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章 백의서생 (白衣書生)
“허!”
“저런 미공자가?”
“하!”
중인들의 감탄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과연 나타난 자는 보는 이
의 탄성을 절로 불러일으킬 만큼의 수려한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영웅건에 의해 단정히 정리되었으며 날카로운 검미가
붓으로 그린 듯하고, 흰 피부와 선명하면서도 단정한 이목구비를 갖
추었으니 전설상의 송옥, 반안이 현신한 듯한 용모의 사내였다. 다만
키가 좀 작고 체형이 가냘픈 것이 아쉬웠으나 빛이 나듯 수려한 용모
로 인해 작은 단점은 인지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넓게 펼쳐진 섭
선을 여유 있게 흔들며 식당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백색단삼
의 사태는 천계에서 유람을 나선 신선과 같은 모습인 듯했다.
흉악한 사내조차도 백의서생의 용모에 잠시간 넋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으르렁 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개자식이 지금 이 어르신께 명령을 한거냐?”
“어르신이면 어르신답게 체통을 지킬 일이지 어이하여 백주대낮에
연약한 여인을 희롱하는 게냐?”
백의서생은 비꼬는 말투까지도 낭랑하였다. 그러나 험상궂은 사내의
귀에까지 자신을 비꼬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릴 수는 없었나 보다.
“이 말라비틀어진 서생나부랭이가 어르신을 희롱해?”
사내는 녹의여인의 손을 놓고 성큼성큼 백의서생에게 다가갔다. 워
낙 체구가 큰 사내였던지라 백의서생의 앞에서니 마치 어른과 아이
가 서있는 것 같이 보였다.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자군.”
백의서생은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다가오는 사내를 보면서 전혀
위축되지 않고 여유 있는 손놀림으로 부채질만을 하고 있었다.
“그놈의 유식한 주둥이를 찢어주마!”
우렁찬 사내의 말과 더불어 솥뚜껑 같은 손을 말아 쥔 주먹이 백의서
생의 안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림같이 생긴 백의서생의 용모가 망
가지는 것을 염려해서인가? 식당 안의 사람들 사이에서 놀라움과 안
타까움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사내의 무지막지한 주먹은 허공을 가르기만
했을 뿐 백의서생의 얼굴을 가격하지 못했다. 백의서생은 가볍게 허
리를 뒤로 젖혀 주먹을 피한 것이다.
“어쭈?”
자신의 일격이 가볍게 빗나가자 화가 더 치밀어 오르는지 사내는 회
수한 주먹을 다시금 백의서생의 복부를 향해 날렸다. 백의서생은 입
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섭선을 접어 날아오는 사내의 손목부위
를 쳤다.
딱!
“크윽!”
뼈와 부채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와 사내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사내는 발작적으로 왼쪽 주먹을 마저 날렸다.
백의서생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사내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좌수로 살짝 사내의 가슴을 밀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서 어찌 저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백의서생의 가
벼운 밀침에 사내는 비틀거리며 뒤로 서너 발자국이나 밀려났다. 단
지 밀린 것뿐이라 고통을 느끼지 못한 사내가 더욱 분노하여 외쳤다.
“이제 보니 한 수가 있는 놈이구나. 오냐, 이 장삼(張三)님께서 네놈
이 오늘 임자 만났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마!”
큰소리를 친 장삼이란 사내는 커다란 체구를 비호처럼 날렸다. 아까
와는 사뭇 다른 동작이었다. 장삼의 주먹이 어깨의 움직임과 동시에
백의서생의 얼굴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졌다. 휘두르는 주먹이 아니
라 뻗는 주먹은 정면에서 피하기가 곤란한 법이었다. 그러나 백의서
생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허리를 낮추어 장삼의 주먹을 피해냈
다. 장삼 역시 백의서생이 이쯤은 피하리라 예상했었는지 허리를 숙
인 백면서생의 얼굴을 향해 왼쪽 주먹을 날렸다. 아래에서부터 시작
된 주먹의 휘두름은 맹렬한 바람소리를 내며 백의서생의 얼굴을 향
했다. 그러자 백의서생의 섭선이 흐릿한 잔영을 만들며 어느 덧 장삼
의 주먹을 막아섰다. 무지막지한 팔뚝에서 비롯된 주먹을 고작 부채
하나로 막을 수 있으랴 싶어 송기무의 입에서 안타까운 신음이 흘렀
다.
퍽!
두 사람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송기무는 두 눈을 크게 떠야
만 했다. 장삼의 솥뚜껑만한 주먹이 백의서생의 섭선에 가로막혀 한
치도 앞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익!”
마치 부채에 밀리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이 장삼은 왼쪽 팔뚝에 불
끈 힘을 주어 주먹을 앞으로 밀기 시작했다. 우람한 팔뚝에 지렁이
같은 핏줄이 꿈틀대기 시작했고, 근육은 튀어나올 듯이 부풀어 오르
기 시작했다. 이마에 혈관이 드러나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음에도 섭
선은 요지부동이었다.
장삼은 눈을 부릅뜨고 백의서생의 조각 같은 얼굴 바라봤다. 기생오
라비 같인 생긴 녀석이라 한주먹이면 대자로 뉘일 자신이 있었다. 잘
생긴 얼굴을 보면 안 그래도 못마땅한 그였다. 그런데 자신에게 시비
까지 걸어오는지라 다시는 그 반반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코
뼈를 납작하게 해주고 이빨도 몇 개 분지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근방에서 주먹질이라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
는 장삼이었건만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피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달랑 부채하나로 있는 대로 힘을 불어 넣은 주먹을 막아내고 있는 백
의서생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한편 마음 한구석에서 덜컥 겁이 났다. 삼십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보고 들은 것을 전부 측간에 배설한 장삼이 아
니었다. 주먹질 하는 놈치곤 한 번씩 들어봤을 그 말이 떠 오른 것이
다.
-무슨 일이 생겨도 무림인은 건드리지 마라!
무공을 익힌 자들은 요상하게 숨을 쉬어 몸 안에 내공인지 뭔지를 가
지고 있다고 했다. 그 힘은 인간의 힘을 초월할 수 있게 해 주어 손바
닥에서 바람이 나가고 하늘을 날아다니게 한다고 했다. 그런 무림인
을 건드린다는 것은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바와 같은지라 시정잡배
들에게는 금과옥조와도 같은 격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백면서생이었다. 가느다란 몸매와 예쁘장한
얼굴은 계집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가 아는 한 이런 무림인은
결코 없었다. 사천은 중원에서 내 놓으라 하는 문파가 집중적으로 몰
려 있는 곳이라 장삼 역시 그간 꽤 많은 무림인들은 먼발치에서 봐
왔다. 자신처럼 흉악한 인상은 아닐지라도 떡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몸매가 한 눈에도 잘 단련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이는 무공
이란 게 단순히 앉아서 숨만 쉰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
이었다. 혹독함에 가까운 신체의 수련을 동반해야 했기에 체형이 단
단하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서생 놈은 결코 발달된 신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늘
하늘한 몸을 보면 손가락 하나에도 땅바닥을 구를 수 있게 할 수 있
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무릇 힘을 쓰는 자는 자신이 남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든
법이다. 장삼도 예외는 아니어서 결국 장삼은 자신이 낮술을 마셔서
제 몸을 못 가누는 것이라 결론 내렸다.
