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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26화 (126/152)

<-- [외전 특별편] -->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는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정도에 혼절해버릴 줄은 몰랐다는 쪽이 맞겠다. 여인이란 본디 이렇게 약한 존재인가, 아니면 이 여인이 유달리 약한 것인가.

"항아님."

작게 부르며 품에 안은 여인을 흔들어 보지만 깨어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난감함이라는 단어를 이토록 뼛속 깊이 새긴 적이 있었나. 흑운은 일단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목하를 그 위에 뉘었다. 이제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혀야... 하는데.

"... 항아님."

방금까지는 달빛이 굉장히 어두웠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이리 환하게 쏟아질까. 검은 무복 위에서 하얀 피부가 유난히 대비되기 때문인가. 그는 눈치보듯 다시 목하를 살며시 불러 보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만져 볼까. 차가운 이성과 짐승같은 본능이 수없이 부딪혔다 떨어진다. 본능이 반쯤 이겼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행위로 발개진 유두 끝에 혀가 닿는 순간 완전히 이겼다.

제대로 미쳤군. 한가닥 남은 이성이 그리 생각하였으나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딱 한번만 더. 이미 체액으로 질척해진 허벅지를 벌리고 성난 양물을 욱여넣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어갔다 나왔는데도 빡빡하던 옥문이건만 지금은 쉽게 열렸다. 그는 그 사실에 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원하는 만큼 빠르게 추삽질을 했다.

온몸에 차오른 욕정과 소유욕이, 절제되지 않는 몸을 제멋대로 움직인다. 달빛 아래 흔들거리는 뽀얀 젖가슴을 손에 가득 쥐고 터뜨려버릴듯 마음껏 세게 주무르고 몸 곳곳에 피멍과도 같은 흔적들을 새겨넣었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하던 파괴적인 욕망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정인의 몸 속에서 폭발했다.

"하아, 하...."

잠시 숨을 몰아쉬던 흑운은 그제서야 여전히 눈을 감은 목하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편안해 보이는 얼굴. 쾌락 뒤에 몰려온 엄청난 자괴감이 그를 뒤덮었다.

"... 빌어먹을."

홀로 머리를 쥐어뜯어 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흑운은 일단 주변의 기척을 살핀 후 상의를 벗어 목하를 덮었다. 빠르게 냇가로 달려가 영견에 물을 적셔가지고 돌아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사과한 후 타액으로 범벅된 몸과 아직도 체액이 흘러나오는 비부를 닦아내고 옷을 챙겨 입혔다. 축 늘어진 몸을 안아올렸으나 목하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한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정리해준 그는 왔던 길을 되짚어 깊은 숲 속을 벗어났다. 목하가 하룻밤을 보낼 막사라면 이미 초저녁에 파악해 두었다. 중간중간 느껴지는 그림자들은 흑운을 알아보았기에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으나, 막사 바로 앞에서 마주친 궁녀는 달랐다.

"무사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쓰러져 있기에 모셔왔습니다."

대강 대답하고 안으로 한발짝 들어서려던 흑운의 앞을 궁녀가 가로막았다.

"뭡니까."

"그, 금남의 구역입니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수상하다. 기척을 숨기지 않았을 때의 그 앞에서는 웬만한 사내들은 물론, 난다긴다 하는 고관대작들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헌데 한낱 궁녀가 당당하게 제 주장을 하다니. 흑운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궁녀가 아까 목하를 쫓아왔던 여인임을 알아차렸다.

"비키십시오."

그러면서 아주 조금 흘린 살기에 궁녀가 흠칫 얼어붙었다. 그 사이 흑운이 안으로 들어가 빈자리에 목하를 내려놓고 나왔으나 궁녀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무사님."

란이가 마지막 용기를 짜내어 그를 불렀으나 흑운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얼음장같은 반응에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결국 해서는 안될 말을 꺼내들었다.

"궁녀가 외간 사내를...."

뒷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기가 란이를 뒤덮었으므로.

잠시 그리 말없는 경고를 한 흑운은 그대로 황제의 처소 바로 옆에 붙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도대체 내일부터 항아님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할 것인가. 그의 머릿속을 채운 크나큰 고민은 이상한 궁녀의 생각을 멀리 날려버린지 오래였다.

