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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29화 (129/152)

<-- [외전 특별편] -->

"자빠뜨리면 되느니라."

"황공하오나, 소신 불민하여 폐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나이다."

"한밤중에 업고 나가서 자빠뜨리란 말이다. 하룻밤에 다섯 번이면 네게 더는 화를 내지 못할 것이니라."

한밤중에, 업고, 다섯 번. 문맥으로 주군의 뜻은 유추해 내었으나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사내의 도리가 아닙니다."

"내 서 귀비에게 직접 해보고 하는 말이거늘. 감히 내 사내의 도리를 지키지 못했다 말하느냐?"

"죽여 주시옵소서."

"됐고, 그 아이나 업고 나가서 죽여주거라. 황명이다, 황명."

아침에 반드시 보고하여라. 현은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하며 흑운을 내보내었다.

은근 귀찮은 흑운도 없겠다, 나 또한 오늘 화연이를 다섯 번은 잡아먹어야지. 즐거운 상상에 붓을 든 손이 다시 빠르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

황제의 곁을 비우기 위해서는 준비할 일이 많다. 그의 자리를 대신할 실력자 다섯을 추가로 배치하고, 그들의 동선과 교대주기를 짜고, 마지막으로 주변을 한 바퀴 둘러 직접 순찰하고. 흑운은 황제의 처소부터 시작해 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해가 저무는 여름의 행궁은 화려한 황궁과 전혀 달랐다. 눈이 아프도록 번쩍거리는 황금빛 지붕 대신 짙은 먹색의 기와가 한낮의 열기를 아지랑이마냥 뿜어내고, 쓰르라미가 부르는 구애의 노래조차 황궁의 그것보다 경쾌하였다. 아직 채 저물지 않은 더위 사이로 깔깔대는 궁녀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넘실거린다.

무어가 저리 즐거울까. 평생을 황제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하는 황제의 여인으로, 황궁의 담장 안에 갇혀 살아가면서.

어김없이 그 수많은 궁녀 중 한 사람에게로 달려가던 흑운의 생각은 그녀를 안지 못하고 코앞에서 멈추었다. 지금 맞은편에서 물동이를 이고 오는 궁녀를 발견한 그의 걸음처럼.

무거워 보이는데.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저쪽 모퉁이 너머에서 하나 둘 셋, 모두 세 개의 기척이 느껴졌으므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대로 목하를 스쳐 지나간 흑운은 넓은 행궁을 구석구석 살피고 나서야 잠깐 휴식을 취했다.

목 뒤로 흘러내린 땀이 축축하게 무복에 스며드는 감각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다. 어차피 갈아입을 것이니 일단 씻을까.

그는 무복의 매듭을 풀며 병사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목욕간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 사람이 많은지. 그를 향해 모여드는 호기심 어린 시선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흑운은 제대로 씻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몸을 돌려 우물가로 곧장 향했다.

겉옷과 상의만 벗어 옆에 걸쳐놓은 뒤 두레박을 우물 속으로 떨어뜨리고 보니 또 근처에서 두어 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잠시 그것에 정신을 집중한 흑운은 위험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물을 길어 올려 머리부터 한 번에 끼얹었다.

꺄악, 기척이 느껴진 방향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이라 하기에도 뭣한, 들뜬 듯 숨죽인 목소리.

궁녀인가. 그는 그쪽에서 몸을 반대로 돌리고 다시 두레박을 떨어뜨렸다. 첨벙, 수면에 부딪힌 나무가 파문을 일으키고, 그것을 다시 당겨 올리는 팔뚝에서 벌써 미지근해진 물방울이 우물 속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조용히 좀 해."

물을 길으러 가다 우연히 먼발치에서 그를 발견한 어린 궁녀 하나가 꺄악대는 동무를 조그맣게 타박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우물가에 선 사내에게서 떼어내질 못하고 있었다.

"저거 누구야?"

"그 왜 있잖아, 맨날 폐하 뒤에 붙어 다니는."

"진짜? 그 무서운 사람?"

잘 조각된 구릿빛 등 근육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죽여 속닥거리던 두 궁녀의 뒤에 또 한 명의 궁녀가 멈춰섰다. 뭘 이리 쪼그리고 보는 게야. 몸을 숙여 그녀들이 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본 목하의 눈이 커졌다.

"너네 여기서 뭐 해!"

"꺄아악!"

목하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놀란 궁녀들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소란에 몸을 돌리고 서 있던 사내가 뒤돌아보자 그녀들은 나뒹구는 물동이를 챙길 새도 없이 허둥지둥 달아나고, 텅 빈 우물가에는 젖은 머리를 탁탁 털어내는 흑운과 달아나는 궁녀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목하. 두 사람만이 남았다.

"비켜 주세요."

