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기나긴 하루 2
2.
지금이 농한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농사일이라는 게 작물을 심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 관리를 해줘야 하니 수시로 나와서 살펴야 했다. 대개는 다침 일찍 나와서 살피지만 뭔가 일이 있어 나와 있을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농사일 하다가 갑자기 자기네 마님이 완전히 빨가벗고 돼지처럼 꿀꿀거리며 기어오는 걸 본다면 그들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혹시 고개를 숙이고 기어간다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마을에 들어가서는 다 밝혀지겠지만 그때까지 만이라도 창피를 면하고 싶었다.
“꿀꿀아, 네 얼굴을 사람들이 확실히 알아 볼 수 있게 고개를 바짝 치켜들어 봐. 얼굴을 봐야 사람들이 네가 누군지 알아보지 않겠어.”
마을 사람들이 잠시만이라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자 양세현은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유아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었다. 양세현이 고개를 들며 꿀꿀거렸다.
“꿀꿀, 꿀꿀, 꿀꿀.”
유아가 말했다.
“꿀꿀아 농사짓던 사람들이 자기네 마님이 완전히 빨가벗고 꿀꿀거리며 나타나면 얼마나 놀랄지 생각하면 정말 재미있지 않니?”
유아야 재미있겠지만 자신은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미쳐버릴 지도 몰랐다.
“꿀꿀, 꿀꿀, 꿀꿀.”
“자 보렴. 벌써저 앞에 농사일 하는사람들이 몇 명 보이네.”
양세현의 눈에도 강렬한 햇볕 아래에서 농사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전부 허리를 굽혀 뭔가 일을 하고 있어 아직 네 발로 기어오는 양세현과 유아의 모습을 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꿀꿀, 꿀꿀, 꿀꿀.”
“보지 잘 보이게 가랑이 좀 더 벌리고 고개도 좀 더 바짝 들어봐. 그래 그렇게. 그렇게 고개 바짝 들고 먼저 마을로 기어가 봐. 난 조금 뒤에 따라갈 테니.”
이번에도 유아가 따라오지 않고 혼자서 기어가라고 하자 양세현은 깜짝 놀랐다.
“꾸울, 꾸울, 꾸울.”
“그렇게 꿀꿀거려도 소용없어 어서 기어가. 내가 도착할 때까지 마을에서 혼자서 잘 놀고 있어. 더 이상 여기서 꿀꿀거리지만 말고 어서 기어가!”
양세현은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정말 기절해 버릴 거 같았지만 유아의 마지막 말소리는 너무 매서웠다.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하다면 다시 그 무서웠던 유아의 채찍 맛을 볼 것만 같았다. 양세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햇볕 아래로 기어갔다.
“꿀꿀, 꿀꿀, 꿀꿀.”
허리를 숙여 일하고 있던 마을의 장정들이 갑자기 꿀꿀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세상에 다시없는 놀라운광경을 본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여인은 다리만 조금 위로 노출해서 보여도 수치가 되는 세상이었다. 여자가 외간 사내 눈앞에서 허벅지를 보인다는 건 너무 창피해서 며칠 동안은 집밖 나들이도 못할 정도의 창피한 일이었다.
여인은 그렇게 자기 몸이 사람들에게 보일까 조심해야 하는 세상인데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이 돼지처럼 꿀꿀거리며 네 발로 기어오는 모습을 보고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그들이 사는 마을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양세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얼굴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자기네 마님이라고 바로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양세현이 그들을 거의 지나칠 즈음에서야 누군가의 입에서 가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마님?”
그 소리를 듣고서야 모두들 비로소 눈앞의 여인이 성무장의 안주인이지 자신들의 마님인 양세현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몇 명이 나지막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잠시 뒤 나머지 사람들도 전부 주저앉았다. 그들 중 두 명은 한창 수로를 치우고 있었지만 그대로 수로속에 주저앉아 버렸다.
