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 제14화 그녀의 요구
"컷.. N. G.."
장감독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
고 연기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 벌써 스물
다섯번째의 N. G였다. 연기자들의 얼굴에 죽겠다는 표정이 스치고 지
나갔다. 힘든 건 연기자들만이 아니었다. 스텝들의 표정도 N.G사인에
한껏 일그러지고 있었고, 무거운 반사판을 들고있던 나이 어린 조명보
는 한숨을 폭 내리쉬며 '또야' 하는 눈빛으로 감독을 원망스러운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음..아..."
메이크업을 손보느라 잠시 의자에 앉는 초희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배어나왔다.아직 다섯씬이 더 남아 있었다. 그것을 마저 끝내
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까 싶었다. 이젠 어디에서건 좀 누워서 쉬
고만 싶었지만 감독과 스텝들 앞에서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자기 출
연분의 촬영을 끝내고 버스에 올라 자고있는 엑스트라들의 모습이 부
러웠다.
예정시간보다 세시간을 더 끌고서야 촬영은 끝이 났다. 지친 표정의
스텝들과 연기자들이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비몽사몽 졸던 초희는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며 내일 또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쳤다.
-쉬고 싶어.....
화장대 앞에 앉아 콜드크림을 바르고 습관적으로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는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어릴 적 꿈을 이
룬, 그래서 한없이 지쳐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커다란 거울 속에서 반
쯤은 잠에 취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런 것이었을까?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샤워기 아래서 그녀는 물 속에 자신의 눈물이
섞여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이상하게 울음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웅웅 울리고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비누칠을 하고 비누거품을 씻어내고
타올로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수증기로 뿌옇게 된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고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여전히 지쳐있는 모습.
-네가 꿈꾸던 게 이런 것인 줄 알았니?
거울 속의 여자는 지친 듯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욕실을 나와 침실로
들어가자 화려한 침대가 을씨년스러웠다. 혼자 자야하는 침대 치곤 너
무 커 보였다. 처음 이 집으로 왔을 땐 커다랗고 화려한 침대가 너무
좋았었는데...
담배를 피워 물고 초희는 거실에서 와인 한잔을 따라왔다. 떫은 듯 부
드럽게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와인조차 서글프게 여겨졌다. 누구라
도 함께 있으면 좋으련만. 메니져처럼 계산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
닌 그저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을
것 같았다.
문득 초희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끌어다
낮에 걸었던 번호를 다시 누르기 시작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닐까? 새벽인데...
뚜르륵.
신호음이 들리자 초희는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나 신호음
이 계속 되는 중에도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제발....
열 번쯤 신호가 가자 드디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지금 얘기할 수 있나요?"
"네..잠시만요.."
잠을 자다 깨어나 잠을 쫓으려 담배를 피우려는 듯 라이터 켜는 소리
가 희미하게 들렸다.
"음..네..말씀하세요.."
"저 초희예요, 낮에 전화했었죠."
"아 초희씨.. 늦었군요, 촬영이 지금 끝났나보군요.."
"네.."
"어쩐 일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셨습니까?.."
"저...납치도 해주신다는 말...사실인가요?"
"......."
사내는 말이 없었다. 대답 대신 길게 담배를 빨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안되나요?"
"음..외롭고...무척이나 힘이 드시는군요.."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욕실을 나오면서 멈춰버린 눈물샘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음을 알았다. 얼굴 위로 길게 흘러내리는 따스한 액체를 느낀
것이다.
"역시..힘들겠죠?"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충분히 생각해보고 말하는 겁니까?..결론부터 말하자면 할 수 있습니
다만.."
"그럼 해줘요. 지금이라도 당장.."
가능하다는 그의 말에 초희는 앞 뒤 잴 것도 없이 요구를 했다.
"파장이 클텐데요..위험하기도 하고.."
"제가 원하는 환상은 모두 이루어준다면서요.."
"그렇기는 합니다만..이삼일 더 생각해보신 후에 그때도 같은 생각이
라면 다시 전화 주십시오.."
"알겠어요.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함이 없을 거예요."
"위험한 납치라..충분히 매력적인 환상이지요..그럼.."
전화를 끊고나자 방엔 다시금 적막만이 가득했다.
[[ 하얀 호수 ]]
영신은 자신의 머리가 길지 않음을 원망하고 있었다. 철부지 같던 고
교시절 남학생들과의 미팅이 있을 때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집
어보며 아무리 세팅을 해봐도 학생 티가 나던 짧은 커트머리를 원망해
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수리 근처에서 시작된 그의 손길이 머리를 따라 목언저리까지만 내
려왔다 다시 정수리로 돌아가는 것이 싫었다. 조금만 더 머리가 길었
더라면...목 뒤에서 등으로 내려가는 그곳에 그의 손길이 스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솜털들이 곤두서며 발가락에서 시작된 전기가
머리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길이 조금만 더 아래로,
조금만 더 앞쪽으로 와주었으면...
-내가 지금 왜이러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뜨거운 피가 그의 손길에 이끌려 서서히 달아오
르고 있었다.
"휴우..."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코끝에 와 닿는 자
신의 숨결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남편의 손길 아래에선 쉽사리 뜨거워
지지 못하던 숨결이 그리고 육체가, 낯선 남자의 손길 앞에서 이렇듯
달아오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영신은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그가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볼까 두려워 몸을 돌렸다. 그의 발을 보고 누워 있다가 그의 몸을 보
고 누운 것이다. 뺨에 그의 허벅지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 전해졌다.
-그의 물건도 이렇게 꿈틀댈까?
"어디 불편해요?.."
"아뇨"
불현듯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처음 방에 들어설 때 그대로로 어떤 가
정의 기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변함없는 남자의 손놀림과 목소리가 영신에게 도발적인 생각을 갖게
했다. 자기만 달궈지고 있는 지금 상황이 조금은 억울했던 것이다.
"저..."
"네? 무슨..?"
"자주 이러시나 보죠?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에게?"
"후후..그렇게 느끼셨습니까?.."
"꼭 그렇지는 않지만...손놀림이 익숙해 보여서요."
"잘하고 있다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런 제의는
처음이었습니다. 당신과 채팅할 때부터 낯익은 모습을 많이 발견했어
요. 지금도 그렇구요.."
"낯익은 모습이라뇨?"
"뭐랄까?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어
요. 편안하고 할까요.."
그랬다. 그녀도 그에게서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었다. 그런데 그도 자
신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다니.
-내게도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 남아 있었나?
남편과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 자신에게서 그런 모습들을 빼앗아간 줄
알았었는데.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이요?.."
"지난번에 하얀 호수가 어디 있냐고 물어봤었지요?"
"네..가르쳐주실 겁니까?"
"저도 잘 모르겠다고 했었죠. 제가 그걸 찾게 도와주실래요?"
영신은 반듯이 누우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은 사람을 편안하
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눈 같았고, 지금 그 속엔 자기의 누운 모습이
담겨있었다.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대답 대신 영신은 팔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싸고는 아래로 끌어당겼
다. 두툼한 그의 입술이 영신의 입술에 닿았다. 남편과는 다른 느낌의
입술. 그러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첫키스를 할 때처럼 가슴이 마구
뛰는 게 어쩐지 영신은 자신이 소녀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어쩌면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고 했었지요?.."
입술을 떼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안경에 자신의 파운데이션이 묻
어 뿌옇게 흐려있었다.
"찾게 해주면 당신의 안경을 닦아드리지요."
그의 얼굴이 다시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것을 보며 영신은 전신이 어
떤 기대로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