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한교운 1
第 十七 章. 한교운
1.
한교운 주위의 경치를 둘러보며 입에서 탄성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남해검문에서 불과 이백 리도 안 되는 곳에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이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마 사람들이 자주왕복하는 관도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가 깊은 산으로 둘러져 있어 교통이 불편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듯싶었다.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는 조그만 강들이 여러 개 흐르고 있었다.
또 그 조그만 강물들 사이사이에 약간의 논밭이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장원은 제법 그럴 듯하게 지어져 있어 주인이 제법 운치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주루는 삼층으로 제법 높게 지어져 있었는데 아마도 멀리 경치를 감상하라는 뜻으로 높게 지은 것 같았다.
이런 경치는 저 멀리 십만대산이나 계림으로나 가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으로 이렇게 남해검문에서 이백 리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행운이었다.
자신의 제자들인 전아와 선아, 용아가 최근 강호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그 친구가 여기의 경치가 정말 훌륭하다고 소개했다고 했다.
그리고 셋 다 직접 다녀와서는 계속 칭찬을 해대는 바람에솔깃해져서 여기에 들러보았는데 과연 자신의 제자들이 계속 칭찬하고 자랑한 것도무리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루에 대한 자랑도 대단했다.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는데다 술맛이 일품이라는 것이었다.
한교운은 제자들의 말을 떠올리며 주루로 들어갔다.
주루 안은 이 마을 자체가 그다지 큰 마을이 아니라 그런 건지 문 앞의 계산대에는 사람이 없었고 주루로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을느끼자 안에서 점소이가 뛰어나와 한교운을 맞았다.
점소이는 등에 검을 맨 여인이 혼자 주루로 들어오자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친절하게 말했다.
“여협께서는 여기 처음으로 오셨나 보군요.”
한교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점소이가 계속 빠르게 말했다.
“여기는 원래 사람이 적은 동네라 평소에 손님이 많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경치가 워낙 볼만해서 간혹 찾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경치를 보려면 일층은 곤란하고 이층이나 삼층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삼층에서 보는 경치가 제법 볼만합니다. 어떠십니까? 삼층으로 가시겠습니까?”
한교운은 좋은 경치를 보려면 아무래도 높은 곳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제자들도 삼층에서 보는 경치가 정말 절경이었다고 칭찬했었다.
점소이는 한교운을 삼층으로 안내한 뒤 찻물과몇 가지 간단한 군것질거리를 조그만 접시에 담아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잣과 낙화생 그리고 해바라기 씨를 잠시 드시는 사이에 술과 음식을 대령하겠습니다. 그럼 술과 음식은 어떤 걸로 가져다 드릴까요?”
한교운은 벽에 걸린 음식이름들을 보고 몇 가지 주문한 뒤에 술은 여아홍을 주문했다. 음식과 술 역시 제자들이 알려준 것들이었다.
한교운의 주문을 들은 점소이가 말했다.
“누가 알려주셔서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오셨나 보군요. 말씀하신 음식과 술이 저희 주루가 특별히 자랑하는 것들입니다. 시골구석이라 안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저희 주루 주방장의 솜씨가 정말 보통이 아닙니다. 웬만한 대도시의 큰 반점 주방장에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점소이는 약간의 수다 섞인 자랑을 한 뒤에 내려갔다.
한교운은 점소이가 따라준 차를 마시며 조금 놀랐다.
술이 나올 때까지 마시라고 내온 차가 의외로 양질의 차였기 때문이다. 남해는 차를 재배하는 곳이 많아 양질을 차를 구하기 쉬운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조그만 시골구석 주루에서 이런 차를 마시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한교운은 차를 마시며 창밖에 펼쳐진 경치를 구경했다.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어 마음대로 둘러 볼 수 있었다.
평지에서 보았을 때도 훌륭한 경치였지만 삼층 높은 곳에서 바라보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였다. 더구나 사람이 적으니 더욱 아름다웠다.
한교운이 주변의 경치에 흠뻑 빠져있을 때 점소이가 주문한 술과 음식을 들고 왔다.
음식이 담긴 조그만 접시가 네 개였고 따로 술 한 병이 정갈한 백자 주전자에 담겨왔다.
제자들이 말했던 대로 음식과 술 모두 훌륭했다. 음식은 나쁜 냄새나 맛이 전혀 섞이지 않은 정갈한 음식들이었고 술도 대단히 훌륭했다.
하지만 한교운은 자신 앞에 놓인 음식과 술을 전부 다 먹고 마실 수 없었다. 네 개의 접시에 담긴 음식을 절반 쯤 먹고 술은 네 잔을 마셨을 때 한교운은 정신을 잃고 탁자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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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운은 정신을 차리자 잠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던 일은 기억났지만 그 뒤로 지금 갑자기 정신이 든 것이다.
그리고 한교운은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탁자 위에 반듯하게 눕혀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자신은 남해검문의 문주로서 당금 천하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였다. 또 과거에 기연을 만나 웬만한 독은 자신에게 전혀 침범하지 못했다.
그런 자신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또 정신을 차려보니 발가벗겨져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한교운은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강간을 당하지 않았나 의문이 들었지만 하체에 느껴지는 감각은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아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교운은 자신의 하체를 내려다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사타구니에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야 할 체모가 단 한 올도 없이 매끈했고 때문에 세로로 갈라진 음부의 균열이 그대로 다 보였다.
