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 五 章 (6/9)

         

         

        흔히 동굴이라 함은 종유석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지나 박쥐들이 떼 

      를 지어 서식하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동굴은 달랐다. 늘  

      훈훈한 공기가 감돌고 통풍이 잘 되었기에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 한눈에 봐도 인위적인 손길이 닿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굴의 깊숙한 내부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침상이 있었고, 그 위에 

      는 한 여인이 누워있었다. 창백한 안색은 여인의 건강이 정상이 아니 

      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침상 옆에 걸터앉아 있는 사내는 여인의 얼굴 

      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희연 누님도, 가연도 절세가인이란 말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실로 이 여인에 비하면 모자람이 있구나.”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사내는 송기무였다. 그가 음양쌍괴에게 납치되 

      어 반어거지로 화양괴의 제자 벌써 오 개월 가량이 흘렀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왜 깊은 병을 간직한 채 이런 동굴에 누워  

      있는 것일까?” 

         

        화양괴와 이화궁주가 손속을 나눌 때, 송기무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였다. 음양쌍괴가 송기무에게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누어있는 여인이 이화궁주라는 것도, 어째서 이곳에 누워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하루에 반 시진씩 음양쌍괴가 번갈아 가면서 

       이 여인을 치료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음양쌍괴 

      는 송기무에게 여인의 수발을 들게 했다.  

         

        괴로운 신음성만을 흘릴 뿐 말조차 하지 못하는 여인인지라 송기무 

      가 해야 할 일은 많고도 많았다. 이불 밑의 여인은 나신(裸身)인 상 

      태였다. 거동을 할 수 없으니 용변을 가릴 수 없기에 옷을 입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송기무가 여인을 돌보는 일 중에는 더럽다고 여겨질  

      똥, 오줌을 치워야하는 일이 당연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송기무는 

       그 일이 왠지 싫지가 않았다. 환자를 돌보는 자가 그래서는 안 된 

      다고 생각했지만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여인의 나신을 보는 것이 

       그에게는 지루한 생활에서 색다른 활력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쩔 수 없다고 하나, 당신의 나신까지 보았으니 우리의 인 

      연이 가볍다고 할 수는 없을 진데 이름조차 모르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오.” 

         

        송기무가 여인에게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사 개월의 세월 동안 송기 

      무는 자신의 사부인 화양괴의 성격이 괴팍하고 급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빙음괴가 없었다면 자신은 벌써 사부에 

      게 맞아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송기무는 동굴로 와 

       누워있는 여인에게 대고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들었다. 외로움을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 

      에게 말을 한다는 행위 자체로 위로를 받고 있는 송기무였다. 

         

         

         

        송기무가 동굴 안에서 여인에게 독백아닌 독백을 하고 있을 무렵 동 

      굴 밖에서는 화양괴와 빙음괴가 열띤 설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제 형님이라 불러라.” 

         

        “왜?” 

         

        “너도 눈으로 봤지 않느냐? 무슨 놈의 천고 기재가 사 개월이 흐르 

      는 동안 한 가닥 진기조차 잡아내지 못한단 말이냐?” 

         

        “경혈이 굳어 있으니 시간이 필요한 게지.” 

         

        “웃기네. 저놈은 보통 이하야. 그러니 아직까지 저 모양인 게지. 더  

      이상 우겨봐야 소용없으니 빨리 형님이라 불러라.” 

         

        “무슨 소리!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어. 두고 봐라, 얼음덩어리야.  

      원래 기재란 한방이 있는 법이야.” 

         

        “이런 젠장! 백년이 넘게 무공을 익혀온 놈이 그 따위 소리냐? 무공 

      이 한 순간에 느는 것을 머리에 털나고 본적이 있냐구?” 

         

        “그거야 보통 사람 이야기구. 쟤는 천재잖아.” 

         

        “개뿔이 내가 수 많은 천재를 봐왔지만 한순간에 무공을 늘리는 천 

      재는 본 적이 없다, 이놈아.” 

         

        “하여간 두고 보라니까. 조만간 네놈의 눈이 뒤집어질 날이 올 테니 

      까. 원래 웅크렸다 뛰는 개구리가 멀리 뛰는 법이고 당겼다 내미는  

      주먹이 더 아픈 법이야.” 

         

        “쯧쯧... 고집하고는! 그래. 좀 더 기다려주지. 어차피 남아돌고 흘러 

      넘치는 세월이니 말이야. 크헤헤헷!” 

         

        자신감 넘치는 빙음괴의 말에 화양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솔 

      직히 새로 맞아들인 제자가 천고의 기재라는 것에 대해 자신감을 잃 

      은지 오래였다. 그가 처음 송기무를 봤을 때도 기재니 뭐니 하는 생각 

      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천의 무림인들이 저마다 달려들어 데려 

      가려 하길래 자신의 보지 못한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 것이 

      다. 평생 동안 빙음괴야 형, 동생을 가려오지 못한 그는 이번 기회에 

       남을 여생을 손윗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송 

      기무를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 제자 놈은 끝내 자신을 실 

      망시키고 있었다. 일반 적인 사람들도 삼개월이면 단전의 위치를 잡아 

      내고 진기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제자 

       놈은 자신의 고절한 심법을 전수 받았음에도 사 개월이 다 되어서 

      야 간신히 단전의 위치를 잡아내고 축기를 하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빠르긴 커녕 한달이나 뒤쳐지는 것을 보고 제자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개월, 삼개월만 더 기다려보마. 그 후에도 진척이 보이지 않을 때 

      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불길 같은 광망을 눈에서 쏟아내는 화양괴였다. 

         

         

        괴팍한 사부가 송기무에게 가르치는 무공의 수련방식은 혹독하다 말 

      할 수 없었다. 아니 주로 이론으로만 진행되는 수업이라 어찌 보면  

      무공이 아니라 학문을 익히는 것과 같았다. 무공이란 원래 공들여 탑 

      을 쌓듯이 기초부터 착실히 닦아 나가야 한다. 그러나 화양괴는 송기 

      무가 천하의 기재라며 기초부분은 그저 맛 뵈기 식으로만 읊어 넘기 

      고 곧바로 상승의 무공에 대한 이론들을 줄줄이 늘어놨다. 내공을 모 

      으는 심법을 가르칠 때도 바른 호흡을 하는 기본적이 이유나 축기의  

      원리 등을 젖혀 두고 곧바로 상승의 심법을 가르쳤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송기무가 상승의 절학에 관한 이론들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나마 빙음괴가 사람 잡겠다면서 기초적인 심법에 대한 조언을 해 

       주지 않았다면 단전의 위치를 잡아 축기를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었 

      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송기무는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무공을 배우는 것은 선부의 복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한시도 게으름을 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좌정한 상태에서 얼마 전 자리를 잡기 시작한 단전을 보기위해 노력했다. 축기를 한다는 것은 그저 몸으로 느끼는 것만이 아니었다. 내관(內觀)이라 하여 실제로 단전을 볼 수 있어야만 했다. 아직은 크기도 좁쌀만하고 그 형태도 미미하지만 송기무는 분명히 자신의 아랫배 쪽에 자리한 단전을 볼 수 있었다. 

빙음괴의 말에 의하면 아직은 진기를 유통시킬 단계가 아니라고 했다. 어느 정도 단전에 기가 쌓이고 일정양이 되면 스스로 진기가 움직이기 시작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운기가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사실상 그 때부터 제대로 된 도인(導引)을 시작하여 운공을 하는 것이라고. 서두르다간 자칫 주화입마의 길로 접어들고 잘하면 반신불수의 폐인이 되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주화입마니 반드시 차분한 마음으로 천천히 배워가라고 빙음괴는 신신당부를 했다. 선부의 복수를 위한 조급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폐인이 된 이후에는 아예 복수를 시도하지도 못하게 될 것인지라 송기무는 서두르지 않았다. 

세 시진에 걸쳐 축기를 한 송기무는 동굴로 들어가 여인의 상태를 살폈다. 그간 용변이라도 보지 않았나 싶어 이불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축축하게 젖어 있는 요가 송기무의 눈에 보였다. 

송기무는 여인을 안아 한쪽에 옮겨 놓고 요를 거뒀다. 그리고는 깨끗하게 빨아 놓은 천을 가져다 여인의 옥주와 둔부를 조심스레 닦았다. 허벅지를 거처 여인의 비소에까지 이르는 동안 송기무는 거친 호흡을 억눌러야만 했다. 아무리 병중의 여인이라지만 옥을 깎아 만들어 놓은 듯한 다리와 신비함을 가득 머금은 여인의 비소를 보며 약관의 송기무가 흥분하지 않는다면 외려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보지 않고는 닦을 수도 없으니 어찌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곤욕스런 일일 수도 있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을 보면서 아무런 행위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송기무의 솔직한 심정은 왜 사람들이 시간(屍姦)을 하는지도 이해가 될 정도였다. 이 정도의 여인이라면 죽은 후라도 한 번 몸을 섞어보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리라. 숨을 크게 쉬며 간신히 여인의 몸을 닦아낸 송기무는 조심스레 여인의 몸 위로 이불을 덮었다.

“소저의 의식이 없는 것이 외려 다행일지도 모르겠구려. 외간 남자의 손길이 함부로 청백의 몸을 건드렸으니...”

송기무는 애써 진정시킨 마음으로 여인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가 이불을 싸들고 동굴 밖으로 나가자 여인의 눈썹에서 살짝 반짝이는 빛이 났다. 습하지 않은 동굴이었음에도 누워만 있는 여인이기에 이슬이 맺혔던 것일까?

“일어나긴 일어나는 거냐?”

“누구?”

“누구긴 여기 누워있는 사람이 수십이냐? 넌 어째 한 번 물어보면 말을 알아듣질 못하냐?”

화양괴의 질책에 빙음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야 이놈아! 질문을 제대로 해야 답을 하지. 뜬금없이 물어봐 대니 알 수가 있냐고?”

“에구, 네 놈이라 말다툼 하는 것도 지겹다. 그래서 일어나는 거냐고? 벌써 몇 달째 저리 누워 똥오줌도 못 가리니 영 불안하다, 야.”

