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一 章 옥수무정(玉手無情)
강호를 질타하는 여인들은 많고도 많았다. 그러나 세속의 규범을 탈피해 여느
남정네 못지않은 호방함과 뛰어난 무공으로 강호가 비좁다 여기는 여걸(女傑)
들의 숫자는 손으로 꼽을만했다.
이는 천성적으로 남자에 비해 무공을 익히기에 불리한 신체를 타고난 여인들
의 한계였다. 그러나 그 한계를 극복하게 된 여인들은 강호에 이름을 드날렸고,
수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강호의 여걸이라 이름 붙여진 여인 중에서 냉혹한 손속과 뛰어난 미모로 뭇
호걸들에게서 동경과 공포가 함께하는 미묘한 감정을 일으키는 한 여인이 있
었다. 바로 옥수무정, 혹은 옥수선자(玉手仙子)라 불리는 강희연(康熙姸)이었다.
흑단 같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투명하도록 하얀 소수(素手)를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미모에서 오는 동경과 경악스러울 정도로
강력한 무공에서 비롯된 공포가 늘 함께 했다. 특히나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성정으로 남자를 우습게 여기고 정을 주지 아니하니 무정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월궁의 항아가 부끄럽지 않을 미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서른이 다 되도록 성
혼을 하지 못한 이유도 이에 있었다. 눈에 차는 남자를 찾지 못함은 물론이거
니와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녀의 냉혹한 손속을 두려워하는 탓에 배필을 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강희연이 지금 사내의 품안에서 얌전한 고양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부채
살처럼 퍼진 긴 속눈썹을 아래로 향한 채 쌔근거리며 자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그녀의 손에 숙어간 자가 수십에 이른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문득 강희연의 봉목이 짙은 속눈썹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잠들은 사내의 얼굴로 향했다. 헝클어진 머리가 채 마르지
않은 것은 지난밤의 뜨거웠던 열락의 순간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짙
은 두 눈썹과 단정히 감긴 눈. 우뚝 솟은 코가 사내다운 기상을 보여주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두툼하여 정감이 갔다. 딱히 미남이라 칭할 수는 없는 얼굴
이나 호감을 주기엔 충분한 외모였다. 하지만 강희연의 눈에는 송옥과 반안이
눈앞에 있다 해고 거들떠보지 않을 여인이었다. 그녀의 시선에 이처럼 가득
한 애정이 담기는 것은 오직 이 사내를 바라보고 있을 때뿐이리라.
강희연은 조심스레 사내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갔다. 자신에게 여인이 가질 수
있는 쾌락이 무엇인지를 일러준 사내였다. 그녀의 입맞춤엔 사내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뜻이 한껏 담겨져 있었다.
촉촉한 입술이 볼에 닿았기 때문일까? 사내는 작은 반응을 보이더니 눈을 떴
다.
“으음... 일찍 일어나셨군요.”
사내가 약간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깨운 거라면 더 자도록 해.”
“아니오. 누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으니 잠들기가 어렵군요.”
입에 발린 소리였다. 그러나 강희연은 행복했다. 분명히 깊은 의미를 갖지 않
은 말임을 알고 있음에도 가슴에서 이는 행복의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흐응, 거짓말!”
“거짓이라니? 내 증거를 보여 드리죠.”
사내는 거침없이 이불을 걷었다. 강희연은 재빨리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
사내의 시선을 쫓았다. 강희연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늠름한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양물(陽物)이 곧게 서 있었다. 강희연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 밤새 자신의 몸에게 쾌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려준 것임을 알고 있지만
햇살아래 드러난 사내의 양물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그녀라지만 부끄러
운 일이었다.
“아이, 몰라~”
그녀의 비음이 노래처럼 울렸다.
“허! 정이 못 믿으시겠다면 몸으로 증명하죠.”
“아잇, 왜 이래?”
사내는 강희연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강희연은 버둥거렸지만 사내의 몸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니 밀어내지 않았음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내의 뜨거운 입술이 강희연의 목을 탐닉했다. 온 몸에 한 줄기 전류가 흐르
는 느낌에 강희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입술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숨길은 강희연의 목에서
만 머물지 않았다. 동그란 어깨를 타고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두 손으로 가렸
던 두개의 수밀도가 사내의 얼굴이 밀어내는 힘을 감당치 못한 손으로 인해
그 풍만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그녀가 호방하여 여염집 규수마냥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였어도 사내
경험이 그다지 많다할 수는 없었다. 사내의 손길을 많이 타지 않은 탓인지 아
니면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인지 그녀의 유실은 천연의 분홍색을 뽐내고 있었다.
사내의 입술 사이로 촉촉한 혀가 비집고 나왔다. 타액을 머금은 혀는 부드러
운 곡선을 그리며 여인의 가슴을 애무해갔다. 몇 번의 회전 끝에 사내의 혀는
강희연의 유두에 이르렀으며, 자극적인 쾌감에 강희연의 몸이 비틀렸다. 사내
는 거침없이 그녀의 유두를 입안에 머금었다. 그의 입안에선 혀의 율동이 멈
추지 않았고 강희연의 비음이 점차 강도를 더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리에 있던 사내의 손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희디 흰 옥주를 지나 무
릎에서 잠시 노니는가 싶더니 그의 손길은 갑작스레 난폭한 움직임으로 강희
연의 음부를 향했다. 그녀의 허리가 침상위로 들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
내었다.
“아!”
사내의 손길이 어떻게 움직였던 것일까?
그녀의 입에서 감격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칠 줄 모르는 쾌락의 탐닉은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무색하게 했다.
강희연은 이불로 몸을 가렸다. 이틀 사이 절정의 문턱을 밟은 게 몇 번이던
가? 눈앞에 사내는 아직도 타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일까?
“이제 그만!”
“왜요?”
“너무 무리하면 몸에 안 좋아.”
“아뇨. 전 괜찮은데요. 누님이라면 앞으로 수십 번도....”
강희연은 손가락을 세워 사내의 입을 막았다.
“내가 힘들어.”
떨리는 음성이었다.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여인의 항복을 받아낸 사내의 마음은 수백만
대군을 지휘하여 대륙을 정벌하는 것보다 더 기쁜 법이었다. 사내 역시 강희
연의 말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강희연은 진심이었다. 갑작스레 너무나 심한 자극을 받게 되면 무리가 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현상을 이미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강희연은 이불로 몸을 가린 채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희연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그녀가 왜 갑작스
레 일어나는지에 대해 묻고 있었다.
“이제 씻고 일어나야지. 밥도 먹어야 하고.”
강희연이 사내가 눈으로 물어온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요.”
“밤새 그리 힘을 썼으니 배가 고프지.”
“하하핫, 그런가?”
사내는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보통 객잔의 일층에는 숙박객이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식당으로 꾸며진
다. 강희연과 사내가 묵은 객잔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희연과 사내는 일층에 놓여진 탁자에 앉았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그녀 때문
에 평범한 정도에 불과한 사내의 모습이 약간 초라해보였다. 그래선지 두 사
람의 모습을 두고 식당안의 사람들이 쑤군대기 시작했으나, 사내도 강희연도
개의치 않았다. 강희연은 눈앞의 사내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고
, 사내는 그녀의 미모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의 향한 질시어
린 투정들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강희연이 평소와 같은 심정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를 보고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내의 두 눈을 뽑고도 남았을 것이니 식당 안의 사내들은 실로
운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마음껏 그녀를 훔쳐보고 그녀의 미모에 대한
천박한 말을 늘어놓고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내공이 뛰어난 강희연이 사내들의 천박한 농지꺼리를 듣지 못했을 리는 없었
다. 단지 사랑스러운 사내의 눈앞에서 피를 뿌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참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아직까지 강희연이 강호에서 이름 높은 여고수라
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강희연은 굳이 그 사실을 사내에게 알려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난 밤 자신이 어떤 여자이건 개의치 않는다 장담한
사내였지만 강희연은 불안했다. 행여라도 이 사내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떠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불과 하룻밤 새에 사내의 존재가 그녀에게 이토록 중요하게 자리 잡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강희연은 사내가 무정히 떠난다면 깊은 상처를 받으리
라는 것을 예감했다. 지난밤의 쾌락만이 이유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는 스스로 이 사내를 사랑하기에 그런 쾌감을 느낀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것
의 여인의 마음이었다. 뭇사내를 비웃는 옥수무정 강희연이었지만 육체적 쾌
락만을 추구하는 천한 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하기에
그녀가 느낀 쾌락의 근원이 사랑이라 믿고자 하는 것이다.
