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두 얼굴-109화 (109/152)

<-- [본편완결] 보고 싶습니다, 형님. -->

“그것 때문이라고?”

쓰다듬던 손이 딱 멈추었다.

“그럼요. 사실 하는 일도 없는 후궁들인데 거기마다 들어가는 인력이 한둘인가요. 시중들 환관에 상궁에 궁녀에, 궁녀 시중들 무수리에.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데다 최소한 품위 유지만 하려고 해도 그 내탕금이, 아휴.”

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말고 이상한 느낌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던 입가는 꽉 다물어지고, 시선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마룻바닥에 꽂혀 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약간 불퉁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

“삐치셨습니까, 폐하?”

“뭐?”

난생처음 듣는 표현에 현이 미간을 구기며 다시 화염을 내려다보았다.

“삐치셨네. 또 왜요.”

“천자는 삐치지 않는다.”

“아, 네.”

화연이 대강 대답하고는 다시 서안 위로 얼굴을 숙였다. 후궁마다 배정되어 있던 궁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은 이제 최고상궁이 된 전 상궁의 몫이었으나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이는 황후였다. 게다가 날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빈 전각들도 손봐야 하고, 또…….

“폐하. 신첩이 분주하옵니다.”

“누가 무어라 하더냐?”

“금일 정무를 다 보시었습니까?”

“당연하지.”

뒤에서 알짱대며 괜스레 의자를 툭툭 차는 현이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화연이 눈치를 주었음에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자들이 잘 있나 보고 오심은 어떠십니까?”

“잘 있다고 하던데.”

화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다음 서류를 펼쳤다. 그러나 그것은 대여섯 글자를 채 짚어 내려가기도 전에 다시 덮여 버렸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

“폐하!”

왈칵 짜증을 내었으나 정작 서류를 덮어버린 사람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다문 입술에 약간 삐딱한 눈썹, 그녀를 똑바로 보지 않는 시선. 화연은 오늘 처리할 서류들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자신을 향해 돌렸다.

“현.”

부드럽게 부르는 이름에 현이 잠시 화연을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산보 나갈까요?”

“되었다. 일 보아라.”

화연이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현의 목을 감았다. 빼꼼 나온 혀가 입술 끝을 핥으며 유혹했으나 현은 요지부동이었다.

“나 봐요. 왜 삐쳤어?”

“삐치지 않는다니까.”

“그럼 왜 나 안 봐요?”

“그냥.”

삐쳤네. 화연은 완전히 확신했다. 내가 지금 황자 둘을 키우는 것인지, 황자 셋을 키우는 것인지.

“우리 현이, 술 마실까?”

“무엄하다.”

“그럼 젖 먹을까?”

“.......”

싫다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 제안은 마음에 든 모양이다. 화연이 현을 침상으로 데려가 폭신한 구름 위에서 아기마냥 안으니 현 또한 못 이기는 척 슬슬 파고든다. 이제 막 젖가슴을 풀고 입에 물려던 그의 앞에 탐스러운 유두 대신 손바닥이 끼어들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신 지 말씀하셔야지요.”

“... 좋아하여야지.”

“무엇을요?”

“후궁을 내보내어 좋아하여야지.”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내탕금 때문에 말고."

화연의 손을 잡아 치운 현이 다시 말캉한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네가 좋아한다면 다 내보내겠다. 후궁들 싹 다. 한 명도 남기지 아니하고."

“아니 됩니다. 고르고 골라 남겨둔 이들이 아닙니까. 후궁전이 텅 비게 되면 황실의 면이 서질 않아요. 게다가 그 부친들 사이의 이해관계도…….”

“해도 너무하는구나!”

벌떡 일어난 현이 눈을 잔뜩 찌푸리고 화연을 노려보았다.

“지아비라더니, 은애한다더니! 내 곁에 다른 아내들이 그리 우글우글 모여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으냐? 심지어 그 수가 줄었는데 내탕금 생각에 좋아한다니, 정녕 네가 나를 은애한다면 이리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하다 하다 별것이 다 서운하구나. 삐침의 원인을 알게 된 화연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그를 살살 달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폐하를 믿기 때문이지요. 수십 송이 꽃이 만발할 적에도 거들떠보지 않으셨는데, 고작 열댓 송이 꽃에 마음을 돌리시겠어요?”

“나는 네가 마음 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네 처소에만 환관을 금했다. 그마저 투기하여 금했단 말이다. 늘 이런 식이지. 늘 속은 나 홀로 끓이고 나 홀로 투기하지.”

