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죄 -->
인적이 드문 길 옆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던 폐비 민씨의 시신이 새하얀 보에 싸여 황성으로 실려왔다. 화연은 죽은 아기를 위로하며 그리 싫어하는 바늘과 실을 들었다. 손가락을 찔려가며 며칠 내내 만든 자그마한 인형 안에 황후궁 다리 밑에서 파낸 흙을 채우고 배내옷을 지어 입혔다.
"데려가세요."
현은 간소한 장례나마 직접 치러주기 위해 해가 뜨기도 전에 변복을 했다. 그런 그에게 인형을 내미는 화연의 손이 온통 바늘에 찔린 상처투성이다. 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손에 입을 맞추고는 인형을 받았다.
그리고 황궁을 나가 민씨에게 안겨줄 때까지 품에 안아 주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한 줌의 가루가 된 둘은 굽이굽이 푸르른 강물 위로 흩뿌려졌다. 너희 또한 황궁에서 멀리 떠나 행복해지라며.
"미안하다."
자그마한 나룻배 위에서 마지막 가루를 흘려보낸 현이 중얼거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현은 며칠동안 직접 기록을 뒤져가며 죽은 자들의 흔적을 찾았다.
지은 죄가 깊어 시신조차 없는 이들은 짚으로 만든 인형에 수의를 입혀 화장하고, 억울하게 죽은 이는 시신을 수습하여 양지바른 곳에 안치한 뒤 남은 가족들에게 비단과 소금을 내렸다.
묘비에는 하나같이 황제가 친필로 쓴 그들의 이름 뒤에 사죄 (謝罪)가 덧붙여져 있었다.
***
"대풍년이군, 대풍년이야!"
비지땀을 흘리며 곡식을 거두어들이던 농부 하나가 잠시 허리를 쭉 폈다. 길어진 그림자로 보아 이미 꽤나 지쳤을 시간이었으나 순박한 얼굴은 기쁨으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새로 제정된 국법으로 인해 이 곡식들 중 무려 육 할이 그와 가족들의 몫이니. 가난한 소작농인 그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다.
이 곡식을 장에 팔아 고기도 한근 끊고, 막내딸 꽃신도 한 켤레 사야지. 새 의대 해 입으라며 고운 명주 한 필 안고 가면 마누라 얼굴이 저 해님마냥 환히 필 테다. 그래도 남는 곡식들은 차곡차곡 광에 쌓아 밥도 하고, 술도 빚고.
일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일이 할을 채 가져가지 못하여 춘궁기면 어김없이 풀뿌리를 캐어야 했던 날들은 더이상 오지 않으리라. 고기 굽는 냄새에 자식들이 코를 벌름거릴 생각을 하면 지쳤다가도 불끈불끈 힘이 솟았다.
"아무렴. 이것 봐, 낱알이 너무 실해서 벼가 아주 축 처졌어!"
"자네 거시기처럼?"
와하하, 농부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놀림받은 사내가 무어라 외치며 반박했으나 웃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여기도 내일이면 다 거두겠구먼. 다음 차례는 뉘여?"
"우리집 차례여. 우리 마누라가 새참을 아주 두둑하게 준비한다고 벼르고 있으니 기대하라고."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하는 농부의 얼굴에는 유난히 우쭐함이 가득했으나 누구도 잘난 체 한다 타박하지 않았다. 그 또한 함께 품앗이하는 소작농이었으나 지주가 다름아닌 국구 서 이흥이었던 것이다.
"그 집은 팔 할이 자네 것이라지?"
"아무렴. 뿐인가, 황제폐하 황후마마 탄일이면 새 의대에 고기까지 내려온다네."
귀비 시절, 성총을 독차지하는 화연에게 대신들이 건넨 재물은 하루가 멀다하고 산처럼 쌓였다. 서 이흥 또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뇌물을 바치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록 그것들로 인해 백성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할지라도.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 사람을 보내어 땅과 집을 샀다.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그 집과 땅을 나눠주고 소작을 하도록 하니 그들은 이듬해로 당장 가난을 벗어나 동료들에게 거한 새참을 한턱 낼 정도가 되었다.
"성군이여. 우리 황제가 하늘이 내린 성군이여."
"아서라 아서. 사내란 계집 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이게 다 황후께서...."
"언제는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라며?"
"구미호는 맞지. 아주 홀딱 빠져선 황후마마 말이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신다는데. 게다가 밤이면 밤마다 다섯 번은 일도 아니래."
