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그녀들의 과거 2
2.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불과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그 무서웠던 십이혈마를 죽이기 위해 나섰다니.
세 여인이 구양선의 경지를 눈으로 보고 직접 느끼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구양선이 계속 말을 이었다.
“강호로 나와보니 십이혈마도 참 가관이더군. 훔쳐간 것을 함께 익히기는커녕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 각자 연구결과를 나눠가진 채 뿔뿔이 흩어져버렸지.
겉으로 보기에는 여기 성무장 자리에다 십이혈마가 함께 마궁을 만들고 해서 그렇게 안 보였을지 몰라도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질시하고 죽이려 들었지.
그리고는 역시 훔쳐간 단약으로 무공을 속성으로 익히고는 강호에서 마구 날뛰고 피바람을 일으키며 잘난 채를 해대고 있었지.
사실 그들에게 혈마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우리 혈신문 때문일 거야. 그들 스스로는 처음에 혈신을 칭했지만 강호에서 누구나 그들을 혈마라고 불러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굳어져버려서 혈신이라는이름은 누구도 기억 못하게 되어버린 거겠지.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피에 미쳐서 날 뛴 것도 제대로 된 혈신경의 무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거야. 하여간 난 섬에서 나온 뒤 그들 중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던 팔마를 찾아갔지.”
구양선이 침대에 걸터앉아 뭔가 아련한 추억에 잠긴 듯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사도백천 그 남자를 만났어. 흠, 이런 말을 하면 아무도 안 믿을지 모르지만 뭐랄까 조금 멍청한 데가 있는 남자였어.
팔마의 소굴에서 갑자기 날 만나자 위험한 곳에 나같이 어린 여자애가 있으면 안 된다면서 날 억지로 끌고 나갔지.
거기다 날 구한답시고 마구 소동을 부린 탓에 팔마에게 거의 죽을 뻔하면서도 결국은 날 끌고 나왔어. 자기는 팔에 큰 부상을 입고 말이야.”
양세현은 사도천이 팔마의 소굴에 잠입했다가 팔에 상처를 입고 온 일이 기억났다.
“정말 뭐 이렇게 멍청한 남자가 있나 싶어서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는데 나중엔 정말 어이가 없더군.
도와 달라는 말도 않았는데 자기 멋대로 날 구해주겠다며 별 우습지도 않은 소동을 벌이고는 결국 팔에 엄청난 상처까지 입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어쨌거나 날 도우려다 난 상처인데다 잘못하면 팔을 잘라야 할 것 같아서 팔을 치료해 줬지.
그랬더니 내 의술이 놀랍다면서 십이혈마와 싸우다 다친 사람이 많으니 도와달라며 이번에는 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곳으로 날 데려가더니 자기는 다시 십이혈마와 싸워야 한다면서 떠나더군.”
양세현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잊을 것인가.
어느 날 사도백천이 데려온 기이할 정도로 높은 의술을 가졌던 어린 소녀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소녀의 도움으로 자신들 즉 유월련, 한교운, 양세현 셋이 십이혈마 집단에 침투할 수 있었고 그것도 바로 십이혈마를 무찌른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구양선은 계속 말을 이었다.
“결국 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을 치료해 주고는 이 멍청한 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십이혈마를 상대하려나 싶어서 몰래 따라가 봤지.
십이혈마를 전부 해치울 때까지 내가 몰래 뒤를 따라다니며 몇 번이나 자기를 구해주고 도와줬는데도 그 남자 결국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어.
맨 마지막에 대마(大魔)를 상대하고 난 뒤에 날 발견하고는 그때도 내 손목을 잡고는 멋대로 날 항주까지 데려갔지.
우리 집이 바다 가운데 있다니까 항주에서 배를 태워주겠다면서 자기 멋대로 끌고 간 거였어.
도대체 바다가 얼마나 넓고 섬이 얼마나 많은데 어딘지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항주로 데려가는 거였어. 정말 어이가 없더군.”
구양선은 아련한 추억에 잠겨 눈을 감고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구양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여인 모두 구양선이그때 이미 사도백천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양세현, 유월련, 단명선 세 여인을 왜 지금처럼 만들어버렸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도백천과 동침했던 세 여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리라.
구양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침실 안을 걸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십이혈마도 죽었고 난 혈신경을 최종적으로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시장에 팔려가는 어린 소녀들 중에서 무공에 자질이 있는 계집애 여덟 명을 골라서 혈신문으로 데려가 무공을 가르쳤지.
그 애들이 바로 너희들이 낮에 본 애들이란다. 원래 여덟 명뿐이었는데 뒤에 다시 열네 명을 더 구해서스물둘이 되었고 유아를 제일 마지막으로 해서 전부 스물셋이 되었어. 원래 유아를 따로 살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히 시장에 갔다가 팔려가는 유아의 자질이 너무 뛰어나서 사지 않을 수 없었어.”
구양선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때문에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삼마가 다시 살아 돌아와 사도백천 그 남자에게 큰 상처를 입힐 거라곤 나도 미처 생각을 못했어.”
구양선이 유월련에게 다가가 그녀의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넌 그 남자가 육마랑 싸울 때 옆에 있었지. 그때 육마의 음약에 중독된 흉내를 참 잘 내더구나. 그것도 너답다고 해야 할까.”
유월련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까지 알고 있다니. 그때 분명 유월련은 사도백천을 유혹하기 위해 육마의 음약에 중독된 흉내를 내었다.
완전히 발가벗은 알몸으로 십이혈마에게 사로잡혀 성노예가 된 여협들의 흉내를 내며 사도천이 자신을 안아주지 않으면 당장 죽어버릴 것처럼 행동했다.
