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유월련 1 (32/148)



〈 32화 〉유월련 1

혈신 겁 유월련 편

1.

만물이 깊게 잠든 어둠 속에서 유월련은 눈을 떴다. 아직 어렴풋한 여명조차 비치지 않는 깊은 밤이라 사람들이 전부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고 유월련 스스로도 너무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다.

요즘들어 계속되는 상심이 일찍 잠을 깨운 듯싶었다. 유월련은 계속 자는 건 이제 틀렸다고 생각하고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튼  매일 새벽 일어나면 빼먹지 않고 수련하는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유월련이 운기행공하는 내공심법은 곤륜파의 비전 신공으로 이것을익힌 자는 곤륜파에서도  세 사람에 불과했다. 그리고 유월련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서도 그렇고 곤륜파에서 가장 깊은 공력을 지난 자는 곤륜파의 장문인이자 유월련의 남편인 현중우나 그들의 사형 유헌백이 아니라 바로 자신 유월연이라는 게 중평이었다.

유월련은 운기행공을 위해 가부좌를 틀고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마음 상태가 고르지 못해 바로 깊은 입정상태로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유월련은 지금 남편 현중의 첩이 낳은 아들의 돌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 남편 현중우와의 불화는 이미 칠팔 년이나 된 이야기라 새삼스레 거론할 필요가 없었지만 남편의 첩이 아들을 낳은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남편과 사이가 벌어진 뒤 유월련은 자신이 가진 모든 열정을 제자들에게 쏟아 부었다. 십여 년을 그렇게 제자들에게 정성을 들이자 다행스럽게 들인 고생이 헛되지 않아 일곱 제자 모두가 잘 자라주었다. 유월련의 일곱 제자는현중우를 사부라 부르고 유월련을 사모라 부르지만 실제 관계는 유월련이 그들의 사부였고 현중우는 오히려 그렇게 친근하지못했다.

대제자 조원형은 무공이나 지략, 그리고 마음 씀씀이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차기 곤륜파의 장문인감이었다. 하지만 현중우의 첩이 아들을 낳으면서 조원형의 미래가 반드시 밝지만은 않게 되어 버렸다.

곤륜파 장문인의 자리는 장문인의 대제자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문인에게 아들이 있을 경우 아들에게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남편의 첩이 낳은 어린 아들은 아직은 태어난 지 일 년밖에 지나지 않은 어린 아기에 불과하지만 차후에는 조원형의 최대 경쟁자가  수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조원형과 현중우의 어린 아들처럼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 큰 경쟁자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십이혈마의 난리 때문에 문파의 중진을 대거 잃어버린 곤륜파는 제자를 일찍 거두어들였고 사부인 현중우와 대제자 조원평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 정도에 불과했다.

만약 현중우가 삼십년 정도 더 장문인 직을 유지한다면 현중우의어린 아들은 서른 살이 되고 그때는 충분히 조원형의 경쟁자가 될 수 있었다.

유월련은 이런 현실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색하는 순간 아들도 낳지 못한 정처가 질투에 빠져 남편의 첩과 자식을 배척한다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유월련이 혼란한 마음을 다잡고 운기행공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객잔  멀리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대형 저기 묵고 있는 사람들이 곤륜파 장문부인 유월련과  제자들이 확실합니까?”

다른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밤에 확실히 확인했네. 유월련과 그 제자 일곱이 분명하네. 유월련은 내가 얼굴을 알고 있고 어린 계집애 하나에 어린 사내 놈 여섯이 유월련과 동행하고 있으면 곤륜파 제자 놈들이 아니면 뭐겠나.”

“대형이 유월련의 얼굴은 어떻게 아는 겁니까?”

“예전에 호주 성무장에서 무림맹 군웅대회가 열렸을  얼굴을 적이 있네. 성무장 양세현과 함께  있는  봤는데 그런 미인을 어떻게 잊어버리겠나.”

