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章 천수나찰(千手羅刹)
타는 듯한 갈증에 눈을 떴다. 침상에 누운 상태에서 보이는 천정은
자신의 방안에 있는 낯익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난 밤 당가연과 술을 마신 것이 기억났다. 마치 몇 장의 화폭에 그
려진 몇 개의 그림만을 보는 것처럼 기억의 사슬은 군데군데 그 고리
가 빠져 있었다. 일단 물이라도 한 잔해야겠다는 마음에 송기무는 몸
을 일으키려하다 자지러지게 놀랐다. 상체를 들기 위해 짚은 팔에 무
엇인가 물컹하는 것이 닿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본 그는 다시 한
번 경악을 해야만 했다.
자신의 옆에서 부챗살 같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곤히 자고 있는 당가
연을 본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송기무는 발딱 일어나 앉아 지난밤에 대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노력
했다. 갈증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현재의 정황으로 미루어 유추를 해 내어야 한
다. 송기무는 당가연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이불을 들어 그 밑을 살
폈다. 아니나 다를까! 이불에 가리어졌던 당가연의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진 게 없었다. 그제서야 송기무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
역시 벌거벗은 상태였다.
‘내가 지난 밤 그녀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는 송기무였다. 웃어야 하는 이유에 비
해 울어야 하는 이유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간
단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워 그 미모가 사천 일대를 울리는 당가연과
정을 통해 몸을 섞었으니 웃음이 나오려 하는 것이었다.
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이유는 꽤 많았다.
일단 강희연이 큰 문제였다. 그녀만을 기다리겠노라 철석같이 약속
해 놓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와의 연속성을 지닌 복잡한 것이었는데
기본적으로는 당가연이 사천당가의 여식이라는 데서 비롯된 문제였
다. 스스로 호방함을 표명하며 성에 대해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강희
연과 달리 당가연은 그와 잠자리를 하기 전까지는 순백지신이었던
게 분명했다. 이불을 들었을 때 그녀의 눈부신 옥주 사이로 보인 검
붉은 흔적은 처녀성이 파기된 증거인 앵혈이 분명했다. 당가연의 정
조를 무너뜨렸으니 분명 그녀는 자신과의 혼사를 요구할 것이고, 송
씨일가에는 당문을 배경으로 한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은 장담컨
대 없었다. 그리된다면 당가연과 성혼한 자신을 보며 강희연이 얼마
나 상처를 받게 될 것인가?
지끈거리는 두통은 숙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허나 어찌할 것인가? 이
미 엎질러진 물이요 깨진 바가지였다.
“흐음~!”
당가연이 듣기 좋은 콧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몸을 왼쪽으로 돌
리자 그녀의 팔이 자연스럽게 송기무의 다리위에 얹어졌다. 낯선 감
촉 때문일까? 당가연의 손이 송기무의 다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부드
러운 애무와는 다른,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촉각을 통해서 사
물의 형체를 알아내려 하는 시도와 같은 손놀림이었다.
갑작스럽게 당가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곧 송
기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일시간의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비명이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송기무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가 두 손을 들어올리자 양손에 이끌린 이
불이 훌러덩 젖혀지며, 아침을 맞은 건강한 청년임을 입증하듯 꼿꼿
이 일어선 그의 분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흡!”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의 장식으로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비명
소리가 한 순간에 멈췄다.
당가연의 커다란 봉목이 그 한계점까지 커졌고 그녀는 곧 숨이 넘어
갈 사람처럼 헐떡이기 시작했다. 송기무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재빨
리 이불로 하체를 가렸다.
잠시간 멍하니 송기무를 바라보던 당가연이 갑작스레 표독스런 목소
리로 외쳤다.
“이 음적!”
짝!
눈앞에서 별이 번쩍하는 것을 본 송기무의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갔
다. 당가연이 누운 채로 우수를 들어 그의 뺨을 날려버린 것이다.
“다, 당소저.”
이빨이 부러질 것만 같은 아픔을 참으며 송기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당가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송기무는 아
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왜 우는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상황
을 미루어 보아 그녀도 어제 과음했음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자신처
럼 아무것도 기억을 못할 것이다. 십수 년을 고고히 지켜왔던 순결을
취중에 잃었으니 그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송기무는 뭐라 달리 위로할 말이 없었다. 그저 그녀가 스스로 울음을
그치기만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흑, 흑! 짐승 같은 자. 그래도 믿을 수 있다 생각했건만...”
당가연이 흐느끼며 말했다.
이쯤 되자 송기무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겪은 일이다. 간밤의 그녀와 나눈 쾌락의 순간이 기억나기
만 한다 해도 이처럼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와 함께 누워있는
이유조차 잘 모르는데 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그녀가 먼저
안겨들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나 이런 경우 십중팔구의 죄
는 모두 남자에게 돌아왔다. 누가 먼저 안겼건 결과는 남자에게 불리
하게 돌아오는 법이었다.
그래도 처량하게 우는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송기무는 당가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소저.”
“이 더러운 손 치워, 짐승!”
당가연이 송기무가 얹은 손을 거둬내며 원망스런 눈초리로 노려봤
다. 송기무는 그녀의 눈빛에 찔끔하여 재빨리 손을 내렸다.
“흐어어엉! 엄마~!”
대체 여자들은 왜 이럴 때에 자신의 모친을 찾는지 송기무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허어엉~”
당가연의 울음은 상주의 그것처럼 점차 통곡성으로 변해갔다. 송기
무는 행여라도 옆방이나 밖에까지 소리가 들릴까 걱정이 되었다. 이
와 중에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저절로 떠오르는 걱정이니 그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당소저.”