"우리 마누라가 그 얘기 듣고 난리가 났으이. 간쓸개 못 빼줄거면 밤일이라도 잘하라고. 아니, 지가 경국지색 아니라 안 서는 것을 날보고 어찌하라고?"
"자네 마누라가 경국지색이면 자네랑 혼인을 왜 해? 황제랑 하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머쓱하게 뒤통수를 벅벅 긁은 사내는 그래도 불만이 남았는지 작게 투덜거렸다.
"경국지색은 무슨. 나라 기울기는커녕 일으켜 세우게 생겼어. 아주 대장군감이여."
"그 대장군 자네 뒤에 계신데."
넌지시 알려준 농부가 혹여나 불똥이 튈라, 두 부부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추수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저쪽에서 남편을 쥐잡듯 잡는 아내의 모습에 대장군감이 확실하구먼, 하고 박수를 보내며.
***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낮은 소리로 자장가를 부른 지 벌써 한 시진이 다 되어간다. 드디어 2황자가 스르르 눈을 감고 잠든 것을 확인한 화연은 손을 떼고 까치발로 살금살금 문을 향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네 걸음째를 떼었을 때.
"으앵!"
"으아아아앙!"
2황자가 어미 없어진 것을 귀신같이 알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옆에서 이미 쌕쌕 잠들어 있던 1황자 또한 울음소리에 놀라 함께 울기 시작했다. 두 황자의 울음에 화연 또한 글썽글썽 눈물이 맺혔다. 제발 좀 자라고, 얘들아. 아이들을 제 손으로 키우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했다.
"유모 게 있느냐!"
"예, 마마."
두 사람의 유모상궁이 동시에 들어와 빠르게 각자 황자들을 안았다. 신기하게도 울음을 뚝 그친 황자들은 얼마 안 가 스르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화연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쓱쓱 닦았다.
"폐하께선 어디 계신다 하더냐?"
"좀전 궁녀가 전하기를, 아직 집무실에 계신다 하옵니다."
"혼자서?"
"그러하옵니다."
오늘도 새벽까지 일을 할 모양이었다. 보고 싶은데, 어쩌지. 황후 된 몸으로 당당하게 집무실에 쳐들어갈수도 없는 노릇이고, 급한 일도 없는데 빨리 오시라 연통할 수도 없는 일이고.
갑갑함을 달래고자 황후궁을 벗어난 화연의 눈에 저 멀리 등불을 들고 지나가는 어린 환관이 띄었다. 갓 소환 티를 벗은, 여인네마냥 자그마한 몸집의 환관. 저거다.
"저 아이의 옷을 가져오너라."
"예, 마마."
현이 오래된 상궁들 가운데서 직접 고른 지밀상궁이었다. 그녀는 황후께 어찌 그러시냐 묻지 않고 곧장 환관을 잡아다가 옷을 벗겨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 날 뒤로 화연이 무언가 수상한 명을 내릴 적이면 반드시 그 목적을 묻는 습관이 생겼다.
"아니 되옵니다,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치밀하게도 빈 전각을 찾아가 환관복을 갈아입는 황후의 행동에 울상이 된 지밀이 발을 동동 굴렀으나 화연은 태연했다. 환관흉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정도쯤이야.
"자네만 입 다물고 있으면 돼. 찾을 사람도 없지만 뭐 찾거들랑 침수 드셨다 하고. 그럼 이만!"
아주 능숙하게 환관복을 입고 상투에 환관모까지 틀림없이 쓴 그녀는 신이 나서 등불을 흔들거리며 집무실을 향했다. 현이 얼마나 놀랄까, 엄청 좋아하겠지. 그림자들이 집무실로 통하는 문마다 지키고 있었으나 환관복을 입은 황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화연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집무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감읍하옵니다, 폐하."
"이만 가 보아라."
고운 여인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이는 틀림없는 현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인 화연의 발 앞으로 파란 치맛자락이 사뿐사뿐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 뒷모습을 보니 틀림없는 후궁이었다.
황후조차 섣불리 들지 못하여 변복을 하고 온 집무실에 후궁이라니. 게다가 한밤중에, 홀로 있는 황제에게. 근래 정무가 바쁘다며 황후궁에 발길이 뜸하던 그가 생각나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화연은 잠시 후우, 심호흡을 한 다음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이냐.”
곁눈으로 초록빛 환관복만 본 현은 설마 화연이 찾아왔으리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약간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시선은 계속 서류에 고정한 채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곧 고개를 들고 옆을 보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든 두루마리를 떨어뜨렸다.
“화연아.”
“누구예요?”
“누구?”
“방금 나간 후궁. 누구냐고요.”
“아, 보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