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다시. -->
"사관은 적으라. 짐은 오늘 지엄한 황명으로서 새로운 법을 선포한다."
그 옥음에 조금은 어수선하던 정전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첫 번째. 어린 황자를 황태자로 봉하여 따로이 교육하던 기존의 관례를 폐지한다. 모든 황자는 각자 스승을 두고 제왕학을 비롯한 차기 황제로서의 교육을 이수하며, 선위하지 않는 이상 천자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태자를 봉하지 아니한다. 짐의 붕어 후 옥좌 아래에서 밀서를 찾아 최측근이 보관하고 있는 밀서와 견주어, 두 이름이 일치하는 황자를 다음 대의 황제로 추존하라. 또한 이를 일컬어 태자밀건법이라 칭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것으로 더 이상 형제들끼리의 피바람은 없을 것이다. 현은 며칠 전 처음 얼굴을 보고 종(芽)이라는 이름을 내려 준 1황자를 떠올렸다. 윤 첩여가 그 아이를 회임했을 당시 후원 한구석에 씨앗을 심고 올라오는 새순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아마 그 씨앗처럼, 제 뱃속의 황손 또한 건강하게 자라기를 빌었으리라.
"두 번째, 황제 호위체계의 개편."
현이 무표정하게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그것을 읽었다. 어젯밤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 몇 번이나 다시 검토하였기에 내용은 모두 외우고 있었으니, 그저 습관적인 동작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황제 직속 호위인 그림자 부대는 퇴임 혹은 붕어 시 그 명을 끊음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후임자 양성 및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신규 배치된다. 이 경우 그 출신을 문제 삼지 않고 양민의 신분패를 발급하며, 성과에 따라 타 무관과 차별없이 관직 이동을 받을 수 있다. 혼인을 하고 자식을 두는 일 또한 가능하다."
"폐하, 그들은 너무나 위험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위험하다면 짐은 어찌 살아서 그대들 앞에 있겠는가."
"허나, 선대황의 흑운이 살아 반역을 꾀했던 전례가 있지 않사옵니까."
"그리 친다면 짐이 붕어할 적에 그대들 또한 모다 죽어야지. 대신들이 반역을 꾀한 전례는 없다던가?"
흠흠,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터지니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현은 대승상을 향해 그리 처리하라, 한마디 하고는 다음 두루마리를 집었다.
"주가 은호는 황후와 태중 용종을 반란으로부터 안전히 보호한바, 그 유배를 해제하고 정4품 장사에 봉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화연의 망나니 둘째 오라비는 벼슬을 잃었음에도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았다. 정실로 맞아들인 양민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그 즐기던 음주가무마저 뚝 끊고 두문불출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빈 자리는 여전히 사려 깊고 올곧은 은호가 차지했다. 폐태후의 일가친척이라 하여 반대의 목소리가 날 법도 하였으나, 황후를 보호한 공이 틀림없기에 그마저 쏙 들어갔다. 잠시 이견이 없음을 확인한 현이 손을 뻗어 다음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을 때.
"폐하, 폐하!"
정전 밖에서 궁녀 하나가 엎드려 외쳤다. 감히 정전을 소란하게 하였으니 끌려나갈 만도 하였으나, 다음 말에 용상을 차고 일어선 황제가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려갔기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후마마께서 산실에 드셨사옵니다!"
오전에 시작한 진통은 해질녘이 다 되도록 계속되었다. 할 일이 산더미같건만, 현은 그 무엇도 손에 잡지 못하고 그저 침전에 앉았다가 산실청 앞으로 갔다가, 또 쫓겨나듯 다시 침전으로 가기를 반복했다. 난산이었다.
"산실청으로 가자."
그리 달달 볶아 침전으로 모시고 온지 한 시진도 안 되었건만, 또 벌떡 일어나며 산실청으로 가자 하신다. 제아무리 황제라 하여도 여인이 출산을 하는 산실청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법. 곧 망극하게도 앞마당에 서 계시겠다는 뜻이 아닌가. 필두는 조금만 계시라, 소식을 가져오겠다 매달렸으나 현을 막아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정신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마마. 자,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보세요."