“흐흐, 양세현도 그렇게나 미인이라던데 두 여자 중 누가  미인이었습니까?”

유월련은  사내가 자기 얼굴을 품평하는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양세현과 자신의 미모 비교가 궁금하기도 했다.

대형이라 불린 사내가 대답했다.

“그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네.  여인 모두 경국지색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미모인데다가 몸매 또한 비슷한 데가 있어서 승부를 가리기가 정말 쉽지 않네. 군웅대회 당시에도 우리끼리 모여서 술자리를 가졌을 때  얘기가 나왔었네. 하지만 거기서도 정말 의견이 분분했다네. 차라리 서시와 양귀비 중에 누가 예쁘냐하는 질문이 더 쉬울 걸세. 서시는 날씬한 미인이고 양귀비는 풍염한 미인인데 그런 경우라면 사람들의 취향이 확실히 갈라지니까 쉬운 편인지. 그에 비해 양세현과 유월련은 둘 다 가슴이 풍만하고 허리는 잘록한데 다리는 또 길지. 이러니 정말 승부 가리기가 쉽지 않네. 다만 내 취향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내겐유월련이 좀 더 내 취향이라고 대답하겠네.”

유월련은 대형이라고 불린 자가 자신을 선택하자 조금 기분이 우쭐해졌다. 하지만 그들의 이어지는 대화를 듣고는 우쭐한 기분이 사라지고 화가 치밀었다.

“대형 진짜 청아선자라는 그 여자가 유월련을 제압할 수 있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네.  청아선자라는 여자가 보여 준 신위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네.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 이상한 수법들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네. 그 여자가 데리고 다니는 빨가벗은 여자들 봤지?  계집들이 정말 내가 생각도 못한 고수들이었네. 그런 대단한 여고수들을 어떻게 빨가벗겨서 데리고 다닐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네.”

“저는 처음 그 빨가벗은 여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홀딱 벗고 있으면서도 부끄럼을 모르길래 어디서 싸구려 갈보 짓이나 하던 계집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싸구려 갈보 짓을 하기에는 다들 너무 예쁘고 몸매도 정말 대단하지 않냐 싶기는 했죠. 그러다가 그 계집들이 펼치는 무공을 보고서야 그 청아선자라는 여자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 무공을 가진 계집들은 그런 식으로 홀딱 벗겨서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있을 정도라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 대단한 수법이 있구나 싶었죠.”

“나도  점이 아직도 이해가  가네. 그 여자들이 이지를 상실한 것도 아니던데 어떻게 그 청아선자라는 아양 떠는 꼴을 봐도 그렇고, 사람들 앞에서 홀딱 벗고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정도 무공을 가진 여자들을 싸구려 갈보도 안  짓을 태연히 하게 만드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네.”

“그런데 아무리 여자가 이상한 술법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곤륜파 유월련을 그 여자들처럼 홀딱 벗겨서 자기 종으로 부리겠다는 건 너무 만용 아닐까요?”

“나도 그런 점이 의문스럽지만 어쩌겠나. 우리는 그 여자 명을 따르는 수밖에 없네. 그 여자명령을 거절하고 배신했다가는 우리 경산방의 식솔들은 전부 그 여자 손에 죽을 걸세. 어차피 그 여자가 명령한 것도 우리더러 유월련과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유월련이 여기 묵으면 알려달라는 정도에 불과했네. 그나마 다행 아닌가.  애초 그 여자가 우리더러 곤륜파 사람들이 먹을 음식에 독이라도 타라고  줄 알았네. 곤륜파 유월련이 어떤 여자인데 그런 시시한 수법에 당하겠나. 만약 그런 짓을 벌렸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죽은 목숨이지.”

“하긴 우리 실력으로 유월련은 어림도 없는 얘기죠.  제자들이면 몰라도요.”

