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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17화 (117/152)

<-- [외전 특별편] -->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웅얼거리는 물음을 용케도 알아들은 흑운이 얼굴을 가린 손을 잡아 내렸다. 왜 자꾸 얼굴을 가리는 것인지. 손 치웠더니 고개는 또 왜 숙이는 것인지. 흑운은 한 손으로 자그마한 턱을 잡아올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게 했다.

"걸어왔습니다."

"아니, 왜 오셨냐구요."

"항아님 보러 왔습니다."

미쳤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벌어진 입술에 거칠고 뜨거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작은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며 목하의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 입안을 사정없이 헤집는 혀가, 방금 그의 믿지 못할 말이 진실이었음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떨어져 나가던 입술이 다시 앞으로 다가와 퉁퉁 부은 눈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러니 얼굴 좀 가리지 마십시오."

"지금... 부어서. 머리도 엉망인데."

"예쁩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록 표정도, 목소리도 그가 하는 말과는 전혀 맞지 않았지만.

"지금, 여기서 저 기다리신 거예요?"

"예."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언젠가는."

"오늘 안 나왔으면요?"

"내일 오면 됩니다."

내일 오면 된다니. 설마. 목하는 그 날로부터 닷새가 지났음을 다시 상기했다. 또한, 그동안 밤에 처소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도.

"어제도…. 오셨어요?"

"예."

"그제도?"

"예."

"그 날부터 쭉? 매일 밤?"

"예."

"어떻게요? 폐하의 호위잖아요."

"윤허 받았습니다."

아무 맥락도, 기승전결도 없는 이 독특한 어법에 익숙해져야 할 모양이다. 목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흑운의 얼굴을 손끝으로 만졌다.

"왜 말을 안 했어요? 낮에는 왜 모른 척했어요?"

"황명입니다."

"낮에 모른 척 하는 게 황명이라고요?"

"황명의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아시는거예요? 그러니까 음, 우리, 우리……."

우리, 뒤에 붙일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목하가 더듬거렸다. 우리 사이를 아시느냐고 묻고 싶은데 그 전에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지도 모르는 까닭이었다.

"우리?"

"어…. 저기, 우리…. 무슨 사이예요?"

"아."

그녀의 물음에 흑운은 현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황제께선 마치 스승이라도 되는 듯 우쭐거리며 흑운에게 묻지도 않은 남녀 간의 감정, 특히 심해보다 복잡한 여인의 마음에 대해 조목조목 알려 주었더랬다. 정인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까지. 정작 자신도 그것을 몰라 귀비가 도망까지 쳤던 일은 까맣게 잊으신 모양이었다.

"항아님께선 저를 은애하십니까?"

"네!"

저도 모르게 아주 당당하게 대답해 놓고 스스로 창피하다. 제발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만 바라는 목하에게 담담한 목소리가 말했다.

"정인입니다."

"네?"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앞뒤 연결 없이? 목하가 멍하니 반문했으나 흑운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저 또한 항아님을 은애합니다. 서로 은애하는 남녀를 정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까지 달콤한 말을 하면서도.

"저를요? 흑운 님이? 왜요? 언제부터요?"

흑운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부터냐, 왜냐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이 궁녀가 거슬리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 되었으나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른다.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흘깃 스치던 시선은 어느 날인가부터 아주 대놓고 자신을 향했다. 그러다 이 궁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을 때 풀잎같기도, 들꽃같기도 한 향기가 은은하게 끼쳐들었고. 수많은 궁녀 중 유독 목하야, 하고 불리던 궁녀의 이름을 저도 모르게 되씹던 기억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가리켜 은애라 칭하신 황제께서도 그 시작은 알지 못하시었다.

"항아님은 언제부터십니까."

결국 흑운은 대답 대신 되묻는 쪽을 택했다. 사실은 그 또한 궁금했다. 누군가의 생각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기에 자신이 궁금하다는 사실조차 몰랐지만.

"저는... 흑운 님이 저를 도와주셨을 때부터...?"

"제가 도와드렸단 말입니까?"

"예전에 귀비마마 첩지 처음 받으실때요. 제가 어지러워서 쓰러질 뻔 했는데 잡아주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덧붙이는 목하의 물음 뒤로 흑운이 기억을 더듬었다. 첩지와 궁을 하사받은 귀비께 궁인들이 인사를 올리던 날에, 끝에 있던 궁녀가 비틀거리기에 등에 손을 지탱해준 일이 떠올랐다. 소동이 일어나 주군의 기분을 언짢게 할까봐.

이 여인에게는 그 의미가 조금 달랐던 모양이지만, 아무 생각도 없었음을 굳이 말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말 대신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는 본능에 충실하게도 눈앞에서 오물거리는 자그마한 입술을 다시 머금었다.

"이제 가야 합니다. 들어가십시오."

가쁜 숨을 내쉬는 목하를 어렵사리 떼어낸 흑운이 그녀를 떠밀었다.

"벌써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이 시각, 여기에."

아쉬운 마음에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목하는 세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며 다시 처소로 향했다. 배가 고팠던 일 따위는 까맣게 잊은지 오래였다.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기척마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멀어진 뒤에야 흑운은 다시 자신이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닷새간의 긴 기다림 끝에 아주 잠깐의 입맞춤만을 전하였으나 모자라지는 않았다.

"만나고 왔느냐?"

흑운이 침전에 들어서자마자 기대에 찬 하문이 날아왔다.

"예, 폐하."

"무어라 하더냐?"

"무슨 사이냐 물으시기에 정인이라 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전부 말씀드려야 합니까?"

흑운은 말 그대로 전부 말씀드릴지, 중요한 부분만 말씀드릴지 질문한 것이었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어쩐지 눈치가 보인다. 남의 연애질이 이리도 재미있는 것을 보아하니 통속소설 좋아하는 화연에게 물이 든 모양이었다. 기실 몇번 함께 읽어보니 그것 또한 참으로 재미있지 않았던가. 현은 더 묻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그건 아니고. 아, 내일 출궁하여라."

"예, 폐하."

무언가 시키실 일이 있으시겠거니. 황명을 새길 준비를 하던 흑운에게 내려진 것은 전혀 뜻밖의 명이었다.

"진시에 북서쪽 궁인들의 출입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그 궁녀 나오거든 함께 저자에 좀 다녀오너라. 궐문 닫히기 전에 돌아오거라."

"그리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밥을 차려서 떠먹여줘도 뱉아 버리는구나. 현은 화연과 함께 열심히 세운 계획이 어그러질 생각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림자 다섯을 더 배치하고 가거라. 황명이다."

"존명."

황명이라는데는 더 댈 말이 없다. 고개를 숙인 흑운 앞에 짤그랑, 남빛 비단으로 만들어진 전낭 하나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아이의 눈길이 세 걸음 이상 머무는 물건은 전부 사 주어라. 선물 안겨주는 사내를 마다할 계집은 세상에 없다."

"예, 폐하."

잘난 체 하며 두둑한 전낭을 넘겨준 황제 또한 연애에 있어서는 거의 재능이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흑운은 그 말 또한 황명으로 인식하고 전낭을 받아 품에 넣었다. 그 서투른 모의가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두 사내 모두 몰랐던 셈이다.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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