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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02화 (102/152)

<-- 그리고, 다시. -->

괜찮다. 화연이 그리 말해 주었으니 괜찮을까.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일일랑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는 일이 너무나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허나 괜찮을까. 화연이 괜찮다 말해 주었으니,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도 앙앙 울고 있던 황손은 단단한 아버지의 팔에 안기자마자 신기하게도 울음을 뚝 그쳤다.

"아버지를 알아보나봐요."

현이 하고 싶었던 말을 화연이 먼저 해 버렸다. 그는 저렇게 눈이 컸었나, 싶을 정도로 휘둥그레진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므로. 갓 태어난 아기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 들었다. 허나 현은 아이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운."

그리 한참을 아기와 눈을 맞추고 있던 현이 문득 내뱉은 말이었다.

"네 이름이다. 운아. 구름처럼 자유롭게 살아라."

유 운. 이름을 받은 황손이 기쁜 듯 방싯방싯 웃었다.

"어? 웃었다. 나를 보고 웃었단 말이다!"

"보세요. 아주 예쁘지요?"

현이 고개를 들고 화연을 보았다가, 다시 운을 보았다가, 다시 화연을 보고 웃었다. 그 무엇도 가지지 못했던 공허함도, 정인의 옆에서마저 한없이 그를 괴롭혔던 불안감도 씻은 듯 사라졌다. 이제서야 무언가를 가진 기분이었다. 그리도 집착하던 내 것을.

"정말 예쁘구나. 너처럼 어여쁘다."

***

덥고 더웠던 여름이 한 걸음 물러날 즈음, 황후궁의 공사도 거의 마무리되었다. 대신들을 일찌감치 퇴청시킨 후 공사현장을 한번 둘러본 현은 화연이 머물고 있는 월화궁으로 곧장 걸음하였다. 아마 운이 또한 거기에 있을 것이니. 그러나 현의 생각과는 달리 화연은 운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다.

"또 처분하려고? 국고를 내어준다 하지 않았느냐."

패물함을 줄줄이 꺼내놓고 이것저것 고르는 화연을 향해 못마땅하게 얼굴을 찌푸리지만 그뿐. 화연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올해 신첩의 탄일에 또 주실 것이 아닙니까. 허니 빈 자리를 만들어야지요."

주기는 줄 것인데. 나직하게 중얼거린 현이 가까이 다가가 화연이 골라낸 패물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것은 아니된다. 내 얼마나 고심해서 고른 것인지 아느냐?"

"알았습니다."

"이것도. 이건 내가 직접 그림을 그려서 만들어 오라 시킨 것이다."

"허면 이걸로 처분하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 안 된다. 이건 내가...."

"아, 폐하!"

옆에서 귀찮게 이것저것 골라내며 방해하는 현에게 결국 화연은 황후로서의 위엄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리 치면 싹다 그냥 넣어놔야지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바닥에 엎드려 눈치만 보던 궁인들의 등으로 묵직한 옥음이 떨어졌다.

"모두 멀리 물러가라."

"예, 폐하."

사방에 기척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현이 화연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손바닥에 따스한 체온이 전해지며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패물 몇 가지 못 팔아먹게 했다고 소리를 질러?"

"내 것 내가 팔겠다는데, 폐하가 왜 잔소리를 하세요!"

"내 것? 내 것이면 다 마음대로 해도 되느냐?"

"당연하죠. 봉잠 빼고 다 팔아버릴거야. 꺄악!"

작은 비명과 함께 화연의 몸이 번쩍 들어올려졌다. 당했구나. 화연이 그것을 깨닫자마자 침상이 가까워지고, 능숙하게도 옷을 풀어헤친 현은 아이를 낳기 전보다 훨씬 풍만해진 젖가슴을 가볍게 주무르며 입 안을 샅샅이 핥고 있었다.

"읍, 읍."

"왜."

화연이 작은 주먹으로 있는 힘껏 등을 두드리자 현이 입술을 살짝 떼어내었다.

"하지 마요."

"뭘?"

"뭐든."

"이건 공평하지 못하다."

현이 약간 더 고개를 들고는 찌푸린 눈으로 화연을 내려다보았다.

"운이는 매일 먹지 않느냐."

본디 황손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는 것이 관례이나 화연은 끝끝내 고집을 부려 운에게 직접 젖을 먹였다. 현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조그만 것이 무엇이라고 부인을 통째로 빼앗아 가는 것인지.

"그건 밥 먹는 거구요."

"나도 시장하다."

"주전부리 들이라 하세요."

"목도 마르고."

"마실 것을 내오겠습니다."