강희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점소이를 불러 사천 특산의 냉면과
구운 오리 한 마리를 주문했다.
“호호, 많이 먹네?”
“많이 먹어야 힘을 쓰죠.”
사내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강희연이 다
시금 얼굴을 붉혔다. 사내의 앞에서는 수줍은 소녀의 모습으로 변해 버리는
강희연이었다.
“누님, 어젯밤 왜 누님이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게...”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강희연은 선뜻 사내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마
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고 싶었다. 강호의 모든 이가 두려움에
벌벌 떠는 옥수무정이 바로 나다. 이 두 손에 죽어간 무림의 고수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털어 놓고 사내가 자신을 어찌 대할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용기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녀의 미색을 탐하여 접근한 자들
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눈썹을 휘날리며 줄행랑을 치는 게 현
실이었다. 물론 사내는 무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 강호에서 강희연이 떨치는 명성을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름을 들어
외우고 있다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는 분명 자신을 보는 시
선이 달라질 게 분명했다. 만약 그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나는 나를 배신한 남자를 용서하지 않는 여자거든. 호호호.”
“하하핫. 그렇군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린다던데. 누님이 화가나면
폭설이 몰아치나보죠?”
‘만약 네가 날 버린다면 두 눈을 뽑고, 손발의 힘줄을 끄집어 낸 다음, 거세하
여 길바닥에 버릴지도 몰라.’
강희연이 속으로 중얼거린 소리를 사내가 들었을 리 없었다. 그는 점소이가 내온 음식을 반기며 강
희연에게 젓가락을 내밀었다.
“자요.”
강희연은 사내가 내민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사천의 특산이 시원한 냉면은 과연 별미랄 수 있었다. 개운하게 목욕
을 한데다가 시원한 냉명을 먹고 있으니 절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저 혹시...”
두 사람이 뜨끈뜨끈한 오리구이와 시원한 냉면을 번갈아 먹으며 그
오묘한 조화에 만족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얌전하게 국수를 입에 넣고 있던 강희연이 고개를 들어 다가온 자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죠?”
옥수선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내는 황급히 두 손을 모아 포
권을 취하며 말했다.
“불초는 대검문(大劍門)의 고승룡(高昇龍)이라고 하오. 소저께선 혹시
옥수, 윽!”
고승룡은 갑작스레 정강이에서 밀려오는 고통 때문에 말을 잇지 못
했다.
“죄송하지만 처음 뵙는 분이군요. 저는 지금 식사중이니 그만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하지만...”
고승룡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을 마저 끝내려 하자 강희연의 안
광이 차갑게 빛났다.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살기가 전신을 훑고 지
나가는 것을 느낀 고승룡은 황급히 말했다.
“하핫,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요. 실례가 많았소이다.”
고승룡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 자리에 있다가는 강희연의 소
수가 심장을 파고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도망을 친 것이다.
“흠, 이상한 사람이군요.”
“무랑(武郞)! 신경 쓰지 마.”
강희연인 무랑이란 칭호를 사용하자 사내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름
뒤에 랑자를 붙인다함은 그 남자를 정인으로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입에서 다정한 호칭이 나오니 사내는 기
뻐하는 것이었다.
무랑이라 불리운 사내의 이름은 송기무(宋奇武)였다. 그는 사천 성도
내의 상인 가문인 송씨일가(宋氏一家)의 장손이었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
호칭 하나에 정신을 못 차리는 송기무에게 강희연이 말했다. 그제서
야 정신을 차린 송기무는 오리구이의 다리를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강희연에게 남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오리고기
를 먹는 모습이 사뭇 거칠었다. 그런 송기무의 모습이 강희연은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송기무를 바라보는 강희연의 애정어린 시선은 오래도록 지속
될 수 없었다.
“그년이 여기에 있다고?”
객잔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사내가 외쳤다. 한 손엔 환이 달린
대도(大刀)를 들고 소매가 없는 가죽 옷을 입은 사내는 험악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텁석부리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있
는 사내의 얼굴인지라 더욱 흉악한 모습이었다.
“감해 내 동생을 해치고 사천바닥을 맴돌아?”
고개를 휘휘 돌려 ‘그년’을 찾던 사내의 시선이 한쪽에 고정되었다.
강희연은 애써 고개를 외면하여 사내의 시선을 피했지만 한눈에도
돋보이는 그녀의 자태는 고개를 돌린다 해서 가려질만한 것이 아니었다.
“크흐흐. 거기 있었구만, 계집!”
강희연의 아름다운 아미가 상큼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험상궂은 사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어제 낮에 그녀에게 집적대던 웬 녀석의
팔을 부러뜨린 그녀였다. 체구는 달랐지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순가
텁석부리 사내가 그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그녀였다. 험상
궂은 사내의 입에서 동생 어쩌구 하는 순간 강희연은 어제 그 일 때
문에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흐흐, 과연 반반한 얼굴이군.”
넓은 팔자걸음을 휘저으며 텁석부리 장한이 강희연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송기무는 강희연의 난처한 표정을 보고는 험상궂은 자가 노리는 것
이 그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죽옷 밖으로 드러난 텁석부리 사내의
우람한 근육과 자신의 허벅지만한 두께의 대도 때문에 두렵기는 했지
만 그렇다고 어여쁜 강희연이 보는 앞에서 비겁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송기무는 사내가 탁자의 앞에 도착함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넌 빠져!”
텁석부리는 송기무의 가슴을 한손으로 밀며 그의 말을 막았다. 비록
한손이라지만 엄청난 힘에 송기무는 일어나기 전 그대로의 자세로
다시 주저앉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강희연이
예쁘게 얼굴을 붉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달아오름이었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무례하단 말이오!”
송기무는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나며 외쳤다.
“너한테 볼일 없다고 했잖아.”
송기무는 다시 주저앉아야만 했다. 텁석부리가 이번에는 이마를 밀어
버린 것이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 중심을 잡기가 힘들어진다. 넘어져
나뒹굴지 않으려면 의자에 다시 앉아야만 했다.
송기무은 오기가 치밀었다. 이대로 의자에서 일어서지 못하면 당장이
라도 죽을 사람처럼 다시 발딱 일어섰다.
“이게?”
텁석부리가 퉁방울만한 눈을 부릅뜨고 송기무를 노려봤다. 그는 장난
치듯 다시 송기무의 이마를 밀려했다. 송기무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사내의 손을 피했다.
“어쭈?”
텁석부리는 송기무가 피하는 것이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아까보다 훨씬 거칠게 송기무의 가슴을 밀어버렸다.
쿠당탕!
사내의 강한 힘을 이기지 못한 송기무는 의자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
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송기무가 쓰러
지자 강희연이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무랑!”
송기무가 몸을 옆으로 돌리며 일어서라고 하자 강희연이 물었다.
“허리 괜찮아요?”
송기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안심한 강희연은 날카롭게 텁석
부리 사내를 째려봤다.
“크큿. 정말 절색이구만. 이렇게 예쁘니 얼굴에 상처를 내기가 그렇
군. 이봐, 계집. 지금이라도 내 동생에게 사과하고 나랑 한 판, 컥!”
짧은 신음성이 터짐과 동시에 텁석부리 사내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
올랐다.
쿠당탕!
체격이 달랐기 때문일까? 송기무가 나뒹굴 때와는 달리 사내가 넘어
질 때는 엄청난 소음이 발생했다.
“이런 개 같은 년이!”
텁석부리 장한은 송기무처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맞았
다는 것은 완전히 실수였으며 그 정도로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코에서 줄줄 흐르
는 피는 결코 그가 태연한 척을 한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감히 무랑의 허리에 위협을 가하다니!”
강희연의 표독스런 외침이었다. 푸르스름한 살기가 쏟아져 나오는 그
녀의 안광에 욕설을 뱉어내던 텁석부리가 찔끔하는 모습을 보였다.
“버릇없는 네 팔을 분지르고, 천박한 혀를 뽑아주마!”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텁석부리 장한의 대도가 휘둘러졌다.
어느새 강희연이 텁석부리 쪽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강희연은
가볍게 몸을 날려 대도를 피하고 손을 세워 텁석부리의 손목을 내리쳤다.
뚜둑!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텁석부리의 손목이 기묘한 각도로 꺾였다.
사내는 갑작스런 통증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강희연은
소수는 사내의 손목을 꺾은 데서 멈추지 않았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
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수도가 사내의 어깨를 가격했다.
퍼억!
