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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16화 (116/152)

<-- [외전 특별편] -->

"소신이 자결할 수 있도록 윤허하소서."

"자결은 또 왜?"

열두 살에 만난 이후로 가장 이상한 모습이었다. 현은 이제 너무 어이가 없어 눈앞의 사내가 가짜 흑운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교합을 꺼내질 않나, 미약 타령을 하지를 않나. 헌데 이제 자결하겠다고?

"폐하의 뜻을 오인하여 항아님과 교합했습니다. 항아님께는 죄가 없으니 소신의 목숨으로 죄를 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현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 지금 들은 말과 이 어이없는 상황을 찬찬히 되씹던 그는 두 사람이 교합하였다는 대목에서 그만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눈앞의 흑운은 언제나처럼 진지한데, 너무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큭큭거리던 현은 간신히 숨을 진정시키곤 흑운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니까, 목하랑 했다고?"

"예, 폐하."

큭큭큭,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소리에 안에서 물이 식기를 기다리고 있던 화연 또한 어리둥절하여 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세요, 폐하?"

"사내들끼리의 일이다. 들어가 있거라."

칫. 무어라 쫑알거린 화연이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자 현이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다.

"좋더냐?"

"예."

"예쁘냐?"

"그렇습니다."

"도대체 왜 그 탕약이 미약이라 생각하였느냐?"

"맥박이 빨라지고 음심이 동하며 피가 뜨겁게 달았습니다. 소신이 아는 미약의 반응과 일치하였습니다."

현은 그가 말한 증상들을 머릿속으로 조합했다. 같은 탕약을 마신 자신은 멀쩡했으니 그 안에 미약 성분은 없다. 그러나 맥박이 빨라지고 음심이 동하며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자신 또한 늘 그 증상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내 보기엔...."

말을 꺼내다 말고 다시 웃음이 터졌다. 큭큭, 바닥까지 두드려 가며 마음껏 웃은 현은 흑운의 어깨를 툭 치고는 간신히 뒤를 이었다.

"네가 그 궁녀를 은애하는 것 같은데."

"불가능합니다."

흑운이 현의 확신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어째서?"

"주군의 지시 없이 감정을 가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융통성이 없을 수도 있나. 현은 새삼 신기함을 느끼며 흑운을 아래위로 훑었다. 하필이면 이런 사내와 만난 궁녀도 참 가엾으나 기왕 이리된 것, 그간 묵묵히 곁을 지켜온 흑운에게 삶을 주고 싶어졌다. 풀잎 같은 여인 하나로 인해 풍요롭게 채워지는, 그런 기적 같은 삶을.

"하면 내가 명하도록 하지. 그 궁녀와 연분 잘 이어보거라.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만 말도록."

"존명."

***

"황제 폐하 듭시오!"

딸랑딸랑, 영롱한 종소리와 함께 환관장이 외치는 소리가 월화궁을 울렸다. 서 귀비를 둘러싸고 있던 궁녀들은 일제히 문 앞에 열을 지어 허리를 숙였다. 그중에는 물론 목하 또한 섞여 있었다. 바닥을 향한 시선에 폐하의 흑룡포, 검은 무복 자락, 초록빛 환관복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물러가 있거라. 부르기 전에는 그 누구도 들어선 안 된다."

"예, 폐하."

두 사람의 지밀과 흑운을 제외한 모든 궁녀는 내실이 있는 전각을 비워야 했다. 마지막으로 복도를 벗어나던 목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묵묵히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흑운을 보았으나 그에게는 어떠한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목하야, 무슨 일 있어?"

그날 밤. 목하와 같을 방을 쓰는 란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무수리 시절부터 동고동락해온 두 궁녀는 이제 독방을 써도 될 연차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한 방을 고집했다. 너희 대식하는 거 아니냐며 주변 궁녀들이 장난스럽게 물어 올 만큼 친밀한 사이. 허니 근래 유난히 이상해진 목하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리라.