“흐응~”
잠시만 진정하고 내 얘길 들어봐요.”
송기무는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한 음성으로 당가연에게 말을 건넸다. 어찌되었
건 마냥 울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사실 소생도 지난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아아앙~”
‘뭐, 뭐야? 왜 더 크게 우는 거야?’
이런 경우를 한 번도 당해보지 못한 송기무였다. 여태껏 그가 상대해 온 여인이라고는 기
루의 기녀들과 강희연이 다였다. 한 번도 순결한 여인을 경험하지 못한 그인지라 순결을
잃은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을 알지 못한 것이다.
“저, 저기 그러니까... 하여간에 그렇게 울지만 말고 대화를 좀 해보자고요.”
“흐윽, 흐윽~”
이번에는 제대로 말을 한 듯싶었다. 당가연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 밤 우리 두 사람이 만취한 듯 하군요. 제가 생각하기엔 당소저도 간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당가연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큰 여인이 외간남자 앞에서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결코 자랑할만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실수를 인정해야만 하는
당가연이었기에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황을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저희가 지난밤에 큰 실수를.......!”
송기무는 당가연의 살기어린 시선에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무엇인가 잘
못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러니까... 그게... 제가 당소저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송기무는 끊임없이 당가연의 표정의 변화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취중에 그만 저도 모르게...”
“흑, 흑!”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던 송기무였다. 그런데 멀쩡히 이야기를 듣
던 당가연이 갑자기 다시 울기시작하자 더욱 당황했다. 이러다 그녀가 성질이라도 한 번
낼라치면 따귀 한대 맞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암기를 뿌려대거나 하독을 하지 않
는다손 치더라도 그녀가 익힌 무공의 일부만 사용하면 송기무 정도는 손쉽게 죽이고도
남았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송기무는 지금 그녀의 기분을 풀 수 있느냐 그렇지 않
느냐에 생사가 달려있다는 각오로 이것저것을 시도해본 것이다. 그러나 당가연이 다시
울기 시작하자 또다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그럼 송공자님이 저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건가요?”
눈물을 훔치며 당가연이 묻는 말은 송기무가 예상했던 바와는 크게 달랐다.
“그럼요. 다, 당연히 사모했으니 이렇게...”
“제 몸을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 모. 하. 는 마음이 있었다는 거죠?”
송기무가 그렇지 않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손을 쓸 기세였다.
“그럼요, 그렇지요. 하핫!”
“지금 웃음이 나와욧?”
“!...”
“그럼 증명해 봐요. 송공자가 저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아니, 그걸 어떻게 증명한단 말이에요?”
“내가 알아요? 하여튼 증명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가연의 눈에서 마치 시퍼런 광망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송기무는 ‘저런 것이 살기
라는 것이구나!’ 라고 내심 중얼거리며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대체 지난밤에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어찌 증명하란 말인가? 감정이라는 것이 몸을 열
어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증명서에 기록되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증명하라는 당가
연의 말은 분명 억지였다. 그렇다고 지금 당신의 말은 억지다 그러니 못하겠다고 말할 수
도 없는 처지였다.
결국 송기무는 일찍이 성혼한 친구들의 금과옥조와 같은 충고를 몸소 실행하기로 했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간도 짧았고, 실행에 옮기는 시간은 더욱 빨랐다.
송기무는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덮치듯 당가연의 위로 몸을 날렸다. 갑작스런 송기무의
행동에 당가연은 너무도 당황스러워 어릴 적부터 몸에 익혀온 무공을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송기무의 팔이 강하게 그녀의 목을 감싸자 피부와 피부가 닿으며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가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기에, 너무도 화가 치밀어 주체할 수 없기에 몸이 달아오른다
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송기무의 살갗이 그녀에 닿는 순간 몸을 달구던 열기의 정체가 분
노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송기무의 집에서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열기가 다시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읍!”
송기무의 두터운 입술이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덥어 버렸다. 그녀는 두 팔에 힘을 주어 송
기무를 밀어내려 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송기무
의 매끄러운 혀가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유영을 시작했다. 혀와 혀가 감기고, 타액
의 교환이 시작되었다. 입으로 뿜어낼 수 없는 거친 열기가 코를 통해 배출되었다. 어느
사이 그녀를 감싸고 있던 팔이 풀렸다. 사내의 거친 손길은 탄력 있는 원형을 유지하던 그
녀의 가슴을 일그러뜨렸다.
“아!”
비음 가득한 탄성이 울리자 송기무의 숨결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입김이 입술
에서 멀어지는가 싶더니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작은 귀를 덥히
기 시작했다. 그의 숨결이 귀에 닿자 당가연의 몸이 비틀렸다. 당가연은 거친 사내의 손을
가슴에서 떼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십수 년을 참오 해 익혀온 내공의 힘으로도 그의 손을
밀어낼 수 없었다. 잠시간의 실갱이가 끝날 무렵 송기무의 뜨거운 숨결은 그녀의 가드다
란 목을 타고 내려와 곧게 뻗은 쇄골에 머무르고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가슴에 이르
렀다.
송기무의 혀가 가슴 한가운데서 수줍음을 타는 유실을 건드리고 그녀의 허리는 침상에서
떨어졌다. 옥주를 더듬는 사내의 손길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어느 한 순간 살짝 띄웠던 허
리가 큰 곡선을 만들며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어냈다. 두 눈이 부릅떠지고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듯 했다. 능숙치 않은 사내의 손놀림이었음에도 그녀는 태어나처 처음 느끼는 야
릇한 쾌감에 치를 떨어야했다.
