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돌아온 한교운 2
2.
‘돌아가서 돌아오고 싶지 않으면 여기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이 지옥 같은 곳에 누가 돌아오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설마 홍아선자님과 녹아선자님은 이곳이 내게 정말 쾌락을 준다고 생각하고 계시나? 내가 진짜 사람들 앞에서 빨가벗고 보지에 매를 맞으면서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한교운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두 소녀의 이야기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아직 남아 있었다.
홍아가 계속 말을 이었다.
“네 제자들인 전아, 선아, 용아 같은 애들에게 네 비밀을 얘기하지도 않을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여기 두 언니도 네 비밀을 강호에 퍼뜨리지는 않을 거야.”
홍아는 한교운이 마음속으로 걱정하던 부분을 정확히 맞췄다.
“이 마을로 오는 길에 정자나무와 네가 보지를 문지르고 왔던 사당을 기억하지?”
한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하고 있어요. 선자님.”
“거기 소상 아래 바구니에 네 옷이랑 장검 같은 네가 여기올 때 가져왔던 소지품들이 전부 들어 있어. 거기까지 뛰어가서 개목걸이는 거기 벗어두고 그걸 입고 돌아가면 돼. 그리고 돌아올 때는 거기서 입고 있는 거 전부 벗고 바구니에 넣어두고 개목걸이를 목에 찬 뒤에 여기로 걸어와. 돌아와서 우리 만나러 백운산장까지 올 필요는 없고 여기 여선루에서 일하고 있으면 돼. 잘 들어 걸어오는 거야. 길에서 사람을 만나도 숨지도 말고 경공도 쓰지 말고 그대로 걸어오는 거야. 혹시 길에서 만난 사람이 귀찮게 치근덕거리면 그때 위협적으로 무공을 사용하는 건 좋아. 그 사당에서부터 너는 우리 혈신문의 암캐야. 그러니까 옷 따위는 절대 입을 수 없어. 알겠지?”
한교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홍아가 명령했다.
“자 그럼 뛰어가.경공 쓰지 말고 뛰어가.”
한교운은 홍아의 명령이 떨어지자 남쪽 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전소저와 임소저의의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미쳤어? 저걸 그대로 돌려보내. 그리고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그럴 거면 저년 뭐 하러 고생해서 잡은 거야?”
“너희들 설마 저 계집이 진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리가없잖아. 아무리 보지에 매 맞고 절정을 맞이하는 계집애라고 해도 즐기려면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방법이 있어. 저년 같은 미인은 빠구리 할 남자 구하기는 식은 죽 먹기라고.”
홍아와 녹아는 두 여인의 질타에도 그저 웃기만 했다.
여선촌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달려오자 그때부터 한교운은 해방감을 느꼈다. 저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지옥에서 진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여기서부터 남해검문까지 빨가벗고 뛰어갈 수도 있었다.
한교운은 여선촌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곳 교차로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만났다. 평소라면 사람의 기척을 먼저 느끼고 알몸을 보이기 부끄러워 어딘가로 몸을 숨겼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너무나 큰 해방감에 저 사람에게 자신이 해방된 것을 자랑하고 싶었다.
한교운은 발가벗은 몸뚱이를 전혀 감추지 않고 그 사람을 지나 달렸다.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민이 아니라 과객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발가벗은 채 달려가는 한교운을 놀란 눈으로 한참이나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교운은 홍아가 말한 사당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소상 뒤편에서 바구니 하나를 찾아내었다.
바구니를 열어보자 한교운이 여선촌을 처음 방문했을 때 입고 왔던 옷과 장검 그리고 은자와 은표까지 그대로 다 들어 있었다.
한교운은 자신의 옷을 보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난 보름간의 지옥 같은 생활이 이제 끝나려고 하고 있었다.