한교운은 황급하게 손으로 겨드랑이를 만져보았다. 음부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겨드랑이에도 털이 약간 있었는데 역시한 올도 만져지지 않았다.
한교운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있는 장소는 조금 전 자신이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주변 경치를 구경하던 바로 그 주루의 삼층이 맞았다.
하지만 탁자 위의 음식과 술은 전부 치워졌고 외출할 때면 언제나 등에 매고 있던 자신의 장검도 사라졌다.
물론 자신에게서 벗겨낸 옷자락도 전혀보이지 않았다.
한교운은 자신의 음부와 겨드랑이 체모가 전부 사라진 걸 별견하자 바로 십이혈마의 수법이 떠올랐다. 과거 십이혈마는 무림의 여자를 잡으면 언제나 지금의 자신처럼 발가벗기고 음모와 겨드랑이 같은 몸의 체모를 전부 제거해 버린 뒤 노예로 부렸다.
그리고 한교운 자신도 과거 사도백천을 도와 십이혈마와 싸울 때 그런 대법을 사용해서 체모를 전부 제거하고 발가벗은 채 십이혈마의 거처로 잠입해서 간자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설마 지금도 그때처럼 십이혈마의 대법을 쓰는 자가 다시 강호에 등장했고 자신이 그 제물이 된 것일까 의심이 들었다.
한교운은 내공을 돌려보고 전혀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내공이 무사하다고 해도 크게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만독불침은 아니라도 해도 웬만한 독에는 내성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이렇게 간단히 정신을 잃게 만드는 수법을 사용하는 자들이라면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훤한 대낮에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밖으로 뛰어나갈 수도 없었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활동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십이혈마라는 유래 없는 악당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정체를 숨긴 채 활동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사람은 없을지 몰라도 상대가 일반 농민들이라면 아무리 강호의 여인들이 세속의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발가벗은 채로 대로를 뛰어가는 일은 쉽게 행동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교운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누군가 대화를 나누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돼지고기 만두도 좋지만 양고기 만두도 맛있단 말이야. 둘 다 장점이 있는 건데 왜 우기는 거야.”
“아니 만두는 돼지고기로 만들어야지 돼지고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걸 왜 양고기로 만들어?”
“그러니까 말했잖아. 그 사람들은 종교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그래서 양고기로 만두를 만들어 먹는단 말이야.”
“하지만 양고기는 냄새가 심해서 맛이 없을 걸.”
“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양고기로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해서 냄새가 거의 없이 맛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열네댓 살 정도로 어린 소녀들의 목소리였다. 두 소녀는 음식 재료에 대해 다투면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한교운은 당황했다. 한교운은 당연히 처음 계단을 올라오는작자가 자신을 발가벗긴 악당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양고기와 돼지고기로 다투는 두 어린 소녀가 자신을 정신을 잃게 하고 발가벗긴 무리와 무슨 관계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교운은 두 소녀가 삼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밟고오자 당황해서 급히 탁자를 세운 뒤 그 뒤로 숨었다.
상대가 아무리 같은 여자에다 어린 소녀들이라고 해도 그들 앞에 발가벗은 채 나설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난 돼지고기 먹지 양고기는 안 먹을래. 내가 그 사람들 믿는 종교를 믿는 것도 아닌데 왜 맛있는 돼지고기를 놔두고 맛없는 양고기를 먹어.”
“아니 이년아 그러니까 별미라고 했잖아. 누가 돼지고기 먹지 말고 양고기만 먹으라고 했냐. 별미니까 한 번 먹어볼만 하다고 몇 번을 말해.”
두 소녀는 여전히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가지고 다투면서 삼층으로 올라왔다.
두 소녀는 삼층으로 올라와서 탁자가 세워져 있자 둘 다 동시에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우와, 저거 뭐야? 탁자 세우고 그 뒤에 숨었어.”
“꼴에 빨가벗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부끄러웠나 보네.”
“그러게 말이야. 좀 있다 훨씬 더한 것도 당할 주제에 겨우 빨가벗은 게 부끄럽다고 숨어?”
“그래도 무림에 이름이 좀 알려진 계집이라서 그런가?”
“하긴 남해검문 정도면 꽤 이름 있는 문파라서 체면 생각도하긴 해야지.”
“거기다 자기가 제자들 잔뜩 거느린 문주님이고 그 유명한 한교운 여협이니까 말이야.”
한교운은 탁자 뒤에서 소녀들의 말을 들으며 비로소 이 소녀들이 자신을 발가벗겨서 눕혀둔 사람들과 한패라는 사실과 또 상대가 남해검문의 문주라는 자신의 신분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교운은 탁자 옆에 있는 의자를 무기로 삼기 위해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의자를 부숴서 사용할까 싶었지만 차라리 의자 그대로 기형병기로 사용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남해검문의 문주 한교운은 검술만 능한 게 아니라 이런 기형병기를 다루는 솜씨도 일가견이 있었다.
문제는 탁자 건너편에서 자신을 놀려대는 저 쬐끄만 계집애 둘을 어느 정도 손봐줘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죽여 버리자니 아무리 자신을 발가벗긴 무리와 한패라고 해도 너무 어린 나이가 걸렸고 그렇다고 저렇게 건방진 계집애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한교운이 어느 수준으로 저 건방진 꼬맹이들을 손봐주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소녀 중에 하나가 말했다.
“한교운 빨랑 나와. 네 내공이 그대로라는 거 다 알고 있어. 하지만지금이라도 바로 보지 까벌리고 나와서 애교부리면 조금 덜 맞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