왼팔에 힘을 주어 부채를 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놀고 있는 오른쪽
주먹으로 백의서생의 관자놀이를 노려 내질렀다.
백의서생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몸이 뒤쪽으로 일장이나 물러나 있었다. 너무나 표홀한 움직임이라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백의서생의 움직임을 본 녹의여인의 눈에 감탄어린 이채가 흘렀다.
“무식한 힘만 믿고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네놈의 경을 칠 일일 것
이나, 길(吉)한 날을 흉한 일을 만들지 않고자 하니 어서 사라지거라.
”
왜소한 체구에서 울러 퍼지는 낭랑한 목소리는 너무도 당당하여 보
는 이의 탄성을 자아냈다. 서생차림의 사내에게서 장부의 기개가 느
껴지니 송기무 역시 감탄해마지 않았다.
장삼은 잠시간 머뭇거리다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알았는지 황급히
줄행랑을 쳤다. 그와 함께 있던 두 사내 역시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
금 객잔의 식당을 나섰다.
“소저께서 많이 놀라셨겠군요.”
“아... 네, 조금.”
사람에 따라 그 행동이 달라지는 것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모
르고 날뛰던 녹의여인이 갑작스레 다소곳한 어투로 대답을 하는 것
이었다. 큰 눈에 눈물까지 그렁한 것이 정말 겁을 집어 먹고 떨고 있
던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송기무는 그녀의 요망함에 혀들
내둘렀다.
“이제 안심하셔도 될 것이니 진정하십시오.”
“정말 공자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아주 놀아라, 놀아!’
여느 명배우 못지않은 연기에 송기무가 내심 투덜거렸다.
“하하하, 해야 할 도리를 다 했을 뿐이지요.”
송기무는 호방하고 겸손한 백의서생에게 호감이 갔다. 외모를 떠나
서 흉악한 사내를 크게 다치게 하여 혼을 낼 수 있었음에도 그저 호
통을 쳐 돌려보내는 그의 너그러운 마음 씀씀이가 마음에 들었다. 만
약 그가 여유로운 상황이었다면, 친구의 인연을 맺고 싶을 정도였지
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소저, 아까의 일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전 이만...”
백의서생의 외모에 넋이 빠져있는 녹의여인에게 재빨리 말을 건네고
송기무는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한시바삐 당문으로 가야한다는 조
급함 때문이었다.
“이것 봐요. 어딜 그냥 은근슬쩍 도망을 가려는 거예요?”
몸을 돌리는 송기무에게 녹의여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
인은 자신의 어투가 지나치게 사나웠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백의서생
의 눈치를 살짝 봤다.
“이미 사과 드렸지 않소?”
녹의여인이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자 송기무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
작했다. 그녀의 행동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호오! 이젠 적반하장이네요? 되레 화를 내는군요?”
“그게 아니라 고의가 아닌 일에 사과를 드렸는데 왜 자꾸 소생을 핍
박하시는 거요?”
송기무의 언성이 살짝 높아지자 갑작스레 녹의여인의 커다란 눈이
흔들렸다.
‘뭐, 뭐야?’
“지금 저한테 소리 지르시는 건가요?”
녹의여인의 커다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무지막지한 장삼의 협
박에도 끄덕하지 않던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자 송기무는 대충 그녀
의 속셈을 눈치 챘다. 절세 미남의 앞이라 여성스러운 척을 하는 것
이다. 송기무는 그녀의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갈 길이 바쁜 몸이오. 소저와 실랑이하고 싶지 않소.”
송기무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백의서생이 섭선을 내
밀어 앞길을 막았다.
“이것 보시오, 형장.”
송기무가 고개를 돌려 백의서생을 바라봤다.
“이분 소저께 무슨 실수를 하신 모양인데 그렇게 가시면 어찌합니
까?”
“충분히 사과를 드렸으니 제 할 도리는 다 했습니다.”
송기무는 백의서생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언제 다시 볼
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잠시나마 호감을 가졌던 이에게 나쁘게 인
식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백의서생은 송기무의 말을 듣고 녹의
여인의 표정을 살폈다. 송기무의 말이 맞는지를 묻는 무언의 질문이
었던 것이다.
“흥! 아녀자를 밀쳐 넘어뜨리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냐고요?”
확실히 이전에 비해서는 한결 부드러운 어투였다. 그런 여인의 태도
에 송기무는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다시 하자는 게요? 그럼 소생보고 대체 어쩌란 말이오?”
“제 화를 풀어줘야죠.”
“어찌하면 풀리겠소?”
점점 고조되는 음성이었다. 한시가 촉박한 송기무는 이런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든 것 자체가 짜증이 났다.
“흐응, 글쎄요...?”
“소저,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는 몸이오. 서
둘러 말하시오.”
“누군 한가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요?”
녹의여인이 양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그러니 빨리 어찌하면 좋을지 말하란 말이오.”
“일단 당신 이름은 뭐죠?”
여인의 입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이쯤 되자 송기무는 거의 폭발하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한 번 넘어진 것을 가지고 질질 시간을 끄는 여
인의 행동 끝에 상황을 즐기는 듯한 미소를 보게 되자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더욱 시간을 소비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불초의 이름은 송기무라 하오.”
그의 말을 들은 백의서생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호호, 제 이름은 주수민(周秀?)에요.”
누가 물었던가?
그제서야 송기무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물어본 이유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름을 말하며 그녀가 바라본 곳에는 백의서생이 있었던 것
이다. 처음부터 송기무의 이름 따위엔 관심이 없던 그녀였다.
“그런데요?”
송기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그냥 그렇다고요.”
주수민은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하시오!”
“호옹, 성격이 급하시네요. 좋아요. 당신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면
용서해 드리죠.”
“...”
“안 들어 줄 건가요?”
“일단 말을 해 보시오.”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죽으라고 한 것도 아닌
데. 제 부탁은 간단해요. 저는 배가 고파서 식당에 왔으니 식사를 해
야 하고 여자가 혼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은 보기에 흉하니 제가 식사
를 할 동안만 저랑 같이 있어주면 돼요.”
참으로 이상한 여인이었다. 사납게 굴며 핍박을 하더니 결국 요구하
는 것이 식사 중에 합석을 해 달라니. 송기무는 고개를 절래 흔들며
거절하려고 했다.
“바쁘다는 거는 알아요. 하지만 그 정도의 성의를 보여야 진심으로
사과하는 게 아닌가요?”
송기무가 막 입을 떼려할 때 여인이 한 말이었다.
“하하하! 그렇게 하십시오, 송형. 미인이 같이 식사하길 청하는데 아
무리 급해도 마다할 이유가 되겠소? 용서의 조건이 아니라 마치 혜택
을 주는 것 같구려.”
백의서생이 속도 모르고 끼어들었다.
“알겠소. 소저가 식사를 하는 동안만 같이 있으면 되는 것이오?”