한교운은 서둘러 속옷을 먼저 입어 보았다. 여인의 몸 앞부분을 가리는 연녹색의 앞가리개였다. 어쩌면 홍아 선자와 녹아 선자가 자신을 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교운은 대법을 받으면 절대 옷을 입을 수 없는 몸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십이혈마의 소굴에 간자로 잠입하기 위해 한교운 자신이 직접 비슷한 대법을 받아 보았다. 그때도 똑같이 몸의 체모가 전부 사라지고 옷을 입을 수 없었다. 벌레 따위가 몸에 다가오지도 않았고 옷을 입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
대신 뭔가 몸에 걸치려고 하면 걸친 자리가 발갛게 부어오르면서 미친 듯이 가려웠다.
한교운은 혹시 그때처럼 옷을 입고 무섭게 가려울까봐 걱정했지만 시간이 상당히 지나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다. 단지 오랜만에 옷을 입어서 조금 거북한 감각을 느낄 뿐이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한교운은 그대로 옷을 모두 입고 등에 장검을 매었다. 이제 다시 당당한 남해협녀 한교운으로 돌아왔다.
딸랑딸랑!
한교운은 그대로 사당 밖으로 나가려다가 목에 걸린 개목걸이의 방울이 울리자 개목걸이 푸는 일을 깜빡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교운은 살짝 웃으며 개목걸이를 벗어 바구니에 넣고 바구니를 원래 있던 소상 뒤쪽에 놔두고 사당 문을 열고 나왔다.
온 세상이 화창해 보였다.
******
한교운이 남해검문으로 돌아오자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막내 제자 민아가 제일 반가워했다.
“사부님 그동안 어디 가셨던 거예요? 갑자기 연락도 안주셔서 사저들이 무척 걱정했어요.”
열여섯 살로 남해검문에서 가장 나이 많은 제자들인 전아와 선아, 기아, 지아가 반갑게 맞이했다. 네 명은 한교운이 십이혈마를 무찌르고 제일 먼저 같은 시기에 받아들인 동갑내기 제자들로 생일에 따라 서열을 정하긴 했지만 서로 간에 아무런 격의 없이 지내고 있었다.
같은 열여섯 살이지만 생일 제일 빠른 대제자인 전아가 말했다.
“사부님의 무공으로 보아 특별히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걱정한 건 아니에요. 그저 연락이 없으시니 강호에 무슨 일이 새로 일어난 건 아닐까 걱정한 거죠.”
그들보다 한 살이 적은 제자들 중에서 제일 말괄량이 기질이 심한 용아가 폴짝 뛰어나오며 말했다.
“어린 사매들은 사저들이 잘 가르쳤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불과 보름이지만 분명히 진전이 있었어요.”
같은 열다섯 살인 해아, 원아, 린아도 나와서 오랜만에 만난 사부에게 인사했다.
해아와 린아는 한족이 아니라 여기 남해 일대의 소수민족과 서역인의 혼혈 출신이라 다른 아이들과 외모가 살짝 달랐다.
한교운은 다시 제자들을 만나자 벅찬 감동을 느꼈다. 속으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랬다가는 아이들이 의문을 품을 것이 뻔했다.
한교운이 웃으며 말했다.
“중간에 뭔가 약간 일이 생겨서 미처 연락하지 못했다. 인명과 관련된 사건이라 급박하게 일을 처리하다보니 이렇게 늦었구나.”
한교운의 제자들은 사부가 뭔가 협행을 했다고 생각했다. 한교운은 협행을 하고도 제자들에게 그것을 특별히 자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주 간혹 어린 제자들이 밤에 이야기를 조르면 옛날이야기와 함께 자신의 협행 이야기를 해줄 때가 간혹 있었지만 그럴 때 말고는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교운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동안 수련한 무공을 펼쳐보게 해서 일일이 지켜 본 후에 잘한 점은 칭찬해 주고 잘못된 점은 전부 수정해 주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막내 제자인 민아의 검술을 지쳐보니 아직 나이가 어리고 힘이 없는 한계는 있었지만 열 살짜리 어린 아이치고는 정말 훌륭하게 검술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뿌듯했다. 용아의 말대로 자신의 나이 많은 제자들이 잘 가르친 게 분명했다.
