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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28화 (128/152)

<-- [외전 특별편] -->

"내가 무사님 말을 왜 들어요."

그리 대답하면서도 목하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단단하게 일어선 중심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옷 위로 밀착되어 엉덩이골을 적나라하게 누르고 있었으므로.

흑운 또한 심장이 쿵쿵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짐승도 이런 짐승이 없다. 이 상황에 또 그 생각이 나다니. 그는 쥐고 있던 목하의 손목을 풀어주며 말했다.

"좀. 들어주시면 안 됩니까?"

귓가에 묵직하게 울리는 저음이 왜 이렇게 매력적일까. 자존심 상하게.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마개를 힘주어 뽑아내고 서둘러 몸을 세우며 돌아서던 그녀가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아야!"

"괜찮으십니까?"

서두르다 그만 흑운과 부딪힌 머리에서 얼얼한 통증이 올라온다. 똑같이 부딪혔건만 울상이 된 목하와 달리 흑운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조금 걱정스러운 듯한 눈빛과 그녀의 머리를 향해 올라오는 손 말고는.

"괜…. 찮아요. 어어!"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서던 목하가 욕간통 난간에 걸려 휘청거렸다. 게다가 물이 튄 바닥이 심하게 미끄럽기까지. 어어, 하며 눈을 질끈 감았으나 물에 빠지지는 않았다. 다만 욕간통에 거꾸로 빠지는 상황과, 한쪽 팔로 허리를 감싸 안은 흑운이 바로 지척에서 그녀를 응시하는 상황 중 어느 쪽이 더 난감한지는 알 수 없을 뿐.

"위험하지 않습니까."

지금 위험한 게 누군데. 목하가 속으로 외쳤다. 하체에 닿은 남성이 분명 아까보다 더 단단해진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으므로. 어찌나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는지, 얇은 여름옷 사이로 굵은 핏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위험한 사내가 천천히 다가와 입술을 겹쳤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한 가닥 자존심 덕에 허겁지겁 그를 받아 삼키는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입."

쉽사리 심알을 내어주지 않는 목하에게서 살짝 입술을 뗀 흑운이 명령하듯 중얼거렸다. 나른하게 내려앉은 눈으로 그녀를 핥으며.

유혹에 넘어갈까, 입을 앙다문 채 눈까지 감아버린 목하의 왼쪽 가슴에 뜨거운 손길이 불쑥 파고들었다.

"아흣!"

묵직하게 쥐어짜는 통증에 살짝 신음이 새어 나오는 순간, 입술을 살짝 떼고 있던 흑운이 능숙하게 치아 사이를 헤쳤다. 거침없이 입안을 점령한 혀가 오돌토돌한 입천장을 핥다가 자그마한 살덩이를 감아 끌어당긴다. 온몸이 아찔해졌으나 사내의 팔이 허리를 단단하게 지지하고 있었기에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원하던 입맞춤을 얻었음에도 왼쪽 가슴을 쥔 손은 멈추지 않고 옷 위로 젖가슴을 마음껏 주물렀다. 굵은 기둥이 옷을 뚫고 나올 듯 꿈틀거리며 골반을 지그시 누르자 목하의 입에서 단 숨이 새어 나와 흑운의 입으로 건너갔다.

목하는 이제 한 팔로 흑운의 목을 감고 다리 사이에 파고든 그의 허벅지에 음부를 밀착시켜 비비고 있었다. 자존심이나 서운함 따위, 당장 눈앞에서 그녀를 유혹하는 쾌락 앞에서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항아님……."

달콤하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만으로, 목하는 절정에 가까운 짜릿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때,

"하아."

작게 한숨을 쉰 흑운이 눈썹을 찌푸리며 몸을 떼어내었다.

"잠깐. 여기."

그가 목하를 데려간 곳은 밖에서 통하는 문 바로 옆의 구석이었다. 두꺼운 벽으로 움푹 들어가 있어 마음먹고 보아야 눈에 띄는. 흑운이 쉿, 조용히 하라고 신호하고 문 앞에 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박대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목욕간 바로 앞에 멈추었다.

"목하 안에 있니?"

낯익은 동무의 목소리. 목하는 얼굴에 반가움을 띠었으나 흑운이 다시 돌아보며 살짝 고개를 젓는 바람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끼익,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꺄악!"

문 바로 앞에 기척도 없는 장신의 사내가 서 있으니 놀랄 수밖에. 란이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흑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목하…. 안에 없나요?"

"예."

얼굴 가득 의심을 품은 란이가 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았으나 구석에 숨은 목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욕간통에서 물이 거의 다 빠진 것을 보니 목하는 뒷정리를 하고 나간 모양이었다. 몸을 돌리려던 란이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고개를 똑바로 들고 흑운을 바라보았다.

