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특별편] -->
"어디 다녀와?"
살금살금 처소로 들어오던 목하가 란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멈추었다.
"안 잤어?"
"어디 다녀오냐고."
"배가 고파서…. 반빗간 가서 주전부리 좀 먹고 왔어."
거짓말. 란이는 시퍼렇게 타오르는 투기심을 동무에 대한 배신감으로 포장하며 자신을 속였다. 투기가 아니야. 오랜 동무에게까지 거짓을 말하는 네가 잘못한 거야. 들키면 목이 베어질 너와 그 사내를 걱정하는 거야.
"얼른 자. 내일부터 짐 꾸려야 하잖아."
정인과의 밀회로 지쳐버린 목하는 포근한 이불에 싸이자마자 금세 새근새근 잠이 들었으나 란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세상 다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목하를 내려다볼 사내의 눈빛이, 그와 연모를 속삭일 목하의 목소리가 떠올라 미칠 것 같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언감생심 바라볼 수도 없었다. 이미 홀로 머리를 올리며 황제의 여인이기를 맹세한 궁녀에게는 모든 사내가 있을 수 없는 존재였으나 그는 더욱 그랬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움츠러드는 위압감이라든가, 아주 가끔 들을 수 있는 저음은 그를 종종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느끼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황제 폐하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최측근이란 벼슬이나 품계로 따질 수 없을 만치 높디높은 자리. 한낱 궁녀가 바라보아 무엇한단 말인가.
허나 아니었다. 그 또한 여인을 품을 수 있는 사내였던 것이다.
"왜……."
왜, 하필이면 너야. 왜 내가 아니고 너야.
어느새 란이의 머릿속에서는 목하가 아닌 자신이 살금살금 처소를 빠져나가 어느 인적 드문 오솔길로 들어섰다.
길게 드리워진 달그림자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내의 품에 안겨든다. 둘만의 밀어를 속삭이던 입술이 뜨겁게 엉겨든다. 다급한 손이 앞섶을 헤치고 허겁지겁 젖가슴을 찾아 입에 넣는다. 새하얀 침의가 짓이겨진 풀에 초록빛으로 물든다. 황제를 지키는 일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던 사내는 한 마리 짐승이 되어 허벅지를 벌리고 비부를 어루만진다. 애달픈 숨결이 밤하늘 아래 흩어진다.
침의 위로 제 몸을 어루만져 보지만 가질 수 없는 사내에 대한 열망은 가라앉질 않았다. 란이는 이미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치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사내의 것과 전혀 다른 매끈한 손가락조차 이미 달아오른 몸에는 아슬아슬한 쾌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비부를 희롱하며 한참 동안 그 사내를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하아, 무사님……."
절정의 순간 저도 모르게 신음 끝에 그를 찾고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닷새의 시간이 바쁘게 흘러갔다. 한 달간 황제와 함께 여름 행궁에 다녀올 귀비 마마를 위한 막바지 준비였다.
그동안 목하는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흑운은 황제께서 월화궁에 다녀가실 적에 스치는 옷자락밖에 볼 수가 없었고, 어찌 된 일인지 란이와의 사이도 서먹서먹해진 까닭이었다.
"이번에 마차 시중은 네가 들렴."
반가운 말과 함께 은근히 눈짓하는 귀비 마마가 아니었다면 그 날도 역시 우울했으리라. 본디 황제와 후궁은 같은 마차에 탈 수 없음이 법도이나 폐하께서 그런 시시한 법도를 지키실리 없다.
마차에 동승하는 수하는 한 명. 그러나 두 분께서 같은 마차를 타신다면 그 수하는 두 명. 틀림없이 흑운 님이 함께 타시겠지. 허나 그리 생각한 이는 목하만이 아니었다.
"좋겠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처소에 돌아온 란이가 던지듯 말했다.
"뭐가?"
"이번 행궁 말이야. 너 혼자만 마차 탈 거 아냐?"
무사님과 함께. 그녀는 뒷말을 씹어 삼켰으나 그 말속에 든 가시를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모처럼 좋았던 기분을 망친 목하는 바르려고 꺼낸 미안수를 탕 소리 나게 내려놓고 란이를 노려보았다.
"너 좀 이상하다?"
"내가 뭘."
"계속 말 툭툭 던지고. 내가 말 걸면 무시하고. 너 오늘 나랑 처음 말 섞은 거 알아? 그런데 뭐? 혼자 마차?"
"아, 혼자는 아니지."
저도 모르게 빈정대던 란이가 흠칫 놀라 입을 닫았다.
"무슨 뜻이야?"
"됐어. 잠이나 자."
그 말을 끝으로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웠으나 잠은 자지 못했다. 목하는 란이가 무언가 눈치챈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란이는 못난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투기심 때문에. 그리 새벽녘까지 뒤척이던 목하도, 란이도 다음날 퀭한 얼굴로 짐을 꾸려 처소를 나섰다. 둘 다 늦잠을 잤기에 발걸음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봐."
밤새 죄책감에 시달린 란이가 헤어지기 직전 조심스레 건넨 말에 목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러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피로가 쌓인 머리로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느라 듣지 못하였을 뿐.
란이는 자신이 완전히 무시당했다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더 따질 정신도, 시간도 없었다. 서둘러 행렬의 뒤편으로 가던 그녀는 저쪽에서 오고 있던 말과 부딪힐 뻔하여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꺄악!"
"워, 워."
히이잉,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다.
"조심하십시오."
높낮이가 거의 없는 목소리로 주의를 준 사내는 란이가 안전하게 행렬에 합류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천천히 말을 몰아 가장 크고 화려한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뒤로 수많은 무사가 검은 무복을 휘날리며 따랐으나 란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내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준 것이다.
"무얼 그리 멍하니 있어?"
"아, 아니."
작게 핀잔하는 동료의 말에 란이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흑운은 그 찜찜한 시선이 더는 느껴지지 않음에 안도하며 그림자들을 행렬의 곳곳에 배치했다. 마차에 드리워진 휘장 너머로 정인의 기척이 느껴진다. 함께 타지 않아 서운해할까.
그러나 황궁을 벗어나는 것은 평소보다 더욱 큰 주의를 필요로 하는 일. 여인으로 인해 집중이 흐트러져서는 안 되었다.
"다 되었으면 출발하지."
마차와 가장 가까이 있는 흑운에게만 간신히 들릴 옥음이었다.
"예, 폐하."
달그락,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무척이나 불편하게 앉아 있던 목하도 흑운이 답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귀비마마야 모시는 상전이니 괜찮다 치고, 폐하와 한 공간이라니. 게다가 옆에 앉은 이는 흑운이 아니었다. 전혀, 비슷하지도 않았다.
"저…. 환관장님."
쭉 이렇게 가시는 거예요? 물어보려던 목하는 그마저 묻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융통성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분이시라지. 그나마 자그마한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한 가닥 위안이었다.
호위가 이렇게 많았구나. 웬만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림자들이었기에, 흑운과 같은 차림을 한 수십의 사내들이 말을 타고 행렬을 둘러싼 모습은 생소하기만 하였다. 쪽창을 통해 보이는 무사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목하가 혼자 방긋 웃었다.
같은 옷에 같은 검을 찬 사내들이 이리도 많건만 개중 흑운 님이 가장 잘났다. 심지어 바로 마차 옆에 있었다. 그녀가 부르면 들을 수 있을 만한 거리에. 그리 홀로 두근거리던 목하의 눈앞에 손 하나가 쑥 들어오더니 매정하게 문을 닫아버리고, 그 사이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