***

행렬은 아침 일찍부터 막사를 걷고 출발 준비를 했다. 간단한 아침을 먹은 후 마차 앞에서 서 귀비와 황제를 기다리던 목하는 저쪽에서 말을 타고 오는 흑운을 발견하고는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말을 탄 모습도 어쩜 저리 멋있으실까. 내리쬐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 뒤에 수십의 무사들을 거느린 그는 검은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빛이 났다.

그리 생각하는 이는 아마 목하만이 아닌 것 같았다.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궁녀들 역시 몰래몰래 흑운을 훔쳐보고 있었으니. 목하처럼 고개를 푹 숙인 란이만을 제외하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목하는 다른 궁인들보다 한발 늦게 허리를 깊이 숙이다 환관장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고야 말았다.

여덟 마리의 발이 일제히 말발굽을 차올림과 동시에 마차가 출발하고, 뒤쪽 구석에 앉은 그녀는 옆에서 마차를 호위하고 있을 흑운을 보기 위해 쪽창을 아주 조금 열었다.

헌데 느낌이 이상하다. 흑운이 다시 닫아버릴 각오를 하고 연 창이었는데, 그는 그녀를 아주 흘깃 보고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정면을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아주 딱딱한 눈빛으로.

잘못 보았겠지. 처음에는 그리 생각하였더랬다. 그러나 행궁까지 가는 사흘간의 여정 내내 흑운은 그녀를 바라보지도, 찾아오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완전히 남이 된 것처럼.

급작스러운 변화에 처음에는 당황했다. 그 다음은 불안했고. 그 다음은 화가 났다. 매일매일 변해가는 목하의 기분을 가장 먼저 눈치챈 이는 흑운도, 서 귀비도 아닌 바로 란이였다.

그럴 수밖에. 매일 밤 또 목하가 막사를 빠져나갈까 감시했고, 그녀가 마차 밖으로 나올 때면 시선을 떼지 않았으니.

"당도하였습니다, 폐하."

사흘 뒤. 마차를 멈춰세운 흑운이 바깥에서 보고했다.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궁인들의 얼굴은 저마다 환해졌으나 목하만은 아니었다.

"나 욕간 좀 준비해 줘."

"예, 마마."

짐을 풀기도 전에 서둘러 목욕간으로 향하던 목하의 걸음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도중에 멈추어 섰다. 저쪽에서 수하 무사인 듯한 사내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리며 걸어오는 흑운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이내 무사가 고개를 꾸벅해 보이고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흑운의 시선이 목하를 향했다.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마주친 눈길이었다.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웃어보였으나 그는 마주 웃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것까진 괜찮았다. 아무리 황제께서 묵인하고 계시다 한들, 황궁에는 엄연한 법도라는 것이 있으니.

허나 못볼 것을 보았다는 느낌으로 휙하니 고개를 돌리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곁을 스쳐 지나치는 것은 너무했다.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하는 것이 분명한 태도. 그 태도는 기어이 목하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목하야, 왜 울어?"

목욕간 앞에서 마주친 란이의 물음에도 눈물은 그치기는커녕 더 서럽게 흐른다. 역시 너무 밝혔던 것일까. 음탕한 여인이라 정이 떨어져 버린 것일까.

"어찌 그리 울어, 말을 해 봐."

"란아, 끅, 흑...."

조금 서먹해지긴 하였으나 가장 친한 동무임에는 틀림없다. 목하는 란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끅끅대며 한참을 울었다.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던 란이는 그날 이후로 목하가 밤에 빠져나가지 않고 잠만 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간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웠다는 것도.

그럼 그렇지. 란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눈이 반짝 빛났다.

"예 앉아 쉬어. 욕간 준비하러 왔지? 내가 할께."

"끅, 고마워. 아니, 같이 하자. 괜찮아."

"정말 괜찮겠어?"

"그럼."

목하는 한결같이 자신을 생각해 주는 동무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 마음을 놓으며 빨개진 눈가를 소매로 슥슥 닦았다.

"내가 물 길을테니까, 너는 불 때고 있어. 알았지?"

"응. 흑, 고마워."

불 때는 일보다는 물 긷는 일이 훨씬 힘들다. 황궁에서야 무수리가 하던 일이지만 행궁에는 무수리가 따라오지 않았으므로 당분간 궁녀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을 대신 해 주겠다는 동무의 말이 고맙기만 한 목하의 마음에서 한가닥 앙금마저 날아갔다.

우물가에 간 란이가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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