정신을 놓지 말라 하는 태의녀의 목소리마저 아득해진다. 화연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고통을 합한 것보다 더욱 큰 고통 아래에서 간신히 숨을 쉬고 본능적으로 힘을 주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죽는 편이 더 나을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정신을 놓아버릴 뻔 하였으나 그때마다 흑운을 떠올렸다. 자신과 황손을 살리고 대신 죽은 그를. 으윽, 입에 문 하얀 영견 사이로 거친 숨과 신음이 새어져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영원할 것만 같던 고통 끝에.
"으애애앵! 으앵!"
드디어 가냘픈 울음소리가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아주 강건한 황자이십니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땀에 젖은 얼굴에 작게 미소가 번진다. 간신히 눈만 뜨고 있는 화연의 가슴 위에 새털같은 무게가 느껴졌다. 태의녀가 조심스레 올려준 갓난아기는 엄마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울음을 그치곤 작은 몸을 화연에게 의지했다.
"어여쁘구나."
그리 애타게 기다리던 아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태의녀와 상궁들이 더운물을 가져와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잠시 어머니와 인사를 나눈 황자 또한 온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포근한 비단보에 싸였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강건하신 황자라 하옵니다."
산실 바로 앞에서 대기하던 태의가 달려나가 고하였으나 현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아니,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듯 보였다.
"황후는! 황후는 무사한 것이냐?"
"조금 기진하셨으나 강건하시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그제서야 걱정 가득하던 용안이 환하게 피고, 한시름 놓은 궁인들은 일제히 경하를 외쳤다. 그리 또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안에서 상궁이 나와 허리를 숙였다.
"안으로 드소서, 폐하."
평소의 위엄찬 걸음은 온데간데 없이, 떨리고 다급한 걸음이 몇 개의 문을 넘었다. 그리고 드디어 침상에 곱게 누운 화연과 그 품에 안긴 황자를 만날 수 있었다.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문 앞에서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는 현의 모습에 화연이 풋, 기운없이 웃었다.
"왜 그러고 계세요?"
"혹시...."
가까이 갔다가 너와 아이가 불행해질까봐. 현은 제 걱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으나 고작 한 걸음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화연과 저 작은 아이에게는, 감히 자신이 다가가선 안될 것만 같았으므로.
"이리 오세요, 폐하. 폐하와 꼭 닮았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보겠다."
"얼른요."
한 걸음, 또 한 걸음. 결국 아이를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현이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정말 작았다. 이렇게 작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작아도 너무 작고, 또.
"왜 이리... 못생겼느냐?"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이리 어여쁘신데. 폐하를 꼭 닮았다니까요?"
"내가 이리 못생겼다고?"
난데없이 저를 두고 못생겼다 하니 골이 아니 날 수가 있나. 갓 태어난 황손은 작디작은 입술을 삐죽대다 결국 으아앙, 울어버리는 것으로 제 불만을 표시하였다.
"폐하가 울리셨습니다."
"제 성질에 운 것이지. 방금 태어난 주제에 성질머리하고는."
화연이 눈을 흘기며 황손을 안아들었다. 유모상궁이 소인이 달래겠다며 받으려 하였으나 살짝 고개를 저은 그녀는 잠시 아이를 토닥이다 현에게 내밀었다.
"얼른 달래 주세요. 폐하께서 울리셨으니.'
재빨리 등 뒤로 손을 감춘 현이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손끝에 물든 피가 얼마인가. 또한 이 손끝에서 스러진 목숨은, 또 몇인가. 그 원한이 아이에게 물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신이나 운명 따위 믿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현이 처음으로 보이는 나약함에서 그 마음을 읽은 듯, 화연이 그를 향해 웃었다.
"괜찮아요."
========== 작품 후기 ==========
연참이지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