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죄 -->
그리 답하는 현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다. 왜 울고 계세요. 위로하고 싶은데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손을 들어올리려 해도 내 몸이 아닌 양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현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사방이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시끄러워. 도대체 왜 다들 울고 있는거야.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드디어 목소리가 나왔다. 그와 동시에 시끄럽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 화연아?"
***
어둠에 덮였던 황궁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삼도천을 건넌 황후를 황제께서 데리고 돌아오셨다는 소문이 황성 내에 파다했으나, 화연은 자신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았기에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우리 황자, 웃었어요? 어미 보고 웃었어요?"
젖을 물던 운이 화연을 올려다보고 배시시 웃었다. 채 삼키지 못한 젖이 오동통한 뺨 위로 흘렀다.
"이놈, 어찌 어미 젖을 흘리느냐."
옆에서 들여다보던 현이 손끝으로 그것을 닦아 입에 쏙 집어넣었다.
"폐하, 그리 좀 하지 마세요."
"네가 나만 못 먹게 하니 아까워서 그러지."
잠시 현을 흘겨보던 화연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따 밤에 좀 드릴께요."
"나는 지금...."
먹고 싶다. 현이 말하려는 순간 밖에서 전 상궁이 조심스레 고해왔다.
"폐하, 1황자마마 들었사옵니다."
현은 아쉬움에 다시 젖을 먹고 있는 운이를 부러운 듯 바라보았으나 지금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들이거라, 현이 답하자 문이 열리며 유모상궁이 품에 부쩍 큰 종을 안고 들어섰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꺄아, 꺄아!"
무어가 그리 좋은지 종이 손을 흔들며 방싯방싯 웃는다. 유모상궁이 자신을 조심스레 아버지 품에 내려놓자 종은 더욱 신이 난 듯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바둥거렸다.
"맏이로서 위엄을 갖추어야지, 어찌 이리 방정맞게 구느냐?"
현이 종을 안아 높이 들어올리며 짐짓 엄하게 나무랐다. 그러면서도 입꼬리에는 웃음 한 조각이 물려 있었다.
"이제 곧 돌 되는 아이한테 바랄 걸 바라세요, 폐하."
"내 요만할 적에는 울 때도 위엄있게 울었다."
"말도 안 돼."
화연의 웃음소리가 꺅꺅대는 종의 웃음소리에 섞여 곱게 날았다. 운 또한 그 소리들에 기분이 더 좋아진 듯, 젖을 더 이상 먹지 않고 계속해서 방긋방긋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화연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옷을 여미고 바깥을 불렀다.
"유모상궁 게 있느냐?"
"예, 마마."
"잠시 들거라."
상궁은 왜? 현이 눈으로 물었으나 화연은 2황자의 유모상궁이 들어오자마자 방금 떠오른 질문부터 던졌다.
"내 지난번 연못에 빠졌을 적에 말이다."
"아이고, 마마. 망극한 말씀 마소서."
"쉿. 그때 운이가 숨 넘어갈 듯이 다급하게 우는 소리에 서둘러 돌아가려다 발을 헛디뎌 넘어졌거든."
화연의 말에 기겁하던 유모상궁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황자마마는 우시지 않았사옵니다. 물론 마마께서 빠지시는 바람에 소인이 비명을 질러 깜짝 놀라 울기는 하셨으나, 그 전에는 그저 방긋방긋 잘 웃고 계시었습니다."
"확실한 것인가?"
"예. 소인이 분명 기억하옵니다."
"... 알았다. 나가보거라."
유모상궁이 나간 후 화연은 품에 안은 운이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었다. 조금 전 1황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 웃음이 2황자와 다르다는 것.
찢어지는 아기 울음소리가 당연히 운이라 생각하였건만 돌이켜 보면 그것은 운이의 목소리와 확연이 달랐다. 아기 울음소리 죄 거기서 거기라곤 하나, 그마저 구분해 낼 수 있는 이가 바로 어미 아니던가.
그리 굳어버린 옆얼굴을 바라보던 현은 1황자를 한 팔로 고쳐 안고선 화연의 머리를 살짝 당겨 안았다.
"나 또한 들었다. 네가 깨어나기 직전, 잠시 정신을 놓았을 적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화연이 놀란 눈으로 현을 돌아보았다.
"네 걱정할까 말하지 않았다.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꿈을 꾸었는데, 황후궁이더구나. 어디서 자꾸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그것을 따라가니 네가 저 구름다리 위에서 어느 사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곤 다시 돌아와서 자꾸 춥다 하기에 들어가 이불을 덮어 주었지."
품에 안은 2황자는 어느 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잠시 기억을 되짚은 화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흑운이었어요."
역시 그랬나. 현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던 사내의 시선이 저를 향했다고 생각했다. 곁에 있을 적, 늘 그랬듯이.
"그가 또 다시 저를 살렸습니다. 내게 허리를 굽히기에 이상하다 여겼건만, 제 뒤에 있는 폐하께 인사를 올리고 갔네요."
안개로 덮인 황후궁과 흑운, 그리고 차디찬 손으로 잡았음에도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그의 손목. 그래. 화연이 보고 온 것은 죽음이었다. 죽었기에 죽음을 보았으나 또한 완전히 죽지 않았기에 짙은 안개에 덮인 죽음 이후의 세계는 보지 못하였다.
"네가 그리 말하였지. 복중 태아를 해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회임한 민씨에게 매질을 하고 돌아온 현에게 했던 말이었다. 나락까지 함께 가겠노라고.
"내게 있어 나락이다. 네가 없는 생이. 네가 죽었다면 나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겠지. 황자들이 장성하여 용상에 앉을 수 있을 때까지."
현을 나락 직전까지 끌고간 아기 울음소리로 인해 화연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되었다. 나락까지 함께 가자던 말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약조였던 것이다. 현에게 건네는 물음 끝자락이 가냘프게 떨렸다.
"그 아이의 어미는 어찌 되었나요?"
"죽었다. 섬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 말을 하면서 현은 처음으로 죽은 민씨의 삶을 보았다. 그녀 또한 힘든 삶이 아니었나. 민씨 가문의 친딸 대신 꼭두각시로 입궐하여 갖은 모욕을 겪다 결국 비참하게 끝나버린 인생이, 가엾지 아니한가.
악하다 하면 악한 여인이었으나 처음부터 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댈 이 하나 없이 황금빛 지붕 아래에 갇힌 채 자신처럼 천천히 미쳐갔을지도.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 주세요."
그리하마. 현이 괴롭게 대답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화연은 죽음 직전에서 두 번이나 살아 돌아왔고 흑운은 돌아오지 못했다.
천자는 무치. 그 무엇도 수치스럽지 아니하며 어떠한 죄도 물을 수 없다. 그리 되돌아갈 곳을 잃은 죄가 향할 곳은 결국 천자의 사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