가죽 북이 울리는 소리가 나며 텁석부리의 장대한 체구가 뒤로 주욱
밀려났다. 단 일격에 어깨가 탈구된 듯 텁석부리의 팔이 건들거렸다.
“크아아악!”
그제서야 텁석부리는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순간적인 연속공격에 이
제야 제대로 된 통증을 느끼는 것이었다.
“아직 멀었다!”
강희연의 차가운 외침이었다. 텁석부리 사내의 눈에 공포와 경악이
가득 차올랐다. 예쁘장항게 생긴 계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상상을 초
월하는 무공과 저 야차와 같은 잔혹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강희연은 표홀한 신법으로 눈 깜짝할 새에 텁석부리 사내의 눈앞으
로 이동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너무나 빨라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세워 사내의 턱 언저리를 찔렀다.
투툭!
사내의 악관절이 탈구되는 소리였다.
“으어억!”
턱이 빠져버린 사내의 괴성은 처절할 정도였다. 강희연은 벌어진 입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내의 혀를 뽑으려다가 문득 송기무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지금까지 보여 준 것만으로도 송기무를 자지러지
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이 사내의 혀를 뽑
아낸다면 그 잔혹함에 송기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 두려웠다.
“네 놈의 행동으로 보아 혀를 뽑는 것이 마땅하나 무랑이 놀랄까 두
려워 그만 두겠다. 어서 그 더러운 모습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라.”
퉁방울만한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고 공포에 절어 있던 사내는 강
희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객잔 밖으로 뛰어 나갔다. 건들거리는 팔을
보아하니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통일 것임에도 혓바닥이 뽑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객잔을 벗어났다.
강희연은 그가 사라지는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채운 것은 오직 걱정뿐이었다.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손속을 보았으니 송기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
한 걱정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몸을 돌려 송기무를 바라봤다.
송기무는 아예 넋이 빠진 표정으로 입까지 헤 벌린 채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다.
‘틀렸어.’
그의 표정을 본 강희연은 절망했다. 이제 곧 송기무는 이런 저런 핑
계를 대고 자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다 기회가 생기면
자신에게서 도망칠 것이고. 아니, 어쩌면 지금 바로 나중에 만날 것
을 기약하자며 떠나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희연은 너무나 억울한 마음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
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니었다. 송기무가 다치는 모습을 보
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더구나 지난 밤 자신에게 세상에서 다시 겪을
수 없는 쾌락을 안겨준 그의 허리가 다칠까 두려워 자신도 모르게
손을 쓰고만 것이다. 그런 마음도 몰라주는 송기무의 저런 표정이란!
“누님, 안다치셨어요?”
송기무가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린 듯 허겁지겁 달려와 강희연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직까지는 다정한 어투로 말하는 송기무였다. 그의
말을 들은 강희연은 급기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놀라셨군요. 이제 괜찮아요. 그놈은 도망갔으니까.”
송기무가 강희연의 동그란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흑, 흑! 무랑 나 무섭지?”
송기무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강희연이 물었다. 어쩌면 그의 가슴
에 안기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몰랐다.
“에? 누님이 왜 무서워요?”
‘어? 안 무섭다고?’
강희연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어 송기무의 표정을 살폈
다. 그의 얼굴엔 진짜로 왜 강희연을 무서워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 무식하게 생긴 놈은 왜 도망간 거죠? 칼까지 버
리고 가다니?”
‘어? 이게 어찌된 일이지?’
강희연은 송기무의 질문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사내의 손목을 분지르고 팔을 뽑아 내
쫓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송기무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몰랐
다.
“무랑, 아무것도 못 본거야?”
“아! 넘어질 때 머리를 부딪쳤는지 누님이 괜찮냐고 하는 말에 대답
하고 난 후에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데 핑하는 느낌이 들면서 어지럽
더라구요.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말이죠. 누님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억지로 일어섰는데 녀석은 이미 도망 중이었네요. 대체 어
떻게 된 일이죠?”
강희연은 송기무의 말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마도 그가 넘어지면
서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킨 것 같았다. 머리에 충격을 받을 채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니 마치 빈혈이 있는 사람처럼 순간적으로 정신
을 잃었던 것이다. 일어나서 자신을 보던 멍한 얼굴은 놀라서가 아니
라 정신을 차리기 직전의 상태였을 뿐이었고. 사태를 파악한 강희연은
보다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서웠어, 무랑!”
“미안해요, 누님. 제가 지켜줬어야 하는데. 그놈이 너무 억세서. 빨리
정신을 차리려고 하긴 했는데.”
‘아니, 정신 안 차린 게 백배 나.’
“흑흑, 무랑. 고마워. 나를 위해 다친 몸을 무릅쓰고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 하다니.”
이쯤 되면 그녀의 연기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말할 수 있었다.
“아뇨, 당연하죠.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 장부의 도리죠. 그런
데 그자는 왜 갑자기 줄행랑을 친 거죠?”
“몰라, 미친 사람이었나 봐. 혼자서 발광을 하다가 갑자기 칼을 내
던지고 도망을 가네.”
“그래요? 그런 미친놈이 백주대로를 활보하다니. 큰일이군요.”
“그러게. 나 정말 많이 놀랐어.”
“이젠 안심해요, 누님. 그자는 갔고 저는 정신을 차렸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에요. 그나저나 비몽사몽간에 누님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하신 거죠?”
“아! 그 자가 나를 끌고 가려고 해서 비명을 지른 거야.”
“그렇군요. 정말 큰일 날 뻔했네요.”
강희연은 신중하게 송기무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나 그가 보고도 못
본 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가해서였다. 열여덟에 강호에 출두하였
으니 그녀가 강호에서 생활한지 벌써 십이 년이 다 되어갔다. 아무리
송기무가 연기를 하고 있다하더라도 험난한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강희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송기무의
표정은 진실하기만 했다. 그녀는 깊이 안도했다. 어찌되었건 사랑하는
정랑을 잃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강희연이었다.
“그럼 언제 돌아오신다는 거죠?”
송기무가 퉁명스레 물었다. 아무리 대장부인 척을 해도 이제 약관을
갓 넘긴 그였다. 더구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온 그가 험난한 세상을
겪어 본 적이 있겠는가? 강희연의 눈에는 그저 이제 막 치기를 벗어
난 어린 아이나 다름없는 송기무였다.
“금방 돌아올게. 무랑이 여기 있는데...”
“다른 사람 시키면 안돼요? 집사에게 사람을 구해보라 할게요.”
“호홋. 무랑. 이일은 나밖에 할 수 없어. 남한테 시킬 일이 아니라
고.”
“그럼 저도 갈래요.”
“무랑!”
강희연도 그러고 싶었다. 삼십 년 만에 찾아온 사랑인데 어찌 그녀라
고 송기무와 헤어지고 싶겠는가? 그러나 사문의 존장이 내린 명령을
지체하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이미 송기무와 꿈같은 나날을 보내느
라 이틀이나 허비했다. 자신이 수행해야하는 일이 시급을 다투는 촉
박한 일이 아닐지라도 마냥 지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안되나 보군요.”
강희연을 표정을 살핀 송기무가 말했다. 실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강희연은 송기무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무랑. 보름이면 돼. 그동안만 참고 기다려, 알았지?”
“...”
“훗. 그렇게 자꾸 조르면 아기 같아.”
“무슨 소리에요? 당당한 사내대장부에게.”
“그러니까 듬직하니 참고 기다려줘.”
“알았어요. 그럼 최대한 빨리 와야 해요?”
“응. 약속할게.”
그제서야 송기무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의 웃는 표정을 보자 강
희연도 마음이 편했졌다. 그녀는 잊지 않고 한마디를 더 남긴 채 발
걸음을 재촉했다.
“딴 여자한테 눈길 돌리지 마!”
“걱정 말아요.”
세상일이란 사람의 뜻대로 되는 법이 없는 것이었다.
강희연이 떠나고 송기무는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여자를 처음 만나
는 것도 아닌데 강희연은 그가 만나본 어떤 여자와도 달랐다. 비단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송기무가 만난 여자들은 대부분 기
녀(妓女)들이었다. 술자리에서 만난 여인들이라 선입견을 가지고 있
었기에 상대적으로 강희연이 좋게 느껴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대
부분의 기녀들이 송기무를 만나면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조르기
만 했다. 그러나 강희연은 오히려 송기무에게 이것을 챙겨주고 저것
을 챙겨주는 지라 그런 포근한 모습에 송기무의 마음이 크게 기운 것이다.
