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죄 -->
"폐하, 폐하."
멀리서 울리는 화연의 목소리가 현을 흔들어 깨웠다.
"화연아?"
자신이 후원 구석에 마련해 준 화연의 별채.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서 자고 있었는지 생각해낼 겨를도 없이 목소리를 쫓아 바깥으로 나왔다. 물안개로 뿌옇게 뒤덮인 후원을 거쳐 화연이 빠졌었던 연못을 지났다. 그러는 동안 현을 부르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희미한 아기 울음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운아, 화연아."
옅은 물안개처럼 보였던 안개는 갈수록 짙어져선 후원을 빠져나올 즈음에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현은 계속해서 아내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속을 더듬었다. 안개 속을 얼마나 헤매었을까.
이윽고 조금씩 걷히는 안개 사이로 그는 화연을 발견했다. 어딘지 멍해 보이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화연아!"
무언가에 계속해서 발이 걸렸으나 화연을 부르며 그 쪽을 향해 달렸다. 그 보람이 있었는지 화연은 점점 그와 가까워졌다. 황후궁의 정원을 가로지르는 도랑, 그 위에 걸쳐진 구름다리. 화연은 그 바로 중간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연아, 화연아! 이리 오너라. 화연아!"
분명 눈앞에 있는데, 화연은 현이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제 앞에 선 그림자와 무어라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으니. 안개는 계속해서 옅어졌다. 그림자가 허리를 절도 있게 숙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익숙한 까닭에 현은 화연을 부르는 것도 멈추고선 그를 응시했다. 그림자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돌아서서 건너편을 향해 사라졌다.
"화연아!"
다시 정인을 불렀다. 이번에는 들린 모양이다. 고개를 돌린 화연이 그를 똑바로 보고 웃었으니.
"폐하!"
화연이 나풀나풀 뛰어 다리를 되돌아왔다. 조금 전, 건너갈 적의 넋을 잃은 눈빛이 아니었다. 헌데 품 안에 나비처럼 안긴 자그마한 몸이 너무 차갑다.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어찌 이리 몸이 차가우냐."
"그러게요. 너무 추워요, 폐하."
화연이 작게 몸을 떨었다. 현은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고 서둘러 내실로 들어와 침상 위에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안아 주세요. 추워요."
겨울을 맞은 다람쥐마냥, 화연이 옆에 누운 현의 팔을 베고선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은애해요. 현."
새삼스레 웅얼거리는 고백이 가느다란 진동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졌다. 너른 품에 쏙 들어오는 화연의 몸을 보듬어 안은 현은 그 머리칼에 얼굴을 묻으며 마주 대답했다.
"나도, 너를 은애한다."
그리 말하는 제 가슴은 이리도 뜨거운데, 화연의 몸은 너무 차다. 현은 온몸으로 화연을 끌어안고 이불을 단단히 여몄다. 화로를 내오라 할까.
"밖에 누구 있느냐."
"폐하, 폐하!"
그냥 답하면 될 것을 어찌 이리 시끄럽게 부르는 것이지. 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눈을 떴다. 꿈이었나. 멍한 머리를 정리하며 둘러보니 필두가 자신의 몸을 받치고는 그를 부르고 있었다. 막 들어온 태의와 여전히 자리에 누운 화연, 그리고 사색이 된 궁인들. 그 짧은 사이에 꿈을 꾸었나보다.
"수선 피우지 말거라. 잠시 어지럼증이 온 것이니."
"그만 쉬셔야 하옵니다. 더 큰 병이 올 수도 있습니다, 폐하."
태의의 충언에도 현은 그저 고개를 한 차례 젓고는 필두의 부액을 받아 뒤에 있는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 뜻이 너무나 단호함을 아는 태의 또한 더 말을 하지 않고 화연의 손목을 잡아 맥읖 짚었다. 헌데 무언가 이상하다. 맥을 짚자마자 새파랗게 질려선 코 아래 손가락을 대어보고, 다시 맥을 짚는다.
"... 왜 그러느냐."