“그래요. 더 이상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어요.”
송기무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혹시...”
백의서생이 입을 열었다. 주수민이 예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백의서
생을 바라보았다.
“무례한 부탁이 아니라면 소생도 합석을 해도 되겠소이까? 이 몸도
혼자서 온 지라.”
“호호호, 얼마든지요.”
주수민은 소매로 입을 가린 채 매우 기쁜 듯이 웃었다.
“송형도 괜찮으시오?”
송기무는 이제 백의서생에 대한 호감도 사그러 들었다. 그러나 그가
악의를 가지고 한 행동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실례하겠소.”
“소저의 방명을 들었으니 소생의 이름도 밝힘이 예의겠구려. 소생의
이름은 백영(白英)이라 하오.”
“호호호, 백소협(白小俠)이셨군요.”
주수민의 말에 백영의 눈에 살짝 낯선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주수민이 주문한 식사의 양은 대단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시켜
대어 여덟 사람이 달려들어도 다 먹지 못할 정도였다. 가냘픈 몸매로
보아 엄청난 양의 음식을 다 먹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는데, 왜 이토
록 많은 음식을 주문한 것인지 송기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남의 식사를 구경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나 있는 그
인지라 그저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인가 보다라고 짧게 생각을
마쳤다.
“주소저, 무슨 음식을 이리도 많이...?”
주수민의 주문량이 지나치다 싶다고 생각한 것은 송기무뿐이 아니었
나보다.
“호호, 백공자도 계시고 저기 무례한 자도 있으니 이 정도는 시켜야
지요. 어서 드세요. 백공자를 만난 기념으로 제가 사는 음식이니까
요.”
“하하하 초면에 큰 신세를 지는구려.”
“신세라니요. 자고로 장부는 많이 먹어야 한답니다. 당신도 어서 들
어요.”
“전 이미 식사를 마쳤소.”
“아까 보니 소면 하나 달랑 먹은 것 같던데. 그 나이에 국수 한 그릇
에 배가 차겠어요? 괜한 고집피우지 말고 어서 먹어요.”
“뜻은 고마우나 사양하겠소.”
시종일관 퉁명스런 송기무였다.
“흥! 아까는 바쁘다더니, 지금은 다시 한가한가 보군요. 미리 말씀드
리지만 저는 이 음식을 다 먹어야 식사를 마치는 거랍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던지 함께 먹어 빨리 식사를 끝낼 수 있게 하던
지 맘대로 하세요.”
“그런 억지가...?”
주수민은 송기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연자탕을 덜어 먹기 시작했
다.
“하하하, 송형. 볼일을 빨리 보러 가기 위해서라도 음식을 먹는 것을
거들어야겠구려.”
그저 호방한 성격에서 기인한 농담이었겠지만 송기무는 점차로 이
백의서생에게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정의로워 보였기에, 남자답
기에 호감이 갔었지만 정의의 행사대상이 자신이 되자 생각이 바뀌
어가는 것이다. 만약 그가 껴들지만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자 짜증이 그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내버려 두세요. 고집불통! 그나저나 백소협.”
“네.”
“아까 보니 무공을 익히신 듯한데 어느 문하에 계시는 지요?”
백영의 턱이 살짝 당겨졌다. 허리가 펴진 것이다. 그는 잠시 입안의
음식을 씹어 삼킨 후 대답했다.
“선비도 건강해야 학문을 익히는 법이지요. 그저 약간의 호신술을 배
웠을 뿐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조수민의 커다란 눈동자가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붉은 입술이 달싹거렸으나 곧 포기한 것처럼 다시금 젓가락을 드는
그녀였다.
“그나저나 송형은 어딜 그리 바삐 가시오?”
“집안일이오.”
참견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마음이 좋지 않으니 목소리가 좋게 나올
리 없다.
“허, 이거 참. 송형의 기분이 좋지 않은가보구려. 좋은 음식과 가인을
앞에 두고도 기분이 좋지 않으시다니...”
아까부터 가인이네 미인이네 하는 것을 보니 겉보기와는 달리 백영
이 여자 꽤나 밝힌다는 생각을 하는 송기무였다. 가만히 있어도 여자
가 줄줄이 달려들 생김이었는데 밝히기까지 한다면 수많은 여인들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었다.
“일을 물은 것이 아니지 않소. 홀로 유람을 나왔으니 오랜 고독에 지
쳐 그런다오. 행여 방향이 같으면 동행을 할 수도 있으니 목적지나
알려하는 것이오.”
“말했듯이 급한 일이라 유람의 속도에 맞춰 움직일 수 없소. 그러니
다른 동행을 찾아보시오.”
“흥! 정말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군요. 백소
협이 호의에서 물었는데 그리 퉁명스럽게 굴다니. 대체 예의가 있는
사람인가요?”
송기무의 눈썹이 꿈틀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늘어지는 조수민
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백영이 자신에게 무례한 것은 없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민강이오.”
당문(唐門), 혹은 사천당가(四川唐家)라 불리는 이곳은 청성, 아미와
함께 사천을 대표하는 문파이기도 하고 하나의 가문이기도 했다.
기실 당문은 하나의 일가에 불과하여 그 규모 면에서는 사천에 웅크
리고 있는 여러 문파에게 비해 작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삼 백
여 가솔에 불과한 당문이 사천을 대표하는 문파로 손꼽히고 중원의
열개 하늘 중 하나로 인정받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문도 중 누구라도 외인에게 해를 입게 되면 반드시 되돌려 주
는 당가의 율법(律法)에서 기인했다. 하나의 문파가 친인척으로 구성
되었으니 짙은 혈육의 정으로 단합된 곳이 당문이었다. 맡은바 직책
이 미미하다할지언정 내 아들, 내 조카이니 문도 하나하나가 소중하
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하여 당문의 제자를 해 해하는 자는 죽을 때
까지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당문의 명성이 높은 이유는 비단 이와 같은 지독한 복수의 방식 때문
만은 아니었다. 강자만이 인정받는 강호에서 힘없는 자의 복수를 뉘
라서 두려워하겠는가? 오늘날 당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또 하나
의 이유가 있으니 바로 당문이 가진 엄청난 힘 때문이었다. 무릇 보
이는 공격을 피하기 쉬워도 보이지 않는 공격을 피하기 어려운 법이
다. 당문의 힘이 이 보이지 않는 공격에 기인하니 강호에서 가장 상
대하기 어려운 힘 중의 하나라 손꼽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문
의 힘이 기기묘묘한 암기와 그 암기의 사용법, 한 방울로 소를 죽인
다하는 독의 제조와 그 하독술에 있으니 당문을 두려워하는 이가 많
음이라.
암기와 독술로 대표되는지라 당문이라 하면 음습하고 어두운 곳이라
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암기의 제조란 고도의 기술과 섬세한
장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처럼 놀라운 기술을 가진 당가
가 자신들의 거처를 대충 지어 놓을 리 없었다. 당가의 건물은 아름
답기로 그 어떤 명소보다 뒤지지 않아 밝고 웅장한 기운이 넘쳐흘렀
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세심한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었으니 전각의
기둥 하나, 기와 하나가 예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 얘기를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아버님!”
