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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할."
현은 높디높은 담장에 사다리를 걸치고 끝없이 올라오는 반란군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저대로라면 황궁이 점령당한다. 최악의 경우에서 반란을 예상하지 못한 바 아니나, 이건 너무 빠르고 또한 조직적이지 못했다. 지방에서부터 일어나 황성으로 진군했어야 할 반란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곧장 황성 내에서 일어난 것이다.
"구미호를 내놓아라!"
쾅, 아까부터 외치는 말과 함께 무언가 단단한 것이 황궁문을 때려부술 듯 부딪혔다. 그래. 반란군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현을 너무나 잘 아는 그 자가, 무지한 백성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했다는 것. 황궁 안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가 정예병들이기에 무예를 익히지 못한 백성들과 하급 병사들로 이루어진 반란군 정도는 진압할 수 있었다.
허나 죽일 수 있을 것인가. 화연이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털어 살리고자 한 그들을, 어리고 무지한 황제의 백성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문을 열어라."
"안 됩니다, 폐하!"
황제를 철옹성마냥 둘러싸고 있던 그림자들이 다급하게 외치며 달려오는 한 노인을 막아섰다.
"상서령?"
"안 됩니다. 제가 반란군의 본거지를 알고 있습니다!"
현이 까딱 눈짓하자 그림자들이 표 유한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가 가까이 오기도 전에 현이 먼저 다가섰다.
"그대를 어찌 믿는가. 짐이 경고했음에도 계속해서 반대파와 접촉하고 있었거늘."
"소신을 벌하시려면 그리 하소서. 허나 지금은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진압해야 합니다."
"자세히."
"첩여 윤씨가 명을 달리한 이후 그 소생을 황태자로 추존하려던 세력이 분열했습니다. 개중 조금 더 큰 쪽이 백성들과 병력을 움직여 반정을 일으킨 것입니다. 신이 본거지를 알고 있으니, 지방에서 지원군이 일어나기 전에 그곳을 치소서."
적의 머리를 베어 사지를 분열시킴은 병법의 기본이다. 허나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잠시 표 유한을 바라보던 현은 지금쯤 흑운과 함께 샌님의 유배지에 거의 당도했을 화연, 그리고 뱃속의 아이를 떠올렸다.
그래, 바로 오늘같은 날을 대비하여 그를 유배라 부르기도 뭣한 산 뒤편 삼합원에 보내놓지 않았던가. 허니 안심해도 될 것이었다. 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앞장서라."
"저희가 가겠습니다."
그림자 하나가 단호하게 앞으로 나섰다. 현이 흑운을 제외한 하위 그림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기에, 이 상황에서도 그는 생경함을 느꼈다.
"따르거라. 내 직접 그들을 볼 것이니."
곧 변복하여 얼굴을 가린 현이 표 유한의 뒤를 따라 황궁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골목골목은 텅 비었고 멀리서 성난 군중들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든다. 구미호를 잡아라. 들으면 들을수록 우스운 말이 아닌가.
현이 화연에게 내린 것들은 값을 따지자면 꽤나 상당할 것이나 한 나라의 황후에게는 그렇게까지 과하지도 아니했다.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부국강병을 이룬 혜국이 흔들릴 만큼은 더욱 더 아니었고. 그마저도 상당수는 황제궁의 예산을 거의 절반으로 뚝 잘라 소모하지 않았던가.
그들을 쥐어짠 것은 황후가 아닌, 그 세력에 탑승할 다리에 뇌물을 갖다바친 관리들이었음에도 백성들의 분노는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화연을 향했다.
"저곳입니다. 소신이 가면 문을 열어 줄 것입니다. 그때 무사들을 움직여 수뇌들을 치소서."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위험합니다, 폐하."
"저들이 나를 죽이려면 좀더 조직적으로 반군을 일으켰겠지."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가옥이었으나 그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는 훈련된 티가 풀풀 났다. 현이 발을 내딛자 그림자들 또한 소리없이 그를 에워싼다.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한 문지기들이 검손잡이를 잡음과 동시에 뒤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현을 불렀다.
"오셨습니까, 폐하."
돌아본 곳에 병부상서가 서 있었다. 늘 익숙하던 관복 차림이 아닌, 피에 젖은 무복을 입고서.
"역시 그대였나."
"안으로 드시지요. 호위를 대동하셔도 괜찮습니다."
역시 함정인가. 그러나 현은 뒤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태생부터 안고 나온 불행. 그 끝없는 죽음의 굴레는 자신이 죽어야만 비로소 끝이 날 것이니.
"차는 내지 않겠습니다. 독을 탔다 생각하실 것이니."
그리 말하는 윤 수찬의 온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가 못내 신경쓰인다. 아직 반란군과 황제군은 부딪히지 않았는데, 저 피는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최악을 향해 달려가는 현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윤 수찬이 입가 근육만을 움직여 딱딱하게 웃었다.
"원한을 많이도 쌓으셨더이다. 예를 들면, 황후의 최측근 상궁이라든가."
화연의 상궁. 자세히 본 일은 없으나 화연이 자주 부르는 그녀의 이름만은 알고 있었다. 소소라 하였던가. 현은 숨쉬기가 곤란해짐을 느끼며 눈앞의 신하를 응시했다.
"하나뿐인 여식을 황궁에 밀어넣고도, 소신은 폐하를 원망치 않았습니다. 신하 된 자로서 당연하다. 그리 여겼습니다."
"황후."
현의 목소리에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담기었으나 윤 수찬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네가 감히, 황후를."
"무사하십니다. 상궁에게 원하는 대로 하라 기회를 주었다만, 그 걸출한 폐하의 호위가 그리 둘 리 있겠습니까."
똑바로 노려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던 윤 수찬이 허무하게 웃었다.
"그 날, 폐하를 뒤늦게나마 제 여식에게 데려간 이가 바로 황후였지요. 하여 소신은 그분께 원한이 없습니다. 허나 폐하께서는 아셔야지요. 아끼는 이의 죽음에 무엇도 보탤 수 없는 무력함을."
아끼는 이의 죽음. 화연을 제외하면 아끼는 이가 있었던가. 현은 그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화연이 그에게 가르쳐 준 말을 떠올렸다. 내내 품고 있었으나 말하지 못했던 것. 그의 죄.
"미안하다."
처음으로 흔들리는 윤 수찬의 시선 앞에서 황제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네 하나뿐인 여식을 지옥으로 데려온 것도, 죽어가는 소유를 외면한 것도 미안하다. 또한 소유에게도 미안하다. 그 아이에게 사과하마. 모든 것이, 미안하다."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까."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피로 물든 무복 위로 떨어졌다.
"죽어가는 제 딸에게, 그리 한 번만 불러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 또한 미안하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소중해질수록 현은 누각 아래서 울며 애원하던 병부상서를 더욱 또렷하게 떠올렸다. 비겁하게도, 자신의 죄 앞에서 화연의 치마폭 속으로 도망쳐 숨던 그 날을. 그래서 차마 황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지금쯤 황궁에 반란군이 침입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미 빼돌린 황후를 찾아서."
"내가 백성들을 베지 않으리라 생각했겠지."
"예. 제 목을 베어 반정을 정리하십시오. 저는 이미 폐하께 복수를 마쳤으니. 폐하께서 아끼는 이의 죽음으로."
아끼는 이의 죽음. 화연은 아니다. 현의 시선이 다시 피에 젖은 무복에 가 닿았다. 밤처럼 검은, 그렇기에 가장 익숙한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무복. 설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필사적인 부정에도 불구하고 본능은 옥루를 만들어 턱 아래로 떨어뜨렸다.
"...흑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