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 팽가가 자랑하는 절세의 도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공자는 아예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
팽가의 무공은 대개 심후한 내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대해와 같
은 내력이 아니면 폭발적인 위력을 내는 일도식을 펼치는 것을 감
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가히 팽가의 모든 도법이 패도(覇道)적인 위력의 극치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팽지호가 펼쳐내는 연환탈백도법은 팽가의 여
느 무공과는 괘를 달리했다.
지나치게 패도적인 팽가의 무공을 보완하기 위해 창안된 것으로
수대에 걸쳐 그 완성도를 높여온 무공이었다.
다른 여타의 팽가 도법처럼 내력을 집중해 폭출(暴出)하는 방식의
초식이 아니라 후초(後招)가 선초(先招)를 보완하고 변화가 변화를
만들어 내는 절묘한 도법.
현 팽가주(彭家主) 팽도천(彭到天)이 팽가도법의 완성이라 할 정
도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무공이었다.
팽지호의 대도가 만들어내는 강력한 회전력은 일시 간 구양철산
의 장영을 흐트러뜨렸다.
남궁세민을 압박해 들어가던 구양철산은 팽지호의 현란한 도세
(刀勢)에 장영을 회수한 것이다. 이도 잠시!
구양철산의 탈혼수가 다시금 흰빛을 뿌리며 허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땅, 땅, 땅!
연이여 세 번에 걸친 쇠 울림소리.
팽지호 역시 낭굼세민처럼 뒤로 크게 밀렸다.
허나 남궁세민과는 달리 팽지호의 입가에 가는 혈선이 생겼다.
탈혼수에 실린 내력(內力)이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남궁세민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마교에 대한 갖은 소문은 철이 들기 전부터 들어왔다.
종교라는 이름을 빌려,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악한 무리들.
기이한 무공과 비겁한 수법으로 정도의 영웅에 위해(危害)를 가하
며, 무림의 패권(覇權)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악의 집단.
그들을 강호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협사(俠士)가 가야할 길이
며, 정의의 실현이라 배우며 자라왔다.
무공을 익힌 후 수많은 악당들을 처단하며 강호 후기지수의 수좌
를 다투던 남궁세민이었다.
그 중에 강호공적(江湖公敵)중 제일이라는 마교의 무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강호의 소문이 늘 그렇듯 마교의 무리에 대한 것들
은 대부분 과장되어 있었다. 간혹 괴이무쌍(怪異無雙)한 무공을 펼
쳐내는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십초지적(十招之敵)이
드물 정도였다.
처음 주루에 들어서 팽지호와 대치 중인 백의탈혼을 발견했을 때,
그는 기뻐했다. 마교의 수많은 것들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
기 때문에 백의탈혼이 마교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정확히
알 도리는 없었다. 그러나 마교의 무리 중 강호의 활동이 잦았고,
그만큼 악명이 자자한 인물. 그를 처단한다면 자신은 물론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계기가 될 것이었다.
팽지호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의 도움 따위도 기대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가문의 절기를
쏟아낼 필요도 없이 몇 수를 통해 백의탈혼을 제압하고 자신의 이
름을 날릴 것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처지는 어떠한가?
일수(一手)에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되었고, 팽지호의 도움을 받아
야만 했다. 더구나 세가를 대표하는 절기 중 하나인 섬전십삼검뢰까
지 펼쳐낸 상태였다. 아니,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다. 구양철산의
탈혼수가 검신의 옆면을 때리는 순간, 그 강력한 힘에 검을 놓칠 뻔
했다. 몸 전체를 움직여 힘을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실제로 검을 놓
쳤으리라.
심한 모욕감, 아니 수치심이 남궁세민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짧은 인생을 살아오며, 무공에 있어 누구에게 뒤쳐진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가문의 어른들이 계시긴 했지만, 곧 넘어설 수 있는
벽과 같았다. 모두가 손을 곧추세워 자신의 자질에 감탄하였으니,
기정된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구대문파의 수장들이나 가문의
어른들이 아닌 한낱 사마(邪魔)의 무리에게 무공으로 밀리다니!