“어허!”
“분명 제 손으로 지아비를 고른다고 하였고 아버님께서 허락하신 일
이었지 않습니까?”
“상인에게 보낸다하지는 아니하였다.”
“소녀가 애정을 느낀 분이옵니다. 그분의 가문이 아니라 그분을 사
랑...”
“닥쳐라!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랑 운운하는 게냐? 무가의 여식
이라 해도 법도는 있는 법! 성혼을 하지 않은 아녀자가 사랑을 거론
하면 강호인들의 경멸을 산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언제부터 당가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했사옵니까?”
“허헛. 내 너를 지나치게 어여삐 키웠음이야. 이리도 철이 없다니. 쯧
쯧...”
“이미 마음을 주었습니다. 여인 된 도리를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 더
세인들의 경멸을 살 일이 아니옵니까?”
“그만 하자. 더 이상 너랑 실랑이 하고픈 마음 없다.”
“아버님!”
“나가 보거라.”
더 이상 조른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당가연은 침울한 표정으로 부친
의 방을 벗어났다.
송기무는 자신이 와서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기
다리고 있을 당가연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송기무와 함께 하고
싶은 그녀였기에 사랑하는 님이 생겼다는 것을 부친께 고했던 것이
다.
마냥 기뻐할 줄만 알았던 부친의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힌 당가연
은 크게 실망했다.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정인을 생각
하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날 오후 당가연은 난데없는 소리를 들었다. 사촌오빠인 당수유와
당추가 하는 이야기 중 성도 내의 송씨일가가 몰살당했다는 이야기
를 듣게 된 것이다. 당가연은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영약 때문이었다. 영약을 탐한 자들이 송씨일가에 해를 입힌 게 분명
했다. 평소 총명하기 이를 데 없던 당가연이었지만 정인이 죽었을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 판단력을 상실했다.
야심한 밤 하나의 인영이 당가의 담을 넘었다. 가냘픈 인영은 놀랍도
록 쾌속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성도로 향한 질주였다.
송기무는 어이가 없었다. 극구 만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여행
을 하며 심심한 것보다 서두르는 게 낫다며 백영이 자신을 따라나선
것이다. 백영이야 처음에 호감을 느꼈던 사람이니 그나마 나았다. 송
기무의 이마에 잡힌 주름살이 펴지지 않는 것은 괴팍하기 짝이 없는
녹의녀 주수미 때문이었다. 음식을 잔뜩 시켜놓고 다 먹지 못했으니
식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며 식사가 끝나지 않은 대신 그녀 역시 송기
무를 따라 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말도 되지 않는 억지의 연속인지라
송기무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던 것이다.
송기무는 내심 두 사람에게 신경을 끊겠다고 다짐하고는 앞만을 보
고 속보로 걸었다. 따라오다 지치면 제풀에 헤어지잔 말이 나올 것이
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백영은 섭선을 펼쳐 부치며 여유롭기 그지
없는 표정인 채 경치를 둘러보니 유람 나온 서생의 한가함이 그대로
였고, 주수미는 여인의 몸임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따라오고
있으니 괜히 그들을 의식해 다리에 힘을 준 송기무만이 지쳤을 뿐이
었다.
어쩌면 스스로는 빨리 걷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송기무는 자신의 걸
음이 별로 빠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을 걷
고 난 후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와 허벅지, 종아리가 당기고 알이 배
겨 작은 움직임에도 묘한 통증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걸음
을 걷는다지만 그다지 빠른 속도를 내기엔 버거울 수도 있었다.
송기무를 포함한 일행이 야트막한 동산의 소로를 지나가자 허공속에
서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 봤습니다.”
“누군 게냐?”
“계집은 무영신투(無影神偸) 추진강(鄒眞剛)이 말년에 얻은 손녀이
고, 사내놈에 대해선...”
“...?”
“알려진 바가 없는 자이옵니다.”
“클클클... 그래가지고서야...쯧쯧. 딴에는 상승의 절기를 지닌 듯 하
다. 다시 철저히 조사를 해 보도록. 저 나이에 저 정도의 실력을 만들
어 낼 곳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왜 모르는 건지...쯧쯧...”
“아! 알겠습니다, 어르신.”
조용한 동산의 적막을 흔들던 소리들이 사라지자 한 줄기 바람만이
소로 가에 있는 이름모를 잡초들을 쓰다듬었다.
“청산에 흐르는 시내의 노랫소리
한 떨기 꽃 고개 숙여 화답하니
붓을 들어 화폭에 담아내랴
시를 지어 운율에 노래하랴
표현할 수 없어 아름다움은
너뿐인가 하노라.”
지나가는 풍경에 흥이 절로 나는지 백영이 흥얼거렸다.
“호호호, 소협께선 시를 통해 노래치 못한다 하시면서 운율에 실어
노래하시니 앞뒤가 맞질 않는군요.”
“하하하, 제가 허투로 공부를 하였으니 늘 이 모양이랍니다. 풍경이
좋아 절로 흘러나온 것이니 너무 깊게 새겨듣지 마십시오.”
세 사람은 이미 산자락에 닿아 있었다. 근육이 당길 때 내리막길처럼
괴로운 것은 없다. 송기무는 작은 동산을 내려오는데도 계속되는 통
증에 식을 땀을 흘려야만 했다. 두 사람의 되도 않는 풍류 따위는 관
심조차 가질 새가 없었다. 산중 소로의 끝을 막 벗어나려고 하는 일
행은 길가 나무에 몸을 기대어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화려한 화복과 하얀 피부가 어울리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검미는 하
늘을 찌르는 치솟았고, 우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이 멋들어지게 어울
렸다. 다만 붉디붉은 입술이 사내의 그것치곤 지나치게 얇은 것과 귀
밑머리가 하얗게 새어 있는 것이 흠이랄까? 선계에서 내려온 듯한 백
영에는 못 미친다 해도 좀처럼 보기 힘든 미남자임은 틀림이 없었다.
“누가 송가의 자식이냐?”
사내는 고개를 돌려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난데없는 질문에 송기무는 당황했다. 송가의 자식이라 함은 분명 자
신을 칭하는 말일 터였다. 저자가 어찌하여 자신이 이리로 올 것을
알고 기다린단 말인가?
송기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흉수!
선부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도망치라 했다. 분명 흉수가 그를 해
할 것이라 염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솔들을 화장하고 선부의 시신
을 안치할 때까지 흉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뒤를 쫓아
왔다면? 그러다 조금 앞질러 기다리고 있던 것이라면? 나타난 자가
흉수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송기무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
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갑작스레 나타나
자신을 기다리는 자가 흉수이거나 그 흉수와 관련된 자라 단정 지은
것이다.
“내가 송기무요.”
송기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차피 마주쳐 버렸다. 피할 생각도
없었고, 피할 수도 없었다. 자신이 갈 곳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길목
을 지키고 있는 자에게 어찌 벗어나겠는가?