거침없이 그의 앞까지 다가온 목하가 차갑게 말하며 두레박을 떨어뜨렸다. 흑운이 그것을 대신 끌어올려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손으로 눌러도 들어가지 않을 듯 단단한 근육이 크게 움직였다. 날카로운 콧대 끝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는 목하의 가슴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방망이질 친다.

이미 여러 번 그에게 안긴 자신도 이러하건만 사내 구경이라곤 못해본 어린 궁녀들에게는 얼마나 매혹적이었을까. 짜증 나고 분해 죽겠는데, 이제 관계없는 사람이라 무어라 할 수조차 없다. 눈조차 맞추지 않고 물이 가득 담긴 동이를 머리에 이는 목하를 나직한 목소리가 붙들었다.

"해시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처소 밖으로 나오십시오."

"또 황명인가요?"

"예. 허니 반드시 나오셔야 합니다."

뭐 이런 사내가 다 있어. 목하는 물동이를 이고 그에게서 최대한 빨리 멀어졌다. 그러면서도 왜 머릿속에는 방금 햇빛 아래에서 본 흑운의 벗은 몸이 아른거리는지. 미쳤구나. 자존심도 없어. 절대 안 나가. 그리 스스로를 타박하며 길어온 물을 커다란 솥에 채우던 목하의 귀가 쫑긋해졌다.

"근육 봤어? 제발 한 번만 만져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만져보기만? 그 팔로 아주 숨 막히게 안아주면…. 아휴!"

"너넨 보고 왔다며. 아, 직접 보기라도 했음 좋겠다야."

"나 오늘 잠도 못 자겠어. 어깨가 아주 정전 마당만 하더라니까?"

"그 정도야? 나 내일 폐하 오시거든 고개 한번 들어볼래. 옷 입은 거라도 봐야겠다."

방금 우물가에서 보고 온 흑운에 대해서 떠드는 것이 분명하다. 듣자 듣자 하니까 이것들이. 물을 모두 솥에 부은 목하는 홱 뒤돌아서서 꺅꺅대는 궁녀들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거야?"

"깜짝이야! 왜 아까부터 자꾸 소리를 질러요, 성님!"

"이것들이 아주 못하는 말이 없어. 어깨가 어떻고 근육이 어째? 사내 맨몸 본 것이 자랑이야?"

"성님도 봐놓고선. 괜히 우리한테만 그런다."

성님도 보았다, 라는 말이 아까 우물가에서의 일을 가리킴을 아는데도 양심에 콕콕 찔렸다. 잠시 말을 멈추고 이마를 찡그린 목하에게 다른 궁녀가 작게 투덜거렸다.

"솔직히 우리가 보려고 봤수? 그 사내가 옜다, 봐라. 하고 던져준 거지. 우린 그저 물 길으러 간 죄밖에 없는걸."

"그럴 시간 있으면 가서 빨래나 걷어! 다 마른 지가 언젠데 아직도 매달려 있어?"

마지막 말은 바로 자신을 향해 던지는 말이었다. 둘 사이는 벌써 말라 버렸는데, 구질구질하게 속끓이는 자신에 대한 질책.

이제 아무 사이도 아냐. 화낼 필요는 전혀 없어.

목하는 그리 생각하였으니, 해시에 살금살금 처소를 빠져나온 것은 흑운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행궁이라고는 하나 남녀가 유별하거늘. 아무 데서나 훌렁훌렁 벗어 법도를 어지럽히지 말라 충고하려는 깊은 뜻에서지.

허나 그녀가 흑운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가자마자 머리부터 검은 천이 덮어씌워 지며 발이 땅에서 떨어졌으므로. 지금 흑운은, 목하를 업고 나가라는 황명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목하를 업고 낮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은 흑운이 밖에 세워놓은 말 등에 그녀를 올렸다. 목하는 그제야 자신에게 덮어 씌워진 검은 천이 무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생전 처음 말에 올라앉아 있다는 사실도.

"저, 저 말 못 타요!"

땅에서 너무 높이 올라와 있는 생경한 공포에 화난 마음조차도 밀려났다. 그러나 가볍게 말 등에 탄 흑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한쪽 팔로 말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제가 잘 탑니다."

근처에 오래 머무를 시간이 없다. 말고삐를 세게 내려치자 히히힝,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도대체 어딜 붙잡아야 하는 거야. 목하는 덜덜 떨며 허리를 감싼 흑운의 손을 더듬어 꽉 쥐었다.

좀 더 천천히 달려도 되는데, 그것이 기분 좋은 흑운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을 스치는 밤바람에서 여름의 냄새가 난다. 아니, 앞에서 흩날리는 목하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인가. 그는 아주 조금 입꼬리를 올리며 팔 안에 가둔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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