가슴이 내려앉은 현이 아무 일도 아니길 바라며 애써 물었다. 그러나 돌아 엎드린 태의에게서는 결국,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비명처럼 울리고야 말았다.
"황후마마께서 서거하셨습니다!"
***
"운아, 운아."
화연은 물에 빠지기 직전 들었던 아들의 울음소리를 찾아 계속해서 안개 속을 헤매었다. 어디선가 울고 있는데, 젖을 물려야 하는데. 아무리 부르고 헤매어도 울음소리는 멀어지기만 한다. 어디 있지, 우리 황자.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던 그녀는 문득 이 곳이 황후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아. 게 있느냐?"
눈앞에서 가늘게 흐르는 도랑 위로 걸쳐진 붉은 구름다리. 울음소리는 어쩐지 뿌옇게 가려진 저 너머에서 들리는 듯 하였다. 화연이 서둘러 다리 위에 올라섰다. 그다지 길지 않은 다리인데 어찌 이리 긴 것일까. 한참을 걷던 화연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에 부딪혀 뒤로 넘어졌다.
"조심하십시오."
그림자가 내민 손이 낯설지 않다. 그것을 잡고 일어선 화연은 자신이 물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물을 머금고 그녀를 바닥으로 끌고 들어가던 비단옷, 쉼없이 섞히는 뻘과 그 사이로 희미해지던 해질녘의 노을. 그리고 그 빛이 꺼지기 직전 자신을 붙잡았던,
눈앞의 손도.
"고마워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 화연이 그림자의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고 하였으나 또 머리를 부딪혔다.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바른쪽으로 가면 바른쪽으로. 그림자는 작정한 듯 그녀의 앞길을 계속해서 막아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건너편 안개 속에서는 계속해서 가냘픈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비키세요."
"안 됩니다."
"우리 운이가 저기 있어요."
"저 아이는 황자마마가 아닙니다."
"비켜요, 비키라니까!"
화연은 조바심에 울컥 짜증을 내며 작은 주먹으로 그림자의 가슴을 두들겼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림자가 그 손목을 쥐어 멈춰세우기 전까지. 어딘가 낯설지 않은 상황이었다. 헌데 어찌 이리 마음이 아플까. 언제부터 흐른 것인지, 눈물이 뺨을 타고 주룩주룩 떨어지고 있었다. 서툴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눈물을 닦아낸 그림자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이제 정말 떠납니다. 함께는 못 가십니다."
그제서야 화연이 고개를 들고 그림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드디어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더없이 홀가분하고 환하게. 화연 또한 마주 웃었다. 이리 웃고 있다면, 아파하지 않고 있다면. 이제는 정말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심장에 깊숙히 박힌 채 차갑게 굳어있던 무언가가 봄을 맞은 눈꽃마냥 녹아내려 피 속으로 스며들었다.
"고마웠어요. 잘 가요."
"고마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다시 싱긋 웃은 그림자가 허리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뒤돌아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화연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서 현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맞은편에선 계속해서 아기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으나 이제 그것을 따라가진 않을 것이었다. 흑운이 황자가 아니라 하였으니.
"폐하!"
반가운 마음에 황후답지 않게 치맛자락을 붙들고 달려가선 현의 품에 안겼다. 그제서야 화연은 온몸을 덮쳐오는 추위를 느꼈다. 물에 빠져서 그런 것일까. 현 또한 그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어찌 이리 몸이 차가우냐."
"그러게요. 너무 추워요, 폐하."
오들오들 떨면서 현에게 파고드니 그가 서둘러 그녀를 감싸 내실로 들어갔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침상에 누웠으나 포근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아 주세요. 추워요."
이불 안에 들어온 현이 팔베개를 해 주고 꼭 보듬어 안아주었다. 화연은 그제서야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속삭였다.
"은애해요, 현."
"나도, 너를 은애한다."
========== 작품 후기 ==========
흑운을 묻어준 현이 마지막으로 내린 명은
"네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
였습니다.
네, 떡밥이었습니다. 흑운은 가고 싶은 곳에서 실컷 머무르다가 마음 편히 떠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