양세현은 그런 그들의 옆을 꿀꿀거리며 지나갔다. 경공을 사용한다면 좀 더 빠르게 지나갈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유아가 절대 용서하지 않고 다시 그 무서운 채찍을 날릴 것이다.
양세현은 너무 부끄러워 눈앞에 보이는 밭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싶었지만 그저 꿀꿀거리며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을 장정들은 길바닥 혹은 수렁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이나 멍하니 양세현을 바라보다가 양세현이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 걸 깨닫자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양세현의 뒤를 좇아 마을로 달려갔다.
양세현은 마을로 기어가며 두 번이나 더 농사일을 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만났다. 그들의 맨 먼저 보았던 장정들과 거의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들 모두 양세현이 지나간 뒤에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양세현이 마을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정신을 차려 마을로 달려갔다.
양세현이 마을로 들어섰을 때는 마을 어귀에는 한 사람도 나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장정들은 다 일을 하러 나가고아낙들은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고 있을 터였다.
양세현은 계속 꿀꿀거리며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가운데의 공터로 들어섰을 때 몇 명의 아주 어린 아이들이 공터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양세현은 그렇게 놀고 있는 아이들 속으로 다가가 주위를 돌며 꿀꿀거렸다.
아이들은 양세현의 모습을 보고도 어른들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신기한 것을 보는 눈으로 꿀꿀거리며 기어 다니는 발가벗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양세현은 계속해서 아이들 주위를 꿀꿀거리며 돌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구경하던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뭔가를 얘기하더니 일제히 엄마를 부르며 자기네 집으로 달려갔다.
공터에서 제일 가까운 집에서 아낙 하나가 아이에게 손을 잡혀 나왔다.
“도대체 얘가 뭘 보고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뭘 봤다는 거야? 빨가벗은 여자? 꿀꿀거리는 돼지? 여자가 빨가벗고 꿀꿀거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니?”
여자가 아이의 손에 잡혀 끌려나오다가 마침내 양세현을 보았다. 여인은 한참이나 멍하니 보고 있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잠시 뒤 여기저기서 아낙들이 나왔고 그들도 잠시 바라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마을 사람들이 공터로 모여들었다. 쉰 살 정도 된 촌장도 나왔다. 양세현을 보고 주저앉았던 장정들도 모여들었다. 양세현이 꿀꿀거리며 기어 다니는 공터 주위를 사람들의 벽이 둥글게 만들어졌다.
양세현은 계속 꿀꿀거리며 공터를 기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 끼리 정신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세상에 마님이야.”
“어휴 저게 무슨 꼴이야.”
“세상에 어떻게 마님이 빨가벗고.”
“마님이 미친 걸까?”
“정신이 멀쩡하면 어떻게 빨가벗고 저러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귀신이 붙은 건 아닐까요?”
“돼지 귀신이 붙는다는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하지만 저기 마님이 저러고 있잖아. 귀신 붙은 게 아니면 어떻게 마님이 어떻게 빨가벗고 저러겠어.”
“무당을 불러야 할까요?”
“누구 영험한 무당 아는 사람 없어?”
“구산촌 무당이 영험하다던데.”
“그 무당은 귀신 쫓는 건 엉터리예요. 귀신 쫓는 건 역시 가흥 두곡촌의 그 늙은 무당이에요.”
“아 그 할멈이 영험하다는 얘긴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젊은 아낙 하나가 말했다.
“전 직접 본 적도 있어요. 제가 시집오기 전 친정 바로 옆집의 아주머니가 귀신이 들렸는데 바로 그 무당이 내쫓았어요. 아주 친한 아주머니였는데 머리를 전부 풀어헤치고 마구 웃으면서 온 동네를 뛰어다니곤 해서 너무 무서웠는데 그 두곡촌할멈이 굿을 한 뒤로 다시 멀쩡해 졌어요.”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촌장이 말했다.
