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 제9화 호기심 - 초희
"컷. 오케이. 잘나왔는데....좋았어.."
모니터를 바라보던 장감독의 얼굴엔 미소가 서렸다. N.G 몇번 없이 만족할 만한
화면이 나온 것이다.
"어이 다음 장면 준비 좀 하고.."
A.D 한 명이 조수들을 데리고 다음 장면을 준비하느라 조명을 옮기고 소품을 이
동시키고 하느라 분주했다. 스튜디오 촬영이 아닌 야외촬영은 돌발변수가 많기
때문에 스텝들의 신경이 곤두서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몇 장면이라도 쉽게 나와
준다면 스텝들도 좋지만 연기자들도 한결 수월하게 진행된다는 경쾌한 기분이 되
어 연기도 잘되는 경향이 있다.
초희는 다음 두 씬은 등장을 않기 때문에 잠시 쉬려고 대본을 들고 그녀의 차로
갔다. 외제 승합차를 개조한 그녀의 차는 야외촬영 때마다 그녀의 안락한 휴식처
가 되어 주었다.
커피 한 잔을 타서 그녀는 장의자에 길게 몸을 뉘였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약간 쌀쌀한 날씨에 움추려있던 몸이 풀리며 나른함이 밀려왔다.
담배를 피우려 핸드백을 뒤지다보니 명함 한 장이 떨어졌다.
-환타지아...환상을 판다고?
초희는 담배를 피우며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납치라도 해준다고? 후훗...정말이지 그래줬으면 좋겠어...
담배를 반쯤 피우던 초희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명함에 씌어진 번호를 하나씩 눌
렀다.
전화는 착신전환을 해두었는지 신호가 가는 중간에 소리가 바뀌었다.
"여보세요?"
병원에 왔던 그 남자일까? 나직하면서 듣기 좋은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
다.
"여보세요?..."
초희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괜한 전화를 했다고 망설이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저...환상을 판다고 했죠?"
"네..그런데....성함이?..."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요.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참고로 하려는 것뿐이죠. 한번의 상담으로 끝
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니까요. 각자가 갖고 있는 환상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을
해야 고객에게 만족할만한 환상을 제공해줄 수가 있죠. 상담자료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
"미리 준비되어 있는 프로그램이 아닌가요?"
"그런 것을 원하시면 어느 놀이공원에나 가면 있는 마술의 집이나 환상의 집을
가셔서 하루를 즐기시지요."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닌가요?"
"어떤 종류의 환상을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그리고 어차피 이 나라 안에서
의 상행위의 대부분은 탈법 내지는 편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던가요?"
사내의 말을 들을수록 초희의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아울러 지금 대화를 하고있
는 남자에게도. 그날 병원에서 잠시 보았던 그 남자의 인상이 참 좋았다는 기억
과 함께.
"언제라도 그 환상 속으로 들어갈 수는 있는 것인가요?"
"당신이 원하는 환상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준비를 해야하니 시간이 좀 걸리지
요. 뭐 평범한 환상이라면 그리 오래 걸릴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일본에서 유행한다는 이미지클럽 같은 것은 아닌가요?"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신다면 두세 시간 후면 도쿄 긴자거리에 즐비한 이미지클
럽의 싸구려환상을 체험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을 원하신다면 좋은 곳을
소개시켜 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내와 말을 하면 할수록 초희의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 같지 않고 은근히 초희의 자존심을 건들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떤 것을 판다는 거죠?"
초희는 약간 신경질적이 되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팝니다. 어떤 구체적인 샘플을 원하시면 인터넷 사이
트를 알려드릴 수도 있고....대면상담을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대면상담
을 해야 구체적인 것이 나올 수 있겠지요. 상담을 원하십니까?"
"글쎄요...."
초희는 말을 흐렸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
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희씨 준비하십시오.."
노크소리와 함께 A.D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연락 드리지요."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쉽게 찾아오는 기회는 아닙니다. 충분히 생각한 후에 전화 주십시오, 초희씨. "
그의 말 뒤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초희의 가슴은 갑자기 콩닥거렸다.
-나를 알고 있었어....
서둘러 전화를 끊고 냉수를 한잔 마셨을 때까지 초희의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
다.
"초희씨 빨리 나오세요. 늦었습니다.."
A.D의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