“왜? 이제야 조가 할망구가 무서워지기 시작 하냐?”

빙음괴의 입가에 살짝 조소가 걸렸다.

“무섭긴. 귀찮아서 그렇지. 늙어 냄새나는 할망구가 사손을 찾겠다고 눈에 불을 키고 덤벼들어 봐라. 그놈의 성질머리를 생각해 보면....!”

화양괴는 치가 떨린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차피 이화궁주를 저 모양 저 꼴로 만들었으니 치료가 되던 안되던 한 바탕 난리를 칠게야.”

“잉? 치료를 해 줬는데 왜 난리를 쳐?”

“에라이 돌대가리 불뎅이야! 그래도 이화궁주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는 계집아이다. 그런 아이를 벌써 오 개월이나 병석에 누워있게 해 놓고 그럼 아무 탈이 없을 줄 알았냐?”

“완치 된다며?”

화양괴가 퉁방울만한 눈을 껌뻑이며 되물었다.

“아이쿠 두야! 네놈과 말을 말아야지. 끙~”

빙음괴가 머리를 절래절래 저었다.

“야, 그럼 어떻게 하면 후환이 없겠냐?”

“후환이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다.”

빙음괴의 눈에 반짝이는 빛이 맴돌더니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있어?”

“프헤헤헷! 역시 난 천재야. 이런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그게 뭔데, 무슨 방법?”

“조금만 기다려 봐라. 상세를 보아 며칠 내로 계집아이가 거동을 할 수 있을 테니 그 때 얘기하자.”

“이 말라 비틀어 죽을 늙은이야! 사람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얘기 못해?”

화양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빙음괴가 싱글거리며 화양괴의 귀에 대고 뭐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화양괴의 입이 찢어지듯 벌어졌다.

“크헤헤헷! 그거 묘책이다! 크헤헤헷, 늙은 놈아! 네놈도 정말 쓸모 있을 때가 있구나.”

이름 모를 야산의 밤의 정적을 흔드는 화양괴의 괴소였다.

“공...자!”

“헛!”

송기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원토록 누워있을 줄 알았던 그녀였다. 결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평생을 저리 누워 있을 것만 같던 여인이 입을 열어 자신을 부른 것이다.

“소, 소저? 정신을 차린 것이오?”

이화궁주가 의식이 돌아온 것은 꽤 되었다. 그러나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눈을 뜨고 말을 하며 외간 남자가 자신의 용변을 치워 주는 것을 어찌 본단 말인가?

“죄송하지만 저 좀 일으켜 주시면....”

아직은 목소리에 기운이 담기지 못한 그녀였다. 송기무는 황급히 그녀에게 가다가 부축하였다. 이화궁주는 이불을 들어 몸을 가리며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주 작은 움직이었음에도 힘에 겨웠는지 그녀는 숨을 몰아 내쉬었다.

송기무는 무어라 말을 하고는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과거 그가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 가마에서 나온 이화궁주였다. 고로 송기무는 그녀가 강호인들이 두려움에 떠는 이화궁주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여인에 대해 아는 바가 아무 것도 없으니 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그였다.

잠시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누워 있을 때야 그녀의 은밀한 곳까지 샅샅이 훑어본 송기무지만 막상 그녀가 서글서글한 두 눈을 뜨게 되자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자께서 제 병수발을.... 해 주셨군요.”

여인이 힘겹게 입을 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송기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제야 송기무는 그녀가 정신을 차렸더라도 움직이거나 말을 하기만 힘든 상태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떠 올린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녀의 나신을 감상하고 용변을 치우며 결코 닿지 말아야할 곳에까지 손길이 닿았던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왠지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지는 송기무였다.

“이 은혜...어찌 갚아야 할지...”

“은, 은혜라니요.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습니다.”

송기무는 ‘당연히’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에게 말한 것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자신은 정당한 이유에서 그간 행동해왔다고 다짐하는 그였다.

이화궁주 역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청백지신이 외간남자의 손길을 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인의 몸으로 어찌 그 사실을 언급할 수 있겠는가? 

“소저께서 정신을 차리셨으니 사부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송기무는 어색한 침묵에서 도망이라도 치듯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화궁주의 말은 분명 감사의 뜻을 표하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결코 감격적이라거나 고마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얼음장을 깔아 놓은 듯 싸늘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탓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하여 도저히 버티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

나신의 여인이 정신을 차렸다고 사부에게 고한 송기무는 난데없는 말을 듣게 되자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는 여인의 정신이 돌아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 알고 있으면 된다.”

단호히 말하는 사부의 곁에서 빙음괴가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부님 저는...?”

“왜? 무슨 문제가 있냐?”

퉁방울만한 화양괴의 눈이 부릅떠졌다. 붉은 머리와 붉은 눈썹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흉신악귀와 같은 모습인 화양괴였다. 그가 인상을 쓰고 눈을 부릅뜰 때마다 송기무는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직 선부의 복수도 하지 못한 저인데...어찌 그런...”

“복수야 차차 하면 되지. 복수를 핑계로 마냥 미룰 수도 없는 일 아니냐? 게다가 이와 같은 일은 선친께서도 필히 기뻐하실 게다.”

빙음괴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빙글거리는 웃음은 그가 단지 송기무를 위하여 이런 일을 추진하는 것만이 아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송기무였다. 두 사람의 앞에서는 그저 쩔쩔 매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송기무가 고뇌에 젖은 표정으로 동굴 쪽으로 돌아가자 화양괴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근데 계집애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당연하지. 그래도 천하의 이화궁주인데.”

빙음괴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화양괴는 잠시간 할 말을 잊었다.

“이 빌어먹을 노괴야. 그럼 안 되잖아?”

“안되긴 뭐가 안돼. 그놈을 머리는 뒀다 국 끓여 먹을 때 쓸래?”

“크크큿, 이 엉큼한 노괴. 무슨 수가 있는 게로구나.”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 그 놈의 조가 할망구가 오면 너와 나를 구분해서 난리를 치겠냐? 싸잡아 나한테까지 별의 별 탓을 다 할테니 어쩔 수 없이 처리를 해야겠지.”

“크크크! 하여튼 말년에 제자를 얻으니 써먹을 때가 많아 좋구나.”

“그나저나 계집아이도 불쌍하군. 천하에 인물이 없어 저런 덜 떨어진 아이를...”

빙음괴가 혀를 차며 말했다.

“기재라니까.”

“개뿔!”

송기무는 사부의 명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붉은 머리를 흔들며 사부는 자신에게 동굴 안의 여인과 혼약을 맺으라 명령한 것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결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당가연이나 강희연과의 인연으로 인해 막연하게 조만간 선택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부친상을 겪고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처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사부의 말을 듣고 나자 부쩍 강희연과 당가연이 그리워졌다. 사천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으니 그녀들 역시 송기무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가에서는 문중의 어른들까지 직접 마중을 나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사부는 엉뚱하게도 동굴 속의 여인과 혼례를 치루라고 한다. 이에 송기무는 심각한 고민에 접어든 것이다. 

강희연이야 본시 성격이 호방한 편이라 쳐도 당가연의 경우는 자신의 순결을 송기무에게 바친 것이었다. 문중의 어른들께 고할 정도면 그녀가 송기무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다른 여인과 혼례를 치룰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당문과 원한을 맺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송기무는 굴 안의 여인이 어떤 여자인지 알지도 못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와 혼인을 하는 것이 마땅한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그였다. 그럼에도 사부에게 강력하게 부당하다는 것을 피력하지 못한 것은 단지 사부의 험악한 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인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송기무는 매일 같이 그녀와 대화 아닌 대화를 해 왔다. 솜씨 좋은 화공이 그려도 표현하지 못할 것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보며 혈기왕성한 송기무가 마음이 기울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더구나 그는 여인의 알몸을 봐가며 수발을 하지 않았던가? 티끌하나 없는 백옥지신을 보며 뛰는 가슴을 억눌렀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성혼의 의례를 갖는다는 것은 막연한 송기무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소유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 어떤 남자가 있어 열 여자를 마다하겠는가? 당가연이나 강희연에게 부족한 바가 있어서라기보다 굴 안의 여인이 가진 뛰어난 미모와, 병중의 여인이 풍겨내는 연약한 모습에 이미 마음을 빼앗겨 버린 그였다. 그렇기에 사부에 명령에 달리 부정의 뜻을 드러내지 못하고 묵묵히 돌아왔던 것이다. 은연중에 그녀와 인연을 맺고 싶다는 내심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아직은 누워 계시는 게 좋을 듯한데...”

송기무는 조심스레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가 동굴안으로 돌아와 보니 그녀가 억지로 버티듯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부의 지시대로라면 자신의 아내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몇 달 동안 의식을 잃고 있을 정도면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린 지 오래지 않아 저렇듯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그의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

송기무의 염려어린 말과는 상관없이 여인은 넋을 잃은 듯이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부축하여 침상에 눕히려는 것이었다. 

“이거 놔요!”

송기무가 그녀의 동그란 어깨를 잡아 가려 하자 여인이 어깨를 흔들며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호의를 베풀려던 송기무는 여인의 반응에 무렴하기 그지없었다. 

“소생은 그저...”

“앞으로는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기력을 되찾기에는 일렀다. 그러나 여인의 목소리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힘이 담겨 있었다. 오랜 세월을 이화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교육을 받아온 그녀였다.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세력인 이화궁주로서 자라온 그녀는 부탁보다는 명령을 내기는데 익숙했었다. 송기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동안 자신의 변을 치워내고 이불을 갈아 왔으니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분노가 치밀었다. 의식을 차리고 있는 동안 송기무가 화양괴의 제자라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것이 화양괴가 아니던가?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은 비단 송기무가 화양괴의 제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화신궁의 궁주들은 대대로 순결을 유지한 채 삶을 마감해 왔다. 남자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살아 갈 수 있는 여인들의 단체가 이화궁이었다. 그러나 궁주인 자신의 청백지신이 이미 송기무의 손에 더럽혀졌다. 송기무가 알몸을 보고 치부에 손을 대었으니 어찌 자신의 몸이 순결하다 하겠는가? 고맙다는 감정과 구분되어 함부로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그에게 분노가 치미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그녀였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건 그렇지 않건 화가 나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녀는 얼릴 적부터 분노를 참는 훈련을 받지 못하고 자라왔다. 사부나 사조가 아닌 이상 그 어떤 대상이라도 화가 나면 풀어야 했고, 모든 이들은 그녀의 분노를 받아들여야만 했었다. 