잠시 후 그녀는 낯선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무엇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고 강한 통
증이 느껴진단 말인가? 적당히 부풀어 올라 작은 둔덕을 만들어낸 그녀의 아랫배에서 오
는 진한 통증이었다.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던 온몸의 근육이 굳어졌던 것만큼이 빠르게
이완되었다. 팔이 늘어지고 다리의 힘이 풀렸다. 파과의 통증이 지난밤에 있었을 텐데 어
찌하여 그 통증이 지금까지 이어진단 말인가?
통증을 호소하는 그녀의 신음소리는 송기무에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느끼는 통증에서 오는 울부짖음을 즐기고 있을는지도 몰랐다.
송기무는 미지의 대지를 질주하는 정복자가 되었다. 저항하는 적을 거침없이 베고 적진
깊숙이 말을 몰았다. 한 발을 내딛는 만큼 광활한 영토가 자신의 소유가 되리라. 때로는
서둘러 때로는 완만하게 대륙 정벌을 점령해갔다. 치열한 저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복
자가 자신에 가져다주는 것이 행복이자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된 대륙은 점차로 정복자
를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반김은 곧 열려한 환호로 변화되었다. 정복자의 발발굽이
새겨진 대륙은 행복에 전율했다. 정복자도 정복당하는 자도 각자의 쾌락의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은 무공을 닦는 사
람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주화입마의 그것을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혈액의 역류가
가져온 것은 주화입마의 무서운 후유증이 아니라 다급한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절정의
쾌감이었다.
“아...앗!”
당가연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며 고개가 젖혀졌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장식된 그녀의
세류요와 둔부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미를 보여 주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침상위의 이
불을 움켜쥐고 새하얀 이가 송기무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시작된 작
은 전율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진자의 운동처럼 몇 번의 반복과 함께 서서히 사그라졌
다.
정복자도, 피정복자도 만족한 한 편의 대륙정벌기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당가연도, 송기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의 순간을 깨고 수줍은 듯
내리뜬 당가연의 눈에 송기무가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자극을 받은 당가연의 입술이 열
렸다.
“무랑!”
송기무의 입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호칭이 또 한번 바뀐 것이다. 호칭뿐만 아
니었다. 원망 가득한 울먹임은 어느새 다정한 정인을 부르는 달콤한 노랫소리처럼 바뀌
었다.
“당소저.”
송기무는 당가연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도저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는지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눈을 침상으로 돌렸다.
그런 그녀의 수줍음은 송기무의 남성을 또다시 자극했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무랑, 가연이라 부르세요.”
이름을 불러달라는 말. 이는 곧 송기무를 남자로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닌가?
“가연!”
송기무의 부름에 당가연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당가연이 손가락을 세워 송기무의
입술을 매만졌다.
여자는 이럴 때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심한 여자의 심리에 능숙치
못한 송기무는 그의 품안에 안긴 작은 새를 보듬듯 당가연의 동그란 어깨만을 쓰다 듬었
다.
“무랑! 진심으로 절 좋아하시는 거 맞지요?”
그녀 참지 못하고 스스로 입을 열었다.
송기무는 능숙한 화화공자는 아닐지라도 이럴 때에는 여자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피에는 이미 수많은 여자들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호색가
의 자질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당가연의 눈을 직시하며 흘러나온 단호하면서 짧은 대답. 당가연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송기무늬 시선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아니, 그녀는 송기무의 눈을 통해 그의 진심을 알고
싶어 했다. 애써 고정시킨 송기무의 눈에서 다른 가식을 찾아낼 수 없는 당가연이었다.
“그 말 믿을게요.”
당가연은 송기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송기무는 안겨든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
다.
“무랑!”
“응?”
어느덧 송기무의 어투는 하대로 바뀌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생긴 이 후였기에
공대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강호의 사람들이 저를 뭐라 부르는 줄 알아요?”
“글쎄...? 가연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그에 걸맞게 부르지 않을까?”
“호호호,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별호는 천수나찰이에요!”
섬뜩한 별호였다. 천개의 손을 가진 나찰이라니!
“제가 악인들에게 손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기에 생긴 별호에요. 옳지 못한 것은 결코 참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하...하... 그렇지. 그래야지.”
왜 송기무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당가연의 말을 계속되었
다.
“사랑한다고 말해서 자신을 바친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코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이지 그 어떤 노래보다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명장의 손을 빌어 만들어진 악기라 할지
라도 그녀의 음성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음성이 송기무에
게 전달하는 의미는 결코 아름다운 소리의 감상만으로 끝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니 무랑은 제게 상처를 주시면 안돼요!”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왜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나찰이라
불리는지 이유를 몸으로 알려줄 것이다. 송기무의 이마에서 땀이 삐질거리며 흘렀다.
“그, 그럼. 당연하지.”
어쩔 수 없이 떨려 나오는 음성. 그러나 당가연은 송기무의 상태를 개의치 않았다.
“소중히 간직해온 순결이에요.”
당가연의 입술이 송기무의 가슴을 간질였다.
“무랑에게 줄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가슴 뭉클한 얘기였다. 당연히 기쁨에 겨워 소리라도 질러야 할 소리였지만 송기무의 안색
은 핏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본가로 돌아가는 대로 아버님께 말씀드리겠어요.”
“무엇을?”
송기무가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우리 사이 말이에요. 아버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제가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걱정하셨거
든요.”