특히나 그녀와의 잠자리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무릇 여인은 삼십
대에 접어들어야 그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익을 대로 무르익은 농염한
여체가 발하는 성적 매력은 삼십대가 되어서야 그 진가가 발한다.
막 삼십대에 접어든 강희연의 몸은 무공으로 다져진 탄력과 내공으
로 유지되는 신선함을 가진 동시에 무르익은 여체만이 뿜어내는 성
적 매력을 여지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야 많은 경험이
있다 자부하지만 기녀 몇을 상대해본 것이 다인 송기무에게 있어서
그녀의 성숙한 육체는 신선한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떠난 이후 송기무은 마치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멍하니 하늘
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온통 그녀의 생각으로 채워져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대청에 턱을 괴고 앉아
강희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있었다. 뜨거웠던 열락의 밤을 추억하면
서. 그 때였다. 갑작스레 내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강희연과의 뜨거웠던 밤을 기억해내며 흐뭇해하던 송기무는 소란스
러운 소리에 방해를 받자 은근히 짜증이 났다. 기껏 떠올려낸 그녀의
아름다운 몸이 소란 때문에 이지러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송기무는 치미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
다. 소동을 일으킨 자에게 지금 느낀 짜증을 고스란히 전해주고자 내
실로 가는 것이다.
“이놈!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복도에서 송기무는 부친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었다. 평소 엄하기
이를 데 없는 부친은 빈둥거리는 송기무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
신에게 한 소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친의 엄한 호령에 자신도 모르
게 어깨를 움찔하는 송기무였다.
‘왜 이 시간까지 전장(錢莊) 안 나가시고 내실에 계신거지?’
소란의 주역이 부친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그였다. 해가 중천에 떴
으니 규칙적인 생활을 철저히 지키는 부친은 당연히 전장에 출근하
였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만약 부친이 내실에 있는 줄 알았다면 화풀
이 대상을 찾아 이곳으로 올 리 없는 송기무였다.
“어서 주시지오, 송대인(宋大人).”
“대체 무엇을 달라 억지를 부리는 게냐?”
“흐흐흣. 끝까지 시치미를 떼겠단 말씀이오?”
송기무는 내실에서 들려오는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뭔가 좋지 않
은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데 무슨 시치미란 말이냐?”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송대인. 나름대로 대인의 체면을 살려드
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흥! 지금 날 협박하겠다는 거냐?”
“후후후, 송씨일가에 무진검(無盡劍) 곽상(廓祥)이 가주의 수신호위로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협박을 하겠습니까?”
“그걸 알고 있는 놈이 억지를 부리는 것은 어인 이유냐?”
“본시 그 물건은 저희가 가졌던 것이 아니옵니까? 자기 물건을 찾아
가겠다는 데 없다고 우기는 게 억지지요.”
“이미 없는 물건을 내 놓으라 하니 억지라 하는 것일세.”
“자꾸만 없다하시는데 그 물건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하늘로 솟
았소이까, 아니면 땅으로 가라앉았소이까?”
“뱃속으로 들어갔다.”
“헛! 그 말... 진...진실이오?”
“그렇다하지 않았는가? 건강에 좋고 양기를 북돋는다 하니 약으로
쓰임이 당연한게 아닌가?”
쾅!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창!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검이 뽑히는 소리도 들렸다. 송기무는 그 소리
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부친을 지키는 호위
곽상이 검을 뽑아든 것이리라.
“그게 어떤 물건인데? 내 그걸 어찌 구했는데? 그걸 함부로 먹어버
리다니!”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자네가 물건을 맡긴 게 벌써 이년이네. 돈을 갚기로 하고 물건을 맡
겼으면 제 날짜에 갚고 물건을 찾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기한을 일
년이나 넘기고 이제 와서 물건을 내 놓으라 하다니 말이 된다고 생
각하나?”
“크큭, 장사치라 이거군. 그래서... 당신이 먹었다 이건가?”
“아니. 내 나이에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그걸 먹겠나?”
“그럼 대체 누가 먹었단 말이오? 내 그놈을 죽여 피를 빨아 먹어서
라도 약효를 되찾고야 말테니 누가 처먹었는지 대시오.”
“뭐라고?”
송기무는 부친의 음성이 미세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강직한 성품
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그의 부친의 목소리에 저런 떨림이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크큭! 빨리 누가 먹었는지 대시오.”
“호갈위(浩?偉), 가주께 무례를 범하지 마라. 더 이상은 보고만 있을
수가 없구나.”
나직하면서도 강한 목소리였다.
“흐흐흐, 곽상. 지금 내가 예의를 따지게 생겼느냐? 자그만치 십년이
다, 십년. 내 청춘을 바쳐 만들어낸 물건이다. 그 물건이 남의 뱃속에
들어갔다는데 당신 같으면 참을 수 있겠는가?”
“가주께서 상도에 따라 처리하셨다.”‘
“상도? 그깟 돈 몇 푼에 내 청춘을 바친 물건을 꿀꺽 하는 것이 상
도란 말인가?”
“억지를 부리겠다는 건가?”
“크크큿. 무진검이 무서우니 오늘은 물러나지. 하지만 곽상, 두고 봐
라! 내 반드시 누구의 뱃속에 그 귀한 것이 들어갔는지 알아내어 그
피를 마시고 말테니.”
소름끼치는 말을 던진 호갈위란 자가 거칠게 내실의 문을 열고 나섰
다. 송기무는 순간적으로 놀라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섰다. 호갈위는
성난 걸음을 옮겨 송기무의 곁을 스쳐갔다. 송기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왠지 모를 위협에 긴장을 했던 것이다.
송기무는 호갈위가 복도를 벗어나자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 다시 대
청으로 돌아왔다.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부친의 심기가 몹시 안 좋을
것이 분명했다. 괜히 얼쩡거리다 애꿎게 화풀이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자리를 피한 것이다.
‘대체 무슨 약이기에 사람을 죽여 피를 빤다고 할 정도지?’
송기무는 호갈위가 한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이란 본시
사람이 아플 때 치료를 하기 위해 먹거나 건강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용된다. 그것이 약의 사용되어야할 본래의 의미일진데 어찌 그 약을
먹기 위해 사람을 죽이려 드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약효
가 훌륭한 약일지라도 이미 타인이 복용하여 그 효력을 발휘했을 것을
피를 빤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복도에서 마주친 호갈위의 눈빛은 흉험하기 이를데 없었다.
분명 무엇인가 사고를 치고야 말겠다는 눈빛이었는데 괜히 송가전장을
상대로 해코지나 할까 염려되었다.
송기무의 불길한 예감은 다음날 곧 현실로 드러났다.
갑작스럽게 수많은 사람들이 송씨가문을 들락거렸다. 무시무시한 인
상에 병장기를 든 사람들도 있었고, 호사스런 옷차림의 사람들이나
심지어 관복을 입은 자들까지 쉴 새 없이 내전을 들락거렸다. 송기무
의 부친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전장에 출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
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실에서 간혹 큰소리가 터져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할 불상사가 생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송기무의 부친은 어릴 적부터 가업인 전장을 이어받아 운영해온 노
련한 상인이었다. 강직하고 완고한 성품이지만 뛰어난 상인의 자질을
지녀 누구를 만나던 논리 정연한 화술로 상대를 설복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선자불래(善者不來)라 했지만, 송기무의 부친은 상황을 바로
설명하여 말썽 없이 돌려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는 무진검 곽
상의 무명도 한몫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상거래를 하다보면 간혹 거래 이외의 말썽이 종종 생기는 법이었다.
송기무의 부친은 그런 일을 대비하여 강호에 이름 높은 고수를 호위로
고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사천에서 일류로 꼽히
는 무진검 곽상을 초빙하여 호위의 직을 일임할 수 있었다.
송가전장이 억지를 쓰거나 힘으로 거래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지
라 사실 무진검과 같은 고수에게 높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어찌
보면 쓸데없는 짓일 수도 있었다. 상인의 호위로는 그저 좀도둑을 막거
나 쓸데없이 빌붙는 저자의 불한당만 막을 수 있는 이류 무사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송기무의 부친은 언제 어느 때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한사코 곽상을 붙들었다. 곽상에게 지급되는 막대한 양의
금전이 언젠가는 반드시 그 가치를 하게 될 것이라며 말이다. 그의
판단은 당일에 와서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힘깨나 쓴다고 거들먹거리며 내전을 찾은 자들이 곽상이 있다는 이
유 하나만으로도 꼬리를 말고 내전을 나서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불안하기 그지없었던 송기무였지만 아
무런 말썽 없이 오전이 지나가고 나른한 오후가 되자 긴장이 풀어졌다.
