여전히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려퍼지고, 소소가 꽉 잡은 손에서는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두 사람이 달린 길은 길이 아니었다. 그저 산짐승들이 지나다니는 나무 사이였을 뿐. 그러다 어느 바위 앞에 당도한 소소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화연의 손을 놓았다.

"하아, 하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화연이 차가운 느낌에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소소야...?"

왜, 어찌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게야. 소소는 그녀가 알던 수다스럽고 명랑한, 그러면서 속 깊던 측근이 아니었다. 등골이 오싹하도록 낯선 눈빛이 화연을 응시했다.

"예서 죽어주세요, 마마."

"왜... 왜. 정신차려, 소소야."

화연이 더듬더듬 뒷걸음질쳤다. 저런 눈을 본 적이 있다. 그녀를 죽이려던 제운이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눈빛.

"제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습니다."

화연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삭의 몸으로는 절대 소소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그녀는 몇 걸음을 채 가지 못해 뒷덜미를 붙들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긋, 소소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었다. 아니, 여느 때보다 배는 환하게 웃었다.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마마?"

차디찬 손이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는 순간, 화연이 바르르 떨었다. 소소의 표정에도, 손끝에도 온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화연을 바라보는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간 잘해주셔서 고마워요, 마마. 저는 마마를 진심으로 좋아했습니다."

슬픔과 기쁨, 증오와 연민, 분노와 애정이 한데 뒤섞여 화연에게 속삭였다.

"허나 그저 소리를 질렀다는 죄로 혀가 뽑혀 죽은, 내 가엾은 첫정을 내가 어찌 잊겠습니까. 그러고도 그리 행복하게 지내는 황제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 것은 그리 잔인하게 짓밟고도 제 것은 그리 소중히 감추던 그 자를, 내가 어찌."

"소소... 흑!"

"소연."

화연의 목을 휘어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소연입니다. 마마께서 월화궁에 처음 오셨던 날, 혀가 뽑혀 죽은 진아의 첫정."

숨이 막혔다. 소소, 아니. 소연은 도저히 여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힘으로 화연의 목을 짓눌렀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정신 속에서 그녀는 현을 떠올리지 않았다. 살려야 하는데, 뱃속의 아이를 살려야 하는데. 눈물 방울이 맺혔다가 후두둑, 눈꼬리를 타고 굴러 떨어졌다.

***

불행. 그것은 항상 현의 몫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가 불행했다. 두 번째 황후였던 어머니는 그를 낳은 뒤 죽었고, 어머니 대신으로 여기던 유모상궁도, 살뜰히 업어주던 환관도 죽었다. 형제들은 차례차례, 혹은 한꺼번에 죽었다. 그를 도와줄 만한 대신들은 모두 정전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 전에 죽거나 유배를 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현이 황태자로 책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도 죽었다. 서모마마들은 감업사로 들어갈 수 있음에도 거의 모두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불행을 먹으며 자라 용상에 오르던 날, 그를 만났다.

“흑운입니다. 이제부터 소신과 그림자 부대가 폐하를 호위합니다.”

너무나 넓어 무섭기까지 한 황제궁 뒤편 후원. 같은 자세로 부복한 수십의 사내들 맨 앞에서, 그는 자신을 가리켜 흑운이라 하였다.

“그것이 이름인가?”

“이름은 없습니다. 34대 흑운입니다.”

“뒤에 있는 자들은?”

“오른쪽 끝에서부터 일, 마지막 왼쪽 끝이 오십입니다. 그리만 부르시면 됩니다.”

사내의 답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현이 묻는 바에만 정확히 답했다. 현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크고 강해 보이는 이 사내라면 끔찍한 죽음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내 곁에 있어주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다.

“너희는… 뭘 할 수 있지?”

“폐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일어나봐.”

흙바닥에서 일어선 사내는 장신이었다. 현이 지금까지 보아온 이들 중 가장 컸다. 밤처럼 검고 큰 사내는 열두 살 현에게 마치 태산처럼 느껴졌다.

“명을 내려도 되나?”

“예, 주군.”

========== 작품 후기 ==========

극초반 〈월화궁〉 에피소드에서 대식을 하다 들킨 궁녀들의 이름입니다. 소연, 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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