남궁세민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검병을 쥔 손에 내력이 집중되었
다.
검극(劒極)이 하늘을 가리키고 수결(手決)이 수평으로 누웠다.
천지간의 기운이 검에 집중되니, 검이 향하는 곳에 무엇도 남지
않으리.
남궁세가의 절대신공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의 기수식.
비록 삼성에 이른 깨달음일 뿐이었다.
실전에 있어서 익숙지 않은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무
덤을 파는 것에 다르지 않았다. 고작 삼성에 불과한 깨달음이란 아
예 익히지 않은 무공을 흉내 내는 것보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상대
의 반응여하에 따라 스스로 주화(走火)의 화(禍)를 입을 수도 있었
기 때문이다.
남궁세민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창궁무애
검법의 절대적인 위력을 신뢰하는 마음도 있었다.
삼성이면 충분해!
그의 머릿속을 가득채운 한 가지 생각이었다.
남궁세민의 자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돌연한 기세에 백의탈혼 구
양철산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직접 상대해 본적은 없다지만 남궁세가의 절기에 대한 수많은 소
문은 익히 들어온 터.
“창궁무애검법인가?”
나직한 중얼거림.
현존하는 무림의 최고절기 중 하나가 눈앞에서 펼쳐질 것이다.
무인으로써의 호기가 가슴을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절기인 탈혼수와 창궁무애검법의 비교.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왔던 기회일는지도 몰랐다.
“일망무애(一望無涯)!”
“구룡탈혼(九龍奪魂)!”
수직으로 세워진 검이 그대로 내리쳐진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진공이 형성된 듯 주루의 모든 공기가 일
시 간 남궁세민 쪽으로 몰려간다.
가공할 검세(劒勢)!
그 이외의 수식은 필요 없을 창궁무애검법의 제 일 초식.
구양철산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붙었다.
흰 장영은 흐릿해졌고 순식간에 아홉 마리의 용으로 화(化)했다.
기기묘묘한 곡선을 그리며 탈혼수는 일망무애에 담긴 압도적인
검세를 아홉으로 나누어 해소해갔다.
만변을 하나로 집중하여 패도적인 위력을 내는 일망무애의 초식
이 아홉 마리의 용에 의해 파해 되는 것이다.
휘몰아치는 장력은 검의 움직임을 봉쇄해 들어갔고, 탈혼수에서
비롯된 막대한 압력이 남궁세민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는 그 순간 구양철산의 좌수가 남궁세
민의 오른쪽 어깨를 가격했다.
퍼억!
그와 동시에 다시금 남궁세민의 심장부위를 노리고 날아드는 구
양철산의 탈혼수.
격중 되는 즉시 남궁세민은 목숨을 잃을 터.
“타합!”
팽지호의 대도가 구양철산의 겨드랑이를 아래쪽을 노리고 날아들
었다.
구양철산은 다시금 우장의 회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갗이 따갑
도록 느껴지는 경력이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정파의 애송이의 목
숨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내어 줄 수는 없는 일.
우장을 거둔 구양철산은 몸을 회전시켜 좌장을 뒤집어 그대로 팽
지호의 옆구리를 노렸다.
남궁세민의 위급함을 돕기 위해 정리되지 않은 일도를 내지른 팽
지호는 배운바 초식을 사용하여 방어를 할 여력이 없었다.
다급해진 그는 도를 뉘여 도신으로 구양철산의 좌장을 막아냈다.
타앙!
귀청을 울리는 굉음.
아까와는 달리 팽지호는 뒤쪽으로 밀려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흙빛으로 물들었다.
탈혼수에 정확히 가격당한 그의 대도가 부러진 것이다.
구양철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두 번이나 자신을 방해한 애송
이를 놓아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열두 개의 흐릿한 장영이 환상
처럼 나타나며 탈혼수는 다시금 팽지호의 목숨을 노렸다.
“천류한성(天流寒星)!”
난데없이 들려오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구양철산의 장영을
막아서는 소수(素手)가 있었다. 어느 사이 뒤쪽에서 격전을 지켜보
던 모용선이 끼어든 것이다.