부친의 달변과 곽상의 뛰어난 명성이 호흡을 맞추고 있으니 문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송기무가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마당에서 졸음과 싸우고 있을 때 난
데없이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속된말로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소리랄까?
“송대인을 뵈러 왔습니다. 기별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여인의 음성에 잠이 훌쩍 달아난 송기무였다. 반쯤 감겼던 눈을 떠보
니 과연 목소리를 능가하는 미모의 여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흰색
경장을 차려입은 여인은 콧대가 약간 높아 도도해 보이긴 했지만 며
칠 전 송기무를 떠난 강희연에 못지않은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흠흠. 어디에서 오신 누구십니까?”
“민강에 자리한 당문(唐門)에서 왔습니다.”
‘다, 당문!’
무림에 대해선 일견식도 없는 송기무였다. 그러나 사천에 터를 잡고 사
는 사람이라면 무인이건 그렇
지 않던 당문에 대해 모르는 자는 없었다. 손짓 한번으로 황소를
죽이고, 기침 한 번에 수백의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당문이 아니던가?
아미파, 청성파와 더불어 사천을 떠받드는 세 개의 기둥(四川三柱)중
의 하나인 당문에 대한 소문은 송기무도 무수히 들어왔다. 독술과 암
기로 중원의 대표한다는 아홉 개의 하늘에 당당히 그 이름을 넣은
곳이었다.
‘대체 그자가 맡겼던 게 뭐 길래 당문에서까지 찾아오는 거지?’
한적했던 송씨일가의 대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게 된 것은
어제 그자가 찾으려 했던 무슨 약 때문인 게 분명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약이기에 불과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온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기사회생의 묘가 있을
대단한 약임에 틀림없었다.
“이미 많은 분께서 순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랫동안 기다리셔야
할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송기무는 비록 여인의 몸이라지만 명성이 자자한 당문에서 온지라
최대한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순서가 그렇다면 따라야겠지요.”
“대청은 기다리는 사람으로 번거롭습니다. 고귀하신 분께서 머무르기
엔 불편하실 터이니 집사에게 기별을 넣은 후 편히 쉬실 수 있는 곳
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당연히 해야할 도리이니 사양치 마십시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당문에서 온 여인의 아주 겸손한 듯했다. 대게 이름 있는 곳에 적을
둔 자는 대게 알게 모르게 거만을 떨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사뭇 달랐다. 송씨일가가 나름대로 성도에서 기반을 잡았다고는 하나
이름난 명문가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천 제일의 부호도 아니었다. 당
문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작은 상인의 집안에 불과했다. 그럼
에도 예의를 잃지 않으니 그녀의 언행은 지극히 겸손한 것이었다.
송기무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굳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안내해 차라도 대접하려든 것이다. 물론 강희연에
못지않은 그녀의 눈부신 외모도 한몫했다. 아무리 송기무가 마음에
품은 연인이 있다 해도 이제 그는 스물을 갓 넘긴 약관의 청년에
불과했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친절을 베풀고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송기무는 지나가는 하인을 불러 집사에게 당문에서 손님이 왔음을
전하고 사랑채로 여인을 안내했다.
주로 친분이 있는 손님을 모시는 사랑채는 부친의 성품 그대로 단촐
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송기무는 여인에게 자리를 안내한 후
차를 따러 여인의 앞에 놓았다. 일반적인 규수라면 한 방에 남녀가 단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될 일이었다. 그러나 송기무가 알
기로 강호의 여인들은 세속적인 예절에 크게 구해 받지 않는다고 들었
다. 그렇기에 눈앞의 여인도 거리낌 없이 송기무를 따라 들어왔던 것이다.
“불초는 송가의 장자인 기무라합니다. 무례가 되지 않는 다면 소저의
방명을 여쭤도 될는지요?”
송기무는 둘이 마주앉게 되자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두 손을 맞잡으
며 말을 건넸다. 강호에 몸을 담은 여인들이 통례에 개의치 않는다하니
이렇듯 이름을 묻는 것이 무례가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한 말이었다.
“아! 소가주셨군요. 저는 가연(佳緣)이라 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당가연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가연이라... 참으로 좋은 이름입니다.”
“혹시 소주께서는 가주께서 가지고 계신 물건에 대해 아는 바가 있
으신지요?”
“그 명약 말씀이십니까?”
송기무의 말에 당가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명약은 아닙니다만, 희귀한 약임은 틀림없지요.”
“아! 그렇군요. 사실 저는 그 약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제
어떤 자가 찾아와서 내 놓으라고 생떼를 쓰다가 돌아갔다는 것 밖
에는...”
송기무의 말에 당가연이 눈빛을 빛냈다.
“그자의 눈 밑에 검은 반점이 있지 않던가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찰라 간에 본 것이라 정확치는 않지
만, 눈 밑에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그자였군요.”
“잘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요. 그저 소문만 들었을 뿐입니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름대로 여자를 잘 다룬다고 생각해
온 송기무였다. 그러나 손짓 한 번으로 황소를 죽일 수 있는 독을 뿌
려대는 여자라고 생각하니 함부로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자칫 노여
움이라도 살라치면 송씨일가가 몰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두려움
이 생긴 것이다.
“혹시 그 약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자신의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약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내용의
질문에 당가연의 눈에선 이채가 흘렀다.
“가친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나요?”
“네. 전혀 언급이 없으셨습니다.”
“흠. 그럼 소가주께선 모르고 계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가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약을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칫 피바람이 몰아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피바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영약이기에 약 한 알에 사람을 죽인다
고 나서는 사람이 있지 않나, 피바람이 분다지 않나 하는 거지? 거참
당최 영문을 알 수가 없네.’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저는 무공을 익혀 한서에 예민하지 않은데 이
방은 몹시 덥군요.”
“네? 글쎄요. 저는 별로 더운 것을 모르겠는데요?”
“정말 이상하군요. 저는 이렇게 더운데 소가주께선 못 느끼신다니.”
당가연은 정말 더운지 손을 펼쳐 부채를 부치듯 얼굴에 대고 흔들었
다. 그녀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는 것과 동시에 얼굴도 달아오
르기 시작했다. 홍조가 피어오른 얼굴은 그녀의 미색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정말 안 더우신가요?”
붉게 피어오른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송기무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송기무는 곧 다시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다...열려 있군요.”
“하아,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이렇게 더위를 탈 리가 없는데.”
당가연의 얼굴은 이제 홍조가 핀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불이라도 붙
은 것처럼 새빨게진 것이다. 송기무는 문득 어디선가 많이 본 광경이
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곧 이와 비슷한 일을 며칠 전에 겪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만이 다를 뿐 거의 똑같은 상황이었다.
당가연은 옷깃을 살짝 끌어 내렸다. 손바닥 부채의 바람을 보다 수월
히 몸에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송기무의 시선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따라 수평으로 뻗은 쇄골에 이르렀다.
“흠, 흠!”
송기무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자신의 실태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 소가주도 더워지시는 건가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당가연이 물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
부절 못하는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 네! 저, 저도 좀 덥군요. 하핫!”
송기무는 애써 그녀를 외면하며, 손부채를 만들어 부치기 시작했다.
“하아, 도저히 안 되겠군요. 바람이라도 쐬어야겠어요. 이대로는...”
말끝을 흐린 당가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기무는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같이 일어섰다.
“그러실까요?”
“어멋!”
송기무가 벌떡 일어서자 갑자기 당가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짧은 순간 그녀의 시선을 느낀 송기무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
였다. 아니나 다를까 주책 맞은 양물이 꼿꼿이 서 바지를 뚫고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무안해진 그는 다리를 꼬아 어떻게 해
서든 가려보려 했으나 수월치 않았다. 그 때였다. 갑작스레 당가연의
다리가 풀리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송기무는 황급히 그녀 쪽으로
몸을 움직여 부축했다. 마치 연체동물의 그것처럼 하늘거리는 그녀의
허리가 송기무의 팔에 감겨들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당가연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져 유연한 곡선을 그렸다. 젖혀진 허리
때문에 그녀의 경장이 당겨져 가슴의 윤곽이 훤히 드러났다. 강희연의
터질 듯한 육감적인 가슴과는 사뭇 달랐다. 적당한 크기로 부풀어 오
른 완만한 곡선이 마치 미를 추구하는 조각가의 배려인양 완벽한 자
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아!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안되겠군요. 잠시 누우시는 게 낫겠습니다.”
