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다시. -->
화려한 궁을 보았을 때보다, 바다마냥 넓은 연못을 보았을 때보다 더욱 환한 웃음이 화연을 가득 채웠다. 그녀를 바라보는 현 또한 똑같이 웃었다.
"들어가 보아라."
황성 밖에 있는 화연의 고향집, 정갈한 별채였다. 그녀가 어릴 적부터 사용하던 바로 그 별채가 눈앞에 있었다. 흙장난을 하던 정원도, 오라버니들이 앵두를 따주던 나무도, 하다못해 아버님께서 어린 화연에게 만들어 주신 장난감 집까지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네가 예전에 가족이 그립다며 울지 않았느냐. 가족이야 네 원하는 대로 불러도 된다만 승상이 그리하지 않을 것이니, 종종 운이 데리고 여기 오자꾸나."
화연이 들뜬 걸음으로 안에 들어가 제 방의 문을 열었다가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간은 어찌 하셨어요?"
"네 방에서 털어왔지. 몰래몰래 조금씩."
화연이 쓰던 세간, 창에 달린 발, 침상 위에 올라간 이불도 그대로였다. 혹시나 싶어 열어본 문갑 안에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옷가지들까지 들어 있었다. 화연은 너무 좋아 눈물까지 글썽대며 이불을 안고 침상 위에 파묻혔다.
"폐하."
"그리 좋으냐."
"은애해요. 진짜. 세상에서 제일. 말로 다 못할 정도로, 은애해요."
"내가 너를 조금 더 은애한다."
침상에 누운 화연의 입술에 담백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욕정보다는 은애가 가득 담긴 나비같은 입맞춤.
"황후궁 짓느라 돈 많이 썼으니, 이제부터 내탕금은 반의 반이다."
***
그 해 여름은 비가 많이 내렸다.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고 낱알과 뿌리들이 실컷 마시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비였다. 화연은 현이 만들어 준 연못에 거북이와 물고기를 키우고 산에는 토끼를 키웠다. 작은 생물들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며 오동통하게 살이 찌고 예뻐졌다.
내실은 정갈하고 고급스러웠으나 역시 고향집을 그대로 만든 별채가더 마음에 들었기에 틈만 나면 그 곳으로 갔다. 그리 가는 길에 언뜻언뜻 보이는 토끼귀를 발견하는 일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 날도 그랬다. 아침나절 내리던 가을비가 오후 전에 걷혀진 날. 해질녘까지 별채에 앉아 책을 읽고 운이와 바깥을 거닐던 화연은 석수라가 들어올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유모상궁을 뒤에 딸리고선 별채 문을 닫았다.
"아. 오늘 거북이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다."
문 밖에 있는 바구니를 보고 문득 생각난 화연이 그것을 집어들었다.
"가는 길에 주고 가세요, 마마."
"그래야지."
가을로 접어든 해는 부쩍 빨리도 진다. 이미 땅거미가 깔리는 후원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 화연은 연못 가운데를 향해 쑥 들어간 바위 위에서 물 속으로 먹이를 뿌렸다. 그리고 바구니가 거의 다 비었을 때,
"으애애애앵! 으앵!"
연못가에서 유모상궁의 품에 안겨있던 운이가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화연은 운이를 달래주기 위해 서둘러 몸을 돌렸다. 허나 아침 나절 내렸던 비는 아직 다 마르지 않았다.
바위가 미끄러워. 화연이 그것을 느끼자마자 풍덩, 큰 소리와 함께 그녀는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마마!"
"으애애앵!"
유모상궁의 비명과 황자의 울음소리가 고요하던 후원을 뒤흔들었다. 황후궁을 지키던 두 명의 병사가 달려와 뛰어들었으나 비가 와서 불어난 물과 시야를 어지럽히는 뻘로 화연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무거운 비단옷이 화연을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갔다. 희미한 빛이 시선 너머로 멀어진다. 운이를 달래야 하는데. 화연이 마지막 생각을 끝으로 정신을 잃는 순간, 빛 속에서 뻗어나온 손 하나가 그녀의 손목을 힘있게 잡았다.
***
"화연아. 화연아."
침상에 기댄 채 깜빡 잠들었던 현이 소스라치며 깨어나 화연을 불렀다. 이마를 짚어보니 후끈대는 열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밤새 곁을 지켰건만, 화연은 좀처럼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화연아. 제발."
탕약을 흘려 넣어도 삼키질 못하고, 불러도 듣지 못한다. 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곁에서 불덩이같은 몸을 시원한 물수건으로 계속해서 닦아주는 것뿐이었다. 그리 사흘이 지난 후, 조용히 고개를 저은 태의가 물러나 엎드렸다.
"너무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하셨습니다.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실 수도...."
"네 이놈!"
현이 집어던진 탕약 사발이 태의의 등에 맞고 바닥에 굴렀다.
"살려내라. 네놈이 그러려고 녹을 먹는 것이 아니냐!"
현도 자신이 억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허나 인정할 수 없었다. 화연을 위해 만든 연못이었다. 월화궁의 작은 연못을 보고도 기뻐하던 화연을 위해 세상 다시없이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더랬다. 헌데 바로 그 연못에 빠져 죽어간다니.
"죽여주시옵소서."
빈말로라도 할 수 있다, 살려내겠다 하지. 태의는 그저 엎드려 빌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현은 허탈하게 손짓하여 그를 물리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화연의 손을 잡고 엎드렸다. 이마가 이리 뜨거운데, 손발은 너무 차갑다. 피가 돌지 않기라도 하는 듯.
"제발. 화연아."
처음으로 신에게 빌었다. 저지른 죄 있거든 모두 내가 받을 것이니 제발 살려달라고. 대신들을 비롯한 수많은 궁인들이 황후궁 밖에서 현을 외쳐 불렀으나 그는 화연의 곁을 단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또한 무엇도 입에 대지 않았다. 누워서 잠을 자지도 않았다. 그저 미친 사람처럼 화연을 부르며 신에게 빌다가, 화연의 몸을 닦다가 손발을 주무르다가, 아주 잠깐씩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이레가 지났다. 이제는 황궁 문 앞에 백성들과 대신들이 엎드려 제발 수라를 하시라 빌기 시작했으나 현은 그저 치우라며 죽그릇을 던져 버릴 따름이었다.
"폐하, 태의 드옵니다."
"... 그래."
현은 태의가 화연을 돌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일어섰다. 그 순간,
"아앗!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