그러한 모든 것을 송기무가 알리 없었다. 그는 몇 달 동안을 그녀만을 바라보며 홀로 대화를 해 왔다. 그동안 쌓여왔던 자신만의 감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더구나 사부는 그녀와 혼인을 하라 하지 않았던가? 저렇듯 매몰차게 자신을 대하는 여인과 혼인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소저, 저는 단지...”

“알아요.”

송기무의 말을 이화궁주는 차갑게 잘랐다.

“그간이야 어쨌건 앞으로 말이에요.”

이화궁주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리고...”

이화궁주가 말을 이으려 하자 송기무의 눈이 빛났다. 그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화궁주는 송기무를 향해 눈을 돌렸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절대로 발설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을 시에는 당신의 혀를 잘라내고 온몸의 힘줄을 뽑아 버리겠어요.”

송기무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의 입에서 저렇게도 잔혹한 협박의 말이 흘러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눈에 뿜어져 나오는 저 얼음 같은 기운이란? 

송기무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껏 병 수발을 해 줬더니 결국 나온다는 것이 저 따위 말이라는 것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했다. 뭘 하며 살아온 여자인지는 몰라도 여자는 여자가 아닌가? 천하의 당가연도 자신에게 순정을 바치거늘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함부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송기무였다. 그렇다고 아직 기력조차 찾지 못하고 누워있는 여자를 상대로 목에 핏발을 세워가며 언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내가 본 때를 보여주마!’

동굴 안의 분위기는 점차로 냉막해져 가고 있었다.

봄바람을 타고 춤추는 꽃잎과 비견될 수 있는 것은 깊은 곳에 결정을 내포한 눈송이의 자유일 뿐일 것이다. 자유로운 곡선을 그려내는 설화(雪花) 궤적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보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무아의 경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멈춰진 세상에 유일한 움직인 듯, 더러워진 속세를 덮어 새롭게 만드는 힘인 듯한 눈은 자유로운 하강 끝에 땅에 안주했다. 

“야, 이놈아! 안 그래도 진도가 느려 열불이 터져 죽겠구만 넋을 잃고 뭘 하는 게냐?”

화양괴의 호통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송기무는 금새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긁적였다.

“쯧쯧...”

화양괴는 한심하다는 듯이 송기무를 보고 혀를 찼다.

“분명 천고의 기재여야 하는데...”

“제자의 자질이 부족해 사부님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송기무는 늘 자신을 보고 천고의 기재라고 하는 사부의 내심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릴 적 나름대로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수재나, 천재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어찌하여 사부가 자신을 기재라 칭하는 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시... 그 수밖에 없는 건가?”

“네?”

“아니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 가다간 얼음덩어리 놈에게 내가 호형을 해야할 지도 모르니 수를 써야할 듯 싶다.”

“...”

“그나저나 계집아이랑은 잘 지내고 있냐?”

“네?”

“이젠 말귀도 못 알아 듯냐? 네 마누라감하고 잘 지내고 있냐고? 며칠 전에 보아하니 이제 걷기도 하고 음식도 씹는 것 같더만...”

“사부님, 송구스럽지만 그녀는 저하고 맞지 않는 듯 합니다.”

끝이 잦아드는 송기무의 목소리였다.

“뭐?”

“아무래도 저한테는 과분한 것 같아서...”

“이놈아! 음양이선의 제자에게 과분한 여자가 세상에 어딨냐? 쯧쯧쯧 못났다, 못났다하니까 진정으로 못나기 이를 데 없는 놈이구나. 여자 하나 못 다뤄서 제 스스로 부족하다 말하는 꼴이라니.”

송기무는 사부의 질책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송기무를 보던 화양괴는 갑작스레 찌푸린 표정을 풀며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했다.

“네 놈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라. 훌륭하신 사부께서 다 알아서 해 줄 테니. 네놈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게야. 나처럼 훌륭한 사부를 모시게 된 네놈은 세상에 다시없는 행운을 맞이한 거나 다름없는 거야.  얼음뎅이가 곧 올 테니 기대하고 있어라. 크헤헤헷...”

여인은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발설하지 말라는 말을 한 이후로 송기무와 단 한마디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가 용변을 보았으며, 음식 먹는 것을 거들려는 송기무의 호의조차 거절했다. 

일주일 전부터는 홀로 좌정하고 앉아 운기를 시도하는 듯했으나 괴로운 표정으로 미루어 수월치는 않아 보였다. 

송기무는 동굴 안에 만들어진 침상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사부가 자신에게 말한 떡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사부의 무공이 고절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무공을 전수하며 시범을 보여 줄 때 과연 저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운 괴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그였다. 그러나 무공이 높다 해서 남녀간의 애정지사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빙음괴를 마중 나간 사부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고, 여인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상태였다. 작은 호롱불이 따뜻한 빛을 내며 동굴 안을 밝히고 있기는 했지만 동굴안의 공기는 사뭇 추웠다. 나름대로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동굴 안이어서 눈이 날리는 밖에 비해 따뜻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절을 비켜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송기무는 이불을 고쳐 덮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러던 순간 콧속으로 흘러드는 희미한 향을 맡았다. 달콤함을 머금은 향내였다. 송기무는 고개를 들어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웬 향내음이?’

이화궁주 역시 이상한 향내를 느끼고 운공을 중단했다. 그녀도 눈빛을 빛내며 동굴 안을 훑어보았다. 잠시 후 흐릿한 향내음은 동굴에서 사라졌다. 

이화궁주는 갑작스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 것이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송기무를 바라봤다. 송기무 역시 갑작스런 냄새에 동굴을 둘러보며 영문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이화궁주는 혹시나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우려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운신이 수월치 못한 그녀는 내딛은 발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송기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그녀를 부축하려 하다가 이내 동작을 멈췄다. 냉혹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화궁주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침상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마음은 다급하나 몸이 따라주질 않으니 그녀의 반듯한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송기무는 그녀가 운공을 하다 갑자기 일어나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왜 저러는 거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녀를 보다가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자리에 누웠다. 괜히 그녀를 보고 있다가는 마음이 약해져서 돕겠다고 나설 듯해서였다. 이미 그녀에게 지독한 협박을 당해 화가 풀리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이불을 다시 덮으려 하다가 문득 더 이상 한기가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서늘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던 그였다. 

‘거참 이상한 일이군.’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점차로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왜 이러지?’

호흡이 가빠져 오고 몸에서 후끈한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송기무는 그저 숨을 크게 쉬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송기무만이 느끼는 게 아니었다. 동굴의 암벽을 짚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이화궁주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무리하게 몸을 움직였기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으며 거친 호흡은 십리 길을 한 숨에 내 달려온 사람 같았다.

“허억, 허억!”

힘에 겨워 잠시간 숨을 몰아쉬는 이화궁주는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송기무를 쳐다봤다.  

“이 비열한 음적!”

난데없는 외침에 송기무는 고개를 돌려 이화궁주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미를 상큼 치켜 올린 채 봉목을 부릅뜨고 송기무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몸에 열기가 치밀어 올라서인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송기무는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한 소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 그게 나한테 한 소리요?”

“더러운 놈! 헉, 헉.... 지금 시치미를... 떼겠다는 거냐?”

“이것 보시오, 소저! 어째서 얌전히 누워 자고 있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욕지꺼리요? 보자보자 하니까 한도 없네... 참나 어이가 없어서...!”

“네, 네놈이?”

“아니 누구는 성질이 없어서 그간 참고 있었던 줄 아시오? 나도 한때 귀하게 자란 몸이오. 어디다 함부로 이놈, 저놈이오?”

이화궁주로서는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사내의 무례함이었다. 세상 그 어떤 사내가 감히 이화궁주의 목전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한단 말인가? 처음 겪는 일이만큼 그녀의 분노 역시 컸다.

“가...감히...네 놈이...?”

“거참 예쁘게 생긴 여자가 입 한번 걸하네. 내 당신한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찌 자꾸...?”

송기무의 말은 이어질 수가 없었다. 이화궁주가 무너지듯 주저앉은 것이다. 송기무는 내키진 않았지만 자리에 일어나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몸도 못 가누면서 성질만 부리기는...? 이래도 내 도움이 필요 없소?”

“나쁜...허억, 허억... 놈... 이.... 비열한...”

그 와중에도 이화궁주가 중얼거리는 말의 내용은 결코 송기무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허! 거참 대책 없는 여자구만. 마음씀씀이가 얼굴의 반만이라도 따라와 줬으면 좋을 텐데...쯧쯧... 지금이라도 말만 하시오. 몸에 손을 대지 말라했으니 부축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니오?”

“결코...”

이화궁주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사타구니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이 열기! 경험한 적은 없지만 사부가 늘상 조심하라던 음약에 중독 된 증상이 분명했다. 그녀는 말아 쥔 주먹에 힘을 주고 아랫입술을 깨물어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내력만 충분했어도 음약의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늦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기에 상한 심맥 때문에 그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고집하고는... 그럼 나는 이만 가서 자겠소. 돌바닥에 앉아서 절을 하던 굿을 하던 마음대로 하시오.”

송기무는 몸을 홱 돌렸다. 

‘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거지?’

돌아서는 그의 마음에는 왠지 모를 미련이 남았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복부에 팽만한 기운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서둘러 몸을 돌린 이유는 가뜩이나 그녀가 음적이 어쩌구 하는데 흉측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아무래도 찬바람을 쐬어야겠다. 이게 무슨 주책이냐?’

송기무는 하의를 고쳐 입으며 약간은 엉거주춤한 상태로 발걸음을 동굴 밖으로 돌렸다. 갑작스레 음욕이 치밀어 오르니 찬바람을 쐬어 가라앉히려 한 것이다.

