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특별편] -->
햇살은 따스하나 바람은 차가운 날이었다. 마지막 남은 몇 장의 단풍잎이 그 찬바람에 잡고 있던 가지를 놓고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이제 놔 봐.”
안마당에서 벼리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목하가 비장하게 말했다. 도운이 입궐한 틈을 타 모여든 찬모와 두칠이, 여리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지켜보았다. 란이의 멍한 눈빛도 목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벼리가 조심조심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났으나 목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잘 하고 계세요, 마님!”
“조심하셔요. 넘어질 것 같으면 바로 잡아드릴께요.”
식솔들의 응원에 기운을 얻은 목하가 용기를 내어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아주 조금 올라갔던 발은 한 걸음이라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짧게 움직여 다시 땅을 디뎠다.
이어서 왼발, 다시 오른발. 세 걸음을 디디고 네 걸음째에 비틀대며 넘어지려는 그녀를 벼리가 재빨리 잡아 지탱했다. 목하의 환한 웃음 뒤에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걸으셨네, 걸으셨어!”
“마님, 진짜 걸으셨어요! 어쩌면 좋아!”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목하를 꼭 닮은 웃음을 머금은 란이가 다가와 목하의 팔을 잡았다. 마치 잘 했다고 칭찬하는 듯.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부축하여 방 안까지 함께 들어갔다.
“참 이상하지.”
오전 내내 걷는 연습을 하느라 지친 몸을 침상에 뉘인 목하가 제 팔을 베고 란이를 바라보았다.
“내 다리, 네가 이리 만들었는데. 그래도 네가 있어서 힘이 나.”
그러면서 입꼬리가 생긋 올라가자 란이도 따라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손을 잡자는 것으로 안 목하가 마주 한 손을 뻗었으나 그 손은 곧장 목하의 아랫배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좀 자라는 뜻인가. 하암, 마침 밀려오는 피곤에 길게 하품을 한 목하가 눈을 감았다. 토닥토닥, 다정한 손길은 그녀가 잠든 후에도 한참 동안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그 뒤로 란이는 틈만 나면 목하의 배를 만졌다. 식사를 하다가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만져보고, 걷는 연습을 하다 잠시 앉았을 때도 옆에 쪼그리고 앉아 쓰다듬고. 그저 독특한 애정표현이라 생각하는 목하와 달리, 늘 그녀들을 옆에서 돌보는 벼리의 시선은 자그마한 의문을 품었다.
“마님.”
“응?”
금일 유난히 찬이 맛나다며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후였다. 빈 그릇을 내어가려던 벼리가 또 목하 옆에 붙어앉아 배를 어루만지는 란이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뭘?”
“저 소저가 혹시, 마님 다리 나은걸 알았던게 아닐까요?”
뜬금없는 말에 목하가 잠시 이마를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표현하는 의사라곤 배가 고프다, 뒷간에 가고 싶다 정도밖에 없던 란이가 그날 유난히 팔을 잡아당겼더랬다. 그 바람에 다리가 움직였고.
“글쎄. 그랬을지도... 에이, 아니겠지.”
“제 말 끝까지 들어보세요, 마님. 만약 이 소저께서 마님의 몸 상태를 제일 먼저 아는 거라면요.”
아직 어리지만 웬만한 어른들보다 싹싹하고 눈치 빠른 아이였다. 그렇기에 도운도 마음에 들어하여 목하에게 붙여준 것이고. 벼리의 눈동자가 진지하게 반짝거리며 란이가 쓰다듬고 있는 목하의 배를 향했다.
“달거리, 쭉 안하셨잖아요.”
“새삼스럽게.”
목하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에는 더없이 건강하여 거르지 않고 달거리를 하였으나, 다친 이후부터는 서너 달에 한 차례 손님이 올 정도로 불규칙하였으므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 모르잖아요. 의원을 모셔올까요?”
“그제 왔다 갔잖아. 그런 말 없었는걸.”
“발목만 짚어봤잖아요. 손목 짚어보면 또 다를지도 모르지.”
벼리가 열심히 말하자 목하의 마음속에도 몽글몽글한 기대가 구름처럼 피어났다. 허나 그렇기에 의원을 부르기엔 무서웠다. 정확히 말하면 기대 끝에 올 실망이 두려웠다. 잠시 고민하던 목하가 란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란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목하의 배만 쓰다듬는다. 이런 애가 알긴 뭘 안다고. 목하는 바보 같다 생각하면서도 몸을 약간 숙여 란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 안에 아기 있어?”
목하를 보는 것인지, 다른 곳을 보는 것인지. 그리 멍한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를 들여다보는 목하는 전혀 웃지 않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눈발이 날릴 듯 차갑고 습기 가득한 새벽이었다. 도운은 평생을 해온 습관대로 인시(새벽3~5시)가 되자마자 눈을 떴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옆에 고운 속눈썹을 내리감고 평화롭게 잠든 여인이 함께 있다는 정도일까.