모용선의 부드러운 장력은 구양철산의 탈혼수가 만들어낸 열두
개의 장영 중 여섯 개를 막아냈었고, 그에 여유를 얻은 팽지호는 장
력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양철산의 짙은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대체 이 주루에 얼마나 많은 정파 나부랭이가 말하는 신진고수들
이 모여 있는 것이란 말인가?
천류한성이라 함은 모용세가의 절기(絶技).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은 모용세가의 후예임이 틀림없었다. 팽지호
를 노리던 나머지 여섯 개의 장영은 방해자를 향해 몰아쳐갔다. 빼
어난 미색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교에 반하는 적일 뿐. 그의 손속에
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방천묘수(防天妙手)”
또다시 끼어든 새로운 인영이 전개하는 천류한성의 한 초식.
앞서 끼어든 여인에 비해 조금 어려보이는 소녀가 현란한 장법으
로 다시금 구양철산의 탈혼수를 풀어냈다.
모용경이 언니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다.
모용선에 비해 내력이 달리는 그녀는 이를 악물고 탈혼수의 위맹
한 경력을 막아서고 있었다.
자신을 막아선 것이 두 명의 어린 여자들이라는 것에 구양철산은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싸움 중에 노기를 드러내는 것
은 고수에게 있어서 절대의 금기.
그는 뒤로 반장을 물러서며 장영을 회수했다.
그가 상대해야할 자는 모두 넷.
모두 어리다고는 하나 오대세가의 절기를 몸에 지닌 자들이었다.
노기를 억누르고, 기식을 가라앉혔다.
하나나 둘이라면 모를까 오대세가의 후예 넷을 상대하는 일에는
백의탈혼이라 할지라도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
지는 않지만 자칫 낭패를 볼지도 모르는 상황.
방수(?手)가 아쉬운 상태였다.
함께한 자는 일초식의 무공도 모르는 신교의 교도일 뿐.
그를 보호해야할 입장에 서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내심으로 적의 허점을 찾아냈다. 넷이라고는 하나 넷 중 하나는
이미 자신의 탈혼수에 의해 꽤 심각한 내상(內傷)을 입은 상태. 활
로(活路)는 거기에 있었다. 한 명이 더 있고 없고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구양철산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히고, 다시금 그의 소매가 팽팽
히 부풀어 올랐다. 십이 성의 공력이 쌍수에 집중된 것이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도적인 기운에 남궁세민을 비롯한
네 사람은 절로 몸서리가 처졌다. 마교의 중진이라는 탈혼수의 무공
이 이토록 대단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그들. 새삼스레
가문의 어른들이 어째서 마교라면 치를 떠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
었다.
구양철산이 뒤로 물러선 것은 상대가 방위를 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벽을 등지고 서있으므로 모든 적이 시야를 벗어나지 않
는다. 따로 연수합격(聯手合擊)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좁은 각에서
지닌바 무공을 펼쳐내기란 쉽지 않은 법. 오히려 서로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네 명이라는 적의 숫자를 고려한 행동이었다.
네 사람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흡을 고르며 구양철산을 향
해 적의 가득한 시선을 뿌리고 있었다.
구양철산의 좌보가 내딛어졌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주루를 메웠다.
그 순간!
“수치를 모르는 것이 어린 후배들을 핍박하는구나.”
난데없는 목소리가 격전에 임박한 다섯 사람의 호흡을 흐트러뜨
렸다.
난데없는 목소리가 격전에 임박한 다섯 사람의 호흡을 흐트러뜨
렸다.
진기를 양수에 모아 지닌바 무공의 진수를 전개하려던 구양철산
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음성에 담긴 내력(內力)이 그에게 집중되어 진기(眞氣)가 흐트러
졌던 것이다.
대저 누가 있어 이와 같은 공력(功力)을 보인단 말인가?
그의 눈은 재빠르게 소리의 진원을 찾고 있었다.
음성의 주인공은 자신을 감출 마음이 없었다.
