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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아◀ 제11화 [채팅 2 - 영신] (11/28)

                  ▶환타지아◀ 제11화 [채팅 2 - 영신]

      

      우편함에 들어있는 공과금 통지서와 편지를 들고 영신은 아파트 문

      을 열었다. 텅빈 집안엔 뉘엿뉘엿 스러지는 저녁노을이 던지는 붉

      은 기운만이 몇 줄기 거실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자동응답기에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표시가 보였다. 버튼을 누르자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난데, 오늘 일이 있어서  못 들어갈 꺼야......"

      

      영신은 불도 켜지 않고 거실에 오두마니 앉아 스러지는 햇살을 보

      았다. 머리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의욕도 나지 않았다.

      그러고 있기를 얼마, 영신은 무엇엔가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이

      미 사방은 어둑신해 있었다. 커피물을 올려놓고 영신은 방으로 가

      서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 속에는 스물 아홉의 여자가 처연히 서있

      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난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것 같아....

      

      그녀의 상념은 삐이익 하는 주전자 벨소리에 깨어졌다. 머그잔에 

      가득 커피를 타들고 영신은 컴퓨터를 켰다.

      

      대화방에 들어간지 이삼 분도 안되어 벌떼처럼 달려드는 무수한 사

      람들.

      

      < 하얀호수님은 여자? 여자면 빨리..> < 아까부터 기다렸잖아..>  

      <혹시 여자분? 맞으면 빨리 들어와요...>

      

      여자에 기갈 들린 사람들만 모여있는 곳인지 이곳에만 들어오면 수

      없이 많은 메모들이 그녀에게로 날아오곤 한다. 개중에는 < 너무 

      튕기지 마 끝내줄께..> 운운하며 노골적인 유혹을 하는 사람들도 

      꽤있었다. 아이디를 바꾸든지 해야지...

      

      영신은 대화방의 방제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환타지아에게서 메모가 날아온 것은. 묘한 설레임을 주던 사람. 

      

      < 호수님 숙제는 다 풀었나요?>

      

      숙제? 아, 그거..나의 환상...

      

      영신은 반가운 마음에 자판을 두드렸다. 

      

      <아직 풀지 못했는데...과외라도 할까봐요..>

      

      그의 메모를 기다리고 있는데 메모 대신 대화방에서의 초청이 날아

      왔다. 키워드 하얀호수의. 키워드로 자신의 아이디를 치자 묘한 느

      낌이 들었다. 

      

      << 하얀 호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 FANTAZIA] 어서오세요

      [ 하얀호수] 반가워요

      [ FANTAZIA] 키워드가 맘에 들던가요?

      [ 하얀호수] 좀 느낌이 이상했어요..

      [ FANTAZIA] 어떻게요?

      [ 하얀호수] 뭐랄까...내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들고 있는 느낌  

                  이랄까..

      [ 하얀호수] 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달까...

      [ 하얀호수] 아무튼 좀 복잡한 느낌이에요..

      [ FANTAZIA] 그렇군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 FANTAZIA] 고1때 비오는 날 교과서 뒤에 적혀있는 제 이름 석자  

                  가 갑자기 빛을 내며...

      [ FANTAZIA] 두 눈으로 빨려드는 느낌에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죠

      [ FANTAZIA] 아무런 생각도 못하다가 그냥 울고 말았어요...

      [ 하얀호수] 지아님은 여자처럼 감성이 풍부하신가봐요.

      [ FANTAZIA] 그렇지도 않아요 그날은 이상하게도...

      [ FANTAZIA] 오늘은 술 안마시죠?

      [ 하얀호수] 네? 아...네..

      [ FANTAZIA] 다행이군요 밤에 혼자 술 마시는 여자..왠지 위태해   

                  보여요.. 

      [ 하얀호수] 그걸 노리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요?

      [ FANTAZIA] 있겠지요..

      [ 하얀호수] 지아님은 아닌가요?

      [ FANTAZIA] 글쎄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요..

      [ 하얀호수]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

      [ FANTAZIA] 전 평균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균치의 야성(?)도 

                  가지고 있겠지요?

      [ 하얀호수] 후후훗..

      [ FANTAZIA] 무슨 뜻의 웃음?

      [ 하얀호수] 엉큼 떠는 남자는 아니라는 생각의 웃음이요..

      [ FANTAZIA] 좋은 뜻인가요?

      [ 하얀호수] 좋을 대로 해석하세요.

      [ FANTAZIA] 그럼 좋게 받아들이죠. 참 숙제는 풀었어요?

      [ 하얀호수] 아뇨..

      [ FANTAZIA] 저런....

      [ 하얀호수] 그때 그 제안....아직도 유효한가요?

      [ FANTAZIA] 네?

      [ 하얀호수] 머리를 매만져준다던....

      [ FANTAZIA] 아 네.. 그럼요...

      [ 하얀호수] 거기에서부터 숙제를 풀어볼 생각이에요..

      [ FANTAZIA] ..............

      [ 하얀호수] 지아님..

      [ FANTAZIA] 네.

      [ 하얀호수] 왜 말이 없으세요.

      [ FANTAZIA] 생각좀 하느라고요..

      [ 하얀호수] 너무 이상한 여자 같은가요?

      [ FANTAZIA] 아뇨. 뜻밖이어서요 그리고..

      [ 하얀호수] 그리고?

      [ FANTAZIA] 당신의 상처가 꽤 크구나하는 안타까움도 함께...

      [ 하얀호수] 연민은 거절입니다.

      [ FANTAZIA] 그런 건 저도 싫어요...좋습니다 당신에게 무릎을 빌  

                  려드리죠..

      [ 하얀호수] 후훗..좀 이상하다 기분이..

      [ FANTAZIA] 내키지 않으면 안하셔도 됩니다

      [ 하얀호수] 아뇨...

      [ FANTAZIA] 언제 해드릴까요?

      [ 하얀호수] 지금요...

      [ FANTAZIA] 어디서요..

      

      어디에서. 영신은 말이 막혔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대라 해서 

      마구 말을 내뱉은 것은 아닐지. 하지만 영신의 마음과 달리 손은 

      자판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호텔의 이름을 대고 방을 잡고 연락해 달라고 삐

      삐번호까지 입력을 시켜버렸다. 화면 위엔 자신이 쓴것이라고 받아

      들이기 어려운 글자들이 가득했다.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 환타지아님이 퇴장하셨습니다 >>

      

      영신은 그가 사라진 빈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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