“저... 가연!”
“네?”
“너무 서두르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왜요?”
당가연의 얼굴이 송기무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그게... 좀 더 시일을...”
“왜 시간이 필요한 거죠? 혹시...”
당가연의 얼굴에 의심의 빛이 뜨는 순간 송기무의 말이 엄청 빠르게 휘몰아쳤다.
“시일을 둔 후에 내가 직접 찾아뵙는 게 좋지 않을까?”
“정말이요?”
의심의 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당가연의 얼굴에는 감격과 기쁨만이 가득했다.
“그럼. 정말이고말고.”
확고한 대답과는 달리 송기무는 제 손으로 무덤의 깊이를 자꾸만 깊어지게 하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무랑은 정말 대단해요. 무공을 익힌 자들도 저희 가문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데, 직접 찾
아갈 생각을 하다니요. 호호호,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버님께서 화를 내시면 어쩌려고 그
래요?”
‘헛!’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엉겁결에 순간을 모면하려 한 말이었다. 다시금 그녀가 속한 가
문이 독과 암기로 이름 높은 당문이라는 것을 상기한 송기무였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부친히 화를 내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한줄기 핏물로 녹아내릴게 분명했다.
‘왜 내가 그딴 소리를 했을까?’
송기무가 막 말을 바꾸려는 순간.
“정말 고마워요. 무랑이 그렇게까지 해 주신다니. 연아는 정말 감동했어요.”
당가연이 갑자기 송기무를 끌어안으며 한 말이었다. 송기무는 막 뱉으려던 말을 꿀꺽 삼켜
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 어찌 말을 바꾼단 말인가?
한사람은 행복에 젖고 한사람은 주체 못할 만큼 난감해하는 상황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당가연의 글썽이는 눈물을 뒤로 한 채 송기무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지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뿐인데 잠시간의 이별을 그토록 슬퍼하는 여인의 심정을 이해하기엔 송기무
의 경험은 일천했다. 돈을 받고 몸을 주는 여인과 마음을 받고 몸을 바치는 여인과의 차이
점을 모르는 그였다.
집 앞에 도착한 송기무는 알 수 없는 낯설음을 느꼈다. 태어나 자라온 집이었다. 몇 년 만
에 돌아와도 정겨워야할 집인데 하룻밤 외박에 이토록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이 선뜻 이해되
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들어가 눈으로 확인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낯설기 이를 데 없는 비린한 향! 무엇 때문에 이
런 냄새가 나는 것일까? 평소 부친은 지저분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또한 냄새에 예민
한 반응을 보이는 탓에 이토록 비릿한 향이 집안을 진동하는 것을 내버려 둘 일이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이제 뛰는 듯이 빨라졌다.
지금쯤이면 집사가 달려 나왔어야 했다. 부친이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민 채 출근을 하셨
다며 기분을 풀어드릴 방도를 찾자고 나섰어야 했다. 그러나 그를 마중하는 사람은 없었
다. 아니,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송씨일가에 상주하는 인원은 무려 이십여 명이
나 되었다. 그 많은 인원들이 이토록 기척을 내지 않고 집안 곳곳에 숨어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체모를 불안감이 송기무를 엄습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쫓아 한달음에 내실로 뛰어 들
었다. 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불안한 느낌은 느낌이었을 뿐일까? 지금쯤 부친이 출근을 하
였을 터이니 내실이 비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길한 예감이었
다. 그는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지나 부친의 침소로 향했다.
드르륵!
기척도 내지 않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차피 아무 일도 없다면 지금 부친은 성도 내의 송
가전장에 있어야할 터이니 굳이 예의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부친의 호
통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그 호통성에 몸을 움찔하면 불안함
이 떨쳐질 것만 같았다.
그의 불안한 느낌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눈앞의 광경은 결코 결벽에 가까운 부친의 침소
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밀한 조각이 새겨져 우아한 자태를 뽐내 부친이 아끼던 책상은 다
리가 부러진 채 본래의 정교한 아름다움을 잃고 뒹굴고 있었으며, 은밀한 곳에 숨겨 둔 장
부들이 아무렇게나 펼쳐진 채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흩어진 붓들이 기묘한 도형을 만
들고 흰색 가득하던 벽에는 암울하기 이를 데 없는 검붉은 문양이 얼룩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신음소리 때문이었다. 소리의 진원은 침상 너머였
다. 용수철이 튕겨지듯 송기무의 몸이 침상위로 날았다. 침상 너머의 바닥에는 전장에서
돈을 세고 있어야할 부친이 누워 있었다. 그것도 온 몸에 피칠을 한 채.
“아버지!”
송기무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외침을 들었던 것일까? 얇은 진동과 함께 부친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정기 가득하던 고집스러운 눈매가 아니었다. 생기를 잃은 흐릿한
동공이 송기무를 향했다.
“무...무아...냐?”
“아버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한 팔로 받쳐 든 부친의 몸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아... 피...해...라... 절...대... 돌아...오...지...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누구에요? 누가 이런 짓을 한거에요? 왜요? 왜?”
한꺼번에 쏟아지는 질문들이었다.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라면 이렇듯 할 수 없었을 것이
다. 질문보다는 울부짖음이라 부를 수 있을 외침이었다.
“피...해... ! 허억!”
부친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아버지~!”