송기무의 대답을 들은 사내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송기무를 바라보
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아이야.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
송기무는 사내가 자신을 아이라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핏
보아 많아봐야 이십 대 후반의 사내였다. 자신 또한 약관에 이르렀으
니 불과 십여 년의 터울도 채 안 되는 자가 아이라 부르는 것은 이치
에 맞지 않았다.
“노부는 너를 도와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까.”
이번에도 사내는 자신을 노부라 칭했다.
“저...저자는...”
갑작스레 주수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탐화귀(探花鬼) 사비옥(司?玉)!”
주수민의 말에 백영의 눈에도 이채가 흘렀다. 처음 주수민이 자신을
호칭할 때, ‘공자’가 아닌 ‘소협’이라는 말을 써서 그녀가 무림인이라
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타난 자를 한눈에 알아볼 정도의
안목을 가지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기껏해야 스무 살 남짓의
여인이 처음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낸 다는 것은 그만큼 강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백영 자신 또한 나타난 자가 누구인
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본 것이 아니어서 주수민처
럼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호오? 어린 아해가 이 몸을 알아보다니... 아해야, 이 어르신은 그 별
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어르신을 부르는 좋은 말이 따로 있지
않느냐?”
“소녀가 그만 화화신군(華花神君)님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지병은 쾌
유하신 것인지요?”
사비옥의 검미가 살짝 들렸다. 그리고는 두 눈에서 광망을 뿌리며 냉
혹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냐?”
주수민의 입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밤이슬을 맞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의 손녀지요.”
사비옥이 순간적으로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그의 음성은 한결 부드
러워졌다.
“추가놈의 외손이로구나. 흠... 그러고 보니 네 어미를 많이 닮았구
나.”
새파랗게 젊은 자가 자신의 외조부를 이놈저놈하며 호칭하는데도 주
수민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송기무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흉수라 생각했던 자가 주수민의 외조부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 같지 않은가? 게다가 주수미의 모친을 저리
언급하는 것을 보면 꽤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네 할애비도 이곳에 온 것이냐?”
주수미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곧 오실 것입니다.”
사비옥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흠. 네가 저 송가 아해랑 같이 있는 것은 무슨 연유냐?”
“어르신이야 말로 왜 여기 계신 거죠? 이미 절정의 수단을 익히신 분
께서 아직도 부족하신 것인가요?”
송기무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데
없이 나타난 자는 억지를 부려 자신을 따라나선 여인과 알고 있는 사
이였으며, 처음에는 친한 척을 하더니 이제는 따지고 들며 언쟁을 벌
이기 직전이니 말이다.
사비옥이 검미를 치켜 올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할 때 송기무가 나
서며 말했다.
“귀하께선 어찌 제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허헛,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것이 소문이다. 네 뒤를 쫓는 저 떨거지
들도 알고 있는 사실을 어찌 노부가 모른단 말이냐?”
송기무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산 사이에 사람들이 발로 밟아 만들어진 소로 이외에는 아무것
도 보이지 않았다.
“쯧쯧, 네게 들킬 정도라면 감히 네 뒤를 쫓을 생각도 못했겠지. 물건
을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진데 어설픈 녀석들이 감히 네 뒤를
쫓을 생각이나 하겠느냐?”
‘물건!’
영약을 말함이었다. 그렇다! 송기무는 한 가지 자신이 간과하고 있었
던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문
턱이 닳도록 집안으로 들이닥치는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도복을 갖
춰 입은 도사들까지 방문하던 송가였다. 그러나 송기무가 집에 돌아
갔을 때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던가?
송기무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선부를 해친 흉수도 그들 사이에 섞여 있었을 것이
다.
그렇다면 왜?
선부를 죽일 능력이 있으면 자신 정도는 손쉽게 죽일 수 있었을 것이
다. 선부의 시신에 남은 흔적은 분명 고문을 한 증거였다. 무엇을 원
하는지 몰라도 자신을 고문하면 될 것을 왜 힘들게 뒤를 밟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다른 자들과 함께? 그렇다면 이 두사람은?
주수민과 백영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과
의 동행은 억지스러운 데가 많았다. 특히 주수민의 경우는 그 정도
심했다. 자신과 우연히 부딪혀서 발생한 일이라기엔 미심적은 데가
많았다.
백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계기야 장삼이란 자 때문에 발생했다
지만 그 역시 의심스러운 데가 많았다. 일단 겉보기에는 자신보다 허
약해 보이는 백면서생이 장상처럼 강해보이는 자를 너무나 손쉽게
물러나게 했다. 단순한 호신술이라기엔 그 실력이 너무 뛰어난 것이
니 의심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역시 선부가 가지고 있다던 영약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정작 자신은 그 영약의 효능조
차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저들이 알기나 할까?
“하핫, 그깟 일로 사내놈이 파랗게 질리기는. 걱정하지 말아라. 노부
가 지켜준다 하지 않았느냐?”
사비옥은 송기무가 그저 쫓기고 있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 때문에
안색이 굳은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귀하께서 저를 지켜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송기무가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적으로 그 누구도 믿지 말아
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는 자들, 그리고 보이지 않게 자
신을 쫓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선부를 해쳤을지 모를 자들이었다. 누
구를 믿고 그렇지 않아야할지 송기무는 알지 못했기에 그런 다짐을
한 것이다.
“하하하. 노부가 지난 팔십년간 강호를 홀로 주유했으니 이제 지칠
때도 되었지. 그러니 너를 제자 삼아 말년의 낙을 삼고자 함이니 다
른 뜻은 없느니라.”
기껏해야 이십여 살로 밖에 보이지 않는 자가 팔십 여년의 삶을 논함
에도 놀랄 틈이 없는 송기무였다. 사비옥은 자신이 여기에 와 스스로
를 밝히기 전까지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송기무를 제자
로 삼겠다함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비록 성인이 다 된
나이지만 엄부의 슬하를 떠나본 적이 없던 그였다. 귀계가 난무하는
강호의 생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호호호, 저희 조부께서 말씀하시길 사어른께선 귀찮아서라도 제자
를 들이지 않으실 거라 하셨는데, 지병을 치료하시면서 마음을 바꾸
신 건가요?”
주수민이 끼어들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 병을 치료하다보니 내가 세상을 하직할 날도 얼마 남
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육신이니 세상
에 왔던 흔적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 추 늙은이야 너처럼 어여
쁜 외손이라도 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만 내게는 그 흔한 제자
도 없지 않느냐? 그러니 이번 기회에 제자를 삼아 내 절기를 전수하
려 함이니라.”
주수민의 질문에 사비옥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너무나 자연
스러워 정말로 그가 제자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해온 것만 같
았다.
“천하에는 무수한 기재들이 많습니다. 자질이 일천한 저를 제자로 삼
으시겠다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겉보기와 달리 팔십여 살이 넘은 기인이었다. 주안술에 대한 개념자
체가 없는 송기무에겐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고,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절기 운운하는 것도 실로 범상치 않았다.