“켈켈켈, 비렁뱅이가 대들보에서 눈 좀 붙이려 했더니만 소란스러
워 잠을 잘 수가 없구먼.”
구양철산은 눈을 크게 뜨고 대들보 위를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 저 위에 올라가 있었단 말인가?
대들보 위에 호로병을 들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자는 거지의 행
색을 하고 있었다.
구양철산은 재빨리 자신의 기억과 대들보 위의 노개(老?:늙은 거
지)를 대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대들보에 올라앉을 만큼 고절한 무공을 익
힌 거지.
중원 천지에 널리고 널린 게 거지라지만 구양철산은 즉각적으로
개방(??)을 떠올렸다.
몇 마디 음성으로 진기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는 자를 배출할 수
있는 곳은 그가 알기로 개방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십만방도(十萬?徒)를 헤아리는 개방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넘치고 절세고수(絶世高手)가 즐비했다.
그렇기에 개방이 정파 무림을 떠받드는 아홉 개의 기둥 중 일좌
를 당당히 차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양철산의 시선이 노개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애초부터 옷이었다는 것을 짐작키 어려운 누더기.
그것을 졸라매고 있는 허리의 끈에는 여덟 개의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팔결(八結)!
구양철산의 안색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늘 자신에게 닥칠 일에 길(吉)보다 흉(凶)이 많음을 짐작한 것
이다. 아니, 대흉(大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현재 개방에서 여덟 개의 매듭을 지은 새끼줄을 허리춤에 매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단 둘.
개방 방주(幇主)의 사숙(師叔)인 태상장로(太上長老)와 방주의 적
전제자(嫡傳弟子)인 후개(後?)만이 여덟 개의 매듭을 묶을 수 있었
다.
거미줄처럼 얼굴에 드리워진 노개의 주름살로 미루어 그가 방주
의 제자일리는 없을 터.
결론은 하나였다.
볼품없어 보이는 저 노개가 개방의 태상장로인 불취광개(不醉狂
?) 탁칠양(卓七陽)이라는 것.
기행(奇行)을 즐기고, 방규(幇規)을 어기길 즐겨하는 그는 원리원
칙주의자인 현(現) 개방주 충의신개(忠義神?) 조통진(曺通眞)과 뜻
이 맞지 않아 개방에서조차 좀처럼 그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늘 신룡(神龍)처럼 머리는 보이되 꼬리는 보이지 않았으며, 최근
행적이 묘연하여 이미 죽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기도 했다.
구양철산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개방의 후개와
자신의 배분이 비슷한 입장. 결국 불취광개는 무려 자신에 비해 두
배분이나 높은 무림의 원로(元老)라는 말이었다.
대들보 아래로 때가 꼬질꼬질 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불취광
개가 몸을 살짝 움직였다.
우당당탕!
대들보 아래로 뛴 불취광개가 탁자의 모서리부분을 밟으며 내려
서다가, 한쪽으로 갑자기 무게를 받아 뒤집어지는 탁자와 나뒹구는
소리였다.
주루 한쪽에 뭉쳐있던 구경꾼들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봉
두난발(蓬頭亂髮)에 해학(諧謔)적인 외모를 가진 늙은 거지가 나뒹
구는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양철산은 웃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모서리에 힘을 받아 튀어 오른 탁자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올 기세였다. 맹렬한 기운이 내포된 것은 물론이었고, 날아오는
속도 또한 쉽게 피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탁자 다리를 불취광
개가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손놀림으로 잡아채 마치 실수로 탁
자와 나뒹군 것처럼 연출한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련의 동작에 중인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할
뿐.
펼침과 거둠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지닌바 무공의 경지를 드러내
는 일이었다. 발로 한번 짓밟음으로서 위맹한 경력을 담아낸 탁자를
날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탁자의 아무런 손상 없이 그 경력을
회수하는 것은 더욱 놀라운 솜씨였다.
불취광개의 무공에 감탄하며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잠시.