눈앞이 흐릿해졌다. 뿌연 습막은 곧 마르지 않는 샘에서 솟아오르는 물이 되어 흐르기 시
작했다. 눈물이 뜨거운 것은 감정의 기운이 담겨 있기 때문일까? 목 놓아 울고 싶었지만 부
친의 몸을 바라본 송기무 통곡 조차할 생각을 잊었다. 다급함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부
친의 팔에 꽂혀 있는 대롱을 보게 된 것이다. 몸에 피칠을 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
다. 혈관에 속이 빈 대롱을 박아 넣었으니 부친의 피가 몸을 적시고 바닥을 적셨던 것이다.
분노로 인해 눈물조차 타들어 갔다. 도대체 누가 이런 잔인한 짓을 했단 말인가? 부친의
몸 곳곳에는 타박상으로 인한 멍울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송기무가 봐도 알 수 있는
고문의 흔적이었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왜 이런 잔인한 짓을 했단 말인
가?
대롱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을 때처럼 뿜어 나오진 않지만 조
금씩 흐르는 혈류는 멈추지 않았다. 몸에서 피가 조금씩 빠져 나가고 있는 동안 부친이 느
꼈을 공포와 고통이 그에게도 전해져 오는 듯했다.
엄하기만 한 부친이었다. 일찍이 아내를 잃었기에 한껏 정을 쏟아 부어도 모자랄 자식이
었지만 그의 부친은 교육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무분별한 애정은 자식의 미래를 망친다
는 것을 알았기에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않고 매를 들었다. 그러나 때리는 아비도 맞는 자
식도 그것이 서로에 대한 사랑의 교환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큰 말썽이 일어날라치
면 외려 송기무의 편에 서서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던 부친이었다. 그런 부친이 있었기
에 늘 명랑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부친이 눈앞에서 죽었다. 천수를 누
린 후 맞이한 호상이라 하여도 실부의 슬픔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친은 누
군가에게 강제로 붙잡혀 잔인한 고문에 시달리다 죽었다.
가슴이 터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 줄 알 듯 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느낄 수 있었다..
한이 맺힌다는 말을 가슴에 새겨 넣고 있었다.
증오의 감정이 터질 듯이 요동쳤지만 표출할 대상이 없었다. 누구의 손에 부친이 죽음에
이르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복수의 한을 풀고자 해도 정작 누
구에게 복수를 해야 할지 모르는 송기무였다.
작은 실마리는 있었다. 어제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집을 찾던 사람들. 효능은 알 수 없지만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부친을 찾아오게끔 한 그 약! 부친의 사망이 그것과 연관이 있을 것
이란 막연한 실마리만이 송기무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송기무는 이를 악물고 두 눈을 부릅떴다. 작은 실마리라도 놓칠 수 없었다. 기필코 이 실
마리를 통해 원수를 알아내어 복수를 하리라 맹세했다. 부친의 피로 새겨진 맹세는 복수
의 매듭을 풀기 전까지는 지워지지 않으리라.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부친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피할 것은 권유했다.
원수가 누구인지 알리는 것보다 대피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함은 아직도 흉수의 위협
이 집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일지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피할 수도 없었다. 부친
의 시신을 방안에 버려둔 채 저 살겠다고 도망을 갈 정도의 독심을 지니지 못한 그였다.
부친의 팔에서 대롱을 빼 냈다. 철로 된 가는 대롱을 그 끝이 뾰족하여 살을 파고들기에
좋아 보였다. 은은한 검은 색 빛이 감도는 철(鐵)의 재질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송기무는
대롱을 갈무리했다. 부친의 죽음에 대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될 지도 몰
랐기 때문이다. 두 팔로 시신을 안아들었다. 본시 작고 마른 체형인 부친이었지만 이렇듯
가볍게 들릴 줄은 몰랐다. 체내의 혈액이 빠져 나갔기 때문일까? 너무나 가뿐히 들리는
시신의 무게에 송기무의 눈에선 다시금 덧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부친의 시신을 매장할 때는 하염없는 곡성이 절로 나왔다. 강직했던 그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흙을 덮다 말고 땅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 부르
고 불러 봐도 눈을 뜨지 않는 부친이었다.
어릴 적 모친의 죽음을 경험했다하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이었다. 철이 들고 처음 맞이
한 가족의 죽음이란 체내의 혈액이 모두 눈물로 변해 쏟아진다 해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이었다.
두 손을 고운 흙을 모아 시신위에 흩뿌렸다. 아무리 도구를 썼다 하나 거친 일을 해 보지
못한 손인지라 땅을 파는 동안 허물이 벗겨지고 짓물렀으나 개의치 않고 흙을 손에 담아
부친의 시신위에 고이 뿌렸다. 황토 빛 흙이 점차로 부친의 모습을 가리더니 결국 보이지
않게 되자 다시 한번 격렬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을 못했기에 황토는 진흙이 되었고, 그로인해 더욱 굳게 다져진
흙이 작은 봉분으로 형태를 갖출 즈음에는 해가 저물었다.
“크으으윽~ 아버지~!”
다시 한번 오열이 시작되었다. 제대로 된 비석하나 세우지 못하는 불효자의 아픔이었다.
원통한 죽음을 갚아야할 대상조차 알지 못하는 서러움이었다. 유일한 피붙이를 잃고 홀
로 남은 자의 절규였다.
“반드시 놈을 잡아 영전에 바치겠습니다. 받으신 고통의 만 배로 돌려주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놈을 잡아 영전에 바치며 성대한 장례를 치러드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려...주십시오.”