선뜻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선부의 복수에 대해 생각이 미친
송기무였다. 돌아가는 정황으로 미루어봐 아무래도 이 일은 무림이
라는 곳과 관련이 깊은 듯 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흉수를 알아낸다
해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성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싸움꾼들도 무림
인들에겐 감히 주먹을 휘두르지 못했다. 그들이 무림인은 절대로 건
들지 않는다는 불문율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송기무
가 무슨 재주가 있어 무림인에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 찰나에 자신의 절기를 전수해 제자로 삼는다고 나서
는 기인을 보니 의심하는 와중에도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드
는 것이다.
“그거야 간단하지. 무공의 수련은 누구나 할 수 있단다. 그러나 절정
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선 단순히 수련하는 것만으로는 아니 되지. 뼈
를 깎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이 있어야만 절정의 경지에 이
르는 것이야.”
사비옥은 유독 귀밑에만 하얗게 샌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 젊은 것들은 패기고 없고, 인내력도 부족하지. 그러니
나의 절기를 배울 수 있는 재목을 찾기가 어려웠던 게야. 그저 머리
만 좋다고 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나 너의 경우를 보자. 네 선친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으니 복수를 위해서라도 어떤 고통이던 참아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제자로서는 적합하다 할 수 있지.”
“강호후학 백영이 고인께 외람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껏 한걸음 물러나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백영이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나섰다.
“여기 송형은 얼핏 보아도 약관에 든 나이옵니다. 절정의 반열에 오
르기 위해선 경맥이 굳기 전인 육칠 세부터 내공을 수련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송형은 절정의 고수가 되기엔 그 배움이 늦은 것
이고, 또한 실부의 원한을 가진 이가 송형뿐은 아닐 진데 고인께서
그러한 연유로 굳이 송형을 제자로 삼으신다함은 이치에 맞지 않는
듯 하여 무례를 범합니다.”
사비옥의 눈에서 불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어디서 굴러온 녀석이 감히 어른의 이야기에 끼어드는 게냐? 네 입
으로 무례를 범했다 하니 책임을 질 각오는 되어 있으렷다?”
사비옥의 외침에도 백영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포권의 자
세를 풀며 당당히 대답했다.
“옳음을 옳다하고 그름을 그르다 함이 장부된 도리! 무례를 무릅쓴
사유가 되지 못한다면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백영의 말이 끝나자 숨 막히는 살기가 사비옥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
다. 무공에 대해 일견식이 없는 송기무조차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
음 물러서게 만드는 강력한 기운이었다.
“장부라? 크크큿”
사비옥이 비웃으며 기댔던 나무에서 몸을 바로 세워 백영이 있는 쪽
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엄청난 살기가 집중된 탓일까? 백영의 이마에
서 땀이 흐르고 하얀 얼굴은 그 창백함을 더해 백지장이 무색할 정도
가 되었다.
“허허헛, 천하에 이름이 높은 화화신군이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를
위협하다니 빈도의 눈이 잘못된 건가?”
난데없는 웃음소리였다.
웃음소리를 들은 사비옥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백영을 향해
폭출하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중인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했다. 산 아래쪽에서 걸어오는
세 명의 도인(道人)이 보였다.
“정명검(正明劍) 현승자(玄昇子)!”
사비옥의 말에 송기무를 제외한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명검 현승자!
사천 무림을 떠받드는 기둥 중의 하나인 대청성파(大靑城派)의 장로
이자 현 청성파 문주의 사숙인 그는 젊은 시절 한 자루 고검(古劍)을
들고 강호를 종횡함에 있어 바름을 추구하며, 그름을 징벌하니 그 무
명(武名)이 일찍부터 하늘을 찔렀다. 청성의 비전(秘傳) 청운적하검
법(靑雲赤霞劍法) 그의 나이 서른에 깨우쳐 강호에 출도를 하니 그의
앞을 막아설 자가 없었다. 출도당시 수로맹에 속하지 아니하였던 수
적 육십 여명이 양자강 상류에 수채를 짓고 사천내의 모든 수로를 장
악한 듯 횡포를 거듭하는 바, 단신으로 쳐들어가 수적을 패퇴시키되
인명을 적게 상하여 도인으로서의 풍모를 잃지 않으니 세인이 그를
일컬어 정명검이라 하였다. 약 십년간의 강호활동을 접고 청성산에
들어가 칩거하며 수양을 한지 벌써 삼십 여년이 흘렀으니 이미 등선
하였다고 알려진 그가 이름모를 야산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실로 놀
라운 일이었다.
현승자는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여유 있게 사비옥쪽을 향해 걸
어오고 있었다. 긴 수염은 그의 나이와 연륜을 엿보게 해 주었으나
홍조 가득하고 팽팽한 얼굴은 중년의 그것보다 훨씬 나은 듯하니 얼
핏 보아 칠십이 넘은 나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강호사귀(江湖四鬼)의 명성이 하늘에 닿은 지 수십 년이 되었건만
어이하여 사시주는 어린 아해를 핍박하고 계신 것이오?”
강호사귀란 주수민의 외조부인 도귀를 비롯한 네 명의 기인을 일컫
는 말로 탐화귀인 사비옥도 그에 속해 있었다.
현승자의 말에 사비옥의 얼굴에 살짝 노기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대
놓고 자신에게 귀(鬼)라는 호칭을 하는 현승자의 말이 거슬렸던 것이
다.
“하하, 누가 핍박을 한단 말이오?”
이미 전대의 고수로 대접을 받는 사비옥이었다. 강호의 후학을 핍박
했다함은 그의 명성에 크게 누를 끼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애써
부정하는 것이었다. 사비옥은 내심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것을 후회
하는 중이었다. 현승자는 둘째치고라도 이곳에는 수많은 무림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자신이 두려워 감히 나서지 못한다 해도 그
들의 눈을 뜨여 있고 귀는 열려 있었다.
“허허허, 그게 아니었단 말이오? 이곳의 살기가 산을 진동하기에 빈
도는 화화신군께서 어린 후배에게 손을 써 강호의 손가락질을 받고
자 하심인 줄 알았소.”
다시금 사비옥의 눈에서 살기가 일렁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비옥이라 할지라도 정명검 앞에서 광오할 수는 없
었다. 내심으로야 광명검을 상대하는 것은 청성이라는 거대 문파를
적으로 돌리는 무모한 행동이기 때문이라 투덜대지만 실제로 서로
손속을 나눈다 해도 필승의 자신이 없는 그였다.
이미 삼십 여 년 전에 사천에 적수가 없다는 소리를 듣던 현승자였
다. 검술만으로는 청성의 전대문주였던 현오자(玄奧子)보다 뛰어나
다는 현승자가 산중에 틀어박혀 검술만을 닦아 왔다면 작금에 이르
러 그와의 승부에서 필승을 자신할 자는 전 무림을 통틀어 손에 꼽을
것이었다.
팔십 평생을 허송으로 보내온 사비옥이 아니었다. 험난한 강호에서
팔십이 넘도록 명성을 떨친 다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그
의 눈에 일렁이던 살기는 나타났던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산중에서 청정한 수양을 쌓던 분이시라 세인의 노기가 마치 살기마
냥 느껴지신 것이겠지요. 하하하핫!”