송기무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의 힘이 센 편은 아니었지만 날씬한 당가연의 몸은 새
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송기무는 당가연을 안은 채 사랑채를 벗어나 자신의 방으로 가
침상에 눕혔다. 그가 당가연을 뉘이고 허리를 세우려하자 어느새 그의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팔이 풀리지 않았다.
“당소저!”
“이상한... 일이군요.”
“뭐, 뭐가요?”
“소가주가 안아 주시니 더위가 한결 가시는 것 같은... 대체... 왜 이런 현상이...”
당가연의 목소리엔 호흡이 섞여 나왔다.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함인지 숨을 많이 내쉬는
그녀였다.
‘이러면 안돼. 내겐 누님이 있지 않은가?’
송기무는 당장이라도 당가연의 팔을 뿌리치고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달
리 자신의 육체는 그녀의 팔과 맞닿은 쾌감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 말씀... 드리면 천한 계집이라... 욕하시겠지만, 조금만 이대로 있어주시면... 안될
까요? 정말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참기가...”
더듬거리는 당가연의 음성이었다. 더위가 한결 가셨다고 말한 그녀였지만 어째 얼굴은
더욱 달아오른 것 같았다.
“천하다니요. 무슨 병이 생기신 한 데 도움이 되신다면 이리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해요.”
마지막 그녀의 말은 더운 숨결과 함께 단내를 피워냈다. 송기무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
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의 숨결이었다. 갑작스레 이러는 당가연의 행
동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당년 이십 세의 청년이 감당하기에 품안의 여체가 뿜어
내는 유혹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사천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당가의 여식이었다. 자칫 잘못 건드려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송기일가는 한줄기 핏물로 녹아내릴 지도 몰랐다. 송기무의 사고가 당가가
자랑하는 독(毒)에 이르자 달아오르는 혈기가 한순간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해요.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당가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괜찮으십니까?”
“한결 나은 것 같네요. 천하다 욕하지 말아주세요.”
“그럼요.”
“그리고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겠습니다.”
당가연의 얼굴에 복사꽃처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송기무가 단호한 목소리로 비밀을
지키겠다는 말을 한 것에 기뻐하는 것이었다.
“이젠 일어나도 될 것 같아요.”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왠지 아쉬움이 느껴지는 송기무였다. 자신의 마음속에 분명
강희연이란 여인이 있음에도 눈앞의 유혹에 흔들리는 것을 탓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쩌
면 성숙한 매력을 물씬 뿜어내는 강희연이 갖지 못한 신선한 매력을 당가연에게서 느꼈
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가연을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고쳤다. 송기무는 옷을 고쳐 입는 당가연에게 차를 내
밀었다. 땀을 많이 흘렸으니 차를 대접하려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당가연이 찻잔을 받아들었다.
“남자분의 방에는 이번이 처음이군요.”
차를 홀짝이며 말하는 당가연의 ‘처음’이란 말에 왜 송기무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까?
“소가주, 아무래도 바람을 더 쐬는 게 낫겠어요. 금새 다시 더워지는 군요.”
차를 내려놓으며 당가연이 서둘러 침상에서 일어났다. 송기무는 당가연의 팔을 잡아 부
축했다. 본시 아무리 강호의 여인이라 해도 남녀의 유별이 완벽하게 무시되는 것은 아닌
지라 이와 같은 접촉은 무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송기무의 팔에 전신을
안겼던 적이 있어서인지, 본래 그녀의 성품이 호방해서인지 당가연은 그의 행실을 탓하
지 않았다. 오히려 송기무가 팔을 잡아 부축하자 몸을 편안히 하여 기대오는 것이 어쩌
면 그의 부축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그녀였다.
두 사람은 방을 나섰다. 송기무의 부축을 받았던 당가연은 방문을 나서자 부드럽게 팔을
빼며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아! 확실히 신선한 공기가 좋군요. 아무래도 답답한 실내에 갇혀 있어서 그랬나 봐요.”
“이제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소가주의 염려 덕분이지요.”
당가연이 다소곳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은한 홍조가 남아 있는 그녀의 얼굴은 햇살 아래
에서 더욱 아름답게 보여 송기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수
없이 다짐을 했건만 송기무의 입에서 불쑥 말이 튀어 나갔다.
“당소저.”
“네?”
송기무가 갑작스레 진중한 음성으로 부르자 당가연의 봉목이 크게 떠졌다.
“갑작스레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뭐하지만 용무를 마치신 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송기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당가연이었다.
당가이화(唐家二花)!
강호에선 현 당문의 가주(家主)인 당일기(唐一技)의 금지옥엽인 당수연(唐秀娟)과 당일
기의 동생인 당천기(唐千技)의 둘째 딸인 당가연을 일컬어 당가의 두 송이 꽃이라 불렀
다.
사천에서 내노라 하는 명문중의 명문인 당가를 대표하는 두 미인으로 꼽히는 당가연은
수많은 남성들이 손에 쥐고자 하는 꽃이었다. 명문대파의 적전제자는 물론 중원에 이름
높은 자문에서 저마다 당가에 매파를 보내왔다. 그러나 당수연, 당가연 두 사촌자매는
자신의 부군이 될 자는 스스로 정하겠다고 선언하고 청해온 혼사를 정중히 거절했다. 강
호의 예법이 자유로웠으나 여인의 혼사는 누가 뭐래도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대사였다.
그녀들이 스스로 배필을 찾겠다는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은 당문이 가지는 가풍에 기인했
다.
비록 당가의 가문을 잇는 것은 사내들이지만, 당가는 대대로 수많은 여걸들을 배출했다.
당가의 비전인 암기의 제조법은 여자에겐 전수되지 않는다 하여도 암기의 사용법을 익
히고 독술을 배우는 것에는 제한이 없었다. 암기와 독술은 섬세한 여성이 익히기에 적합
한 무술이었다. 여성이기에 더욱 익히기 쉬운 무공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강호에서 손꼽히는 여걸 중에는 늘 당가의 여인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성 높은
여인들을 많이 배출한 당문에서는 여자라 하여 틀에 박힌 예법으로 구속하는 일이 드물
었다. 그렇기에 당수연과 당가연은 자신의 배필을 스스로 찾겠다는 선언을 당당히 할 수
있었고, 당가에서는 그녀들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이런 당가연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청년들의 도전은 끊이질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얻
을 수만 있다면 서슴없이 목숨을 걸 청년들이 넘치고도 흘렀던 것이다. 지금 송기무가
자신과 따로이 시간을 갖고자하는 바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당가연은 잘 알고 있
었다. 그리고 그런 청은 여태껏 한번도 들어주지 않아온 당가연이었다.
하지만...!
“소가주께서 정히 원하신다면...”
당가연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당당한 무가의 여식이라지만 남녀의 문제에서까
지 당찬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송기무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당가연을 사랑채
로 안내했다.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해 자신의 방으로 왔기에 사랑채로 가는 방향을 모르
지 싶어서였다.
강희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저 만나서 이야기만 하는 것을 뿐
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송기무였다.
당가연과 송기무가 만화루(滿花樓)에 자리한 것은 신시가 다 된 저녁 무렵이었다. 부친을
보고 나오는 당가연의 표정에서 그녀가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음을 읽은 송기무는 술
을 마시러 갈 것을 청했고 당가연은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붉은 칠의 기둥이 수십 개나 되는 만화루는 성도내의 고급 주루였다. 특히나 전경 좋은 이
층은 주대가 일층과 구분되어 계산되는지라 어지간한 자들은 감히 오를 생각도 못하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이층의 난간에 앉아 첫잔을 채우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네, 송가주께서 이미 그 약을 누군가에게 복용시키셨다는군요.”
“거참, 대체 어떤 약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하룻밤 새에 몰려드는 건지...”
당가연은 고소(苦笑)로 송기무의 의문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이미 말했듯이 그가 알아
서 별로 좋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당가에서도 그 약의 소문만 들었을 뿐 정확한
효능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바가 적었다. 그렇기에 연구의 대상으로 약을 구하러 나선 것
이었다.
“무림의 여걸과 함께 이렇게 잔을 기울이니 그 흥취가 절로 나는 것 같습니다.”
“여걸이라니요.”
“사천에 이름 높은 당가의 분이신데, 소저께서 여걸이 아니면 누가 여걸을 자칭하겠습니
까?”