깨물린 아랫입술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억울하게 부친을 잃게 된 송기무의 심정을
증거 하듯 처연한 붉은 빛이 감도는 피였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설움, 그리고 증오였다. 가슴이 터질 듯 괴로웠지만 분출할 곳도
마땅하지 않았다. 너무나 울어대 지친 다리에 힘을 주어 절을 마친 송기무는 뛰기 시작했
다. 부친을 해한 자가 두려워서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
질 것 같았기에, 그리고 부친의 곁을 떠날 수 없을 것 같기에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흘렸
음에도 그치지 않은 눈물 때문인지, 증오로 인해 사고의 기능이 마비된 탓인지 자신이 달
려가는 방향조차 알지 못하는 송기무였다.
이각 이상을 쉬지 않고 달리던 송기무가 발을 멈추어 섰다. 땀과 눈물에 젖은 얼굴은 홍수
의 격랑에 휘말렸다가 빠져 나온 사람 흠뻑 젖어 있었다. 거친 숨결에는 단내가 섞여 나왔
다. 한 없이 달릴 수만은 없었다. 알 수 없는 적으로부터 도망을 가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
의 진실 된 목적은 도망이 아니라 복수였다. 이대로 달린다고 해서 흉수가 목을 내밀며 찾
아와 복수를 할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모든 일의 발단은 호갈위라는 자가 찾으러
온 영약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송기무는 아직 그 영약의 효능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가장 기본적인 사건의 열쇠는 호갈위라는 자에게 있을 법했다.
그자가 찾아온 다음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은 우연일 리가 없었다. 분명 호갈위라
는 자의 수작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탐을 내는 영양일 것이고 그 영약이 송
씨가문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을 터이니 소문의 진원이 호갈위라는 작자임에 틀림
없었다. 그럼 어디 가서 그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자를 찾아내면 사건의 경위
를 설명해 줄 것인가? 얼핏 보아도 그자는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었다. 선친을 호위하는
곽상에는 못 미치는 실력이겠지만 무림인이라면 송기무, 자신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송기무는 한 가지 이해 못할 사실이 있
다는 것을 알아냈다.
부친의 시신을 매장하기 전 집안을 둘러본 송기무는 헛간에 쌓인 가솔들의 시신들을 발
견했다. 그들 역시 고통스러운 죽음 당했으리라 여겨지는 흔적을 몸에 새긴 채로 겹겹이
쌓여 헛간에 널브러져 있었다. 스물에 달하는 시신을 일일이 수습할 수 없었던 송기무는
헛간에 불을 질러 그들의 시신을 화장했다. 그러나 낯익기만한 시신의 얼굴 중에서 보이
지 않는 자가 있었다. 바로 무진검 곽상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곽상은 사천에서도 일류로 쳐주는 고수라고 했다. 그렇다면 흉수들이 집
안을 덮칠 때 부친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을 것이다. 그가 아는 곽상은 충직한
인물이었다.
무인으로서 돈에 팔려 상인을 보호하는 것은 그다지 자부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곽상이 선친의 곁에 머무는 것은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년 전 어렵사리 모셔온 곽상은 일 개월의 시간을 두고 계속 머무를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일 개월이 지나자 그는 선친의 인품에 감탄하였다 말하고 송가에 머물러 가
주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했다. 선친은 그 일을 크게 기뻐하여 잔치까지 벌일 정도였다. 그
후 곽상은 여러 면에서 충직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송기무는 곽상이 선친을 보호하는 일에는 목숨을 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런데 그의 시신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친이 저지경이 될 정도라면 곽
상은 운신을 할 수 없는 중상을 입은 상태이거나, 죽어 있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선친이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시신은 어디
에 있단 말인가? 혹시 죽지 않은 그를 흉수들이 끌고 간 것일까? 그럼 곽상 역시 지독한
고문을 받다가 죽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어 낼 수 없
는 송기무의 심정은 답답하기만 했다.
당장 드는 생각은 당가연을 찾아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라면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시아비가 될 자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닌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문이라면 송기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밝혀낼 지도 몰랐다. 일
단 그 영약에 대한 것만 해도 송기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복수의 일념으로
타오르는 송기무는 머뭇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민강(岷江)으로 향했다.
송기무의 모습이 사라지자 수풀 한쪽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아니 그곳에 숨었던
사람의 움직임에 흔들리는 수풀이었다. 빽빽한 수풀을 헤치고 나온 자는 탐욕스런 눈빛
을 뿌리며 송기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측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까?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사내는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방
향은 송기무가 사라진 쪽이었다.
사내가 사라지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쇳소리가 섞인 듯한 기괴한 음성이었다.
“저 꼬마 놈이 알고 있단 말이지?”
“송가의 자식 놈입니다. 그가 모른다면 세상에 아는 자가 아무도 없
겠지요. 장사도 치루지 않고 누군가를 찾아간다면 분명 물건을 가진
자일 겁니다.”
“클클, 만약 물건을 가진 놈이 송가가 죽은 것을 알고 먹어 버린다면?
”
“아직 모든 약효가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죽여서 피를 빨면 되겠지
요.”
“크캬캬캬캬, 그렇군. 그러면 되겠어. 네놈의 영악함이 꽤 쓸만하구
나. 헌데 약효가 스며들지 않은 것은 어찌 아느냐?”
“송가의 집안에서 독특한 약향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물건이 집안에 있었다는 얘기지요. 약이 몸에 완벽하
게 흡수되기 까지는 적어도 세 달 이상이 걸립니다. 그러니 녹아들지
않은 약효만 받아들여도... 흐흐흐흐.”
“크캬캬캬캬!”
모습도 보이지 않는데 마치 유령의 그것처럼 들려오던 두개의 음성
이 점차로 멀어져 갔다.