짐짓 호탕하게 웃는 사비옥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현승자의 표
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랬구려. 빈도의 오해를 사시주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한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는 현승자의 모습은
진정 신선의 현신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송기무를
비롯한 두 명만이 느끼는 것이고 사비옥은 눈곱만큼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현승자의 선풍도골이 외려 짜증만 불러일으키는 것이
다.
“용서랄 게 무에 있겠소? 그나저나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속에서 선계
에 들 준비를 해야 하실 분이 풍진 세상에 어인 일로 나오셨소?”
다분히 비꼬는 어투였다.
“허허헛. 수양이 부족하여 아직도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음이니
사시주께선 너무 탓하지 마시오.”
여유 있는 현승자의 응대였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해 버리고 질책하
지 말라 부탁하는데 달리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늙은 너구리같은 호랑말코 놈’
사비옥의 검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래, 고귀하신 분께서 이 사모의 행사에 끼어드신 이유는 뭐요?”
마음이 좋지 않으니 말이 곱게 나갈리 없었다. 사비옥의 말투는 일문
의 장로의 직에 있는 현승자에게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나 현승자
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도내의 혈사를 들었지요. 물론 영약에 관한 이야기도. 폐문의 장
문인께서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가벼운 일이 아니라 사천에 혈풍이
일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송기무는 현승자가 누군지 몰랐다. 다만 살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비옥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짐
작할 수 있었다. 청수한 차림과 정명한 기상이 절로 넘치니 의로움이
가득하다는 것은 굳이 깊이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현승
자가 말하는 바가 자신의 가문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자 그는 귀가 번쩍 뜨였다.
“호오! 청성파에서 그런 약에 관심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구려.”
청성파라는 말에 송기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청성파의 명성은
무림인이 아니라 해서 가리어 못들을 것이 아니었다. 사천을 대표하
는 청성파의 명성을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방금 전 현승자는 장문인
의 부탁을 받아 이 자리에 왔다고 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라 함
은 청성파 내에서 그의 지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케 했다. 송기무
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갑작스레 곽상 이외에는 보지도 못했던 무림
인들이 자신의 눈앞에 속출하니 정신이 없기도 했다.
“본시 도가비전으로 제조된 약이 아니겠소?”
“하! 도가비전으로 제조된 것이니 청성이 도문을 대표하여 회수를 하
시겠다?”
“사시주께선 마치 청성이 영약을 탐낸다 하시는 것 같구려.”
“아니란 말이오?”
“성도 송씨가문에 혈사가 있었소이다. 이는 끝이 아니라 혈풍의 시작
을 알리는 것뿐이지요. 사천에 적을 두고 있는 청성이 어찌 코앞에서
일어나는 겁란을 외면하겠소이까?”
“푸하하핫! 그렇구려. 청성은 탐이 나지 않으나 혈겁을 막기 위해 청
정수련을 깨고 장로까지 납신 것이구려.”
사비옥의 말은 이제 노골적인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아이에게 내 제자가 될 것을 제안하고 있었소. 그러니
청성의 장로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셔야 하겠소.”
사비옥이 송기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연스레 현승자도 송기무를
보게 되었다.
사비옥이 청성의 장로를 운운한 것은 그가 송기무를 제자로 맞는 일
은 새로이 문하를 거두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아무
리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그가 왔다 하더라도 지금 참견을 한다면 대
청성이 남의 제자를 가로채 가려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
하는 말이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던 현승자의 눈가에 살짝 주
름이 잡혔다.
“사시주께서 그의 사부가 되길 자청했단 말이오?”
“어허! 화화신군의 독보행이 강호에 알려진지 벌써 수십 년인데 어이
하여 제자를 찾으신단 말이오?”
“그거야 이 몸이 말년이라..”
“보신하실 영약이 필요하신 게요?”
현승자가 사비옥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리
고 그 의도는 송기무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엄청난 능력을 가진듯해
보이는 기인이 자신을 제자로 삼고 도와주겠다고 나서자 마음이 혹
한 그였다. 그러나 현승자의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가 원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선부가 가지고 있다던 영약이었던 것이다.
“지금 사문의 제자를 거둠에 장로께서 훼방을 놓겠단 말이오?”
사비옥의 눈에서 불같은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현승자가 나타나지
만 않았어도 일은 수월하게 풀릴 판이었다. 그의 등장과 더불어 일이
꼬여버렸으니 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를 부르는 말에 귀자가 들어가
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여인을 유혹하고 마음을 훔친 후 사라지는
기행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지만 분노했을 때 수화를 가리지 않는 그
의 성격 때문에 귀자가 붙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을 정도였다. 만
약 그가 크게 분노한다면 아무리 청성이라 할지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었다.
“저 아이가 자청해서 사시주의 문하가 되길 원한다면 어찌 빈도가 방
해하겠소이까?”
그 말인즉슨 송기무가 제자가 되는 것에 동의하기만 한다면 자신도
물러나겠다는 말이었다.
“어떠냐? 노부의 제자가 되는 것이? 노부의 제자가 되는 즉시 너는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절기를 전수받게 될 것이며 선친의 복수도 할
수 있을 것이니라. 내 온힘을 쏟아 부어 너의 복수를 돕도록 하마.”
백영이 또다시 나서려고 하다가 사비옥의 얼음 같은 눈초리를 받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저는 목적하여 가는 곳이 있습니다. 제게 사사의 은혜를 베풀고자
하심은 크게 감읍하나 지금은 때가 아닌 듯 합니다.”
거절의 의미였다. 사비옥의 반듯한 외모가 사정없이 우그러들며 뭐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무량수불!”
현승자의 도호였다.
“빈도는 청성의 현승자라고 하네.”
“아! 송기무이옵니다.”
“송소협의 가문에 생긴 비사(悲事)에 대해 들었네. 선친께 애도를 표
하네.”
“...”
갑작스레 도호를 외치고 끼어든 현승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려 했던
사비옥은 그가 송기무의 선친에 대한 죽음을 논하자 재차 끼어들기가
뭐했다. 어쨌거나 고인이 된 자의 애도를 표하는 중에 끼어들어선 뜻
한 바를 이루긴 커녕 악효과만 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
고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송기무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송소협은 어이하여 이러한 불상사가 생긴 것인지 그 이유는 명확히
알고 있는가?”
“짐작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량수불! 인간의 탐욕이란 끝이 없는 것. 하찮은 물건을 취해 영달
을 바란 탓일세. 그리고 그 욕망은 끝이 없으니 송소협의 가문에 생긴
혈사를 시작으로 전 무림의 이목이 송소협에게 집중되었다네. 이곳
에 몰려온 자들뿐만이 아니고 보물을 탐하는 모든 이들이 이리로
몰려들고 있지.”
송기무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약의 효능이 아무리 좋아
해도 약은 그저 약일뿐이었다. 아무리 기사회생의 묘가 있는 영약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난리가 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그였다. 이는
송기무가 강호의 생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드는 생각일 뿐이었다.
“피를 보는 데 익숙해진 자들이라 송소협의 안전이 몹시 위협을 받
고 있는 상태라네. 선친이 가지고 계시던 영약은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무림은 물론 중원에 파란을 몰고 올 수 있는 물건! 그러하니 우리
청성에서는 송소협을 보호하여 영약이 악인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
도록 하고자 하네.”