한교운은 제자들에게 자시 수준에 맞는 새로운 초식 하나씩을 가르쳐 준 뒤에 다들 물러가게 했다.
아이들에게 초식을 전수하고 저녁을 먹고 나자 벌써 날이 어두워져 잠을 잘 시간이었다.
한교운이 옷을 벗고 침상에 눕자 가슴이 싱숭생숭했다. 만약 자신이 아직 여선촌에 있었다면 여선루 일층 연회장에 불을 밝혀두고 보지 때리기 놀이를 할 시간이었다.
자신은 방울 달린 개목걸이 하나를 빼면 완전히 빨가벗은 채로 탁자 위에 올라가 있고 그 아래에서 여선루의 손님이 회초리로 자신의 보지를 때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개목걸이에 달린 방울을 딸랑거리며 울고불고 그에게 마구 애원하며 폴짝폴짝 뛰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보지를 앞뒤로 마구 흔들고 사방에다가 발길질을 마구 해대며 탁자 위에 주저앉고 있었을 것이다.
한교운은 여선촌에서의 지옥 같은 시간을 잊기 위해 서둘러 잠을 자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보지에 매를 맞는 순간의 기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교운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침상에 누운 채로 남해검문 특유의 내공심법을 운용했다. 예전에도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내공심법은 운기하는 것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가장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공력을 운용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결국 한교운은 전전반측 밤새도록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동녘이 밝아오기 시작한 새벽녘에야 겨우 약간 잠을 잘 수 있었다.
날이 완전히 밝아오고 조금 늦게 잠에서 깨어나자 한교운은 조금 전 잠깐 잠들었을 때 꾼 생생한 꿈이 그대로 기억났다.
꿈속에서 한교운은 여선루에서 발가벗은 알몸으로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주변 탁자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마구 희롱하고 발가벗은 몸뚱이를 마구 주물러댔다.
그리고 갑자기 한교운은 알몸에 방울달린 개목걸이하나만을 목에 차고 그들 사이를 네 발로 기어가고 있었다. 탁자에 앉은 은가장의 두 소년과 전소저, 임소저가 회초리로 사정없이 한교운의 등과 엉덩이를 때렸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바뀌어 이번에는 남해검문 한 가운데서 탁자 하나를 놔두고 한교운의 제자들이 탁자에 올라간 한교운의 보지를 매질했다.
자신의 대제자 전아, 말괄량이 용아. 그리고 막내제자 민아가 손에 회초리를 들고 한교운의 보지를 매질하며 말했다.
“망할 년, 감히 우리 유서 깊은 남해검문의 명예를 실추시켜. 너 같은 건 보지가 찢어지게 맞아야 해.”
한교운은 탁자 위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애원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소녀가 잘못했어요. 남해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이 못된 보지년의 씹보지를 찢어지게 때려주세요.”
한교운은 보지를 찢어지게 때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 너무나 생생해 보지에 회초리가 떨어지는 순간과 보지에 느껴지는 그 끔찍한 격통까지 그대로 기억나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한교운은 자신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 해방되어 돌아왔고 개목걸이를 차고 음식을 나르고, 탁자에 올라가 보지를 얻어맞는 건 이제 과거의 일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교운은 지난 보름간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내가 진짜 지난 보름간을 그리워하고 있단 말인가? 진짜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고 개목걸이를 차고 음식을 나르고 보지에 매 맞는 걸 원하고 있단 말긴가?’
한교운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런 끔찍한 지옥 같은 일들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거기다 자신은 당당한 남해검문의 문주이며 스무 명이나 되는 제자를 거느린 스승이고 또 십이혈마를 무찌른 중원 전체의 영웅이었다.
세상에 고통을 쾌감으로 느끼고 고통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은 몸을 보이고 기뻐하는 여인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과거 십이혈마의 소굴에 잠입했을 때 십이혈마의 대법에 당해 발가벗고 사람들에게 알몸을 전부 보이고 만져지며 살아가는 강호 여협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분명 남자들의 눈길과 손길을 기뻐하던 여인도 존재했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