구양철산은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성질 급하
고 악을 원수처럼 미워한다는 불취광개였다. 그가 강호공적이라는
마교도인 자신을 보고 어째서 저런 행동을 취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문대로라면 다짜고짜 자신을 쳐 죽이려 덤벼들
어야 할 터. 그러나 방금 전 불취광개의 행동은 스스로의 실력을 드
러내어 구양철산에게 알아서 물러나라는 암시(暗示)나 다름없는 것
이었다.
구양철산이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불취광개는 허우적대듯 몸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에고고고~ 늙으니까 몸이 예전 같지 않단 말이지.”
불취광개는 주먹으로 허리를 두들기고, 오죽(烏竹)으로 만들어진
타구봉(打狗棒)을 바닥에 짚으며 엄살을 피웠다.
그가 몸을 완전히 다 일으켜 세우자, 남궁세민이 불취광개의 앞쪽
으로 다가서며 포권을 취했다. 허리까지 깊숙이 숙였으니 극상(極
上)의 예를 갖추었다 할 수 있었다.
“강호말학 남궁세민이 개방의 탁노선배님을 뵈옵니다.”
내상(內傷)을 고통이 느껴질 것이 분명한데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
니 명가(名家)의 후손다운 태도였다. 무엇보다 노개의 우스꽝스러운
태도에 현혹되지 않고, 한눈에 신분을 파악했다는 것은 그의 침착하
고 날카로운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막연히 노개의 신분을 짐작하던 팽지호, 모용자매의 얼굴에 놀라
움이 떠올랐다. 음성에 실린 내력에 고수일거라 생각을 했지만 설마
하니 개방의 태상장로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한눈에 자신을 알아본 것에 기뻤던 것인지 불취광개는 경망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크헤헤헬, 네가 옥면신룡(玉面神龍)이라 불리는 아이냐? 과연 잘
생겼구나.”
“감당할 수 없는 허명입니다.”
불취광개와 남궁세민의 행동은 마치 구양철산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했다.
백의탈혼이라 불린 이후로 처음 받아보는 무시.
그럼에도 구양철산은 인상만을 찌푸린 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
다. 눈앞의 거지는 교내에서도 상대할 자가 극히 적은 무림의 원로
였다. 게다가 불취광개의 이해할 수 없는 호의(好意)는 더욱 구양철
산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크헐헐. 그래, 그래. 무릇 겸손할 줄 알아야 영웅이 되는 법이지.
너는 팽가에서 온 것이냐?”
불취광개의 시선이 팽지호에게 향했다.
“팽지호가 태상장로님께 인사 올립니다.”
불취광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른 자세로 예를 갖추는 팽지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흐뭇함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소녀는 모용경이랍니다.”
“경아! 탁노선배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아이가 워낙...”
모용경이 불쑥 나서며, 격의 없이 불취광계에게 인사를 건네자 모
용선이 당황하며 말했다.
“클클클, 무례는 무슨? 네가 모용극(慕容極)의 둘째 손녀로구나.”
불취광개가 나름대로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모용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용경은 그것 보라는 듯 모용선을 향해 혀를 낼름 내
밀었다.
“그리고 너는…….”
불취광개는 느릿하게 모용선을 바라보았다.
“소녀 모용선이 개방의 어르신께 문안드리옵니다. 할아버님께 말
씀 많이 들었습니다.”
“켈켈, 늙은 비렁뱅이 욕을 많이 했나보군.”
“천만에 말씀입니다. 할아버님께서는…….”
“그나저나 어쩌자고 너희들끼리 먼 길을 나선 것이냐? 게다가 탈
혼수를 상대로 싸움질이라니?”
불취광개가 손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 모용선의 말을 자른 것이었
으나 모용선의 얼굴에서는 불쾌한 심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불취광개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마교의 개입니다. 강호의 정의를 위해 저희들이…….”
“클클클……. 그랬구나. 그랬어.”
또다시 남궁세민의 말을 잘라먹는 불취광개였다.
그제야 불취광개의 고개가 느릿하게 구양철산 쪽으로 돌아갔다.
진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눈.
그 흐릿한 시선 뒤에 감추어진 정기어린 안광(眼光)에 구양철산은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딱히 내력을 뿜어내지도, 살기를 드러내지도 않았음에도 이토록
자신을 위축시키다니.