“나도 그 할멈 얘긴 들은 적이 있어. 근데 그 할멈은 너무 늙어서 여기까지 오기 힘들 건데.”
촌장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다른 늙은이 하나가 말했다.
“마차를 보내면 될 거야.”
“마차는 비싸잖아.”
“총관영감이 내주겠지. 마님이 저러는데 설마 총관영감이 돈을 아끼겠어.”
“어이쿠 방금 그거 봤어? 마님 겨드랑이랑 거기에 털이 하나도 없어.”
“어라 정말 털이 하나도 없네.”
“저건 왜 저런 걸까?”
“귀신이 아니고 역시 병이 든 건 아닐까?”
“세상에 빨가벗고 꿀꿀거리는 병이 어디 있어.”
마을 사람들이 꿀꿀거리며 기어 다니는 양세현을 보며 분분히 의견을 내놓는데 뒤쪽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소리 난 곳을 바라보았다.
유아가 한참을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다가 사람들 가운데로 걸어왔다. 한눈에 봐도 유아의 모습은 무림인이 분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분히 길을 비켜주었다.
유아가 공터 가운데로 걸어가서 말했다.
“사람들 반응이 어떨까 싶어서 계속 듣고만 있었더니 정말 재미있네. 하긴 꿀꿀이 널 보면 사람들이 귀신들렸다고 생각하기도 하겠다.”
양세현이 유아의 주위를 꿀꿀거리며 돌았다.
유아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 꿀꿀아 이제 발딱 일어나. 손은 아까처럼 머리 뒤로 돌리고.”
양세현이 발딱 일어나더니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끼었다. 양세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얀 알몸이 사람들 눈 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크고 흰 젖무덤과 그 가운데 오똑 솟아있는 빨간 젖꼭지 그리고 가는 허리와 깊은 배꼽, 가는 허리 때문에 더욱 커 보이는 엉덩이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올의 털도 없어 희고 볼록한 둔덕과 세로로 쭉 갈라진 균열이 전부 다 보이는 보지까지 사람들 눈에 모조리 드러났다.
“그대로 사람들 사이로 한 바퀴 걸어서 사람들에게 다 보여줘.”
양세현은 유아가 시키는 대로 그들 주위로 둘러서서 군데군데 보여있는 사람들 사이를 따라 걸음을 걸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렸다고만 생각한 양세현이 웬 어린 계집애의 말에 따라 시키는 대로 발가벗은 채로 걸음을 걸어보이자 영문을 몰라 했다.
양세현이 한 바퀴 돌고 나자 유아가 말했다.
“좋아 꿀꿀아 사람들이 궁금한 모양인데 네가 잘 설명해 줘.”
양세현은 사람들이 둥글게 원을 그린 가운데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린 채 서서 지금까지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설명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위세 당당하던 성무장이 혈신문에 점령되었다고 하자 양세현이 그들의 눈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 믿지를 못했다.
유아가 말했다.
“꿀꿀아 사람들이 잘 믿지 못하니 직접 보여 주야겠지 아까처럼 다시 돼지가 돼 보렴.”
양세현이 다시 네 발로 엎드려 기면서 꿀꿀거렸다. 희고 둥근 엉덩이가 잔뜩 치켜올려진 채 좌우로 흔들리고 아래로 늘어진 커다란 젖무덤이 앞뒤로 흔들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양세현이 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 같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를 데리고 있던 아낙들의 일부가 아이를 부둥켜안고 집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양세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꿀꿀거리며 기어 다닐 때는 귀신이 들린 줄 알고 아이들에게 못 보게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혹시나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할까 싶어 아이들을 데리고 피하려고 했다.
유아가 장풍을 날려 공터 가까이 있던 나무 한 그루를 부러뜨렸다. 날씬한 처녀의 허리 정도는 되어 보이는 제법 굵직한 나무가 유아의 장풍 한 방에 그대로 부러졌다.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던 아낙들이 일제히 제자리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