“그 제자들도 어림없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곤륜파 제자는 기껏해야 그 꼬맹이 세 명일세. 그것도  쬐끄만 막내 제자 말고 그 위의 열네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쌍둥이는 확실하지도 않네. 그 쬐끄만 꼬마도 워낙 어리고 덩치가 작아서 이기는 게 가능하다는 거지 조금만 더 덩치가 있었다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네.”

“곤륜파 무공이 그렇게나 대단합니까? 형님 실력이면 그래도이 주위에서는 당할 자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열서너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꼬마에게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구대문파가  구대문파로 불리겠나.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의 무공은 일반 방파의 무공과 비교할 수 없다네.”

“어이쿠, 그렇게 무공이 대단하면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도 듣는  아닐까요?”

“하하하하, 그건 안심해도 되네. 아무리 천하의 유월련이라고 해도 이십  넘게 떨어진 곳에서 나누는 대화를 무슨 수로 알아듣겠나. 하여간 유월련과 곤륜제자들을 확인했으니 어서  청아선자라는 여자에게 가서 알려주세.”

“그렇게 하죠. 그래도 전 그 청아선자라는 여자가 자기 장담대로 유월련을 홀딱 벗겨서 종으로 삼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잘하면 유월련의 빨가벗긴 몸뚱이를 주물러  기회 정도는 있을 거고 못해도 알몸 구경은 할 거 아닙니까. 더구나 무림의 소문난 고수이니 빨가벗겨 놓으면 더 대단할  아닙니까. 조금 전 얘기했던 그 여자들도 무림인이라 기녀원 같은 곳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몸매를 가진 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멀어졌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그 대형이라 불린 사내의 말대로 유월련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고 해도 이십 장이나 떨어져서 나누는 대화를 듣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월련은 과거에 기연을 얻어 시력과 청각이 극도로 뛰어났다. 거기에다 사방 모든 것이 잠든 고요한 밤이라는 조건이  해져 이십 장밖에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니  사람 이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경산방의 인물들 중  사람 같았다. 대형이라고 불린 자는 경산대호라는 별호를 가진 경산방의 방주일 것이고 다른 한 명은 그와 함께 경산육호라는 별호를 가진 그의 의형제 다섯 명 중의 하나일 듯싶었다.

유월련은 경산방 두 남자의 대화 내용을 생각하며 강한 분노와 함께 터무니없는 황당함을 느꼈다.

‘날 발가벗겨서 어쩌고 어째? 저런 삼류잡배들이 감히 나를 노리다니 곤륜파 유월련의 이름값이 이렇게나 떨어졌나?’

생각 같아서는 밖에서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을 당장 잡아다가 자기를 노린다는 그 청아선자라는 계집에게 끌고 싶었지만 유월련이 조금 모욕어린 언사를 당했다고 성미가 급하게 행동했다면 십이혈마의 난리 때 그런 공을 세울 수 없었을 터였다.

유월련은 사소한 일이라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두 번,  번 깊이 생각한 뒤에 행동했고 그런 조심성이 유월련을 지금까지 살아있게 만들었다.

당장 지금의 일만해도 너무 공교로웠다. 자신의 행방만 전해주면 된다면서도  자신에게 들리는 거리에서 자신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유월련의 경이로운 청력이 아무나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공교로웠다.

또 하나는 무림의 여고수를 발가벗겨서 데리고 다닌다는 청아선자라는 여자였다. 경산대호로 짐작되는 자가 아무리 삼류방파의 방주에 불과한 자라고 해도 상대가 고수인지 아닌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안목이라면 결코 십 년 가까이 한 지역에서 세력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경산대호가 고수라고 했다면 틀림없이 고수일 것이다. 그런 여고수가 발가벗고 돌아다닌 다는 건 말이 안 되니 그 청아선자라는 여인이 뭔가 사이한 수법을 사용한 게 분명한데 아무래도 과거 십이혈마가 사용하던 수법이 연상되어 무척이나 불길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자신들을 노리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유월련은 머리맡에 두었던 장검을 집어 들고 창밖으로 놈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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