불취광개의 무공이 신화지경(神化之境)에 이르렀다는 것은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다.
“어린 아해들에게 무지막지한 손속을 쓰는 수치를 모르는 아이야.
너는 또 왜 이 아해들과 맞붙어 싸우는 것인고?”
다짜고짜 던져진 하대.
그럼에도 구양철산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상대방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기도 했고, 일단 자신의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이다.
“…….”
“쯧쯧……. 뻣뻣하기는……. 그러니 늘상 그 모양이지.”
“……!”
구양철산의 시선은 조심스레 불취광개의 얼굴을 살폈다.
과연 그가 말하는 바가 자신이 받아들이는 그것과 같은지 알아내
기 위함이었다.
“노선배님, 저자가 마교의 백의탈혼입니다.”
“클클, 그래 수치를 모르는 녀석이지.”
불취광개는 마치 장난을 치듯 남궁세민의 말을 흘려버리고, 허리
춤에 있던 호로병의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남궁세민은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켜야만 했다. 자신이 말
한 뜻을 모를 불취광개가 아니었다. 마교의 교도를 보고 그대로 놓
아두는 것은 정도의 협사가 행할 바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백의탈
혼을 죽여 강호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눈
앞의 거지는 자신의 조부조차 고개를 숙이는 원로중의 원로.
감히 그의 행사에 감 놔라, 대추 놔라하며 따지고 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의구심.
그리 생각해선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
는 무엇이 남궁세민을 흥분케 했다.
정도의 노고수라 하나 불취광개는 구대문파 중 하나인 개방의 소
속.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한 무림맹과 구대문파의 드러나지 않은 갈
등에 생각이 닿은 것이다.
모래알 같은 구대문파의 신진고수들이 최근에 들어 마교와 맞서
세운 공적은 전무하다 할 정도였다. 그런데 오대세가의 후예들이 큰
공적을 세운다면...?
정도의 기둥이라는 구대문파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냐는 강호인
들의 비난이 더 심화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구대문파의
원로인 불취광개가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스스로의 추측과 결론을 세운 남궁세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오대세가의 후예들이 강호에 명성이 높은 백의탈혼과 맞선 것이
못마땅한 것이라면, 자신이라도 수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스로 총명함을 자부하는 남궁세민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온갖 사악한 행동으로 강호정의를 어지럽히는 마교
의 주구지요. 종교를 빙자해 선량한 사람을 악의 수렁으로 끌어들이
는 자중 하나입니다.”
남궁세민의 음성이 은근히 높아졌다. 이는 불취광개에게 들으라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곁눈질로 보는 사람은 구양철산이
었다.
예상대로 구양철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
한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남궁세민이 노린 것은 구양철산을 향한 도발.
불취광개가 사태를 얼버무리려 한다 해도, 구양철산이 덤벼든다면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궁세민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혹세무민하여 난세(亂世)를 조장하는 악의 무리가 당당히 백주
(白晝)에 활보한다면 강호인들이 저희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
다.”
이번에는 불취광개의 잿빛 눈썹도 움직였다.
남궁세민은 맹랑하게도 명분을 빌어 불취광개까지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흥! 어린놈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결국 구양철산의 노갈이 터져 나왔다.
비록 자신이 불취광개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하더라도, 교를 위해
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신도의 자세. 그는 이성적 판단 이전
에 종교적인 신념(信念)과 교리(敎理)에 충실해야 하는 신도였던 것
이다.
구양철산의 일갈에 불취광개의 눈가에 잡힌 쪼글쪼글한 주름이
깊어졌다. 그리고 헝클어진 수염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작은 한숨.
“방자(放恣)한 네 놈을 징계하여 본교(本敎)의 정의로움을 보여주
겠다.”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구양철산을 보며 남궁세민의 눈이 가늘어
지고 입가에는 흐린 미소가 떠올랐다. 모든 일이 뜻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자신을 비롯한 오대세가의 후손이 마교의 중진이나 다름없는 백
의탈혼과 맞서고, 불취광개의 도움을 받아 악적(惡賊)을 처치했다고
알려질 것이다. 불취광개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백의탈혼 처단
은 근래에 보기 드문 공적(功績). 시작과 결과를 중시하는 무림의
생리로 미루어 자신과 가문의 위명이 또 한층 높아질 게 분명했다.