입에 발린 말임을 뻔히 아는 당가연이었다. 그녀의 앞에선 자들은 늘 한결 같았다. 한마디
라도 칭찬을 덜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녀의 칭찬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
러나 당가연은 송기무의 말이 싫지만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의 칭
찬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뛰는 것과 동시에 기분이 고조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송기무
의 외양을 다시 뜯어보았다.
치렁치렁한 흑발이 탐스럽게 흘러내렸고, 짙은 두 눈썹이 남자다운 모습이었다. 곧게 뻗
은 코가 얼굴의 중심을 잡아 그럭저럭 호감을 줄 수 있는 얼굴이었으나 그간 당가연이 보
아온 수많은 남자들에 비해 뛰어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가연이 보아
온 강호의 유력한 후기지수들에 비해 송기무는 오히려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
당가연은 왜 자신이 송기무가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청을 한 것을 쉽사리 받아들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뛰어난 외모를 지닌 것도 아니오, 그녀가 평소 원하던 절정의 무공을
가진 자도 아니었다. 성도에서 이름난 상인의 아들이라지만 당가에 비하면 손색이 많았
으니 가문의 배경 탓도 아니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보인 추한 실태를 보상하기 위함
이라 생각했다. 낯선 남정네에게 몸을 기대는 추태를 보였으니 당가의 여식으로서 큰 실
수를 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다시 기회를 마련하여 자신의 정숙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실
수를 만회하려 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곳에 온 것이라고.
“북풍에 몸을 실어 변방에 접어드니
장부의 기세 하늘에 닿는구나.
검을 곧추 세워 세월을 노래하니
천하가 발아래 있도다.”
미인의 앞이라 주흥이 돋았는지 송기무의 입에서 되지도 않는 싯구가 흘러 나왔다. 비록
잘 지어진 구절이라 볼 수 없었으나 당가연의 그의 시에 왠지 사내다운 호기가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가주께선 무인이 되고프신가보군요.”
“하하핫. 어릴 적 꿈은 그러했지요. 준마를 타고 호문관을 넘어 오랑캐를 무찌르는 장수
가 되고팠답니다.”
“그런데 왜 실행치 않으셨나요?”
“보시다시피 뼈가 가늘고 허약한지라 무인으로써의 자질이 없다더군요. 어릴 적에 가친
께서 저를 데리고 이리저리 다니며 알아 보셨습니다. 제가 하도 졸라댔던 탓이지요.”
“흐음... 모두 다 거절하던가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수업료를 내고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곳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
지요. 허나 그때는 이미 제 스스로 의욕을 잃어 무공을 익혀 장수가 되겠다는 꿈을 저버리
게 되었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허약한 신체는 단련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여자인 저도 이렇듯 무공을 익혔잖아요.”
“제 의지가 약한 탓이지요.”
방금 전까지 호쾌하게 시를 읊던 자치곤 너무나 쉽게 기풀이 꺾였다. 당가연은 그런 송기
무에게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여인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성격은 당가연이 좋아하는
남성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어색한 자리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소가주에의 적성에 맞지 않았을 뿐일 거예요. 다른 분야에 소질이 있는데 굳이 무인이
되려 고집을 세울 필요는 없지요.”
“하핫, 불초는 아직까지 그 소실을 못 찾고 있으니 문제지요.”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밝아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송기무가 말한 내용은 당가연의 실망
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얼추 보아 약관을 넘긴 나이였다. 사내대장부라면 능히 일가를 이
끌 나이였건만 아직까지 진로조차 생각하지 못한 철부지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운이 좋아 부잣집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고 자라오다가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며 살아
갈 싹수가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평소 당가연이 경멸해마지않던 자들의 전형이었다.
그녀는 술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송기무가 생각보다 형편없는
자라는 사실에 심술이 났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기무는 연신 싱글벙
글한 표정으로 당가연의 잔을 채웠다.
당가연은 이 잔을 마지막으로 그만 자리를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평소 경멸하
던 부류의 사내와 시간을 허비할만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크하하핫, 어차피 성도 안에서는 이 몸에게 대들자가 없다는 거 잘 알잖아.”
갑작스레 한 남자의 요란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어깨부터 손까지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은 텁석부리 거한이 험상궂은 무리와 함께 주루
의 이층으로 올라오면서 떠드는 소리였다. 그의 얼굴을 본 주루의 손님들이 인상을 찌푸
리며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보아 꽤 알려진 인물인 듯했다.
“헤헷, 그럼요. 대형의 별호인 대도무적(大刀無敵)이 달리 지어졌겠습니까요?”
쥐꼬리 수염을 기는 마른 사내가 텁석부리의 옆에 달라붙어 아부를 하는 소리였다.
그들의 소란에 송기무도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그리고 곧 텁석부리 장한의 낯이 무척 익
다는 것을 깨달은 송기무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 자신과 강희연에게 행패를 부
리던 자라를 것을 알아본 것이다. 행여나 자신을 기억하고 그 때 일을 따질까 두려워 송기
무는 고개를 숙인 것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뿐이라 스
스로를 위로하면서.
“아시는 분인가요?”
송개상의 행동에 당가연이 물었다.
“아, 아니요.”
“그렇군요.”
당가연은 다시 잔을 들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녀가 막 송기무에게 그만 가봐야겠다
고 말을 할 찰라 소란을 피우며 이층에 올랐던 자의 목소리가 다시 주루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못 비키겠단 말이야?”
텁석부리 장한은 퉁방울만한 눈을 부릅뜨고 난간에 앉은 중년일행을 위협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행패요.”
짧은 콧수염을 기른 한 중년인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하하핫! 행패라? 감히 대도무적 노지명(盧智明)님께 그따위로 지껄이다니.”
노지명은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 자리는 우리 노대형의 전용석이야. 그러니까 괜히 버팅기지 말고, 어서 자리를 옮기
라고.”
쥐꼬리 수염의 사내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대도이귀(大刀二鬼)중 형인 노지명이군!”
당가연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
릇 명문대파의 제자라 함은 의(義)를 추구하고 협(俠)을 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당가
연은 사천을 대표하는 당가의 후손이었다. 노지명의 행위는 협사의 길을 추구하는 그녀
가 보고 넘길만한 것이 아니었다.
노지명의 옆에 있는 점박이 장한이 급기야 중년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나이 처먹었으면 말귀를 알아 들어야할 것 아냐. 네놈의 귀는 멋으로 달고 다니냐?”
“컥! 이, 이손 놓지 못해?”
중년인의 버둥거림은 별 효용이 없었다.
“그 손을 놓고 꺼지는 게 좋을 거야.”
다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외면된 시선을 한 번에 돌리는 음성이었다. 송기무는 갑
작스런 당가연의 외침에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여야만 했다. 분명 노지명이라는 자
가 송기무가 있는 쪽을 쳐다볼 것이었으니.
“흐흐, 이건 또 웬 이쁜이야?”
노지명이 당가연의 미색을 보고 음침한 음성을 흘렸다.
“헤헷, 정말 삼삼한 계집이군요.”
쥐꼬리의 사내도 눈을 가늘게 뜨고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그 놈 놔줘라. 나 저쪽에 가서 앉아야겠다.”
노지명이 점박이 사내에게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 당가연과 송기무가 있는 쪽으로 향
했다. 송기무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될 대로 되라 식으로 고개를 확 들어
올렸다.
“헛!”
불쑥 고개를 들어올린 송기무의 얼굴을 확인한 노지명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송기무에게 향한 것을 본 당가연은 이상함을 느꼈다.
“소...소협!”
송기무의 우려와는 달리 노지명은 갑자기 꼬랑지를 말았다. 그는 퉁방울만한 눈을
뒤룩뒤룩 굴려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이 소저가 소협과 관계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요.”
자신을 보면 한바탕 복수를 하겠다고 난동을 부릴 줄 알았던 송기무는 노지명의 난
데없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아니, 노대형 대체 왜...”
“소인은 이만 가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노지명은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 두 손을 마주잡아 송기무에게 내밀더니 부랴부랴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함께 있던 흉악한 사내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
뒤를 쫓았다.
긴장을 고조시켰던 분위기가 너무나 어이없이 식어버리자 석연치 않은 서운함이 들
정도였다.
“소가주님, 저들을 모른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아, 그게...”
“저들이 소가주님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그, 그게 예전에 제가 손을 한 번 봐 준적이 있어서요. 하핫, 이거 참!”