“저기...”

송기무의 발걸음을 붙잡는 한마디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도..하악, 하악... 도와 주세...요...”

여인의 눈에는 거의 눈물이 맺혀있는 상태였다. 반듯한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고 아랫입술에는 핏물이 배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송기무는 성큼 다가서서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어 일으키려 했다. 그의 손이 여인의 몸에 닿자 흠칫하는 그녀의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 

‘거 참 더럽게 비싸게 구네. 그럼 손도 안대고 부축을 하란 말이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송기무는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그녀를 일으켰다. 이화궁주가 흠칫한 이유가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 없는 그였다. 병상에 오래 누워 있어선지, 아니면 날씬한 몸 때문인지 적은 힘을 주었음에도 손쉽게 그녀를 일으킬 수 있었다.

“하아~!”

그가 이화궁주를 부축하자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지 그가 부축을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느끼는 열기는 수십 배는 강해진 것 같았다. 이화궁주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송기무를 노려보려 했다. 그러나 송기무는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왜 갑자기 자신을 이렇듯 다정하게 바라보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대체 이게 무슨 꿍꿍이야? 욕을 할 때는 언제고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다니?’

송기무 역시 음약의 기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말랑말랑한 두부와 같은 여체에 손을 대고 부축을 하고 있자니 하복부의 팽창이 도를 넘어서서 걸음을 옮기기조차 버거운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태에서 침상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다리를 받쳐 들어 침상에 뉘인 송기무가 허리를 들려고 할 때 송기무는 더 이상의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화궁주가 소매사이로 눈부시도록 하얀 팔을 드러내며 강하고 빠르게 그의 목을 감싸 안은 것이다. 송기무는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녀의 팔을 거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열기의 정체가 욕정임을 이미 느낀 그였다. 두 다리 사이에서 노도처럼 밀려오는 열기가 한 순간에 그의 머리까지 도달했으니 갑작스레 이런 행동을 취하는 그녀의 저의에 대한 의심을 할 여유조차 잃은 상대였다. 나름대로 이화궁주에 비해 안정을 유지하던 그는 한순간에 이화궁주보다 훨씬 뜨겁게 달아올랐다. 

음약, 혹은 춘약이라 함은 인간의 욕정을 자극하여 오직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데 그 효용이 있는 것이었다. 음약은 신체에 큰 해악을 끼치지는 않지만 이성을 잃고 성욕만을 불태우게 만드는 약인지라 음양의 화합을 통해 열기를 다스리지 아니하면 치미는 열에 의해 뇌에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는 위험한 약이기도 했다. 독이 아니므로 달리 해약이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음약에 중독 된 자는 욕화에서 비롯된 열기가 뇌를 손상시키기 전에 반드시 남녀의 교합을 통해 음양의 조화를 맞춰 열기를 다스려야만 했다. 이런 음약에 중독 된 송기무가 작은 자극이었음에도 순식간에 욕정에 지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직 열기를 가라앉히려는 욕망 때문인지 송기무는 거칠기 이를 데 없는 동작으로 이화궁주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단지 입술이 닿았을 뿐임에도 이화궁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전율이었다. 사내의 젖은 입술이 얼굴에서 목으로, 목에서 쇄골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녀는 지나친 쾌감에 몸을 떨어야했다. 

이화궁주의 머릿속에서 한순간 그를 밀쳐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이 그녀를 통제하기엔 너무 늦어 있었다. 송기무가 거친 손으로 그녀의 옷섶을 헤치고 가슴을 움켜쥐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요란하다싶을 정도의 숨소리가 뒤섞이는 동안 어느덧 그녀는 눈부신 나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음약에 중독 되어 오직 쾌락만을 추구하는 송기무에게 여인에 대한 배려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이화궁주와의 결합을 시도했다. 사내를 겪어보지 못한 이화궁주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화가 났음인가? 송기무의 입에서 격한 숨이 터져 나오며 두 다리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아악!”

약 기운에 취해있음에도 파과의 고통은 이화궁주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게 했다. 지난 이십 년간 고이 간직했던 순결이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에도 그녀는 고통 이외의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젖혔다. 여인의 비명은 송기무를 더욱 자극했다. 이미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단지 거칠고 반복되는 동작만을 통해 쾌락만을 추구하는 육체의 욕구에 지배 받는 그에게 있어서 인지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신체의 일부를 통해 전해져 오는 감각뿐이었다.

“아흐윽!”

고통에 의한 비명인지, 아니면 쾌감을 겨운 노래인지 모를 소리조차 송기무는 듣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를 경험한 적이 없는 이화궁주는 어떻게 해야 온 몸으로 전해지는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제대로 느끼는지 알지 못했다. 치미는 열기는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고, 보다 강한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지 모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사내의 거친 움직임에 몸부림을 치는 것뿐이었다. 

메마른 땅에 폭풍우가 몰아쳤다. 단단히 굳었던 땅은 시커먼 먹구름과 함께 갑작스레 내린 폭우에 물러져가고 있었다. 대지를 적시는 비는 잠시간 고였다 내를 이루고 흐르기 시작했다. 더해지는 빗줄기는 작은 내를 격랑으로 바꾸었고 거침없는 물줄기는 땅을 가르고 산을 허물었다. 거센 물줄기는 일체의 저항도 용납하지 않았다. 가로 막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흐르고 또 흐를 뿐이었다. 건조한 대지에 내린 비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돌처럼 단단하던 지표는 물에 젖어 더욱 풍성한 모습으로 변모되고 쾌락이라 이름 붙여진 나무와 풀이 급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황량한 대지 위에 푸르른 잔디와 밀밀한 숲이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격랑을 머금은 물줄기는 둑을 허물어 미지의 세계와의 길을 텄고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 여인의 대지는 비명을 터뜨렸다.

“허억!”

“아앗!”

남녀의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오고, 태풍처럼 격렬하던 두 사람의 동작이 일순간에 멈췄다. 두 눈을 부릅뜬 이화궁주의 동공이 최대한으로 확장되고 그녀의 손톱이 송기무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잠시간 멈췄던 두 사람의 몸은 곧 파도를 타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전신으로 번져가는 쾌락을 표현해 내는 율동이며, 쾌락의 끝을 붙잡기 위한 아쉬움의 몸부림이었다.

이십 년의 순결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볼 때, 순간에 불과한 열락의 시간이 짧디 짧았던 것을 아쉬워함인가? 그렇지 않다면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음약의 기운이 덜 해소되었기 때문인가? 두 사람은 하나 된 상태에서 떨어지지 않고 다시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닦여진 길은 다니기가 수월한 법이다. 이미 고통스런 순간이 사라지고 쾌락에 환호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동굴을 채운 지 오래였다. 다시금 반복되는 단조로운 동작에서는 이전 보다 더 큰 기쁨의 외침이 흘러 나왔다. 동굴 밖은 눈이 날리건만 후끈거리는 열기로 달아오른 두 사람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성을 상실한 두 사람의 행위 짐승의 교미와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화궁주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그런 행위를 아름답게 포장했다. 거친 숨결과 함께 나오는 교성은 새들의 지저귐과 같았고 어설프게 몸부림치는 동작 하나하나에도 조물주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이 담겨져 있는 듯 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옥주가 송기무의 허리를 감싸며 조이기 시작했다. 조여진 허리에 동작에 방해가 될 법도 하건만 송기무의 격렬한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하...아....조...조금...”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이화궁주는 꽃잎과도 같은 입술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하려 들었다. 그러나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송기무의 귀에 그녀의 가느다란 음성이 들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는 어느 한 순간 송기무는 여인의 화심에 달하고자 온 몸을 밀어 넣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밀착을 시도했고, 이화궁주는 그의 허리를 조이는 옥주에 강한 힘을 불어 넣었다.

“아!”

“큿!”

단발마의 탄성은 다시 한 번 동굴에 울려 퍼졌다. 

이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두 사람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동작을 취할 것이다. 음약의 기운이 소진 될 그 시간까지.

“크헤헤헷!”

“뭐가 그리 좋냐? 멍청한 노괴야.”

“제자 놈이 여편네를 맞이하는데 안 좋냐?”

“개뿔 여편네 같은 소리하네. 저 계집이 순순히 무아 놈을 지아비로 섬길 것 같냐?”

“잉? 그건 또 무슨 소리여?”

화양괴의 퉁방울만한 눈이 더욱 커졌다.

“명색이 이화궁주다. 천하의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계집아이가 이화궁의 규칙을 어기고서 쉽사리 저놈을 맞아들이겠냐고?”

“아, 네놈이 이렇게 하자며? 음약을 써서 둘이 합방을 시키자고 한 것은 네놈이잖아.”

“그거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방도가 없으니 그런 거지. 무조건 일이 잘 풀릴 거란 얘기는 아니었다.”

“이놈이 이제 와서 발뺌을 하네?”

“발뺌은 누가?”

“아, 네놈이 환락연(歡樂煙)을 피우면 잘 될 거라고 했잖아.”

“잘 될 거라고 했지. 잘 된다고 하진 않았다.”

빙음괴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노괴야, 네놈은 늘 그게 문제다.”

“뭐가?”

돌렸던 빙음괴의 시선이 다시금 화양괴에게 꽂혔다.

“늘 그렇잖아. 무슨 일이건 벌리기 전에 혼자 앉아서 하루종일 고민만하고, 막상 일을 벌인 다음에도 괜히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말이야. 그게 장부가 취할 태도냐?”

“그럼 네놈처럼 아무생각 없이 일을 잔뜩 벌려놓고 뒷감당은 하지도 못하는 게 장부의 자세냐?”

빙음괴가 화양괴를 나무라듯 말했다.

“크헤헤헷, 그게 더 사내답지. 병아리 간도 아니고 하는 일마다 벌벌 떨어야겠냐?”

화양괴의 말에 빙음괴는 고개까지 저어가며 혀를 찼다. 저리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말 몇 마디에 수긍할 게 아닐 것이라 내심 생각하면서...