“자리를 피하게, 공형제(孔兄弟).”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어버린 불취광개와의 일전(一戰).
구양철산이 뒤쪽에 서 있는 백의의 사내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교사(敎士)님.”
공형제라 불린 사내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대꾸했다. 한차례 흉험
한 싸움을 경험한 터라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교도라 하나 오대세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 행해지는 교에 대한 박해(迫害)가 오대세가를 주축
으로 한 무림맹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오
대세가의 후예들이 눈앞에 있고, 그들조차 공경(恭敬)해 마지않는
괴이한 차림의 늙은 거지가 있었다.
믿고 있던 구양철산의 표정 역시 어둡기만 하다.
자신에게 피하라함은 이미 이 싸움에서 이길 승산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자리를 지키겠다 대꾸하였지만 그의 눈에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
이지 않았다.
공가 사내의 떨리는 음성을 들은 구양철산의 입에서 다시금 나직
한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소위 정도라 불리는 자들과의 오랜 시간
싸워오는 동안 저리 말하는 신도들을 수없이 봐 왔다. 음성에서 확
고한 신앙을 느낄 수 없는 자들은 대부분이 변절한다. 아마도 제대
로 싸움이 벌어지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도주하리라.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교도들의 신앙은 굳고
단단하기가 철벽(鐵壁)과도 같아 어떠한 일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설사 목숨을 위협 받고, 극심한 고문을 받는다 해도 교의 명예에 누
가 될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공가 사내와 같은 신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교의 내분 때문이었다. 안정되지 않은 교단은 신도들이
교에 가지는 신뢰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심마저.
지금에 와서 그를 나무랄 수도 없는 입장.
구양철산은 자신이라도 교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어야겠다
는 의지에 불타올랐다.
소맷자락이 부풀어 오르고, 경력이 양수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지
닌바 모든 공력을 실어 탈혼수를 펼쳐내는 것이다.
단순히 무공 자체만으로 탈혼수가 강호의 어떤 무공에 떨어질 리
는 없었다. 다만 가진 공력과 무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
그렇다 해도 구양철산은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공력을 모으고 있음에도 불취광개는 아무런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정화(淨火)의 의(意)를 몸소 실천하리!”
탈혼수의 만변의 묘를 담고 있는 장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구양철
산의 손에서 펼쳐지는 탈혼수에서는 일체의 변화를 찾을 수 없었다.
탈호수 최후의 절초 일수섭혼(一手攝魂)이 펼쳐진 것이다.
“좋구나!”
불취광개의 한마디.
그는 진심으로 탈혼수의 절초에 대해 탄복했다. 얼핏 아무런 변화
도 보이지 않는 일수섭혼의 진정한 묘를 본 것이다.
변화의 극에 달하고자 하는 무변(無變) 변(變).
구양철산의 깨달음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불취광개라 할지라도
쉬이 상대치 못했을 것이다.
이해하고 느끼긴 했지만 확연치 않은 무공에 대한 깨달음. 그것은
미련이 되었고 구양철산은 일수섭혼의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
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손끝은 끊임없이 불취광개의 전신요혈을 노
렸으니 이미 초식에 감추어야할 변화를 드러낸 것. 무변의 변을 추
구하는 일수섭혼의 진정한 묘가 살아나지 못한 것이다.
구양철산의 공격을 받는 불취광개의 발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
니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그가 펼치는 신법은 취팔선보(醉八仙
步)였다. 일결제자에서 방주에 이르기까지 무공을 익힌 개방의 방도
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 이하의 신법. 그러나 불취광개는 취팔
선보만으로 강호일절이라는 탈혼수의 공격범위에서 가볍게 벗어나
고 있었다. 같은 무공이라도 누가 펼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는
무학의 평범한 진리를 몸소 보여준 것이다.