흉수는 이상하게도 집안에 있던 은자나 패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부
친만이 알고 있던 비밀금고가 열려 있었음에도 그 안에 있던 많은 재
물은 고스란히 있었다. 결국 흉수가 원하는 것은 그 영약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은자를 집어 나왔다. 나머지 은자와 패
물은 송기무의 방에 있는 자신만의 금고에 넣어 두었다. 본시 쓸모없
는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용도로만 쓰였으나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곳
이니 재물은 안전하게 보관될 것이었다.
오랜 걸음을 걸어본 적이 없는 송기무였다.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쑤
셔왔다. 앉아서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무작정 달려 나올 것이 아니라 말을 살 걸 그랬다는 후회를
했다.
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품안의 대롱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선
친의 몸에서 피를 뽑아내던 대롱이었다. 철로 만들어진 차가운 감촉
이 손에 닿을 때마다 선친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온 몸의 피가
빠져 나간 채 힘없이 죽어가던 모습이 생생히 보이는 듯 했다. 그러
면 물집이 잡히고 허물이 벗겨지는 발바닥의 통증 따위는 쉽게 잊혀
졌다. 머릿속에는 오직 복수라는 하나의 단어만이 차오르고 있었다.
분노가 육신을 지배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고 다
시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 걷고 또 걸은 송기무는 버틸 수 있는 한계
에 도달했다. 흉수를 잡아 목을 베어 영전에 바치기 전에 제풀에 쓰
러져 버릴 수는 없는지라 송기무는 객잔에 들어 하루를 묵고 가기로
했다.
작은 객잔의 방은 허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지저분한 방에서 묵어본 적이 없는 송기무였지만 채 장례도 치르지
못한 불효자가 이불을 덥고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나친 호강이라
생각했다.
극도로 소진된 심력과 체력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송기무를 무너뜨
렸다. 허기진 배를 채울 사이도 없이 수마(睡魔)는 강력한 유혹의 힘
으로 송기무의 눈을 감게 했고, 그는 세상모를 깊은 잠에 빠져들었
다.
스슥...!
빗장도 잠글 사이 없이 수마에 사로잡힌 송기무였다. 열려진 창문틀
아래에서 그림자가 슬쩍 모습을 보였다. 송기무가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림자는 창문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왔다. 흑색경장과
동일한 색상의 복면을 한 인영은 옷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방안
에 들어섰다.
허리를 약간 숙인 채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인영의 눈빛에 이채
가 어렸다. 방안에는 행낭 같이 보이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복면인은 발끝만으로 걸음을 옮겨 송기무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을 펼쳐 송기무의 얼굴 앞에 대고 흔
들었으나 규칙적인 호흡소리밖에 들리지 않자 복면인의 입에서 가는
한숨소리가 들렸다. 방안에 들어와 복면인이 만들어낸 가장 큰 소리
였다.
복면인은 허리를 침상에 엉덩이를 살짝 걸쳐 앉은 채 아주 조심스럽
게 손을 내밀어 송기무의 품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송기무
가 잠에서 깰까봐서인지 그 움직임은 극도로 느린 것이었다.
“흐음...가연...”
당가연의 꿈이라도 꾸는지 송기무가 갑작스레 몸을 돌리며 마치 무
엇인가를 안아가듯 복면인의 허벅지에 팔을 얹었다. 잠이 깬 줄 알고
흠칫했던 복면인이었으나 이내 잠꼬대인 것을 알고 안도했다. 난감
한 눈빛을 보인 복면인은 다시 아주 느린 동작으로 허벅지 위에 얹어
진 송기무의 축 처진 팔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송기무의 눈썹에 미
세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잠이 깰만한 정도는 아니었는지 슬슬 코를
골기 시작했다.
간신히 송기무의 팔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흑의복면인의 눈이 찌
푸려졌다. 송기무가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가슴이 바닥으로 가 품안
을 뒤지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복면인은 고개를 살짝 젓더니 송기무
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받쳐 몸을 뒤집기 시작했다. 송기무의 몸이 반
정도 들려 조금만 힘을 쓰면 바로 눕힐 수 있을 때 쯤, 그가 갑작스럽
게 두 팔을 벌려 복면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자는 와중에도 팔에 꽤
힘이 들어갔는지 아니면 송기무가 잠에서 깰까봐 복면인이 버티지
못한 것인지 복면인은 송기무가 이끄는 데로 몸을 숙였다. 이렇게 되
니 마치 두 사람이 서로 꼭 끌어안고 누워있는 현상이 되었다. 복면
인의 커다란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호흡을 고르며 애써 진정한 복면인은 몸을 움찔 거려 송기무의 양팔
사이에서 빠져 나오려는 시도를 하다가 여의치 않자 일단 송기무의
옷깃을 풀어 헤쳤다. 품안에서 송기무의 전낭을 찾아낸 복면인의 눈
에서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손을 놀려 전낭을 풀어낸 복면
인은 전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게 울리는 은자의 차가운 금속성.