의미없는 말싸움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현은 계속해서 손안에 넘치도록 차는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흘러나온 젖으로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어온다. 그것을 살짝 핥는 그의 행동에 화연이 기겁하며 등을 마구 때렸으나 전혀 아프지 않았다.

"너는 좀더 공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안 된다니까요."

"한쪽만."

"왜 운이껄 뺏아먹으려고 해요!"

"원래 내 것인데, 운이한테 빌려준 것이지."

화연이 안 돼요, 다시 한번 말하기도 전에 현은 이미 한쪽 유두를 입에 물었다. 한번 세차게 빨아당기자 고소하고 시큼달달한 액체가 흘러나와 목으로 넘어간다. 자신이 손도 못 대는 동안 운은 매일매일 달라붙어 이것을 배불리 먹었겠다. 울컥한 현은 정말 그것을 다 빨아먹을 기세로 혀끝을 유두에 감아가며 계속해서 빨았다.

"이제 그만."

화연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자신에게 안긴 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부드럽게 떼어놓았다. 현이 아쉬운 눈빛을 보내보았으나 화연은 단호하기만 했다.

"지금은 아니예요. 나중에."

기실 출산을 한지 두어 달이 다 지났으니 합궁을 해도 한참 전에 할 수 있었으나, 화연은 전혀 내키지가 않았다. 휘장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흑운이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또한 그가 마지막으로 건넨 고백이 가슴에 사무치는 기분. 그런 화연의 마음을 헤아린 현 또한 더 조르지 않고 담담하게 옷섶을 매어 주었다.

"패물, 다 파는건 안 된다. 내가 직접 골라내 주마."

**

"네게 줄 것이 있다."

아직 석강 들었을 시각인데, 다짜고짜 월화궁으로 쳐들어온 현이 화연을 빤히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 바람에 운은 젖을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유모상궁에게 건너가야 했다. 무언가 기대에 가득 찬 현의 표정과는 달리 화연은 심드렁했다.

"또 패물입니까?"

"그것은 네 탄일에 줄 것이고."

"새로운 의대입니까?"

"한 번만 더 가져오면 찢어버리겠다며."

"귀한 보석입니까?"

"네 눈보다 더 귀한 보석이 있을까."

"아, 진짜. 그런 말 좀 하지 마시라니까."

그러면서도 화연은 소리내어 웃었다. 참으로 신기한 사내였다. 다른 이가 하였다면 그저 뻔한 수작, 아니면 낯간지러워 거부감이 들 만한 말조차 현의 입에서 나오면 감미롭게 들리니.

"따라오너라. 아, 운이는 두고."

자연스럽게 유모상궁에게서 운이를 받아 안으려던 화연이 샐쭉해졌다. 허나 마음 한구석으로 대체 무엇이기에 이리 하시나, 싶은 기대가은 또 어찌할 수 없는 일. 결국 못 이기는 체 현의 손을 잡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 나란히 걸어 도착한 곳은 높디높은 대문. 바로 황후궁이었다.

"나도 아직 보지 않았다. 네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

매달 임금만 정산하였지, 정작 화연은 공사현장에 단 한 번도 와보지 않았기에 어찌 생겼는지 모른다. 현이 턱짓하자 웅장한 대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그 안에서 갓 완공된 황후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와아."

삼 층으로 올려진 전각 세 개와 정원, 그리고 후원으로 이루어진 황후궁은 아름다웠다. 정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꽃나무가 심어지고, 그 사이로 놓여진 붉은 구름다리, 하다못해 밤에 등불을 걸어놓는 기둥마저도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가자."

잠시 입을 벌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화연의 표정에 만족한 현이 앞장서서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 구름다리를 건너고 전각을 한 바퀴 돌아 후원으로 들어갔을 때, 화연은 조금 전 본 정원은 새발의 피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폐하... 이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넓은 후원에 자그마한 놀잇배가 뜬 연못. 정원으로 흘러드는 시냇물은 바로 여기부터 황후궁을 한 바퀴 두르곤 다시 연못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그 옆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야트막한 산 꼭대기에는 작은 누각이 있어, 그 위에 올라가면 황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법 하였다.

"마음에 드느냐?"

"너무...."

화연이 환히 웃으며 현의 품에 매달렸다.

"아름답습니다, 폐하."

"또 있다."

"또요?"

현이 화연을 이끌고 후원 가장자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소문에는 황금 조각상을 세우고 있다 하더니 그것은 헛소문인 모양이라, 그저 기암괴석이 저마다의 모양을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저리 구경하며 도달한 후원 가장자리에는 야트막한 담장이 둘러진 작은 전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대문에는 자물쇠가 달려있지 않아 현이 살짝 미는 동작만으로도 쉽게 열렸다.

"폐하, 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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