화연은 피로가 몰려옴을 느끼며 잠시 하늘을 보고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대신들은 현이 지시한 일이라면 자진해서 야근을 하고, 백성들은 혜국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군이라며 황궁 문 앞을 지날 적마다 절을 올린다. 그리 위엄과 통찰력을 갖추신 분이 어찌 제 앞에서만 이리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는지.

“투기하죠, 왜 안 해요. 집무실에서 후궁 나오는 거 봤을 때는 아주 속에서 천불이 났다니깐? 안 되겠다, 내 말 나온 김에 남은 후궁들 죄다 내보내야겠어. 이것들이 감히, 어디서 내 남편을 넘봐?”

내 남편. 화연의 말 끝자락에서 튀어나온 단어가 현을 살살 간질였다.

“정말 그리 하고 싶으냐?”

“그럼요. 내 남편 곁에 다른 여인? 말도 안 되지!”

또, 내 남편. 이제 현은 조금 전 서운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남편이라지 않나. 필녀가 필부에게 세상 단 하나뿐인 지아비를 부르듯, 그렇게.

“잠시 정무 좀 보고 오마.”

“오늘은 할 일이 없으시다면서요?”

“그런 줄 알았는데 다시 생겼다.”

현이 마지막으로 입술을 맛나게 빨아먹고 다급히 문을 빠져나갔다. 그래도 꽤나 귀여운 면이 있단 말이야. 조금 전 남편 소리에 스리슬쩍 올라가던 현의 입꼬리를 생각하니 그녀 또한 웃음이 난다. 허나 귀여움은 잠시, 일은 영원히. 화연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의자에 앉아 조금 전 들여다보던 서류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

“아니 되옵니다, 폐하!”

“연유는?”

황제가 이번에 내놓은 새 안건은 대신들이 힘을 합쳐 반대하기에 꼭 알맞았다.

“무릇, 황손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황실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든든한 반석과도 같나이다. 밭이 넓을수록 그 열매 또한 많은 것 아니겠사옵니까? 허니 후궁전을 없애겠노라는 말씀은 천부당 만부당한 줄로 아뢰오.”

“황자가 수십, 수백이어도 황제는 단 한 명이 아닌가. 되려 많으면 많을수록 쓸데없는 예산만 늘어날 뿐이오.”

“후궁이란 폐하의 옥체를 받들어 뫼심으로서 후사를 잇고 어심을 위로해드리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옵니까.”

“필요가 없다니까? 내 어심은 황후께서 위로해드리니 신경쓰지 마시고.”

“후대를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후대에 들인 황후께옵서 황자를 생산하지 못할 경우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황후를 여럿 들이라 하시오. 1비가 후계를 생산치 못하면 2비를 들이고, 2비도 아니 되면 3비를 들이고. 그리 다섯까지 비를 둠을 허용하리다. 선황제들께선 후궁을 적으면 열에서 많게는 오십이 넘게 두셨소. 후궁 하나당 들어가는 국고가 얼마인지 경들은 모르시는가? 호부상서!”

느닷없이 지목되어 당황할 만도 하건만, 호부상서는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줄줄이 그 내용을 읊었다.

“처음 후궁이 입궐할 제 그 첩지에 따라 사가에 은자 오백 냥에서 금자 백 냥까지의 재물이 내려가며, 이때 패물과 비단은 따로 치옵니다. 내탕금은 황후궁을 기준으로 하되 정5품은 황후궁의 절반, 정1품은 황후궁의 칠 할입니다. 황실의 큰 행사 때마다 내려가는 선물은 또 따로 치며 황상께서 특히 총애하실 경우는 내탕금 외 국고를 자유로이 소비하는 일이 묵인되옵니다. 이로 인해 과거 수많은 폐단이 일었으나 개선은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황제의 큰 신임을 얻어 젊은 나이로 호부의 으뜸 자리에 앉은 표 태준의 보고였다. 그가 말을 이어갈수록 반대하던 대신들은 목을 점점 옷깃 속으로 집어넣고, 현은 보일락 말락 미소를 지었다.

“황실의 대를 잇는다는 미명 하에 이리도 많은 국고가 낭비되고 있소. 혜국이 작금 부국강병하여 태평성대를 이룬다곤 하나 국방은 아무리 튼튼히 해도 모자람이 없는 법. 대승상!”

“예, 폐하.”

옥음 끝에 대승상이 나오면 이미 결정은 난 것이다. 서 이흥이 한 걸음 나서며 허리를 숙이고, 사관은 조금 더 긴장하여 붓 끝에 진한 먹물을 찍었다.

