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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35화 (135/152)

<-- [외전 특별편] -->

사납게 뻗쳐드는 궁녀들의 손을 피한 란이가 정신없이 바깥으로 내달렸다. 후회가 물밀듯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그녀를 잡으려는 두어 명의 발소리와 낡은 마룻바닥이 삐걱대는 소리, 요란한 소나기 소리가 한데 섞여 조용한 전각을 불길하게 뒤흔들었다.

"꺄아악!"

앞마당을 빠져나가기 직전, 우악스런 손이 길게 늘어진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다꽂았다. 하얀 재갈이 입 안을 파고들어 더 이상의 비명을 막았다. 질질 끌려 들어가면서도 힘껏 발버둥치던 란이의 머리가 날카로운 댓돌 모서리에 부딪혔다.

진한 피가 바닥에 고인 빗물로 스며들고, 정신을 잃기 직전 란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소리없이 나타난 검은 인영이었다.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피 속으로 잠겨들었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본 흑운이 성큼성큼 댓돌을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 누구요!"

그저 끌고 들어가려던 궁녀가 피를 쏟으며 쓰러진 것도 섬뜩한데, 뒤에서 검은 그림자까지 나타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둘중 나이많은 궁녀가 그를 향해 소리쳤으나 감히 그를 막지는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 복도를 지나친 흑운은 여러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의자에 꽁꽁 묶인 채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린 궁녀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왼손에서 반짝거리는 은가락지.

"무슨 짓이오. 내명부의 일이니 나가시오."

최고상궁 자리는 허투루 얻은 것이 아니다. 그가 내뿜는 살기에 유일하게 주눅들지 않은 염 상궁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이 돌아갔다. 스르릉, 검은 칼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와 함께.

"감히 어디서 칼을 뽑는가. 예 있는 모두가 황제 폐하의 여인임을 모르는가!"

황제. 평생동안 그의 삶을 지배한 두 글자가 흑운을 멈춰세운다. 뽑아들었던 칼은 목하에게 묶인 포승줄만을 잘라내고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다.

"내 여인이다."

싸늘하게 중얼거린 흑운이 스르르 무너지는 목하를 안아들었다. 황제의 허락 없이 곁을 비웠음에도 아무런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가슴에서 시커먼 분노가 올라와 주변을 집어삼켰다.

***

흑운은 무작정 데리고 나온 목하를 자신의 처소로 데려갔다. 침상에 눕히고 불빛 아래에서 확인한 그녀의 상태는 처참했다.

재갈이 물려 있던 입안과 손끝, 발끝을 제외하면 모든 부위가 터지고 정신은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 상처를 닦고 약을 붙여야 하는데, 얇은 침의가 터진 살에 들러붙어 모두 가위로 잘라내야 할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찬물에 영견을 적셔 피를 닦아내던 흑운이 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며 침통하게 읊조렸다.

지켜야 할 사람이 아닌, 지키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수상한 비명을 포착한 수하가 보고해 오지 않았더라면 목하는 싸늘한 시신으로 뒷산에 버려졌으리라. 아마도,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검은 옷 때문에.

상처의 치료라면 의원보다 능숙하다. 다친다고 해서 남에게 보일 수도 없는 그림자이니까. 그의 손은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여 상처에 약을 붙이고 얇은 포를 감았다. 그러나 여인의 몸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연약했다. 또한 상한 것이 살만은 아닌 것 같았기도 하였고.

의원. 의원이 필요하다. 흑운은 잠시 온몸의 감각을 세우고 바깥을 살폈다.

"거기. 밖에."

말은 없었으나 익숙한 기척이 조금 더 또렷해졌으니, 그것이 곧 대답이었다.

"이 방을 지켜라. 그 누구도 들고 나서는 안 된다."

수하에게 명령을 내린 그는 어둠을 가르고 태의녀의 처소로 숨어들었다. 금일 밤의 일은 어떤 처벌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사사로이 근무지를 이탈하고, 처소에 여인을 들이고, 황제를 위해서만 움직여야 할 그림자에게 사적인 명을 내렸으며 이제 태의녀의 처소까지 제멋대로 드나들고 있으니.

