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특별편] -->
"뻔뻔한 계집애."
란이는 약을 가지고 돌아올 목하를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목하의 문갑을 열고 그 안을 미친 듯 헤집었다. 맨 밑바닥에 소중히 감춰져 있던 검은 무복. 그것을 가슴에 안고 곧장 찾아간 곳은 최고상궁인 염 상궁의 처소였다.
"마마님, 란이입니다."
"어쩐 일이냐?"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오너라, 염 상궁의 허락이 떨어지자 란이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으로 들어섰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목하는 십여 년을 함께 해온 동무이니까. 그리고 그 사내 역시 처벌을 면치 못할 테니까. 그러나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이것이 무엇이냐?"
그녀가 내민 물건을 내려다본 염 상궁이 얼굴을 찌푸렸다.
"목하가 지니고 있던 물건입니다."
"세답을 하려던 것이 아니고?"
"세답방도 아닐진데, 어찌 무사의 의복을 세답하겠나이까."
염 상궁이 굳은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란이가 말한 대로였다. 검디검은 무명으로 만들어진 그 옷은 틀림없는 무복이었으니.
궁녀의 짐 속에서 나온 사내의 의복이라. 탁, 탁, 손가락을 서안에 드리던 염 상궁에게 란이가 다시 고해 바쳤다.
"근래들어 한밤중에 처소에서 사라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어젯밤에는 아예 방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제는 귀비마마께서 심부름을 보내셨다. 그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느니라."
"하지만, 마마님."
"소란 떨지 말거라.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일이다."
란이의 입가가 살며시 휘어 올라갔다. 조용히 처리한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으니. 염 상궁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곤 다시 돌아온 처소에 목하는 없었다.
면경 앞에 곱게 놓인 고약을 손끝에 바르고 얇은 포로 싸매는 란이의 가슴이 어쩐지 쿡쿡 쑤신다. 허나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을 어찌할 것인가.
"네가 잘못한 거야. 왜 거짓말을 해?"
면경 속에 목하가 있기라도 한 듯, 란이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 소리는 듣는 이 없이 방 안을 떠돌다가 다시 란이의 귀로 되돌아갔다.
***
"늦었구나."
서류를 들여다보던 현이 무심하게 말했다. 흑운이 어느 틈에 뒤를 지키고 있었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황공하옵니다."
"모두 물러가라."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궁인들과 보이지 않던 그림자들이 일시에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흑운과 둘만 남게 되자 현은 들여다보던 두루마리를 탁 덮고 씩 웃었다.
"이리 늦게 온 것을 보니 잘 되었나 보구나. 역시 내 말이 옳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신의 한 수였다. 현은 자신의 조언이 아주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며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었다.
"하여, 폐하께 논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물어 보아라. 내 여인의 마음이라면 아주 속속들이 헤집고 있으니."
콧대가 하늘까지 올라간 현이 자못 거만하게 대답했다. 허나 이어지는 흑운의 질문은 그 또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만일 그 분께서 수태를 하시면 어찌 됩니까?"
그러게 말이다. 현은 자신이 놓친 한 가지를 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자신이 암묵적으로 허락, 아니. 적극적으로 밀고 있긴 하지만 기실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궁녀와 외간 사내의 통정이라니. 외부로 새나가게 된다면 둘 다 목이 베어질 만한 중죄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흑운의 철저함을 믿었기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으나, 수태는 그 영역 밖이 아닌가.
"네 심중을 말해 보아라."
"소신과 항아님의 출궁을 허해 주시옵소서."
"... 뭐?"
한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떠나겠노라 하는 흑운의 대답에 현은 잠시 텅 빈 머리를 가다듬었다. 뒤에 흑운이 서 있지 않은 용상이라니. 그런 것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이 느낌은 뭐란 말인가. 화도 나고 서운하고, 갑자기 그 궁녀가 미워지고 한편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 화연과 함께 읽던 통속소설에서 지아비를 옆집 과부에게 빼앗긴 부인네의 심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흑운이 직접적으로 준 충격과 옹졸한 제 마음이 스스로에게 준 충격. 두 가지 충격에 빠진 현이 표정을 굳히고 있는 사이 흑운의 속 또한 복잡했다.
어젯밤, 새근새근 잠든 목하를 내려다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어째서 그림자들에게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밤.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했던, 길고도 짧은 밤.
주군보다 소중한 것이 생겨버린 이상 자신은 더 이상 주군을 지킬 수 없었다. 황궁에 불길이 치솟았을 때 그는 과연 주군을 구하러 갈 것인가, 아니면 목하를 지키러 갈 것인가.
"신은 이미 그림자로서의 자격을 잃었습니다. 쓸모가 없어진 도구는 버리심이 마땅합니다."
도구. 그림자를 다른 말로 칭하기에 이보다 합당한 단어는 존재치 않으리라. 그럼에도 현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물러가라. 내명부의 일은 귀비의 소관이다."
"예, 폐하."
흑운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그의 기척을, 현은 느낄 수 있었다. 딱히 현이 무예의 고수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만 십수 년을 한몸처럼 붙어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을 뿐. 그래. 한 몸이었다. 그 동안.
"이건 뭐... 비역질도 아니고."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현은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면서도 팔걸이에 기대어 이마를 짚었다.
수하에게 삶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늘 자신의 뒤에서 그림자로서 존재했던 그에게, 기쁨이 있었으면 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러고 싶었다. 그림자와 삶이라는 두 단어가 공존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달은 현의 고뇌는 깊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있을 리가 없지, 죄다 물러가라 하였는데. 서류를 들여다 볼 마음이 싹 사라진 현은 집무실을 나가 화연의 처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석처럼 뒤에 따라붙는 궁인들 중에 검은 옷자락이 없음이 새삼 신경쓰인다. 앞으로도 없을지 모르는 그것이.
"서 귀비는?"
"화원에 계신다 합니다."
화연의 일거수일투족이라면 현보다도 더 잘 꿰고 있는 필두가 대답했다.
"그리로 가자."
"예, 폐하."
아직 화원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맑게도 울린다. 그 사이에서 화연의 웃음소리를 찾아낸 현이 싱긋 웃었다. 무어가 저리 재미있을까. 그런 그의 뒤편으로 검은 그림자가 소리없이 나타나 자리를 지켰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현이 나타나자마자 웃음소리는 뚝 그치고, 화연을 제외한 모든 궁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그 사이에서 수하의 정인을 찾아낸 현의 눈썹이 조금 꿈틀한다.
"삼십 보 이상 물러나라. 흑운, 너도."
물러나라는 명에 너무나 익숙한 궁인들은 잠시의 지체도 없이 후원 입구 가까이까지 비켜서고, 누각 위에는 현과 화연. 단 둘만이 남았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되 화연만은 용안에 드리워진 어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폐하?"
"일까지는 아니고."
제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두 사람 중 하나였다. 현이 읊조리듯 흘려보내는 속마음을 차분하게 새겨들은 서 귀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에 관한 국법이 따로 있나요?"
"그림자에게는 법이 없다. 황명이 곧 법이니."
"헌데 어찌 그리 고민하세요. 용상 뒤를 지킬 수 없다 하면, 용상 앞이라도 지키라 하시면 되지요."
잠시 그녀의 말을 되씹던 현이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요 귀여운 것. 늘 맞는 말만 한단 말이지.
"네가 내 복덩어리구나."
달콤한 말이 타액에 섞여 방금 그의 고민을 해결한 작은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