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곤륜파의 제자들 3
3.
대사형 조원형이 사제들을 이름으로 부를 때는 대단히 화가 났을 때다. 강소명은 다시 흔적을 찾았다.
대사형 조원형이 화가 나고 안 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모 유월련은 강소명에게는 낳아준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기억도 가물거리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울고 있는 것을 데려다가 지금까지 키워준 것이 바로 사모 유월련이었다.
때로는 업어주기도 하고, 울고 있을 때는 품에 안고 달래주고, 어릴 때는 같은 침상에서 재우며 옛날이야기도 해주었고 손수 목욕도 시켜주었다.
강소명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은 사부도 사형제도 아니고 바로 사모 유월련이었다. 무슨 수를 쓰던 사모 유월련을 찾아야만 했다.
흔적은 계곡 아래로 이어지다가 좁은 산길로 이어졌다.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갈 때 쓰는 길인지 아니면 산짐승이 지나다니며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는 좁은 길이었지만 길인 것은 분명했다.
사모 유월련은 이 길에서도 여전히 네 발로 엎드려 기어간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잠시 뒤 강소명은 발자국이 이상해 진 것을 느꼈다. 강소명은 이 변화를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홍소연이 재빨리 강소명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홍소연은 사모 유월현을 도와서 강소명을 키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강소명의 감정 변화를 가장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홍소명이 강소명을 달래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막내 사제. 뭔가 변한 게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야 해.”
대사형 조원형도 말했다.
“막내 사제. 지금은 상황이 위급해서 뭐가 단서가 될지 모르니까 네가 본 건 전부 말해줘야 해.”
조원형도 기분을 가라앉히고 어린 동생을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강소명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말했다.
“여기서부터 손바닥 자국은 변하지 않았는데 발자국이 바뀌고 있어요.”
홍소영이 물었다.
“어떻게 바뀌고 있니?”
“이렇게 네 발로 엎드려서 기면 땅바닥을 발가락 끝 부분으로만 디디게 되기 때문에 발 앞부분 자국만 남아야 하는데 이건 발끝만 디딘 것보다 훨씬 작게 아주 조그만 구멍만 있어요.”
다섯째와 여섯째 사형인 육전과 육만 형제가 동시에 물었다.
“그게 무슨 자국이야.”
두 사람은 쌍둥이 형제끼리 뭔가 통하는 거라고 있는 지 동시에 같은 말을 할 때가 간혹 있었다.
“아무래도 엄지발가락 자국 같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맞아요. 엄지발가락 자국이 확실해요.그리고 왼발과 오른발의 간격이 이렇게 벌어졌어요.”
강소명이 팔을 거의 넉자나 되게 벌리며 설명했다.
곤륜 제자들은 사모 유월련이 발가벗은 채로 가랑이를 쫙 벌리고 엄지발가락 하나만으로 바닥을 디디며 걷는 모습을 상상했다. 입을 벌리는 제자는 한 명도 없었다.
강소명이 설명을 마치고 계속 흔적을 추적했다.
흔적이 다시 이상해지고 있었다. 강소명은 이것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대사형, 흔적이 또 약간 바뀌었어요.”
“응 어떻게 된 거지?”
“여기서 부터 사모님의손자국은 보이는데 발자국이 안 보여요.”
다들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었다.
조원형이 물었다.
“그럼 물구나무를 선 채로가신 걸까?”
강소명이 고개를 저었다.
“바로 뒤에 남자 둘의 발자국이 정확한 간격으로 나 있는 걸 보며 그게 아닌 거 같아요. 사모님은 손바닥 만으로 기고 있고 남자 둘이 사모님의 발목을 하나씩 잡고 걷고 있어요.”
남자들이 뭘 생각하는지 민망해서 아무 말도 못하자 홍소연이 대신 물었다.
“그럼 사모님은 다른 남자에게 발목을 잡혀서 두 손만으로 기어가고 계신 거야?”