이내 복면인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찾는 물건이 없었던 것이다. 여
느 도둑이었다면 묵직한 전낭을 꺼내는 순간 기뻐하였을 것이다. 그
러나 굳이 꺼내든 전낭을 뒤지고 실망을 하는 것으로 보아 복면인의
목적이 은자가 아닌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복면인은 다시 조심스레 송기무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시도했다.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했으니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복면인은 처음 들어 왔을 때는 옷깃조차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
으나 지금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
었다. 송기무의 양팔을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잠을 자고 있으
니 팔에 강한 힘이 들어가 있을 리가 없었음에도 송기무의 팔에서 벗
어나는 것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금만 심한 동작을 취
하면 송기무가 잠에서 깰 것이기 때문에 아주 조금씩 움직여야만 했
기에 더욱 그러했다. 간신히 팔을 들어 올려 송기무의 품에서 벗어난
복면인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송기무의 얼굴을 잠시간 응시하던 복면인은 빠르게 창문 쪽
으로 이동했다. 고양이 같이 가볍던 발걸음은 크게 무거워져 있었다.
세상모르게 자는 송기무가 깰 리 없을 거라 생각해서 편하게 행동하
는 것일까? 흑의 복면인은 곧 들어온 곳을 통해 사라졌다.
송기무는 소면을 시켜 뜨거운 면발을 먹고 있었다. 달고 달았던 잠에
서 깨어나니 해가 높이 솟아 있어 게으름을 피운 자신을 크게 탓하고
당문을 향한 출발을 서두르려 했다. 그러나 지난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인지라 요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하니 국수는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국물이 싱거운지 짠지
조차 모를 정도로 대충대충 입으로 밀어 넣은 송기무가 자리에서 일
어나려는 찰라 부드러운 충격과 함께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얏!
뾰족한 비명소리였다. 급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던 송기무가 마침 그
옆을 지나던 여인과 부딪히며 여인을 쓰러뜨린 것이다. 송기무는 크
게 놀라 여인을 부축하려 들었다.
“이손 치워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한 여인은 옷을 털며 스스로 일어났다. 그녀의
차가운 말투에 송기무는 얼굴을 붉혔다.
“대체 눈은 어디에 달고 다니는 거죠?”
표독스러운 외침이었다. 목소리와 달리 여인은 허름한 객잔의 식당
에 앉아 있는 사내들이 침을 질질 흘릴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
다.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긴 목선이 보였고, 흰 피부와 유난히 큰 눈이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상큼 치켜 올라간 아미와 음성으로 보아 분명
화를 내고 있는데 분명한데도 큰 눈 때문인지 표정에서는 그녀가 화
를 내고 있다는 게 잘 느껴지지 않았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용모의 여인이었으나 송기무는 부친상으로 마음
이 울적하여 그녀의 미모를 감상할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강호에
서 손꼽히는 미모로 명성 높은 강희연과 당가연의 얼굴에 익숙한 그
였다. 눈앞의 여인이 눈에 띄게 아름답다 하여도 두 절세가인과 인연
이 있는 송기무의 관심을 끌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더구나 왜 이런
허름한 객잔을 찾아 들었을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화려한 장신구
로 치장된 여인이었다. 본래부터 요란한 치장을 한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 송기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하여...”
“흥! 죄송하다면 다인가요? 제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
어요?”
송기무는 실로 난감했다. 자신이 급하게 일어나서 부딪혔다 해도 분
명 고의가 아니었다. 여인의 추궁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지만 그래
도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치료가 필요하시다면 사례라도...”
“뭐에욧! 지금 제가 당신한테 돈이나 받아내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에
요?”
“어떤 놈이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수작을 거는 거야?”
송기무가 당황해 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걷
어 올린 소매 아래로 굵직한 팔뚝을 드러낸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손목을 돌리며 송기무와 녹의의 여인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쪽으로 킬킬거리는 사내 둘이 더 보였다.
“이봐요, 아가씨. 이놈이 아가씨께 수작을 거는 겁니까?”
험악한 남자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녹의의 남자에게 물었다. 여인
은 얼굴에 곤란한 듯한 안색이 스쳐지나갔다.
“흥!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닌 듯 한데요.”
매몰찬 음성이었다. 두꺼운 팔뚝에 드러난 힘줄이 꿈틀하더니 사내
가 소리쳤다.
“도와주겠다는데 그건 또 무슨 말버릇이야?”
“당신 도움 따윈 필요 없으니까, 가서 먹던 밥이나 먹어요. 대낮부터
술이나 먹는 주제에...”
여인의 성격은 실로 대단했다. 험악한 인상과 체구는 남자인 송기무
도 위축될 정도였는데 서슴없이 할말을 해 버리는 여인의 표정에 조
금도 두려워함이 없었다.
“이런 당돌한 계집을 봤나! 얼굴이 반반해서 잘 봐주려 했더니...”
험상궂은 사내는 잔뜩 인상을 쓰고 녹의여인을 향해 인상을 썼다.
“천박하기는...”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콧방귀를 꼈다.
그리고 송기무를 향해 말했다.
“당신 때문에 이런 일까지 생기잖아요! 대체 무슨 생각...”
그녀의 말이 이어지지 못한 것은 아예 외면을 당해버려 무안해진 사
내가 거칠게 손을 낚아챘기 때문이다.
“이년이! 감히 이 어르신을 무시해?”
“이년...? 이손 못 놔!”
녹의여인의 아미가 상큼 치켜 올라갔다.
“크흐흐, 네 년이 처음부터 고분고분 했으면 되었을 일 아니냐?”
사내는 다른 한 팔로 녹의 여인의 허리마저 끌어안으려 들었다. 녹의
여인의 미간에 주름이 심하게 잡힐 때 또 다른 목소리가 사내의 행동
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그 손 놓지 못하겠는가?”
낭랑하고도 위엄 있는 음성이었다. 허름한 식당 내에서 갑작스레 발
생한 흥미 있는 사단에 주목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새롭게 등장
한 인물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