답답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악몽을 꾸고 있음인가? 무엇인가 목을 옥죄어 오는 강한 힘에 송기무는 눈을 떴다. 분명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숨을 쉬기가 곤란했다. 그는 곧 상황을 파악했다. 분노에 가득한 여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내리꽂히고 숨을 쉬기 곤란한 상황에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여인의 손아귀를 뿌리쳤다. 조금만 더 강하게 목을 조여 왔다면 자는 중에 질식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허억, 허억 대,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간신히 숨을 쉬게 되자 송기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여인은 원망에 가득 찬 눈길만을 던지고 있었다. 깨문 아랫입술이 곧 터져 피가 줄줄 흐를 것만 같았다. 

송기무는 그제서야 흐릿한 영상과 함께 떠오르는 기억의 단상을 잡아낼 수 있었다. 

거친 숨소리, 흐르는 땀방울, 그리고 지독한 쾌락...

‘꿈이 아니었나?’

음약의 기운이 뇌에 미친 영향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던 송기무는 여인의 표정과 갑작스레 쓰라려 오는 무릎의 통증으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마치 화상을 입을 듯 검게 색이 죽은 무릎의 피부에서 오는 아련한 통증은 지난밤의 격렬했던 행위를 선명히 증거하고 있었다.

상황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하여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먼저 끌어안은 것은 눈앞의 여인이었다. 단지 목을 끌어안았다고 해서 이성을 잃은 자신도, 갑작스레 유혹의 손길을 뻗친 여인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평소와는 달리 이성을 잃은 채 절정을 향해 심하게 몰입해 들어갔던 자신의 행동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죽어 버려!”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송기무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소, 소저.”

“부르지 마! 말시키지도 마!”

여인의 나직한 음성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냥 죽어버려! 죽어버리란 말이야!”

절규로 바뀌어가는 여인의 외침에 송기무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사부와 빙음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어제의 그 장면을 두 사람이 본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인이 잠이 깨긴 전까지는 자신과 함께 나란히 누워 자고 있었을 것이다. 사부와 빙음괴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그러나 송기무는 그럼 염려를 할 때가 아니었다. 눈앞의 여인이 거의 발작 이전의 증세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호수처럼 큰 눈망울에서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반듯하고 하얀 이마엔 푸른 핏줄이 드러날 정도였다.

“소저...”

송기무는 여인이 자신의 목을 졸랐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여인의 어깨를 향해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여인의 소수가 허공에 하얀 곡선의 자취를 남기며 송기무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오랜 병치레로 기력이 없었음에도 이화궁주의 손속은 날카로웠다. 송기무는 눈앞에 희끗한 것을 봤다고 느끼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천돌혈(天突穴)에 타격을 받은 송기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고, 그 바람에 침상 밑으로 떨어졌다. 

“커억, 콜록! 콜록!”

천돌은 가벼운 힘만 가해져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치명적인 사혈 중의 하나이다. 이화궁주의 정확한 가격은 비록 내력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송기무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이화궁주의 손끝에 살짝 찔렸을 뿐인데도 송기무는 시야가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기침이 터뜨려야만 했다. 기침은 순간적으로 호흡을 이어가기 위한 신체의 자연적인 반응이었다. 화양괴에게 심법을 배우느라 호흡이 길어지지 않았다면 순간적인 질식에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작스레 느낀 엄청난 고통과 순간적으로 느껴진 생명의 위협은 송기무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화를 치밀게 했다. 아무리 경우가 없는 여인이라지만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밤의 일은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왜 자신이 그렇게 이성을 잃고 여인에게 덤벼들었는지, 또한 여인도 왜 자신에게 안겨들었는지 전혀 이유를 모르는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이 다짜고짜 목을 조른데다가 괴상한 수법으로 자신을 죽이려하자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송기무는 한동안 기침이 멈추길 기다렸다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계집애가 미쳤나?”

입에서 터져나간 소리는 막상 소리를 지른 송기무조차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평소 나름대로 여인에게 잘한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막말이 나갈 줄은 스스로도 짐작치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후회가 된다거나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손을 들어 여인의 뺨을 후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많이 참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 계집?”

여인의 표정은 천변만화의 어의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한껏 독기 오른 눈으로 송기무를 노려보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섬뜩하기만 한 표정이 된 것이다. 여인의 독살 맞은 표정에 송기무는 내심 찔끔했지만 가슴을 내밀고 더 큰소리를 쳤다.

“비록 고의였건, 그렇지 않건 하룻밤의 인연이 가볍지 아니한데 감히 지아비가 될 지도 모를 자의 목숨을 노리다니! 사람의 목숨은 하찮게 여기면서 계집소리는 억울한 게요?”

자신이 내뱉은 소리에 내심 쾌재를 부르는 송기무였다. 지난 번에 자신의 손을 뿌리쳤던 일이 마음에 못내 서운했던 그였다. 그는 이화궁주에게 막말을 쏟아 부으며 가슴이 후련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네놈이 지금 당장 죽고 싶은 게로구나!”

이화궁주가 몸을 일으키려는 기미가 보이자 송기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뒤로 이동했다. 방금 전 한 수로 미루어 여인의 동작은 재빠르고 기묘하여 다시금 공격해 온다면 자신이 막아내기엔 버겁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놈이라니? 여인네 입이 그토록 걸하니, 어디 가던 소박맞을 여인이군.”

송기무의 한마디에 이화궁주는 그야말로 눈에서 불똥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심맥이 상해 기력이 회복되지 않은 이화궁주로서는 송기무를 쫓기에 무리가 있었다. 여인이 자신을 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송기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릴 적부터 못돼 먹은 친구들과 자주 어울린다고 선부에게 늘 꾸지람을 듣던 송기무였다. 일찍이 그 친우들과 기루를 휘젓고 다니며 방탕한 생활을 한 송기무인지라 천한 말투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밤새 몸을 배배 꼬며 좋아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야차처럼 난동을 부리니 이 무슨 경우란 말인지?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탕녀가 되는 것을 애써 티내려 하는 것이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화궁주는 송기무를 벌써 수백 번을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네놈을...죽이겠다. 반드시...”

이화궁주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선부의 죽음으로 잊었던 송기무의 치기가 튀어 나왔다.

“푸헤헷, 침상에서야 얼마든지 죽어주지.”

“감히! 네놈이 이화궁의 궁주를 희롱하다니!”

이화궁주의 고함이 터지자 송기무는 갑자기 머리를 철퇴로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이, 이화궁주?’

너무 놀란 그는 머릿속으로 말을 하면서도 더듬을 정도였다. 설마 눈앞의 여인이 이화궁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송기무가 알고 있는 사상최강의 집단중의 하나인 대청성의 장로조차 한수 접어주던 이화궁이었다. 왜 여인들이 들고 나타난 가마를 보고 정명검이 그토록 조심스러워하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그만한 힘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었겠는가? 그런 단체의 우두머리와 밤새 운우지정을 나눈 것으로 부족해 희롱까지 하고 있었으니 여인의 말대로 자신은 이미 명부에 적을 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한 송기무는 원독에 가득 찬 안광을 뿌려대는 이화궁주를 뒤로한 채 동굴을 벗어났다. 더 이상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머리로 우주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인간들은 늘 모든 현상을 묶고 분류하는 일을 반복한다. 저마다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의거해 이리 묶고 저리 묶어 몇 개의 범주로 구분하거나 반대로 세분화하여 분석하려든다. 추상적으로 함께 되거나 달리된 것들이 실재와 얼마나 깊은 연계가 있는 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자는 드물었다. 그렇기에 단호한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하고 이를 신봉하니 강호에도 이와 같은 구도가 명확히 드러났다. 몇몇의 무리를 묶어 정(正)이라 하고 이에 속하지 않으면 마(魔)라고 하여 상호 배척하니 강호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여기에도 극단적인 이분법에 의해 구분되어진 하나의 단체가 있으니 세인들이 이들을 일컬어 마교(魔敎)라 했다. 

본시 강호의 단체가 아닌 하나의 종교에 불과했던 이 단체는 교단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교도들에게 기이한 수법을 전하여 함부로 사람들을 죽이고 해치게 한다하여 정에 속하는 강호의 문파들에게 배척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교에 속한 신자들은 독실한 신앙을 쌓아가니 이들에게 있어 정이란 자신들의 교리(敎理)며, 교단(敎團)을 박해하는 다른 무리가 마가되니 옳고 그름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지는 후세의 사가들이 정할 것이리라. 

꺼지지 않는다는 성화(聖火)는 운남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단위에서 힘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일렁이듯 춤추는 성화를 바라보는 중년인의 눈에는 깊이를 짐작치 못할 고뇌가 가득했다. 단상에 앉아 괴고 있던 턱을 들어 올리며 중년인은 좌측에 서 있던 문사차림의 사내에게 물었다.

“언제인가?”

나직한 목소리에선 절로 위엄이 흘렀으나 깊이 있는 울림은 듣는 이로 하여금 신뢰와 평안을 느끼게 하였으니 결코 범상하다 할 수 있는 음성이 아니었다. 

“확인된 바로는 어제 저녁인 듯 하옵니다.”

문사차림의 사내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좋지 않은 시기에 문제를 일으키는구나. 내 교단의 일에 바빠 단속을 못했음이야.”

“가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게 속하의 탓이오니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모두가 내 책임일세. 집안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가장이니 신도들이 나눠지고 분열을 하는 것이 아니겠나?”

“교주님!”

문사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교주라 불린 중년인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가 사내에게 다시 물었다.

“어디로 향한 것인지는 짐작이 가는가?”

“많은 형제들이 지금 행방을 찾고 있으나, 워낙 탁월한 신법을 지니고 계신지라 그 흔적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흠... 그러게 그 아이에게 무공을 전하지 말라 하였거늘...”

“누구나 그런 뛰어난 자질을 보면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절로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이 드니 막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허헛... 그랬던가? 아무래도 내가 너무 소홀히 했던 것이군. 내 핏줄이 어떤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중년인은 시선을 멀리 던지며 문사차림의 사내에게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한 부탁이네만 수(秀)아를 찾는데 신경을 좀 써 주겠나? 바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이런 부탁을 하니 미안하이. 아비 된 자로서 인정을 벗어나기가 힘들다네.”