강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형들이아무 말도 없이 모두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들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모두들 사모 유월련의 성격이나 무공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는 사모 유월련은 깔끔하고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긍지가 높았다. 혀를 깨물고 자결을 하면 했지 결코 그런 모욕을 당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모가 남자들 앞에서 발가벗고 기어 다니다가 이젠 남자에게 발목을 잡혀 하체를 들어 올려 진 채 두 손만 사용해서 엉금엉금 기어가다니 그들은 정말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한참 이어진 침묵 끝에 조원형이 말했다.
“일단 찾고 나서 생각하기로 하자. 막내 사제 계속 흔적을 찾아라.”
강소명은 계속 흔적을 따라 달렸다. 산길은 산 아래로 내려가다 평지로 들어가자 밭들 사이로 난 농삿길로 이어지고 그 뒤 큰 관도로 이어져있었다. 강소명이 관도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멈춰서 머뭇거렸다. 조원형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뭔가 이상한 거라도 발견했느냐?”
“어라 여기서 부터 다시 혼자서기어가고 있어요.”
강소명이 다시 조금 달려가다 말했다.
“여기서 부터는 기지 않고 그냥 두 발로 걸어가고 있어요. 저기 농지가 있으니 혹시 누군가 본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조원형은 나이가 제일 많고 무공이 가장 고강할 뿐 아니라 강호에서의 경험도 제일 많았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 정도 넓은 농지가 이어져있는데 농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이상하구나. 요즘은 농번기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이 정도 넓이의 농지라면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나와 있어야 하는데 한 사람도 보이지 않다니 정말희한한 일이군. 어쩌면 뭔가 이상한 것을 보고 모두 숨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저쪽에 마을이 있으니 가서 물어보도록 하자.”
그들이 마을로 다가가자 웬일인지 마을 어귀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을 찬 무사들이 한꺼번에 여럿이 몰려오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원형은 반응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물어 볼 사람이 하나도 없어질지도 모르겠군. 누구 하나 붙잡고 물어봐야겠어.”
조원형은 몸을 날려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한 명 앞으로 뛰어 내려 소리쳤다.
“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여쭐 말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조원형은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워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부분이 있는데 이번에는 목소리에 일종의 기공을 실어 보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중년인도 약간 안심이 되는지 몸을 멈췄다. 중년인뿐만이 아니고 달아나던 사람들도 대부분 몸을 멈추고 멀찌감치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조원형이 부드러운 말소리로 물었다.
“저희는 지금 사람을 찾는 중입니다. 여러 분이 보시지 않았나 싶어서 여쭈려는데 이렇게 달아나시는 걸 보니 혹시 무언가 무서운 것이라도 보셨습니까?”
중년 사내는 뭔가 말을 하려다 못하고 망설였지만 조원형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태도가 공손하자 한참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예 보았습니다. 무사님이 찾으시는 사람이랑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들이 낮에 농사를 짓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무서운 마음에 무작정 마을로 도망쳐왔습니다요. 지금은 일이 바쁜 철은 아니지만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산이 약간 무너져서 일할 게 잔뜩 있는데 모두 무서워서 밭에 나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셨기에 그렇게 두려워하십니까. 저희는 의를 행하는 정파 무사들이라 악인이 있으면 저희들이 해치울 테니 걱정 마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강소명과 다른 제자들도 모두 주위로몰려들어 사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글쎄 우리가 오늘 아침부터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있는데 몇 시진 전에 갑자기 산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나오더군요. 산에서 사람이 나오는 거야 하등 이상할 게 없는지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오니까 글쎄 한 무리의 칼을 찬 무사들이 있고 그들 가운데에 글쎄 빨가벗은 여자 한 명이 기어오지 뭡니까. 소인은 아주 가까이에서 나뭇가지를 긁어모으고 있는 바람에 똑똑히 보았습죠.”
발가벗은 여인이 기어왔다는 대목에서 곤륜제자들이 모두 이를 깨물었다.
