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특별편] -->
“저게... 어떻게…. 란아…?”
분명 란이였다. 몇 번이고 저주하고 몇 번이고 용서하다 종내는 증오로 가득 덮어버린 그 얼굴. 그런데 달랐다. 자신이 아는 모습과 조금 많이 달랐다.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창을 닫으려는 도운의 손이 목하에 의해 가로막혔다. 목하는 자신이 지금 본 것을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두칠아. 이리 데려오너라.”
“마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란이를 부축한 채 안절부절못하던 두칠은 전에 없이 단호한 목하의 말에 울상이 되었다. 애원하듯 바라본 도운의 얼굴마저 무서울 정도로 살기를 띠고 있다. 그런 두칠에게 한 번 더 단호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리 데려오래도.”
도운 또한 포기하곤 시선을 돌렸다. 모르길 바랐건만. 두칠이 어쩔 수 없이 가까이 데려온 란이를 자세히 들여다본 목하가 조심조심 손을 내밀었다.
“란아. 채 란.”
예쁘장하던 얼굴이 때가 묻고 여기저기 긁혀 거지나 다름없다. 게다가 늘 단정하던 매무새 대신 소매가 짤뚱한 무명옷, 그마저 다 헤져 걸레짝이라 보아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목하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그녀의 눈빛. 탁하고 멍한 눈빛은 자신의 이름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내버려 두고 들어가십시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목하가 고개를 돌렸다. 잔인한 호기심으로 그녀를 물어뜯는 시선들과 그것을 너른 어깨로 막아서고 있는 도운이 보인다. 목하는 눈을 감으며 잡고 있던 쪽창을 닫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가마 안을 바라보던 란이의 시선이 닫힌 창에 가로막혔다.
그날 저녁, 그녀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운 또한 애써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방 안은 두 사람이 앉아 있음에도 창밖에서 암컷을 찾는 귀뚜라미의 울음만으로 간신히 침묵을 면하였다. 그리 멍하니 있던 목하가 도운을 부른 것은 아주 한참 만이었다.
“도운 님.”
의자에 앉아 병법서를 읽고 있던 도운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예, 부인.”
“어찌 된 일인지, 도운 님은 아시지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 아이요. 제 옛 동무.”
낮은 한숨과 함께 병법서가 탁 덮였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도운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밤,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말을 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궐에 둘 수는 없으니 한밤중에 출궁하였습니다.”
간단한 설명이었으나 앞뒤 사정을 알아듣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란이는 목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천애 고아로 황궁 아니면 제 몸 하나 의탁할 곳 없다는 사실 또한 포함이었다.
“왜 말 안 해줬어요?”
“묻지 않으셨습니다.”
맞는 말이네. 목하는 자신이 왜 묻지 않았는지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일부러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원망을 오롯이 돌릴 곳이 필요했으므로.
“저, 부탁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이다. 도운은 목하의 부탁에 침착하지 못하게 얼굴을 잔뜩 구겼다.
“란이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요.”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도운 님은 찾아내실 수 있잖아요.”
안 됩니다. 하려던 도운은 보지 말아야겠다 생각한 목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도운이 거절할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벌써 풀이 죽은 저 눈빛.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하아, 말 대신 깊은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기다리십시오.”
**
목하는 인형처럼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란이를 마주 응시했다. 사실 자신을 바라보는지도 잘 모르겠다. 흐릿한 눈에는 딱히 초점이랄 만한 것이 없었기에.
“야. 채 란.”
가시 돋친 말투로 불러 보아도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수하고 싶었다. 왜 그랬냐고 뺨을 때리고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온종일 침상에 박혀 있는 목하가 도운을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일이라고는 란이를 증오하는 일밖에 없었기에, 상상 속에서 란이는 몇 번이고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멀쩡한 얼굴로, 멀쩡한 정신으로 제 원망을 온전히 받아내고 미안하다 엎드려 빌기를 바랐다.
“속 시원하다. 나쁜 년. 네가 바란 게 이거야?”
하하, 목하는 말을 뱉어 놓고도 허탈하여 힘없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란이 또한 생긋 웃었다.
“뭐가 그리 좋아 웃어. 그 꼴이 뭐야 대체.”
미친년, 독한 년, 오라질 년. 목하가 아무리 욕을 하고 다그쳐도 란이는 그저 웃고만 있는다. 이런 계집애가 아니었다. 얼핏 사이 비틀어져 싸우기라도 하면 목하가 한 대 때릴 적에 두 대를 때리던 계집애였다.
그리 싸우고 상궁 마마님께 불려가 종아리를 맞고 나면 뒤늦게 미안하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미워할 수 없는 여우였다. 그러는 자기 얼굴도 멍투성이면서.
결국, 목하는 란이를 책망하는 것을 그만두고 옆에 있는 베개를 집어 끌어안았다.
“너까지 그 모양이면 나는 어떡해. 나는 이제 누구를 미워하면서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