“현재의 후궁 제도를 폐하고 후비 제도를 차용하며, 그로 인해 확보된 예산은 병부로 편성하여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의 수를 늘리고 처우를 개선하는 일에 쓰도록 하시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여인네 패물 살 돈 아껴서 국방을 튼튼히 하겠다는데 반대할 빌미가 없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일으켜 온 후궁 제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나 그 연유는 현과 화연밖에 알지 못하였다. 현은 그다지 깊은 생각을 가지고 한 일이 아니었으되, 결과적으로는 그가 역사에 길이 남는 성군으로 기록된 수많은 연유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겨울날 아침이었다. 두터운 솜옷을 챙겨입은 화연이 현의 손을 잡고 문을 나왔을 때, 신이 난 황자들은 유모들의 만류에도 짧은 다리로 온 정원을 뛰어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놈들, 이리 오지 못할까!”

현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던 1황자가 꽈당,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밭이라곤 하나 겨우 세 살박이에게는 꽤 아프다. 크고 순한 눈에 금세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아이고, 황자마마!”

“종아!”

“그 누구도 일으켜주지 말아라.”

재빨리 1황자를 안아 올리려던 유모상궁도, 그쪽으로 달려가려던 화연도 못박힌 듯 멈추었다. 그 사이 현은 화연의 손을 놓고 걸어가 눈밭에 넘어진 1황자 앞에 섰다.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누군가 일으켜 줄 때까지 기다리면 늦는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아버지를 올려다보던 1황자는 짙푸른 옷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았다. 그리곤 곧 씩씩하게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선 씩 웃었다.

“잘 했구나. 가자.”

그제서야 빙그레 웃은 현이 1황자를 번쩍 안아들고선 추위에 빨개진 뺨에다 용안을 부볐다. 그것을 본 2황자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아장아장 달려온 두 살박이는 넘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는데 성공했다.

“아바마마, 소다도 나나두데여!”

"소자도 안아주세요?"

혀 짧은 소리로 용케도 아바마마를 외친 2황자도 번쩍 들어올려져 현의 왼쪽 팔에 안기었다. 후원으로 돌아 눈에 잘 띄지 않는 쪽문으로 나가니 수수한 가마 두 대가 황실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첩은 좀 걷고 싶습니다, 폐하.”

“눈이 쌓여 힘들 것인데.”

“폐하께서 손을 잡아 주시면 되지요.”

코끝이 빨개져선 생긋 웃는 화연이 어여쁘다. 그래, 손 잡아주면 되지.

"대신 힘이 들면 곧장 가마에 타야 한다."

"예, 폐하."

그리하여 가마에는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는 상궁들이 황자들과 함께 오르고, 황제와 황후는 나란히 손을 잡고선 행렬의 맨 끝에서 걷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두어 시진이나 되었을까. 이윽고 산꼭대기에 도착한 현이 황자들을 안아 흰 눈을 이불처럼 덮은 봉분 앞에 내려놓았다.

“고맙다 인사하거라. 너희를 살린 이다.”

따뜻한 가마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끌려나왔건만, 두 황자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의젓하게 서서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고마뜸미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스승님을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숙이지 말라 배웠기에. 그러나 그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나란히 절을 하시니 두 황자 또한 얼결에 따라 했다. 뒤에 둘러선 상궁들과 그림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술 한잔을 무덤 위에 뿌린 화연이 곱게 인사했다. 현 또한 술잔을 받아 무덤 위에 뿌리며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그 소리가 워낙 작아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무어라 하셨습니까, 폐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입술이 달싹대는 것을 보았는데. 화연은 풀지 못한 의문을 가지고 묘비에 쌓인 눈을 조심스레 쓸었다. 이름이 없었기에 묘비명은 새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운 꽃 한 송이와 검, 그리고 태양이 귀퉁이에 그려져 있을 뿐. 종과 운은 아무것도 모른 채 어머니의 흉내를 내어 봉분 위를 쓸었으나 그것은 곧 손바닥 자국 남기기 놀이로 변했다. 깨끗하던 눈 위에 깜찍한 손바닥들이 단풍잎마냥 뒤덮였다.

그리 간소하나 마음을 가득 담은 제사를 치른 황실의 가족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 산 아래로 내려갔다. 홀로 된 무덤가에는 현이 남기고 간 그리움만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와 섞여 내려앉았다.

“보고 싶습니다, 형님.”

========== 작품 후기 ==========

IF외전 특별편 - 흑운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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