엉겁결에 거짓말을 해버린 송기무였다. 대도이귀 중 맏이인 노지명이 대단한 인물은
아닐 지라고 타고난 신력을 바탕으로 한 십이로(十二路) 도법(刀法)으로 성도 내에
서 갖은 행패를 부리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당가연이었다. 허약하게만
보이는 송기무가 그런 자를 혼내준 적이 있다니 그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그
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소가주께선 의외의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노지명이 아무리 삼류에 불과한 불한당이지만 타고난 신력과 무공을 익힌 자인데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셨다 말씀하시고 혼을 내 주시니 말이에요.”
“아! 그, 그게 세상사는 모두 무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송기무는 기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우기기로 했다. 지금에 와서 사실은 정신 못 차
리고 누워 있다보니 자기 혼자 도망가더라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무릇 군자 된 자는 그 뜻만으로도 의를 행하는 것이지요.”
태연스런 거짓에 스스로도 감탄하는 송기무였다. 그러나 당가연이 지금 송기무가 하
는 말의 진위여부를 가려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눈앞에서 노진명이 꼬리를 말고 도
망치는 것을 보았으니 송기무의 말을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소녀는 소가주께 감탄하였습니다.”
“하하핫, 감탄하실 것까지야!”
송기무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재빠르게 술을 들이켰다. 거짓말을 하다보니 갈증이
나는 것이다.
사람이란 하나의 일을 계기로 해서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은 물론이거니와 받는 느낌
까지 달라 보이는 법이다. 당가연이 송기무에서 실망을 하였을 때는 한시바삐 자리
를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건만, 노지명과의 일이 있은 후인 지금은 빠르게 술을
들이키는 송기무의 행동에 장부다운 호방함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송기무에 대한 오해를 마음속으로 사죄하며 당가연은 그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하하, 달이 부끄러워할 미인께서 술을 따라 주시니 오늘 크게 취해야겠군요.”
“저리 높이 떠 있는 달을 보면서 그리 말씀하시다니, 소녀를 놀리시는군요.”
어느덧 주흥이 오른 당가연이었다. 기실 호방한 당가의 피를 이어받은 그녀인지라
평소 명랑하고 쾌활한 모습으로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외간남자에게 실없
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지라 진중한 언행을 지켜왔으나 주흥이 돋은지라 그녀의
평소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하하핫! 반쯤 가리어진 게 안보이십니까? 그런데 어찌 소생이 당소저를 놀린다 하
십니까?”
“호호홋! 송공자께선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어느덧 소가주라는 칭호에서 송공자로 호칭이 바뀐 당가연이었다. 그다지 친근한 표
현은 아닐지라도 사무적인 소가주에 비하면 한결 가까워진 느낌을 주는 호칭이었다.
“이 송모가 이리도 즐겁게 술을 마셔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송기무가 잔을 들어 올리자 당가연도 따라 들었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술
을 들이켰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술잔을 들이키는 당가연의 자태는 송기무의 시
선을 어지럽혔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마음속에 강희연이란 여인이 있다는 것을
잊고 싶었다.
이래서 남자의 마음에는 늑대가 숨어있다 하였는가?
혈관에 흐르는 주기(酒氣)는 송기무의 얼굴만을 달구는 것이 아니었다. 약관을 맞이
한 피 끓는 청년의 감정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이성은 자제를 요구하되 그의 육신
과 감성은 강하게 여인의 향취를 갈망하고 있었다. 당가연의 눈짓 한번 손길 한번이
송기무의 감정을 격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부정의 순간은 찰라였다. 가슴속에 그려진 강희연의 영상이 흐릿해지는 것도 순간에
불과했다.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당가연의 눈을 볼 때마다 마음에 기울어 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다.
“당소저. 잠시 실례를.”
송기무는 측간에 가는 것을 핑계 삼아 일단 자리를 피했다. 어느 한 순간 그녀의 손
을 덥석 잡아버릴 충동이 일어날지 몰라서였다. 자아의 제약은 좁아터진 물길과 같
아서 격랑을 만드는 거센 물줄기라면 가뿐이 넘어설 수 있었다. 더구나 송기무는 혈
기왕성한 평범한 남자에 불과했다. 이성으로 몰아치는 파도와 같은 격정을 제어할
수 있는 수양이란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가연에 대한 욕심이 이성의 둑을 무너뜨
리기 직전에 송기무는 자리를 피했다. 뇨기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라도 쐬고 있을라치면 진정이 될까 싶어서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찬 공기를 맞으며 송기무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깊이 들이마신 차가운 공기가 달아
오른 마음까지 식혀주기를 바라며. 그러나 주루를 나선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당가연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화공의 정성이 담뿍 담겨진 하나의 선처럼 우
아한 곡선을 그린 그녀의 아미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솟아오른 오똑한 콧망울. 도톰
히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을 가진 그녀의 영상이 매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송기무의
마음을 거칠게 흔들었다. 낮에 잠시 보았던 그녀의 몸매까지 떠올랐다. 크기도 작지
도 않으며 눈으로 보기만 해도 탄력이 드러나는 그녀의 가슴이 머리 속을 하얗게 비
우는 것 같았다. 가늘기 그지없는 당가연의 세류요(細柳腰:가느다란 허리)는 어떠한
가? 그의 한 팔에 감겨 버들가지처럼 낭창이는 당가연의 허리에 대한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후, 하, 후, 하!”
당장이라도 달려가 당가연의 허리를 잡고 입을 맞추고픈 욕망을 참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크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
상의 방법이었다.
“송공자!”
“...!”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어느새 송기무를 따라 내려온 당가연이었다. 순간적으로 송기무는 그녀가 그 사이를
못참고 자신을 보고파한 것은 아닐까하는 기대에 사로잡혔다.
“아, 공기가 너무 좋아서...”
“호홋! 측간 옆에서 공기가 좋다하시다니... 정말 송공자는 특이하시군요.”
송기무는 여태껏 인분향이 가득한 곳에서 깊은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
다.
“하핫, 그... 그게... 그나저나 소저께서 어인 일로? 혹시 소저도...?”
“아니요.”
당가연이 수줍게 웃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올라오시지 않기에 잠시 나와 봤지요.”
“그, 그러셨군요. 어서 올라가시죠.”
송기무는 손을 내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
“네?”
“외람된 질문하나만 할게요.”
“무엇이든 물어 보십시오. 이 송모가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다 큰 처자가 이런 질문을 한다고 흉보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저 역시 큰 용기를 내
어 여쭤보는 것이니까.”
“제가 어찌 당소저를 탓하겠습니까? 무슨 질문이든 기꺼이 답할 테니 말씀하시지요.”
“혹시 송공자께선 마음에 두신 정인(情人)이 있으신가요?”
“네?”
너무나 갑작스런 당가연의 질문에 송기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
졌다.
“그... 그러니까... 그게...”
“당돌한 질문이지만 꼭 답변을 듣고 싶어요.”
송기무의 어리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생각들 때문에 골치가 지
끈거릴 정도였다. 많은 이견의 대립은 결국 강희연에 대한 언급을 해
야 할 것인지 말아야할 것인지로 귀결되었다. 송기무는 왜 당가연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그 의도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
나 이 순간 자신에게 정인이 있다 말하는 순간 당가연의 얼굴에 실망
의 빛이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가연 역시 자신을 좋아하
고 있는 것일까? 정인이 없다면 그 자리에 서려하는 질문인가?
정답 없는 자문의 연속은 계속될 수 없었다. 호수 같은 눈망울을 빛
내는 당가연 앞에서 긴 시간을 고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둘러
답을 해 주어야만 했다.
“없습니다. 없지요.”
미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튀어나가 버린 말이었다. 강희연이 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겠는가?
“아! 그렇군요.”
당가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정말 당소저가 내게 마음이 있는 건가?’
“송공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아, 네.”
명랑한 목소리로 주루의 안으로 들어가는 당가연이었다. 송기무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주루의 안으로 들어서 계단을 올라갈 때 송기무는 난감하기 그지없
었다. 앞서 올라가는 당가연의 둔부가 눈앞에서 어른거렸기 때문이
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그러면서도 무공으로 다져진 탄력이 눈에
보이는 그런 둔부였다.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강희연의 둔부에 비해
크기는 작았지만 아담하면서도 귀여운 느낌을 주는 당가연의 둔부가
논 앞에 바로 놓이니 애써 진정시켰던 음욕의 불길이 다시 치솟아 올
랐다. 마치 두 눈에 투시력이라도 생긴 것처럼 당가연의 하의와 속곳
을 넘어 희디흰 피부가 선명하게 보이는 듯 했다.
마음의 동요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부위 때문에 송기무는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당가연의 뒤를 쫓
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