"무슨 일은. 얼른 자자."

"너 내일 비번이잖아. 뭐 할 거야?"

"할 게 뭐 있나. 잠이나 푹 잘 거야."

"흐응……."

"곤하다. 얼른 불 꺼."

목하가 재촉하자 그녀를 수상한 듯 내려다보고 있던 란이 마지못해 등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이불을 말고 누운 목하는 동무에게 들키지 않게 아주 작은 한숨을 내쉬었으나 가슴에 얹힌 돌멩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해야 하나,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하나. 그리 뒷모습만 바라보던 사내에게 안긴 지 오늘로 닷새째. 사내는 평소와 똑같이 황제 폐하를 따라 월화궁을 드나들었으나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역시 한순간 유흥거리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 뜨거운 눈빛, 서툴고 다정한 손길, 방으로 돌아와 직접 옷을 입혀주던 세심함까지도 유흥거리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또로록 굴러 베개로 스며들었다.

한참을 그리 울다 보니 이번엔 배가 고프다. 망할 배. 이 와중에도 할 일은 하는구나. 눈물을 쓱쓱 닦고 일어난 목하는 등을 보이고 누운 동무를 살그머니 불러 보았다.

"란아, 자?"

드르릉, 대답 대신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월화궁엔 따로 수라간이나 생과방이 없고, 대신 수라간에서 날라온 음식을 데우거나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반빗간이 있었다. 거기 가면 주전부리가 남아 있으리라.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와선 생각보다 찬 밤공기에 바르르 떨며 반빗간을 향하던 그때.

"읍!"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 하나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 당겼다. 황궁에서는 가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궁녀들이 있다 들었다.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 한밤중에 끌려나간다고. 이번엔 제 차례인가.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쳐 보지만 여인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입이 틀어막힌 목하는 그대로 그 손에 의해 컴컴한 나무 사이로 끌려 들어갔다.

"어디 가십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그녀가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바닥까지 내려앉았던 심장이 다시 머리 꼭대기까지 치닫으며 거세게 쿵쾅거렸다. 발버둥이 멈추자 그때까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이 힘을 풀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무사님…?"

"흑운이라니까."

때마침 구름을 벗어난 반달이 나무 사이로 새하얀 빛을 뿌렸다. 믿을 수 없어 커다랗게 뜬 목하의 눈앞에 선 사내는 틀림없는 흑운이었다. 어떻게,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는 분명히 목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달빛에 비친 목하의 얼굴을 응시하던 흑운이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또 우셨습니까."

세상에. 목하는 그제야 지금 제 몰골이 어찌 보일지 깨닫고는 다급히 얼굴을 가렸다. 한 시진이 넘도록 울었으니 눈은 퉁퉁 붓고 피부는 거칠어진 데다 누워 있던 머리는 산발이겠지. 게다가 침의 차림. 아, 창피해. 환관이 없고 궁인의 수가 적은 월화궁이라 방심한 것이 실수였다.

"보지 마세요."

"왜 우셨습니까."

목하는 얼굴을 가린 채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말 못 해. 당신이 나를 봐 주지 않아서 슬펐다고, 서운했다고 어떻게 말할까. 다행히 흑운은 그녀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겉옷을 벗어 한 겹 얇은 침의 위에다 걸쳐줄 뿐.

"아직 밤공기가 찹니다."

걱정해주는 건가? 목하는 긴가민가하며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빼꼼 내민 눈앞에 여전히 딱딱한 얼굴의 흑운이 보였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웅얼거리는 물음을 용케도 알아들은 흑운이 얼굴을 가린 손을 잡아 내렸다. 왜 자꾸 얼굴을 가리는 것인지. 손 치웠더니 고개는 또 왜 숙이는 것인지. 흑운은 한 손으로 자그마한 턱을 잡아올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게 했다.

"걸어왔습니다."

"아니, 왜 오셨냐구요."

"항아님 보러 왔습니다."

========== 작품 후기 ==========

연참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내일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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