"무사님께선 예 무슨 볼일이신지요?"

볼 때마다 찜찜한 여인이다. 흑운은 대답 대신 눈빛에 짜증을 담으며 냉정하게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끈덕지게 쫓아오는 시선조차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저 궁녀와는 친하게 지내지 마십시오."

잠시 후, 기척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흑운이 목하를 돌아보지 않고 흐트러진 수건을 걷어 모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한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였나. 지난번 일조차 수습하지 못한 주제에 또 항아님을 탐하다니.

"참 편하시네요."

별안간 차가워진 태도에 쌓이고 쌓인 서운함이 가시가 되어 삐죽 솟아 나온다.

"내킬 때는 실컷 가지고 놀다가, 귀찮아지면 모르는 사람이 되고. 그러다 또 생각나면 챙기는 척. 이럴 거면 애초에 정인이라느니, 밤에 만나자느니. 그런 말은 왜 하셨어요?"

"황명입니다."

연분 이어보아라. 황제께서 그리 명하셨으니 황명은 맞다. 비록 전달방법에 좀 문제가 있긴 하였으나 거짓은 아니되, 목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저와 만나는 것이…. 황명이었다구요?"

"예."

옷가지와 수건을 따로따로 대강 개어 모아두고 욕간통 부근에 튄 물을 닦아내는 것으로 뒷정리가 끝났다. 이제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목하에게서 등을 돌린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흑운에게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제게 주신 선물들은요? 그것도 황명이었어요?"

"예."

그래.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빌어야겠다. 짐승 취급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어려운 결심을 하고 뒤돌아선 흑운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담담했기에 목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저는 그다지 좋은 사내가 아닙니다. 항아님."

"... 그런 것 같네요."

무어라 더 말할 시간도 없이 목하가 뚜벅뚜벅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비참함과 모멸감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조금 더 일찍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을 것을."

"항아님."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나쁜 상황임이 확실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일단 목하를 향해 뻗은 손은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몸을 피하는 그녀에게 닿을 수 없었다.

"... 나쁜 새끼."

"예?"

고운 입술과 어울리지 않는 거친 욕설. 흑운은 자신이 방금 무엇을 들었는지 긴가민가하여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설마 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송구합니다."

변명할 생각도, 이유도 없다. 그저 묵묵히 사과를 건네는 흑운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송구할 것 무에 있습니까. 황제 폐하께 그 황명, 거두어 달라 청하세요."

"항아님. 지금 무슨……."

"그리 못 하십니까? 하면 제가 귀비마마께 주청을 올리겠습니다. 황명이 아니라면, 무사님께서 제게 이리 추근대실 연유도 없어지겠지요."

"항아님!"

차갑게 돌아서는 목하의 어깨를 황급히 잡아보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찰싹, 냉정하게 그의 손을 쳐낸 목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목욕간을 나가 한여름의 햇살 사이로 사라져 버렸으니.

***

"들어도 되겠습니까, 폐하."

흑운이 현에게 먼저 알현을 청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에 행궁까지 따라온 상소문을 빨리 해치우고 화연과 놀 생각에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이라 하여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들거라."

절도 있게 예를 갖춘 흑운이 뜸 들이지 않고 곧장 용건을 꺼내 들었다.

"지난번 항아님과 연분 이어보라 하신 명을 거두어 주소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잠시 심복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현은 부러 목욕간 앞에 두 사람을 세워놓은 자신의 배려가 소용없었음을 깨달았다. 저 눈빛.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저 눈빛이 감출 수 없는 증좌이지 않나. 이리 재미있을 수가. 상소문을 덮은 현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그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고하라."

"빠뜨리지 말고. 가 어디서부터입니까?"

"네 생각하기에 문제가 되는 시점부터."

흑운이 특유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꺼내놓는 이야기는 현의 상상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현은 어느새 서안에 턱을 괴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곤 흑운이 이상입니다. 하고 입을 다물었을 때 관자놀이까지 치솟는 입꼬리를 감추려 잠시 생각에 잠긴 척 두 손에 얼굴을 묻어야만 하였다.

"일단…. 황명의 철회는 불허한다."

한참 뒤에야 웃음을 멈춘 현이 고개를 들고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예. 폐하."

"대신 그 아이의 마음을 돌릴 비책을 알려주마."

아래를 향하고 있던 흑운의 눈이 순간적으로 정면을 향했다.

"... 무엇이옵니까."

"이리 가까이."

까딱까딱, 앞뒤로 흔들리는 현의 집게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다가온 흑운이 현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현이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인 말은 흑운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자빠뜨리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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