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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37화 (137/152)

<-- [외전 특별편] -->

“아주 잘 치유된다면 목발에 기대어 조금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마저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발목 힘줄이 상할 대로 상하여…….”

고운 손끝이 목하의 다리께를 안타깝게 쓰다듬었다. 게서 통정한 사내가 흑운이었다 하면 이리까지 되진 않았을 터이다. 허나 외부로 새어나간 그 만남에 현 또한 흑운을 구하진 못하였겠지.

정인을 지키고 다리를 잃은 이 아이를 대견하다 해야 할 것인가, 가엾고 미련하다 해야 할 것인가.

“각별히 신경 써서 부탁하네.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게 해 주게.”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마마.”

태의녀가 능숙한 솜씨로 침을 놓고 포를 가는 동안에도 목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언뜻 평온하게 보이는 시간은 빠르게, 하지만 똑같은 일상으로 흘러갔다. 흑운은 자주 현의 곁을 비우고 목하에게 와 불편한 것이 없는지 살폈다. 덥지 않냐고 부채질을 해 주면 그때마다 목하는 고맙다며 웃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황제의 환궁과 두 사람의 출궁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오후 내내 내리쬐던 해가 서산 너머로 숨어 조금은 시원해진 밤.

“흑운 님.”

말없이 곁에 앉은 흑운을 바라보던 목하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덥고 갑갑해요. 물가에 가고 싶어요.”

누워있는 동안에도 부탁하는 바가 거의 없던 목하의 말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흑운은 아무 말 없이 겉옷을 벗어 목하의 어깨를 감쌌다. 두 팔로 힘주어 들어올린 몸이 너무 가벼워서 무겁다.

그는 목하를 안은 채 소리 없이 창을 뛰어넘어 이 시간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후원으로 향했다. 끄트머리가 조금 어그러진 달이 두 사람을 환히 비추며 연못까지 따라 달렸다.

“앉으실 수 있습니까?”

“그럼요.”

연못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누각 위에서, 목하는 흑운에게 어깨를 기대고 눈앞을 응시했다. 시원한 밤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어루만지고 지나쳐 갔다.

“나오니까 훨씬 낫다.”

목하가 고개를 돌려 흑운을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흑운의 눈매가 아주 살짝 휘어지며 한 손으로 밤바람이 흩어놓고 간 머리카락을 쓸어 정리해 주었다.

“그런데 목말라요. 나 물 한 잔만 갖다 주면 안 돼?”

“다녀오겠습니다.”

“그 전에.”

장난스럽게 쭉 내민 목하의 입술을 바라보던 흑운이 조금 더 눈꼬리를 휘었다. 조심스레 삼킨 입술에서 그리운 맛이 난다. 두 개의 혀가 다정하게 서로를 감싸며 타액을 나누다가 잠시 후 떨어졌다. 길게 늘어진 은사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제가 은애한다고 말했던가요?”

“오늘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티 없는 웃음이 어둠을 타고 흩어졌다.

“은애해요. 도운 님.”

현이 이름을 내려준 지는 한참 되었으나, 그것이 목하의 입에서 나왔을 때야 비로소 흑운은 도운이 되었다. 그는 목하의 어깨에 덮어준 겉옷을 다시 한번 여며준 뒤 머리칼 위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오겠습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목하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어깨에 덮은 옷에 코를 파묻고 곁에 있어도 그리운 체취를 맡아본다. 고민이라면 이미 충분히 하였기에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고마웠어요.”

검은 옷을 곱게 개어 옆에 내려놓은 목하가 정인에게 하듯 속삭였다. 가느다란 팔로 몸을 지탱하며 기어가는 마룻바닥에 다리가 스친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터지고 처절하도록 붉은 핏자국이 목하가 앉았던 자리부터 난간까지 긴 선을 그렸다.

그 짧은 거리를 움직이는데도 목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비오듯 쏟아졌다. 이윽고 도착한 누각의 끝에서, 목하는 끊어질 듯한 통증을 참으며 난간을 잡고 일어섰다.

풍덩. 고요한 연못에 커다란 파문이 이는 순간 요란하게 쏟아지던 매미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 또한 잠시뿐. 매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동시에 소리 높여 통곡하기 시작했다.

***

“쿨럭, 쿨럭....”

핏기라곤 없는 창백한 입술에서 기침과 함께 물이 쏟아져 나왔다. 끄트머리가 이지러진 달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달을 반쯤 가린 사내의 그림자도.

“무슨 짓입니까!”

목하는 그때 흑운이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검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눈물처럼 뚝뚝, 목하의 얼굴에 떨어졌다.

“왜... 살리셨어요.”

“말이라고 하십니까?”

거친 말과는 다르게 그의 팔은 정신없이 목하의 몸을 가득히 끌어안았다. 그녀가 살아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평생을 이리 살아야 한다면서요.”

젖은 어깨에 얼굴을 묻은 흑운이 세차게 고개를 젓는 것이 느껴진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터져나왔다. 물과 눈물이 섞여 서럽게 흘렀다.

“다음엔 살리지 마세요. 보고도 못본 척 하세요. 평생을 도운 님께 매달려, 짐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발목을 잡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리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고...!”

“그리라도 살아 주십시오.”

무거운 속삭임과 함께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다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대의 발이 되고 다리가 되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살아만 있어 주셔도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목하의 몸이 땅에서 떨어졌다. 그가 소리없이 걷는 발자국마다 핏물이 점점이 떨어져 선을 그린다. 도운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죽여 우는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성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시도 목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

현이 도운과 목하를 위해 준비한 집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며 또한 정갈했다. 황궁에서 말을 탈 필요도 없을 만치 가까운 위치는 현이 부르면 바로 달려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도리어 무슨 일이 생기면 황궁에서 빠르게 집에 도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살뜰한 찬모 한 사람과 목하의 시중을 들 어린 계집아이, 덩치 큰 문지기, 잡다한 일을 맡아볼 하녀.

정2품 무관직을 받았으나 식솔 또한 그들의 집처럼 단출했다. 애초에 도운은 자신의 일을 거의 남에게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제 모습을 남에게 내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목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제 퇴궐하십니까, 나으리?”

“그렇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순박한 문지기가 조금 늦게 귀택한 도운을 반겼다.

“부인께선?”

“그저... 그렇습니다요.”

도운은 환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수화문을 지나 정방으로 들어갔다. 목하가 거처하는 와실에서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다급히 문을 열어젖힌 그의 눈에 들어온 방 안은 엉망이었다. 이번에 깨진 것은 도운이 장인에게 주문하여 만든 새 면경인 것 같았다.

“나가 있거라.”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곁을 스쳐지나갔다. 도운이 지나가는 발밑에서 면경 조각이 잘그락, 잘게 깨어졌다.

“부인.”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에 목하가 고개를 들고 도운을 보았다. 꺼져가는 눈에서 예전의 반짝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도운 님.”

도운이 팔을 뻗자 힘겹게 앉아있던 목하의 몸이 스르르 그 속으로 스러졌다. 가을의 쌀쌀함이 열린 창문으로 날아들고, 그것에 실려온 낙엽 하나가 새하얀 이불 위에 빨갛게 누웠다.

“점점 나빠져요. 이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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