“백주 대낮에 건장한 칼 찬 무사들 여럿이 젊은 여인네 하나를 빨가벗겨서 몰고 오니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야 놀랄 수밖에요. 모두들 뭔가 사단이 일어날지 모른다 싶어서 곧장 마을로 도망쳐 왔습니다요.”
“여인네를 몰고 와요?”
“예 마치 말이나 염소 몰듯이 그렇게 몰고 왔습지요. 가까이서 보니 회초리 같은 것으로 그 빨가벗은 여자 볼기를 찰싹찰싹 때리면서 몰고 오더군요.”
조원형은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혹시 그 여인에게 뭔가 특징 같은 게 없었습니까?”
“그러니까 한 스물 몇 살 정도 된 것 같은 부인이었는데 정말 예쁘더군요. 아랫배나 허벅지에도 군살하나 없고 팔다리도 늘씬한 게 그런 미인은 소인이 태어나고 처음 보는 거 같았습니다. 다만 그…….”
“다만 뭡니까? 확실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어른 여자들은 모두 사타구니에 털이 나지 않습니까. 근데 그 여자는 털이 하나도 없더군요.”
자신들이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똑같았다. 조원형은 이를 깨물었다.
“기어가는 데 그런 거까지 보였습니까.”
“산에서부터 저기까지는 기어왔는데 우리들 앞에 와서는 일어서서 천천히 걷게 시키더군요. 일부러 사람들 있는 곳에서 구경거리를 삼으려고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그놈들이 모두 몇 명인지 보았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몇 명이더라? 전 너무 무서워서 숫자를 세지도 못했네요.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저기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이봐! 아까 그 칼 찬 놈들 모두 몇 명이었지.”
사내가 고개를 돌려 소리치자 멀찌감치 떨어져서 두 사람의 대화를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대답했다.
“사내는 모두 여섯이었어. 그 무서운 처녀는 조금 있다 뒤따라 왔고.”
“아, 그렇군요. 처음 여자를 둘러싸고 온 남자들은 모두 여섯이었습니다.”
“다시 다른 여자도 나타났다고요?”
“네 처음에는 못 봤는데 약간 떨어져서 열여덟이나 아홉 정도 하여간 스물은 약간 안 되어 보이는 처녀 하나가 조금 뒤를 따라오더군요. 그런데 말투나 행동으로 봐서 그 처녀가 사내들에게 명령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강소명이 본 흔적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 처녀라는 건 강소명이 본 사모가 마구 절을 했다는 그 여자일 것이고 발가벗었다는 여자는 사모 유월련이 분명했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러니까 저기 관도에서 저쪽으로 갔습니다요. 저 멀리에서는 마치 바람처럼 뛰어서 사라지더군요.”
조원형은 그들의 입을 막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부인은 아무래도 우리가 찾는 분 같습니다. 이름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관가에서도 아주 높은 분의 며느님 되십니다. 저희는 그 높은 분의 요청을 받고 그 며느님을 구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습니다만 설마 그놈들이 그렇게 못된 패악을 저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높은 분은 이런 이야기가 다른 데로 퍼지는 것을 싫어할 것입니다. 집안의 흉이 되니까요. 혹시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마을 사람들끼리만 아시고 이 이야기가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만에 하나 그 이야기가 그 높은 분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 마을 전체가 큰 경을 칠지도 모릅니다.”
사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예예,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단단히 입조심을 시키겠습니다요. 절대 이 이야기가 마을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요. 소인들을 믿어주십시오. 저 나리께서도…….”
사내가 몇 번이나 굽실거리며 애원하듯 말했다.
“예, 저희도 이 마을에서 들은 것을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안심하십시오. 여러분께서는 마을 밖으로 이야기가 퍼지지 않도록 주의하기만 하면 됩니다.”
계속 굽실거리는 사내를 뒤로 하고 곤륜 제자들은 일제히 관도 쪽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