구양선이 손가락으로 유월련의 턱을 간질이며 말했다.
“후후, 그 남자 그런 방면으로는 정말 멍청했어. 여자가 부리는 수작 같은 건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네가 진짜 음약에 중독된 줄 알고 널 살리려고 이러 저리 날뛰다가 결국 너랑 동침했어. 멍청한 남자 같으니, 남자랑 동침해야만 살아나는 음약 따위가 세상 어디에 있다고…….”
구양선이 두려움에 잠긴 유월련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사실 네가 이해가 가. 네 남편 현중우가 널 아내로 맞이하기로 약속하고도 널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데다 십이혈마와 싸우려고 곤륜산에서 중원으로 나와 사도백천 그 남자를 만나보니 현중우의 인품이 정말 하찮아보였겠지.
거기다 결정적으로 현중우가 첩을 들이려고 하는 사실도 들켰고 말이야. 그러니 네가 현중우에게 한창 실망하고 있을 때 그 남자가 나타나 너를 그 지독한 위기에서 구해주자 그에게 빠져서 그런 식으로 유혹한 거지?”
유월련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선은 그녀의 내심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고 있었다. 유월련은 구양선이 더욱 두려워졌다.
구양선이 유월련의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넌 그때 진짜 육마의 비약에 중독된 상태이긴 했어. 바보같이 한순간의 실수로 네가 정파 무림의 첩자라는 게 육마가 있는 자리에 발각되는 바람에 꼼짝없이 잡힌 거였지.
가족 같은곤륜파 사람들을 전부 죽인 그들에 대한 복수심과 오랜 첩자 생활에서도 들키지 않았던 사실 때문에 상황을 낙관하고 제대로 주위를 살피지 못한 거였지.
육마의 수하들에게 윤간 당하려하자 자살하려 한 것도 진짜였지. 철천지 원수들에게 윤간 당하느니 차라리 인생을 포기 해버리는 게 더 쉬웠지. 하지만 네가 자살하려고 하니까 육마가 네게 뿌렸던 그 음약, 지독한 저질이지만 그 음약이 널 살린 거였어.
네가 음약에 중독되어 남녀 간의 환락에 정신이 빠져 온통 그 생각만 하느라고 자살 같은건 생각도 못했으니까. 재미있게도 그게 네 정조도 지켜줬지.
네가 음약에 중독되어 하는 행동이 재미있어서 널 바로 윤간해 버리지 않고 처녀 상태 그대로 사람들 앞으로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처녀막까지 보여주면서 정파의 계집들은 처녀들까지 이렇게 음란하게 행동한다며 희롱하느라고 널 건드리는 걸 뒤로 미뤘으니까.
항문에다 꼬리를 끼우고 두 손으로 보지를 까 벌리고 널 주물러 달라고 사람들에게 막 애원하고 입으로 개랑 말의 물건도 빨고 말이야. 나중에는 사람이 안되면 개랑 박게 해달라고 막 애원하던 소리가 아직도 기억나.
그러다 그 남자가 널 끌고 다니던 육마의 수하들을 죽이고 널 구해줬을 때가 기억나. 그때 널 해독시킨 것도 사실 나였어. 그 남자가 널 보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내가 마침 가까이 있는 찬물에다 해약을 타뒀지.
그 남자는 그 찬물로 그냥 해독된 걸로 보고 네 중독이 깊지 않았다고 생각한 거고 네가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생각 못하게 된 거였어.”
구양선이 그때를 생각하는지 손을 입술에 대고 조금 웃었다.
“난 그때 그 남자가 허둥대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와. 그러고 보니 그때 네 행동도 참 대단했지, 그 짧은 순간에 네가 육마의 수하들에게 알몸으로 끌려 다니며 벌인 추태를 전부 기억하고는 그 남자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순식간에 그 남자를 유혹하던 그 꼬락서니라니…….”
구양선은 웃음을 멈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네가 마신 찬물에 해독약을 탈 때 네가 어린 처녀의 몸으로 원수들에게 그렇게 희롱당한걸 비관하고 자결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사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약을 같이 넣었어.
그때 네가 하는 모습을 보고 난 그 약의 효능이 그렇게 대단한가 한동안 오해했어. 그 뒤에 여러 번 실험을 해보고서야 그 약의 효능이 대단한 게 아니라 네 성격 탓이라는 걸 알았지만 말이야.”
유월련은 엎드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모두 구양선의 말 그대로였다. 음약에서 깨어나자마자 상황을 단숨에 파악하고는 사도백천의 입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를 유혹하고 결국 그와 동침하는데 성공했다.
구양선이 피식 웃었다.
“사실 네가 별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윤간 당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알몸으로 사람들 사이로 좀 끌려 다닌 게 전부였으니까. 게다가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정도야 당시에는 정말 별거 아니기도 했지. 당시에 그런 일 당하지 않은 여자가 드물었고 또 넌 처녀의 몸으로 용감하게 직접 발가벗은 알몸으로 십이혈마의 무리에게 잠입하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그때 벌였던 추태도 마찬가지야. 음약에 중독되어 제 정신도 아닐 때 벌어졌던 일에 어떻게 책임을 묻겠어. 강간 따위를 당했다고 세상에 다시없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 뒤에 그런 일 전혀 없었던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네 남편 현중우와 결혼해서 곤륜파를 되살린 것도 전혀 나쁘지 않아. 오히려 그런 점은 칭찬해 줘야 할 거야. 단지 세상 사람들이 네게 가지는 환상이 조금 우스울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