“존명! 속하,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시기가 좋지 않아. 하필 이런 때에... 쯧쯧, 철없는 것 같으니라고.”

문사차림의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들어올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고소를 머금은 중년인의 쓸쓸한 웃음을 위로하듯 성화의 춤사위는 계속 되었다. 

“빨리 좀 못 오겠느냐?”

화양괴의 낮은 호통에 송기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직까지 경신의 법을 배우지 못한 이마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화양괴의 뒤를 쫓았다. 차마 동굴에 다시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던 송기무는 난데없이 나타난 사부에게 이끌려 산 정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얼음덩이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끝내야 되니 서둘러!”

화양괴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중얼거렸다.

한참을 걸어 산 정상의 널찍한 공터에 도착한 화양괴는 내력을 운용하여 열양지기를 내뿜었다. 그의 주변에 쌓여있던 눈이 순식간에 녹아들었으며, 이내 수증기가 피어오르더니 땅이 건조해졌다. 송기무는 사부의 신기(神技)에 눈을 휘둥그레 떠야만했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사부의 몸에서 눈을 녹일 만한 뜨거운 기움이 뿜어져 나왔다면 자신도 그 열기를 느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송기무는 산정에서 이는 차가운 한풍 이외에는 아무런 열기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놀라운 현상에 넋이 나간 송기무를 향해 화양괴가 퉁방울만한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 상태로 가다간 분명 내가 그 얼음덩이 노괴에게 호형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크~ 그런 일은 죽어도 일어나선 안돼! 네 놈의 자질이 천하제일이라 우겼으니 내 반드시 네놈이 천하의 기재라는 것을 입증하고야 말겠다. 어서 좌정하고 앉거라.”

횡설수설하는 사부의 말에 송기무는 당최 영문을 파악할 수 없었으나 평소 어렵기 그지없던 사부인지라 명에 쫓아 좌정하고 앉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내 진력을 네게 주입시켜 주마. 대신 얼음덩이 놈에겐 절대 비밀이다! 진기가 유입되는 동안 심법을 지속적으로 운용해라. 진기의 흐름에 역행하다가는 나도 너도 한순간에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이 사부가 알아서 진기를 유통시킬 터이니 그저 잠자코만 있거라!”

화양괴는 말을 마치자마자 송기무의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 서서히 내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눈을 반개하고 호흡을 고르던 송기무는 등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기운을 느끼며 화양괴가 주입한 진기의 흐름을 내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따스하다 느껴졌던 진기는 점차 그 열기를 더하더니 나중에는 불같이 뜨거워져 송기무의 악다문 입에서 절로 신음성이 터지려 했다. 그러나 진기의 유통 중에 음성을 내뱉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이를 악물고 참아 내었다. 잠시 후 극양의 열기가 노도와 같이 송기무의 체내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명문으로 밀려들어온 진기는 협척, 옥침, 백회를 지나 인당 단중, 신월을 뚫고 송기무의 단전으로 몰려 들어갔다. 간신히 위치를 잡아내고 미약한 진기를 모으고 있던 송기무의 단전은 화양괴의 막대한 진기로 크게 자극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온 몸이 더워지고 무거워 지는 느낌에 송기무는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운공중에 일어난 낯선 현상에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의심이 들다가 빙음괴에게 들었던 설명을 기억해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연공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여 진기가 발동하고, 경락이 트이기 시작하면 신체 각 부위에는 여러 가지 촉동 현상이 나타나는 수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여러 가지 느낌이란 커지는 느낌(大), 작아지는 느낌(小), 가벼워지는 느낌(輕), 무거워지는 느낌(重), 서늘해지는 느낌(涼), 더워지는 느낌(熱), 가려운 느낌(痒), 저린 느낌(㵉) 등으로 크게 구분되나 그보다 더 다양한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송기무가 지금 느끼는 느낌은 빙음괴가 말한 현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운공 중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의심을 하는 것은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송기무는 고통 속에서도 의념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버티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화양괴는 진력을 주입하기 시작한지 한시진이 지나서야 송기무의 등에서 손을 떼었고, 그 순간 바로 운공에 들어갔다. 무려 삼십 여년의 수련을 통해 얻은 진력을 한순간에 쏟아 부었으니 진기를 다스려야 했던 것이다. 심후하기 이를 데 없는 화양괴인지라 내기를 다스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 반시진도 채 되지 않아 운공을 마친 화양괴는 창백해졌던 안색이 다시금 불그스레하게 돌아와 있었다. 

무아의 경지에서 눈을 뜬 화양괴는 눈앞의 광경에 크게 놀랐다. 주입한 진기를 안정시키기 위해 운기를 하고 있어야할 제자가 눈동자의 흰자위만을 드러낸 채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불이 붙은 것 마냥 달아오른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하였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괴로움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성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무아야! 왜 그러는 게냐?”

화양괴가 달려들어 송기무를 안아 올렸다. 축 늘어진 송기무의 몸은 시체나 다름없었다. 다만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신음과 이미 전신을 축축이 적신 땀만이 그가 아직 숨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이고 얼음덩이야!”

산 정상에 있던 화양괴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의 다급한 외침만이 메아리처럼 산정의 공터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가 왜 이 모양이야? 몸 안에 있는 이 막대한 열양지기는 또 뭐고?”

“그, 그게...”

화양괴는 불그스레한 얼굴에 그 빛을 더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놈이 천고의 기재다 보니 갑작스레 엄청난 내공이 불어 났나봐. 틀림없어. 그래서 욕, 욕심을 내다가 주화 입마에 빠졌나봐.”

“개뿔! 야 이 미친 노괴야. 이 정도 공력이면 근 삼십 년 이상을 수련해도 될까 말까한 데 이제 막 진기를 유통시키던 아이가 갑작스레 내공이 불어난단 말이냐?”

“그러니까 기재지.”

“에라! 자질하고 내공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나저나 큰일이군.”

“왜?”

“노괴야, 이 아이에게 네 진력을 불어 넣었지?”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있겠어?”

“무아를 살리고 싶으면 솔직히 말해라.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어.”

빙음괴의 협박에 화양괴는 순간적으로 갈등해야만 했다. 편법을 써서 빙음괴에게 형소리를 들으려 한 자신의 수작을 실토해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애꿎은 제자를 죽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그게... 조금...”

“쯧쯧... 내 그럴 줄 알았지. 이 놈아. 세상에 남의 몸에 자신의 진기를 불어 넣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냐?”

“뭐? 그게 왜 불가능해? 개정대법... 뭐 이런 거 유명하잖아.”

“당최 네놈이 두 갑자를 넘게 무공을 익히고 얻은 게 무엇인지 이해가 안 간다. 그 머리로 어떻게...쯧쯧!”

빙음괴가 자신의 머리에 대해 언급하자 화양괴는 울컥하며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아쉬운 쪽은 자기였다. 

“이놈아 개정대법이 말처럼 쉬운 것인 줄 아냐? 내공을 전하는 자와 전해 받는 자가 하나의 심법으로 호흡을 맞춰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 갑자도 넘는 공력을 가진 자만 시전 할 수 있을까 말까한 게 개정대법이다. 무턱대로 진력을 밀어 넣어서 내력을 전할 수 있다면 죽기 전에 사부에게 전수받은 공력이 수백 갑자는 되는 고수들이 강호에 즐비할 거란 생각 못해봤냐?”

“...!”

“아직까지 한 번도 성공했다는 얘기조차 못 들어 본 개정대법을 네놈이 시행했으니...쯧쯧!”

“그게... 무아와 내가 같은 심법을 사용한 것까지는 맞잖아.”

빙음괴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욕을 사라! 욕을 사! 축기와 행공을 하는 심법이 개정대법을 시행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냐? 아직까지 제대로 된 운기조차 못하는 아이에게 무지막지한 기운을 밀어 넣은 셈이니 한 순간에 심맥이 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어?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범상하지는 않군.”

빙음괴가 자신의 제자를 보고 범상치 않다는 말을 하자 심각한 상황중에도 화양괴의 안색이 약간 밝아졌다. 그가 얼마나 단순한 성격을 소유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네 놈이 억지로 진력을 밀어 넣자마자 즉사해야 정상인데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아주 특이한 체질을 가지고 있나본데?”

“그러니까 내가 천고의 기재라고 했잖아!”

화양괴의 말에 빙음괴의 눈에서 얼음 같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빙음괴의 눈총을 받은 화양괴는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아직까지 심맥이 완전히 상한 것도 아니고...허 괴사로다.”

“얼음덩어리야. 내 제자가 지금 무지하게 괴로워하잖냐. 잔소리는 나중에 하고 어떻게든 손을 좀 써 봐라.”

“흠... 일단은 체내에 준동하는 열기를 내 음한지기로 가둬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치료까지야 안 되겠지만 그렇게 하면 당장 죽지는 않겠지.”

“어? 치료가 안 되는 거야?”

“내가 무슨 의원이냐? 네놈이 상한 사람을 다 치료하게?”

빙음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단 손이라도 쓰라고. 애 잡겠네.”

제자의 괴로운 신음성을 들으며 마음이 다급해진 화양괴도지지 않고 큰소리로 맞섰다. 기대했던 바와 달리 무공을 익히는 진도가 신통치 않아 그다지 각별한 애정을 쏟아 부었던 제자는 아닐 지라도 생애를 통털어 처음 맞이한 제자인데다가 자신의 실수로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이다.

“내가 왜 네놈 제자한테 어렵사리 모은 진기를 쏟아 부어야 하는데?”

화양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부아가 치민 빙음괴가 쏘아붙였다. 빙음괴의 말을 들은 화양괴의 얼굴에 금새 비굴한 미소가 떠올랐다. 

“크헤헤헷, 사실 내 제자면 네놈 제자기도 하쟎냐?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면 안 되지. 설마 음양이선이 자기네 제자조차 못살려 낸다는 소릴 듣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네놈만이지 내 나까지 묶여 들어 가냐?”

“무슨 소리! 언제 우리가 따로 떨어져서 언급되는 것 봤냐? 늘 음양이선은 함께 거론된다고...”

