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특별편] -->
목하는 동당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이불을 발로 차느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은애한댄다, 정인이랜다. 그리 배게에 머리를 찧어가며 밤을 꼴딱 새우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든 목하를 란이가 두들겨 깨웠다.
"목하야, 얼른 일어나봐. 귀비마마께서 찾으셔."
"우웅... 나 비번인데에."
"알아, 아니까 얼른 일어나. 빨리 너 데려오라셔."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간신히 일어난 목하는 란이가 건넨 물수건으로 대강 얼굴을 닦고 머리를 빗었다. 모처럼 비번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귀비마마, 목하 들었사옵니다."
"얼른 들어와."
내실로 들어선 목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귀비께선 왜 저리 싱글벙글 웃고 계시고, 어찌 몇 벌이나 되는 옷이 널따란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인지.
"오늘 비번이지? 잠시 궐밖에 심부름 좀 다녀오렴."
"예, 마마. 어찌 하면 되옵니까?"
"책방에 가서 새로 나온 통속소설 좀 사와. 궁에서 나온 것 들키면 안되니까 평복하고. 자, 어느 것이 마음에 들어?"
신이 난 서 귀비가 이것저것 목하의 몸에 대어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남의 연애에 참견질하는 것이 이리도 재미있을줄 알았더라면 진작 하였을 텐데.
"마마, 이런 것은 입을 수 없어요. 제 옷을 입고 가겠습니다."
황궁 복식이 아닌, 여염집 규수가 입을 만한 옷가지들이었으나 그 옷감부터가 진귀한데다 귀퉁이 자수마저 침방 상궁의 솜씨다. 이런 것을 입을 수 없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목하는 귀비께서 웃전의 명을 거역하느냐, 한 마디를 하고서야 울상이 되어 고운 소매에 팔을 끼워넣었다.
"낯이 어찌 이리 거칠어. 이것도 좀 바르고."
"제꺼, 제꺼 바를께요!"
"가만히 있어 좀."
이제 서 귀비는 대놓고 목하를 경대 앞에 끌어다 앉혔다. 인형놀이를 하듯 이것저것 두드려 바르고 입술을 도홧빛으로 물들인 뒤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솜씨를 감상해 본다. 그다지 특출난 부분은 없으나 또한 모난 곳 없는 얼굴이라, 조금만 손을 대어도 금세 몰라보게 예뻐지니 무척이나 꾸미는 보람이 있었다.
"봐, 조금만 손을 대니 이리 어여쁜 것을."
잠을 못자 푸석하던 피부는 촉촉한 미안수로 생기를 머금고, 잘 다듬어진 눈썹은 목탄으로 덧그려졌다. 연지를 두드린 뺨과 입술은 수줍은 도화빛 미소를 피워내고 있었다. 목하가 경대에 비친 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더더욱 만족한 서 귀비는 짝짝, 손뼉을 치며 목하를 문 밖으로 밀어내었다.
"다녀와. 책 천천히 사 오고."
북서쪽 문으로 나가. 서 귀비가 방글방글 웃으며 덧붙이자 목하는 어리둥절하게 예를 갖추고는 서둘러 북서쪽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월화궁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눈이 동그래져서 달려온 란이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마마께서 뭐라셔? 이건 다 뭐야?"
"몰라. 귀비마마께서 저자 심부름 시키셨어."
"이 비단옷에, 어머, 분단장도 했네. 너무 예쁘다."
란이는 오랜 동무를 이리저리 돌려세우며 연신 감탄했다. 그러나 한켠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의문은 감추지 못하였다.
"저자 심부름 가는데 이리 꽃단장을 해주셨다고?"
"응. 아, 나 얼른 다녀올게. 뭐 필요한거 있어? 오는 길에 사 오게."
"난 됐어. 조심해서 다녀와."
온갖 수선을 떠는 란이에게서 벗어난 목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람이 지나지 않는 길만을 골라 북서문에 다다랐다. 문지기에게 명패를 보여주고 나간 황궁 바깥은 다른 세상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멈춰선 그 곳에, 그가 서 있었으므로.
"흑운 님...?"
늘 보던 무복 차림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건장한 사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생각했을 뿐. 그 사내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예의없게도 몸을 숙여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목하의 입이 벌어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흑운을 불렀다.
"갑시다."
대답 대신 아주 잠깐 목하를 들여다보던 그는 차가우리만치 간단하게 한 마디만을 던지고선 뒤돌아 성큼성큼 걸었다. 낯설지만 무복보다 잘 어울리는 푸른 원령포삼이 걸음에 따라 크게 펄럭이며 특유의 묵직한 체취를 뿌린다.