“푸하하핫!”
이번에는 사비옥이 현승자의 말을 끊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인즉슨 이 사모도 영약을 탐하여 저 아이를 제자로 삼으려 든
다는 것 같구려. 하늘을 보고 욕을 하여 이 사모를 비웃다니 과연 청
성의 장로이외다.”
“빈도가 어찌 사형을 칭하여 말한 것이겠소? 그저 강호의 귀계를 모
르는 송소협이니 청성에서 보호하고자 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는
뜻일 뿐이었소이다.”
결국 사비옥의 의도가 계략이라는 말이었다.
“푸하하핫! 그렇구려. 일개 가문이 몰살당했다고 청성의 장로가 다
나서니, 중원의 몰락가문마다 뛰어 다니시려면 장로께선 몸이 백 개
여도 모자라시겠구려! 송가 아이야. 네 일생의 홍복이로구나. 대저 누
가 있어 감히 대 청성파 장로의 보호를 받겠느냐?”
청성이 나선 이유에 대해 힐난하는 말이었다.
“인연이 닿음은 하늘이 정하는 법! 송가에서 가진 보물이 청성과 인
연이 있음이니, 청성은 송소협의 보호에 힘을 쓸 것이외다.”
영약이 도가의 비전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크큿, 과연! 금불상은 전부 소림사에서 관리를 해야 할 것이고, 아궁
이의 불은 마교의 허락을 받아 지펴야 하는 거구려. 이제 도가의 인
연은 청성에서 관리를 해야 하니 천하 도가의 으뜸에 청성이 섰구려.”
“세월의 힘을 이겨낸 옥안에서 고절한 무공의 성취를 느꼈지만 사시
주 설변마저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빈도가 미처 몰랐구려.”
사비옥이 입만 살아있다는 얘기였다. 강호에서 닳고 닳은 늙은 생강
사비옥이 현승자의 말에 담긴 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일촉즉발!
사비옥의 전신에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나오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현승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질 때 송기무가 나서며 말을 했다.
“저는...”
불가에서 흔히 인간들이 가긴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다섯 가지로 구
분하니 이를 오욕(五慾)이라 칭한다. 오욕은 색(色) ·성(聲) ·향(香) ·
미(味) ·촉(觸)의 다섯 가지 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의 모든 욕
망 전반을 의미하는 말이나 재물욕(財物慾), 명예욕(名譽慾), 식욕(食慾
), 수면욕(睡眠慾), 색욕(色慾)으로 대표된다. 이 욕망을 버림으로
써 진정으로 세속의 때를 벗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이른바
불가의 기본 요체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하나의 교리는 수많은 해석을 낳을 수
있고, 그 해석에 따라 다른 실천으로 종교의 목적에 도달하려는 교파가
생기게 된다.
이에 색욕의 해소를 궁극적으로 실천하여 열반의 경지에 들기를 추
구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세인들은 이들을 일컬어 환희밀교(歡喜密敎)라
하였다.
거대한 토굴은 수많은 장인들의 손길로 다듬어져 매끈한 벽면을 드
러내었고, 거대한 조각상은 남녀의 교합을 묘사하여 적나라한 모습으로
토굴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 아!”
화려한 침상에는 벌거벗은 남녀가 뒹굴고 있었다.
여인의 구릿빛 옥주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노인의 어깨가 이를
받쳐 부드러운 동작을 만들어내니 기묘한 자세가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나, 쾌락을 쫓는 남녀의 변태적인 행위라 하기엔 너무나 자연
스러운지라 오히려 경건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비쩍 마른 노인의 것이라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허리는 완만한 원
형을 그리며 회전하였고 어깨에 고정된 다리로 인해 그 움직임에 부
응할 수 없는 여인은 안타까운 교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아~!”
노인이 침상을 받치던 손을 들어 여인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
니 환희에 물든 표정은 극락을 노니는 것과 같아 이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교리가 헛되지 아니함을 증명하는 듯 했다.
노인은 어깨에 얹어지지 않은 다리를 다시금 팔로 안아 어깨에 얹으
니 그의 얼굴에 여인의 두 옥주 사이에 끼인 듯한 형상이 되었다. 노
인은 두 손으로 여인의 발목을 잡아 위로 올리며 허리를 곧추세우니
여인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잠시간 동작을 멈췄던 노인
은 허리의 움직임을 작게 한 채 팔을 위 아래로 운동시켰다. 그러자
여인의 둔부가 침상에서 들린 두 사람의 밀착이 최대한으로 이루어졌
다. 일반적으로 어지간한 근력을 가진 젊은이도 취하기 힘든 동작
이었으나 노인은 별로 힘도 들이지 않은 채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무
아의 경지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노인의 가르침일까? 깊은 침
범과 닿는 부위의 신선함에 여인의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는 듯 했다.
여인의 교성은 점차로 고조되어 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쾌락의 경
지였다. 이와 같은 체위의 교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왜 진작 몰랐는지
억울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 다리 사이를 조여 오는 뿌듯한 느낌
에 전율하고 또 전율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으며 알 수
없는 포만감에 몸을 뒤틀었다.
거친 호흡과 함께 섞여 나오는 비음은 찬양이었으며 때론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물결치는 두 사람의 조화로운 행동은 숭고한 수행이었다.
“아악!”
일시 간 천계의 아름다움을 구경한 여인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눈앞
이 아득해진 상태에서 피어오르는 오색의 불꽃! 인간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미의 극치이자 축복의 불꽃이었다. 천계에서 멀어지는 것
이 아쉬운 듯 여인은 몸을 흔들어 대었으나 해탈의 경지에 이루지
못한 여인이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아!”
아쉬움이 극에 달한 탄성이었다. 자신에게 천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노인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하려 할 때 토굴의 입구로 뛰어든 붉은
승포를 걸친 승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포를 걸쳤다하지만 기나긴
머리를 그대로 기르고 있어 그 모습이 중원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탁달위(卓達偉)님, 중원에서 긴급한 전서가 날아들었습니다.”
여인에게 커다란 은혜를 내리던 숭고한 의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
해를 받았음에도 노승은 못마땅한 기색하나 없이 뛰어든 승려에게
말했다.
“중원에서?”
“그렇습니다. 사천에서 음양신단(陰陽神丹)이 출현하였다 하옵니다.”
그 무엇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노승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
다. 노안에서는 경악과 환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음양신단! 그것이... 그것이 사실이란 말인고?”
“그러하옵니다. 지금 사천 일대는 물론 전 중원이 음양신단 때문에
들끓고 있다는 보고이옵니다.”
노승의 미간이 잠시 좁혀졌다.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 지어지는 이 표
정은 노승의 오랜 습관이었다.
“아무래도 노납이 직접 나서야 할 듯 하네.”
“탁달위님께서 직접 말이십니까?”
“해탈에 대한 추구도 세속의 때를 벗지 못함일까? 노납의 헛된 욕심
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게야.”
승려에게 이야기하는 소리인지, 자신에게 스스로 하는 독백이지 모를
노승의 음성이 토굴 안에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