조금만 더 이리 함께 있고 싶다. 도운은 아주 잠깐 이불 속에 몸을 파묻은 채 목하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인의 체온으로 데워진 따뜻한 이불과 화로에 묻힌 불씨의 냄새, 아직 깨어나지 않은 초겨울의 새벽 공기.
이 모든 것이 도운을 감싸 편안하게 가라앉혔다. 곧은 입매에 지그시 떠올랐던 미소가 나른함에 점점 지워진다. 이내 눈꺼풀이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다시 눈을 덮어버렸다. 그리 몇 시진이나 지났을까.
“서방님, 서방님.”
평소처럼 느지막히 일어나다 화들짝 놀란 목하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황제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 신하라, 좀 꾀를 피울 만도 하건만 늘 새벽같이 등청하던 서방님이었다. 분명 오늘도 입궐하신다 하였는데 어찌 여기 누워 계신 것인가.
“으음. 부인.”
목하의 노력에도 도운은 일어나는 대신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팔을 뻗어 목하를 끌어안았다. 잠결인데도 건장한 팔 안에 갇히니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바둥거리면 바둥거릴수록 죄어오는 팔에 생명의 위기마저 느껴진다. 결국 목하는 살기 위해 그 팔뚝을 깨물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아릿한 통증을 느낀 도운이 드디어 눈을 떴다. 품에 안겨선 자신의 팔을 열심히 밀어내는 목하와 이불 위에서 희미하게 부서지는 햇살. 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오르다 다음 순간 차갑게 굳어버렸다. 햇살. 햇살이 보이면 안 되는데. 무언가 잘못되었다. 도운은 뒤통수가 오싹해짐을 느끼며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일어났다!”
드디어 도운을 깨웠다는 뿌듯함과 자유로워진 호흡에 목하가 짝짝 박수를 쳤다.
“지금 몇 시입니까.”
“사시(오전9시~11시)에요, 서방님.”
그때부터 도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새 의대를 꺼낼 시간도 없이 어제 입었던 것들을 대충 주워 입고, 단정하게 틀어야 할 머리는 대강 하나로 묶었다. 지각. 있어본 적도 없고 있어서도 안될 일이 지금 그에게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늦잠을 자서.
“어? 나으리!"
입궐해도 한참 전에 입궐해야 했을 나으리께서 어찌 와실에서 나오시는가. 놀란 두칠이 저도 모르게 그를 쫓아갔다. 그러나 대답 대신 방으로 달려가 칼을 집어든 나으리께선 대문까지 갈 필요도 없이 몸을 날려 담장을 훌쩍 뛰어넘으시니, 두칠은 그 날랜 뒷모습에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
“위장군은 어디 갔지?”
도운은 늘 누구보다 먼저 입궐하여 황궁 전체를 순찰했다. 수하에게 맡기고 보고를 받으면 되는 일임에도 늘 그 넓은 황궁을 직접 살핀 것이다.
무관이기에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무어라 할 사람이 없는 조강까지 참여하여 대신들의 동태를 살피고, 현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보고를 올렸다. 그렇기에 비어있는 자리는 현에게 유난히도 크고 확실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금일 등청하지 않은 것 같사옵니다.”
“비번이던가?”
“이틀 전에 비번이었던 것으로 아옵니다.”
이틀 전에 쉬었다면 오늘 쉴 리가 없는데. 설마 도운이 늦잠을 잤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현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마음 한구석에 돌덩이를 올린 채 조강을 진행했다. 빨리 끝내고 싶건만 아침부터 할 말들이 많기도 많다.
그는 낮것상 받을 시각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정전에서 벗어나 도운의 사무실이 있는 연병장 쪽으로 연을 틀 수 있었다. 현은 운이 좋았고 도운은 나빴다. 때마침 바람처럼 달려 들어오던 도운이 황제의 행차와 딱 마주쳐 버렸으니.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허리를 정확한 각도로 숙이고 예를 갖추는 도운은 언뜻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마구 흐트러진 채 대강 묶여 있는 머리를 제외한다면. 분명 급히 달려온 것이리라. 현은 속으로 걱정을 한 저분 보태며 말없이 그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집안에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도운은 입에 발린 말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가 아무 일 없다면 없는 것이었다. 현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걱정이 의문으로 바뀌었다가 잠시간의 생각 후 실실거리는 웃음이 되었다. 저 머리. 뒤통수가 눌린 채 대강 묶인 저 머리는 누가 봐도 자다 일어난 것처럼 보였으므로.
“위장군.”
“예, 폐하.”
“어찌 이 시각에 입궐하였는지 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