그 체취를 따라 종종걸음치던 목하는 얼마 가지 못해 뛰어야만 했으나 흑운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흘긋 뒤를 돌아본 흑운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를 기다려 주는 것 같았다.
"왜 그리 빨리 걸어요!"
힘겹게 흑운을 따라잡은 목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항의했다.
"갑시다."
또, 대답은 없었다. 그저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툭 던져놓고 조금 느려진 걸음으로 앞을 향할 뿐.
"책방에 가야 해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할 말을 찾지 못한 목하는 겨우겨우 이 한마디만을 꺼내놓고 살짝 흑운을 올려다보았다. 건조한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를 마주했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왜 자꾸 대답없이 앞만 보고 가는거지. 분단장을 싫어하나? 못생겨 보이나? 정인이라더니. 저 태도는 뭐지? 어제 했던 말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도중, 무언가를 발견한 목하가 황급히 흑운의 팔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흑운 님, 거기!"
그러나 한발 늦었다. 질 좋은 가죽신은 이미 길 한가운데에 고인 물웅덩이를 찰방하니 밟고 난 후였다.
"... 아."
흑운이 눈썹을 아주 살짝 까딱하자 목하가 화들짝 놀라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이번엔 화가 난 것 같았다. 허락도 없이 귀한 옷을 구겨지게 만들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 손이 닿는 것이 싫어서? 시무룩하게 바닥을 보며 다시 걸음을 떼놓던 목하에게 불쑥, 푸른 소매가 내밀어졌다.
"왜 놓습니까."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싫지 않습니다."
싫어 보이는데. 분명히 싫어 보이는데. 누가 봐도 싫은 얼굴인데. 목하는 혼란스러운 와중 그의 팔을 덥석 잡지는 못하고 소심하게 소매 끝자락만 붙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분명히 보았다. 흑운이 아까보다 더 불쾌하게 눈썹을 구기는 모습을.
***
북서쪽 문에서 고운 여인이 팔랑팔랑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는 어느 팔자좋은 후궁이 나들이 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뒤따르는 수하가 아무도 없기에 이상하다 느끼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가 한 발짝 앞까지 다가왔을 때에야 흑운은 지금 나온 여인이 목하임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숙여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고운 모습이었음은 분명했다. 정신을 차리고 급히 돌아선 그는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제어하느라 용건만 간신히 꺼내놓을 수 있었다.
"갑시다."
앞만 보고 걷다 보니 무언가 허전하다. 흘깃 뒤를 돌아보고 걸음을 멈추자 목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달려와 숨을 할딱대었다. 왜 그리 빨리 걷냐며 불만을 표하는 얼굴마저 곱다. 헌데 그 학학대는 숨소리와 살짝 벌어진 입술이 문제였다. 그녀와 보내었던 밤이, 꼭 저렇게 할딱대던 그녀의 숨결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 갑시다."
가라앉혀야 한다. 후우. 심호흡을 해 보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 목하의 나신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여인은 오늘따라 왜 이리 고운 것인가. 바로 앞에 있는 길조차 보지 못하고 무작정 걷던 그의 팔이 뒤로 당겨지더니, 옷 위로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흑운 님, 거기!"
음심에 미쳐 실수를 했다. 어릴 적 진검을 놓쳐 동료의 팔을 떨어뜨릴 뻔한 이후로 실수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스스로 당황하여 눈썹을 조금 까딱하자 여인이 화들짝 잡고 있던 팔을 놓아버린다. 팔에서 사라진 체온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젖어버린 한쪽 발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실 젖은지도 몰랐다. 손이 닿았다 떨어진 팔에서부터, 열기가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기 때문에.
"왜 놓습니까."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싫지 않습니다."
방금은 잘만 잡더니 기껏 내민 팔은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마냥 소매 끄트머리만 살며시 잡는다. 도대체 왜. 흑운은 환궁하면 폐하께 여쭈어야겠다 생각하였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방금처럼 덥석 잡아주지 않는 목하가 불만스러웠다. 허나 왜 아까처럼 잡아주지 않냐 따질수도 없는 일. 그는 그렇게 어정쩡하게 소맷자락만을 맡긴 채로 목하의 걸음에 맞추어 걸었다.
이 속도로 어느 세월에 저자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하지만 뭐 어떠랴. 바람이 실어오는 풀잎 냄새가 이다지도 향기로운데. 그는 이 길이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라며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걸음을 늦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