“끄응~”

빙음괴의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삼십 년간을 어렵사리 모아온 진력을 허비해야 한다는 것은 그로서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화양괴가 말년에 얻은 제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벌써 백여 년을 함께 해온 지기였다. 철없는 애보다 못한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백년지기의 제자가 애꿎게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만약 입장이 바뀌었으면 화양괴는 투덜댈지언정 자신의 목숨이라도 걸 게 분명했다. 늘 수련하는 무공의 열기가 지나쳐 뇌에 손상을 받아 머리가 나빠진 것이라 타박해왔지만 화양괴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도 남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빙음괴였다. 

사실 음양쌍괴가 실제로 음양이선이라 불리지 않는 이유의 거의 모든 이유는 화양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빙음괴 자신도 성격이 괴팍하다고는 하나 아무 생각 없는 사고를 치고 다닐 성격은 아니었다. 결국 그들의 이괴로 불리는 이유의 대부분은 화양괴의 앞뒤 못 가리는 성격에 기인한 것이 컸었다. 정사를 막론하고 자신의 성질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손을 써대는 화양괴의 못 말리는 성격 탓에 일 갑자 이전부터 음양쌍괴로 불리어온 것이다. 만약 화양괴와 자신의 우정이 깊지 않다면 이미 오래전에 따로 행동을 했을 것이다. 성질 머리야 마음에 드는 바가 눈곱만큼도 없다지만 빙음괴를 자신의 몸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화양괴라는 것을 잘 아는 빙음괴인지라 일백 성상을 화양괴와 함께해 온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빙음괴는 쓰린 속을 억지로 달래며 자리에 앉았다. 

빙음괴가 송기무의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 있는 시간은 화양괴 보다 훨씬 길었다. 막무가내로 진력을 밀어 넣었던 화양괴와는 달리 송기무의 경맥에서 제 멋대로 날뛰는 극양의 기운을 그의 음한지기로 차근차근 몰아가 단전 내에 억눌러 놔야만 했다. 그 과정이란 일백성상을 무공으로 살아온 빙음괴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행여나 두개의 상이한 기운이 충돌이라도 한다면 송기무는 혈맥이 터져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유입된 음한지기가 열양지기에 비해 넘치게 된다면 또 다른 부작용이 일어날 것임이 분명했다. 고로 부족하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게 진기를 유입하여 화양괴의 진력을 가둬 두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빙음괴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빙음괴는 무려 여섯 시진에 걸쳐 송기무의 체내에 있는 화양괴의 진력을 억지로 다스려 단전에 모아 두었다. 삼십 년의 진기를 소모해 이룬 결과가 고작 화양괴의 진력을 억제하는 것이니 빙음괴의 입장에선 쓸모없는 진력의 낭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후~”

송기무의 등에서 손을 뗀 빙음괴는 길게 숨을 내쉰 후 곧장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화양괴는 곧장 제자의 상태를 살폈다. 과연 빙음괴의 요상법이 실효가 있는 듯 불타오르는 것처럼 달아올랐던 송기무의 안색이 돌아와 있었다. 약간 창백한 기운을 띄고 있긴 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괴로운 신음성도 흘리지 않았고, 비 오듯 흐르던 식은땀도 더 이상 흘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탈진한 상태에서 곧장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잠시 후 운공을 마친 빙음괴가 눈을 떴다.

“어떻게 잘 됐냐?”

화양괴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일단 네 망할 놈의 진력을 무아의 단전에 밀어 넣었다. 거동하는 데 지장은 없을 거야. 참! 무아가 일어나면 당분간 운공은 못하게 해라.”

“왜?”

“함부로 진기를 움직이다가 네놈의 망할 진력과 내 음한지기가 무아의 몸에서 날뛰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다고. 한 순간에 혈맥이 터져 나갈 수도 있고... 뭐 어떤 증상이 나타날 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위험할 게 분명하다고.”

“그럼 운공을 못하면 어떻게 무공을 배워?”

“당분간은 못 배우는 거지, 뭐.”

“그걸 치료라고 했냐?”

화양괴가 다시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놈이 일 벌려 놓고 왜 나한테 소릴 지르고 난리야? 이만큼 한 것도 나로선 최선을 다한 거라구. 세상에 남의 진기를 자기 걸로 만드는 방법이 어디 있냐? 특별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무아는 평생 무공을 익힐 생각도 못하게 될 거라고.”

“특별한 치료?”

제자가 자신의 실수로 평생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화양괴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잊었냐? 죽은 놈도 살려내는 괴물이 하나 있었잖아?”

“아!”

화양괴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머리를 쳤다.

“그런데 그 녀석이 아직도 살아있을까?”

“남의 병을 고치는 놈이 지 병은 못 고칠까? 당시에 약관에 불과했으니 아직 살아 있을게야. 녀석이 죽었다 해도 후인이 있겠지.”

빙음괴가 태연하게 말했다. 이미 자신이 할 도리는 다 한 셈이었다. 화양괴처럼 순간적인 감정에 동요되는 법이 없는 그는 방법이 없는 일에 안달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럼 빨리 가자. 놈을 찾건 후인을 찾건 서두르자고.”

“쯧쯧... 하여튼 저놈의 성질머리...”

운남의 성도 곤명(昆明)에서 멀지 않은 천화(天花)는 사계절의 변화가 크지 않고 겨울에도 봄처럼 훈훈한 날씨를 유지하는 곳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말 한 마리가 끄는 수레는 관도 위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수레와 함께 이동하는 인마는 치료를 위해 사천을 떠나온 송기무의 일행이었다. 고절한 무공으로 한서를 타지 않는 음양쌍괴와는 달리 두터운 털옷을 걸쳐 입었던 송기무와 이화궁주는 운남에 들어선 이후로는 얇은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거의 다 왔다, 무아야.”

송기무는 지금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나이든 사부와 빙음괴는 수레 옆에서 걷고 있고, 자신은 수레에 걸터앉아 편히 가고 있으니 영 불폏나 것이었다. 거동에 큰 지장이 없었음에도 자신으로 인해 고초를 치루는 제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화양괴가 한사코 수레에 타고 가라고 하는 것이다. 송기무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사부에 대한 송구함만이 아니었다. 벌써 보름에 가까운 여정동안 자신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냉랭한 기운만을 뿌리고 있는 이화궁주와의 동석도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나마 덮개가 없는 수레였기 망정이지 덮개로 감싸져 제대로 된 형상을 가진 마차였다면 송기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저기 보이는 마을 보이지? 저기가 그놈이 사는 곳이란다.”

화양괴의 말대로 멀리서 한가로워 보이는 시골 마을이 보였다. 저녁때라 그런지 마을의 굴뚝에선 한결같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운남이라 하면 빽빽하게 들어찬 열대의 밀림과 독충과 괴이한 동물로 가득 찬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송기무는 목적지가 사천에서도 쉬이 볼 수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음에 안심했다. 성도에서 나고 자라온 송기무인지라 독사나 기이한 벌레 같은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어째 이곳은 일 갑자가 흘렀음에도 똑같은 모습이군, 그래.”

화양괴가 마을 어귀에서 중얼 거렸다.

“천화로 들어가기만 해도 확실히 다를걸? 여긴 예전부터 촌구석이었잖아.”

빙음괴가 화양괴의 말을 받았다. 빙음괴는 여정 내내 불만을 토로해 왔다. 강호에 나와 한바탕 신나게 놀려고 했던 것도 때려치우고 제자를 가르친다며 다시 산 구석에 들어가더니 기껏 나온다는 것이 운남의 시골로 가자는 것이냐며 툴툴 거려온 것이다. 

“무아 치료가 끝나면 천화는 물론이고 곤명에 가서 한바탕 놀면 되잖아.”

화양괴가 아무리 성질이 급하다고 해도 머리까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 화양괴의 무공은 당금 무림에 그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고절했다. 그와 같은 상승절학은 범상한 자질로는 결코 익힐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화양괴의 무공에 대한 열정이 다른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정수준 이상의 자질 없이는 열정만을 가지고 상승공부를 습득해 내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급한 성격과 생각을 하는 것보다 행동을 하는 것이 빨랐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고를 많이 칠 뿐 화양괴는 범인에 비해 총명하면 총명했지 결코 떨어지진 않았던 것이다. 여정 내내 투덜거리는 빙음괴의 속셈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화양괴의 말에 의해 빙음괴의 안색이 금새 밝아졌다. 일명 춘성(春城)이라 불리는 곤명은 한겨울에도 따스한 봄날과 같은 기후를 유지하여 내륙에서도 겨울철의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일 갑자에 걸친 지루한 산중의 생활에서 묵혀온 때를 벗겨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다.

네 사람과 말 한 마리는 마을 어귀를 따라 돌기 시작하여 한 모옥 앞에 섰다. 일행은 모옥에 다가서며 은은한 약향을 맡을 수 있었다.

모옥의 앞에서 말이 한차례 푸레질을 하자 모옥 뒤쪽에서 한 여인이 나왔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팔을 걷어붙인 모습이 뭔가 일을 하다 나온 모습이었다. 운남의 구석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미모의 여인이었다. 넓은 이마와 동그란 얼굴이 전체적으로 선한 인상을 만들어 냈다. 처음 화양괴의 붉은 머리와 빙음괴의 푸르스름한 머리색을 보게 된 사람은 놀라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여인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누굴 찾아 오셨는지요?”

“한승백(漢昇白).”

화양괴가 짧게 답했다. 이에 빙음괴가 혀를 찼다. 환자의 치료를 부탁하러 온 주제에 의원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는 화양괴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조부님께서는 약재를 구하러 가셨습니다.”

한승백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빙음괴였으나 성질 급한 화양괴는 달랐다.

“언제 돌아오느냐?”

다짜고짜 내뱉어진 반말. 그러나 여인은 여전히 공손한 어투로 대답했다.

“삼 개월 정도를 기약하셨으나 약재를 쉬이 구하지 못하시면 더 오래 걸리실 수도 있습니다.”

“뭐라? 삼 개월?”

화양괴는 놀라 외친 후 다급하게 말했다.

“어, 어디로 갔느냐?”