황명이 떨어진다면 일각의 지체도 없이 자신의 목에 칼을 찔러넣어야 하리라. 그래도 괜찮은 것은, 또한 한편으로 죽음이 두려워지는 것은 이제 지키고 싶은 이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요!"

서책을 읽고 있던 태의녀가 서늘한 기운에 놀라 그것을 떨어뜨렸다. 아직 잠들지 않았음이 그나마 다행일까. 흑운은 옆에 찬 검을 내보이며 손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환자가 있습니다."

검게 빛나는 손잡이에 음각된 구름.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태의녀는 기본적인 진료 도구들을 챙겨 그를 따라 나섰다. 그 느린 걸음이 영 조급한 흑운은 실례하겠습니다, 나직히 양해를 구하고 태의녀를 들쳐업은 채 바람처럼 달렸다.

"이런, 이게...."

그 누구도 들어온 적 없는, 흑운 자신조차 옷을 갈아입거나 아주 잠깐 눈을 붙일 때 말고는 들어오지 않는 처소가 가장 붐비는 날이다. 당연히 귀비마마를 돌보러 가는 것이라 생각했던 태의녀는 침상에 시체처럼 누운 여인을 보자마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기도 아니되, 감히 무슨 짓이냐 따질 수도 없을 정도로 눈앞의 여인은 심각했기 때문에.

"치료해 주십시오."

"일단 응급처치는 하겠소만, 소속을 밝히고 장부에 이름과 수결을 남기세요. 제대로 된 치료는...."

"태의녀님."

동앗줄인가. 지금 눈앞에 있는 나이 든 태의녀가 그에게는 목하를 살릴 유일한 동앗줄처럼 느껴졌다. 주군이 아닌 누구에게도 숙인 적 없던 허리가 간절함을 담고서 동앗줄을 향해 깊숙히 숙여졌다.

"부탁드립니다. 살려주십시오."

속에서부터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에 태의녀가 입을 다물었다. 궁녀로 보이는 여인과 호위무사의 사연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터. 차마 그 애끓는 연정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

"염 상궁."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가라앉은 목소리가 눈앞에 엎드린 상궁을 찍어눌렀다.

"내 각별히 예뻐하는 아이임을 모르는가. 어찌 내게 한 마디 보고도 없이 그 지경을 만들었단 말인가!"

"제가 아니어도 목이 베어질 아이입니다. 귀비마마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서 귀비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염 상궁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그녀 또한 목하를 어여뻐하지 않았나. 도리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그녀를 칭찬해야 할 일인데, 그런데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보름 뒤면 황궁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게서 목하를 출궁시키고 흑운에게 관직을 주어 함께 살게 하자. 현과 그리 속닥거린 터였다. 그 보름 사이에 이 사단이 날 줄 누가 알았을까. 그것도 목하와 둘도 없이 친하던 란이의 발고로 인해.

"이제부터 그 아이는 내 소관이네. 자네는 관여치 말게."

"하오나 마마. 내명부의 기강이 달린 문제이옵니다."

"그 내명부가 작금 누구의 소관인가. 내명부에서 최고 높은 이가 누구냐, 이 말일세!"

그녀의 일갈에 꼿꼿하기 그지없는 염 상궁도 한발 물러설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목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서 귀비의 바로 옆방에서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태의녀가 들락거린 보람도 없이, 그리 사흘이 지났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아침.

"으읏...."

잠시 목하의 머리맡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던 흑운이 희미한 신음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항아님."

굳게 닫혔던 눈꺼풀이 들어올려지고, 희미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할 이도 없건만 흑운은 무한한 감사함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차마 대어볼 수도 없는 손이 목하의 얼굴 위를 맴돌다가 다시 거두어졌다.

"흑운 님...."

깨어나자마자 목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다리에서부터 올라와 온몸을 잠식하는 고통이었다. 그 다음은 거칠어진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흑운이었고. 그러나 목하는 고통 속에서도 그를 보며 작게 웃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흑운이 무사하니 되었다.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뭐가 다행입니까. 항아님이...."

흑운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괴로이 손 안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어찌 말할 수 있을까. 부르튼 입술로도 그에게 미소를 보내는 작은 여인에게 어찌 그 말을 꺼낼까.

"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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