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 제2부 No.4
2-7. [[ 행복한 연인들 ]]
< ....영화배우 초희를 납치한 범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으로부
터 몸값 요구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범인은 인터넷 전자메일
을 통해 경찰과 메니져에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알려왔는데 5억 원을
달러로 환전하여 국내 모외국계 은행을 통하여 스위스의 구좌에 전신
환으로 송금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자메일에는 초
희씨가 납치될 때의 상황을 담은 동화상도 같이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범인이 두명 이상의 컴퓨터 전문가로 조직된 단체로 보고 KIST
의 협조를 얻어 수사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수사본부에
나가있는....>
두사람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와인을 마시며 T. V를 보고 있
었다.
"대단하군. 나 같은 사람은 몸값이 얼마나 될까? 오천만원?..."
초희는 말없이 승환을 보고 웃음을 보냈다. 그 웃음 속에는 당신같이
평범한 삶을 자기가 얼마나 갈구하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라는 쓸
쓸한 자괴감이 담겨 있었다.
"당신의 환상은 무척이나 비싸군.."
승환의 말투에는 비아냥이 서려 있었다.
"아니예요. 납치되었다가 그냥 아무 일도 없이 풀려나는 것이 오히려
더 의문이 될 것이라고 해서 저렇게 하기로 했었어요. 돌아가서는 잔
뜩 거짓말을 해야겠지만..."
"탄로 나지 않을까?"
"연기하는 것이 제 직업이잖아요.."
"아무튼 당신과 같이 있다는 것이 지금은 뿌듯해지는걸. 이렇게 비싸
고 귀한 사람을 안을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아.."
"놀리는 거예요?"
"놀리다니. 황금보다 비싼 당신을 다시 한번 안아 볼 수 있을까?"
"싫어요, 놀리면..."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아서..."
"키스해줘요.."
승환은 초희의 얼굴을 다정하게 감싼 채 입술을 부딪혀갔다. 꿈처럼
부드러운 입술과 혀였다.
"음....으음..."
승환의 목덜미로 나긋하고 부드러운 팔이 감겨왔다. 초희의 입술과 혀
에 아직 남아있는 와인의 향을 음미하며 승환은 천천히 그녀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위로 올렸다.
"으음....잠깐만요.."
초희는 옷 속으로 파고드는 승환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승
환이 기분 상하지 않게 배려해주는 말투였다.
"....?"
승환은 왜 그럴까 싶어 말없이 초희를 바라보았다.
"아직 술이 남았잖아요...그리고 저렇게 달빛도 좋은데.."
창밖을 보니 아닌게 아니라 달빛이 너무도 좋았다. 잔잔하고 은은한
은빛의 빛살들이 숲 위로, 그들이 앉아있는 통나무집 위로 포근하게
내려안고 있었다.
"그럼 우리 술을 들고 산책이나 갈까?"
"산책이요?"
"음. 아침에 산 위에 올라보니까 우리가 도착했던 곳 근처에 작은 호
수가 있더군."
"그래요?"
"음. 거기에서 어젯밤에 우리가 헤쳐온 환상 같은 안개가 피어오른 것
같아."
"그럼 가요, 우리.."
옷장 속에 두툼한 모직남방과 사파리가 있는걸 낮에 봐두었기에 추위
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승환과 초희는 옷을 입고 주머니에 와인병
과 와인잔을 넣고 밖으로 나왔다. 랜턴불빛에 의지해서 어젯밤 걸어온
그 길을 되짚어 걸으며 둘은 한밤중에 소풍을 가는 기분에 적잖이 들
떠 있었다.
"당신, 어젯밤에 보니까 소녀처럼 천진스러운 곳이 있더군.."
"무슨 말이에요?"
자신을 천진한 소녀 같다고 말하는 승환의 말에 초희는 무슨 뜻인가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후우..후우.."
승환은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입김을 뿜어대는 흉내를 냈다.
"아 그거요? 하하하...."
승환의 말에 초희는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한참을 웃어대던 초
희는 웃음이 멈추자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더니
갑자기 샐쭉해진 표정으로 승환을 흘겨보며 말했다.
"지금 그 말, 저 놀리는 거죠?"
"놀리다니...그런 게 아니고 참 재미있어서..어젯밤엔 솔직히 조금 긴
장을 했었거든. 게다가 안개는 점점 짙어져 가는데 길은 처음이고. 제
대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옆에서 천진난만하게
당신이 안개를 만드는 것을 보니까 조금은 여유가 생기더군. 여자도
저렇게 여유가 있는데 나는 뭔가 싶기도 하고..."
"그러지마요. 자꾸 그런말 하면 어디로 숨고 싶어지잖아요.."
"그러면 안되지..."
승환은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초희를 바라보았다. 절대 어디론
가 숨어들거나 도망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초희는 그런
승환의 표정이 재미있어 그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달빛 아래에서 환상
속의 두 연인은 키스를 하며 좁은 오솔길을 걸어갔다.
익숙하지 않은 밤오솔길을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걷던 두사람은 넝쿨
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야 말았다. 땅에 쓰러진 그들은 쓰러진 자세 그
대로 반듯이 누워 하늘을 보았다.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맑은
별빛과 달빛이 그들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하하하...."
"호호호...."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사람은 웃기 시작했다.
자유. 그랬다. 그것은 자유였다. 끝없이 길게 이어질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짧은 만큼 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양복과 넥타이를 단
정하게 맨 채로 끝없이 서비스정신에 입각한 웃음을 짓지 않아도 되었
고, 자동차 뒷좌석이나 분장실 소파에서 대본을 외우며 새우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자유. 무엇보다 이렇게 땅에 쓰러져 잊고 살았던 하늘이
며 별을 보며 웃을 수 있는 자유.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나 있다는 자
유였다.
웃음이 잦아지자 둘은 서로의 입술을 다시 탐했다. 피라니어떼처럼 달
려드는 기자도 없었고, 약정 수신고를 채우지 못했다고 쏘아대는 지점
장의 따가운 눈총도 없는 곳에서 둘은 길고 긴 키스를 했다.
"으음..."
쌀쌀한 공기 탓인지 초희의 입술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얼음 사탕 같아..당신 입술이..."
"으음...아파요..."
"뭐가?.."
"등에 돌이 박혔나봐요..."
"이런..."
승환은 초희를 안아 일으키고는 등을 털어 주었다.
"우리 이런 식으로 가다간 해가 떠도 호수까지는 못 가겠어요.."
"후후...싫은가?"
"그런 건 아니에요.."
키스를 해오는 승환의 입술을 초희는 살짝 피했다.
"호수까지만 참아요..."
"못 참으면?.."
"오늘밤 제 곁에 얼씬도 못하게 할꺼예요.."
"그건 무섭군..."
"그러니까 호수에 도착할 때까지만 참고 있어요.."
"잘 참고 있으면 상이라도 줄 건가?"
"음....그건 봐서요.."
"그럼 기대를 하고 있어야겠군.."
승환은 초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에 대한 화답인 듯 초희 역시
승환의 허리를 나긋한 두팔로 가볍게 안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