“왜? 네놈이 찾아 나서려고?”

보다 못한 빙음괴가 끼어들었다. 내버려두었다간 화양괴가 중원의 모든 산을 뒤져서라도 한승백을 찾아 나서겠다고 난리를 부릴 게 뻔했다.

“당연히...”

“쯥!”

빙음괴가 화양괴를 노려봤다. 화양괴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아이야. 우리는 네 조부랑 오랜 세월을 알아온 사이니라. 일행 중에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한의원의 후인은 안 계시느냐?”

“환자가 있다면 안으로 드십시오. 부족하지만 소녀가 노력을 해 보겠습니다.”

화양괴는 꼬마 계집애가 뭘 안다고 나서려느냐고 말하려다가 빙음괴의 전음에 말을 삼켰다.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 한승백의 의술을 이어 받았음에 틀림이 없으니 일 망치지 말고 잠자코 있어.]

[하지만 이런 꼬마 계집애가 뭘 안다고...?]

[한가 놈이 강호에 성수신의(聖手神醫)로 명성을 떨친 게 몇 살 때였는지 기억 안 나냐?]

빙음괴는 차갑게 쏘아부친 후 송기무와 이화궁주를 데리고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몇 살 때였더라?’

화양괴는 빙음괴가 마지막으로 한 질문의 답을 생각해 내느라 조금 뒤처져야만 했다.

화양괴는 미심적은 눈초리로 여인을 살폈다. 여인은 눈을 반개한 채 송기무를 진맥하는 중이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로군요.”

여인이 눈을 뜨며 말했다.

“이미 혈맥이 터져 죽었어도 모자랄 것일진대 이렇듯 멀쩡하니 다니시니...”

여인의 입에서 이미 죽었어야한다는 말이 나오자 화양괴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무리 음유한 기운이 열강한 기운을 단전에 억누르고 있다지만 이 상태에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무릇 진기란 우주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인간의 몸에 우주의 기운을 채워 넣음으로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타인의 진기는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해도 자신의 몸에서는 해로움 이상의 효능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부족한 부분이 다름이니 타인의 진기가 도움이 될 턱이 없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엔 이분 소협의 체내에는 외부에서 강제로 유입된 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그, 그렇네...”

젊은 여인이 의외로 정확하게 송기무의 상세를 알아내자 화양괴는 내심 탄복하며 대답했다.

“소협에게 내릴 수 있는 처방은 두 가지입니다. 조부께서 이 자리에 계신다 해도 같은 처방을 내리실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의원이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환자의 신뢰를 얻는 일이다. 의원을 신뢰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처방이라 할지라도 환자를 완치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었다. 여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부를 찾아온 손님이라 함은 조부의 의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나이도 어린 자신이 내린 처방을 불신하게 된다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뿐이기에 자신의 조부를 들먹여 신뢰를 주는 것이었다. 빙음괴는 그런 여인의 마음을 눈치 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화양괴는 여전히 미심적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 가지 방법은 침술을 이용해 강제적으로 소협의 체내에 있는 진기를 뽑아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 중 소협의 단전에는 심한 손상이 갈 터 이후로는 단전을 통해 축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평상시의 활동에도 큰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첫 번째 방법을 사용한다면 송기무는 더 이상 무공을 익힐 수 없게 된다는 말이었다. 빙음괴는 화양괴가 이 방법에 동의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인고?”

다른 방법이 더 있다는 여인의 말을 놓치지 않은 빙음괴였다.

“두 번째 방법은 체내의 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이 기운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대단한 이득이 될 수도 있겠지요.”

“아니 남의 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단 말인가?”

빙음괴가 놀라 외쳤다.

“저도 그 방법을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빙음괴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흘렀고 화양괴는 분통을 터뜨리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결국 제자를 폐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처방의 다라는 얘기였다.

“그렇다 해도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음한지기가 양강한 기운을 억누른다고 하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을 뿐입니다. 기운의 평형이 흐트러지는 순간부터 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날뛰게 될 테니까요. 일단 그렇게 된 이후 이분의 생명은 길어야 한달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순간 즉사를 하겠지만 이분은 특이한 체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나마도 가능한 것이겠지요.”

여인의 말에 빙음괴는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방법을 모른다고 해 놓고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인가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화양괴가 폭발하기에 앞서 빠르게 말을 꺼냈다.

“의원은 두 번째 방법을 모른다고 했는데 어찌 우리보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하는가?”

빙음괴는 아이라는 호칭에서 의원이라는 호칭으로 바꾸어 불렀다. 진맥을 하여 송기무의 정확한 상세와 치료법을 짚어 내는 여인의 의술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 것이다.

“소녀는 모르지만 그 방법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마 두 분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상에 남의 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어딨어? 그런 게 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왔겠냐?”

결국 화양괴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붉은 머리카락에 얼굴까지 붉어진 그의 인상을 보고도 여인의 눈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설마... 지금 의원이 말하는 것이...?”

빙음괴가 화양괴를 무시하고 여인에게 말했다. 

“아마도 노인장께서 짐작하시는 그것이 맞을 것이옵니다.”

“뭐, 뭐냐? 얼음덩이야. 너도 알고 있었던 게야? 남의 진기를 자기 걸로 만드는 방법을?”

애다 닳은 화양괴가 빙음괴를 붙들고 늘어졌다.

“방법이야 있지. 노괴야... 네놈도 알지 않느냐? 남의 진기를 흡수하여 자신의 내공을 불리는 공포스런 무공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흐, 흡성대법(吸成大法)!”

화양괴의 퉁방울만한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화양괴의 퉁방울만한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어떻게 할래?”

빙음괴의 음성이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건 듣는 즉시 결정을 내리는 화양괴였지만 이번에는 그 역시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간 침묵이 흐른 후 화양괴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의 음양이선이 못할 일이 어디에 있냐? 가자! 내 십만대산을 뒤집어엎어서라도 흡성대법을 구해와야겠다.”

“그들이 내 놓을까?”

빙음괴의 회의적인 질문에 화양괴가 자신 있게 답했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우리한테 함부로 하진 못할게야. 조건을 내세우면 교환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그냥 진기를 빼 버리면 안 될까? 걔네들은 왠지  섬뜩한 데가 있어서 말이야.”

빙음괴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화양괴의 붉은 눈썹이 역팔자로 크게 치솟았다. 빙음괴는 화양괴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흠, 흠!”

“그럼 치료 방법을 결정하신 것입니까?”

여인은 두 사람의 대화가 정리되길 기다렸다가 물었다.

“아이야. 우리가 대산으로 가서 대법을 구해 오마. 그동안 내 제자 놈을 좀 보살펴 줄 수 있겠느냐? 대법을 구해오는 여정이 험난할 듯하여 동행을 하기가 그렇구나.”

갑작스레 진지하고 무게를 잡는 화양괴였다. 

“환자를 돌보는 것이 의원의 도리입니다. 일 년 이내에는 큰 탈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셔도 될 것입니다.”

“일년이라...”

빙음괴가 여인의 말을 되뇌었다. 길다면 긴 시간일 수 있겠으나 흡성대법을 얻어 와야 할 곳은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음양쌍괴로서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곳이었다. 한바탕 소동을 부릴 수야 있겠지만 힘으로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덤벼드는 자들이기도 했고, 그들이 가진 기괴한 수법 역시 상대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음양쌍괴의 무공이 아무리 고절하다 해도 십만에 달하는 수를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억지로 뺏어올 수가 없는 입장이기에 일년이라 긴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쉽사리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의원, 만약 우리가 일 년 이내에 이곳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자네가 저 아이 체내의 진기를 빼 내주게나. 목숨을 잃게 할 수야 없지.”

빙음괴가 여인에게 당부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화양괴가 버럭 소릴 지르며 끼어들었다.

“못 돌아오긴 왜 못 돌아와? 무아야,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이 사부가 반드시 대법을 구해 와서 네 몸을 치료해 주마. 설령 황궁에 있다 해도 이 사부가 마음먹는다면 얻어낼 수 있으니 잠시만 참고 기다리거라.”

“큰소리치기는...쯧쯧...”

빙음괴와 화양괴는 이화궁주를 수레에 태워 십만대산으로 향했다. 이화궁주가 점차로 무공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에 송기무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음양쌍괴였다. 송기무와 이화궁주의 합방을 도모한 두 사람이었기에 다음 날 송기무와 이화궁주 사이에 일어났던 사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화궁주의 성격으로 미루어 조금이라도 무공이 회복되면 송기무 먼저 죽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직은 거동조차 불편해 하는 그녀를 데려간 것이다. 

“마음 편하게 계시도록 하십시오. 기혈을 안정시키는 약을 지어 드릴 테니 아침저녁으로 드시면 될 것입니다.”

여인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송기무는 여태껏 이런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호방하다 할 수 있는 강희연, 쾌활하고 명랑한 당가연, 그리고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 이화궁주. 모두가 경국지색이라 할만한 미인이었지만 이 여인에게선 색다른 매력이 물씬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겉모습만 따진다면 여인의 미색은 앞서 언급한 세 여인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용한 음성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과 절제되고 차분한 행동은 송기무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 당겼다. 어쩌면 이화궁주의 독살 맞은 행동에 질려버린 그였기에 여인에게 더 끌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 지나치게 많은 여인과 인연을 맺게 된 송기무였다. 지금이야 서로 모르고 있으니 큰 탈이 없지만 훗날 세 여인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한가롭게 여인들에 대한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평생토록 무공을 수련할 수 없게 될 지도 몰랐다. 화양괴를 사부로 모시며 선부의 복수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한 그였다. 비록 배움의 진도가 느려 절정의 고수가 될 수 없을 지라도 제자의 복수 정도는 충분히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무공을 수련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다면 더 이상 제자로서 생각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것이 사부였지만 여태껏 보아온 사부의 성격으로 미루어 모든 일을 순리에 맞게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고로 선부의 원수를 갚는 일이 불가능해질 지도 모를 상황이 된 것이다. 고작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흉수를 밝혀내고 그 목을 선부의 영정에 바쳐야 했다. 송기무는 반드시 병을 이겨 내겠다고 새삼 다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