구양철산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최
고의 절초를 펼쳐내었으니 예서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내재된
변화는 드러난 변화를 부르고 우장이 뒤집어져 하늘을 향하더니 뱀
처럼 영활하게 불취광개의 신형을 쫓았다.
이번에도 불취광개는 반격치 아니하고 보법을 밟아 구양철산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구양철산의 얼굴에는 땀과 절망만이 가득해졌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지는 이
미 오래였다.
이십여 년을 고련해온 탈혼수.
천하의 절기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공이었기에 자부심이 없었다
할 수 없었다. 그런 탈혼수를 극성으로 전개하였음에도 상대의 옷깃
조차 스쳐보지 못하고 있었다. 패배에 대한 좌절보다 스스로의 부족
함에 대한 자괴감이 더욱 그를 괴롭혔다.
구양철산의 안광이 불을 뿜고, 그의 양장이 가슴에 모였다 앞으로
내질러졌다. 전신의 공력을 격발하듯 분출하고자 한 것이다. 실전에
서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한 벽공장(劈空掌)이었다.
구양철산의 양장에 휘몰아치는 진기의 소용돌이.
이어 일곱 개의 화려한 장영이 허공에 떠오르며, 막대한 장력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일곱 개의 장영 중 벽공장력을 쏟아낸 것은 단 두개.
구양철산이 탈혼수를 절정까지 익혔다면 허공에 피어오른 일곱
개의 장영 모두가 막대무비한 장력을 쏟아 냈을 것이다.
불취광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허공을 격해 밀려오는 장력의 속도와 위력을 생각해 볼 때 더 이
상 피하기만 할 수는 없는 상황.
그의 좌장이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내밀어졌다.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 중 항룡유회(亢龍有悔).
개방을 대표하는 절기가 불취광개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위맹하기 이를 데 없는 두개의 장력이 허공에서 얽혔다.
퍼억!
진기의 부딪힘이 만들어내는 격한 파열음이 주루를 진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쏘아진 활처럼 뒤로 튕겨나가는 구양철산의 신형.
위맹한 초식만으로 가득한 강룡십팔장 중 가장 부드럽다는 항룡
유회의 장력이었지만 그가 감당하긴 힘들었던 것이다.
막대한 충격을 입고도 정신을 잃지 않은 구양철산은 우측 다리를
뒤로 내밀어 벽을 딪어 신형을 세웠다.
울컥 입술을 밀고 튀어 나오는 선혈(鮮血).
단 한번의 충돌에 작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구양철산이 풀려버린 다리에 힘을 주어 신형을 바로잡을 때 들리
는 난데없는 굉음.
우당당탕!
중인의 시선이 구양철산과 불취광개에 집중되었을 때, 몰래 주루
를 빠져나가던 백의사내가 주루로 굴러들어오며 탁자와 함께 나뒹
구는 소리였다.
‘대체 누가?’
공가 사내가 주루로 일부러 다시 굴러 들어올리는 없을 터.
주루 안쪽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바깥쪽에서 안쪽을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사내.
그 중 한 사내를 보는 모용경의 눈에 반가움이 넘쳐흘렀다. 백의
탈수 출현 이전까지 자신의 시선을 잡아끌던 준미한 공자가 아직까
지 머물러 있던 것이다.
준미한 사내의 붉은 입술이 비틀리듯 벌어졌다.
“교적(敎籍)에 이름을 올린 자가 명예를 저버리다니……!”
나직한 음성이었다.
갑작스레 적막에 잠겼던 주루 안이라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
는 없었다.
구양철산의 눈이 이채가 서렸다.
방금 전 자신을 스치듯 지나 주루를 나선 자였다.
얼핏 꽤나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무심코 스쳤던 자가
일월신교의 교도였을 줄이야.
구양철산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저토록 준미한 자가 교내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놀란 것은 구양철산 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문공자의 성격이 더럽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살아보겠다고 도주하는 자를 발로 차 넣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송
기무의 놀라움도 작다할 수 없었다.
“어느 교구(敎區)의 형제인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구양철산이 물었다. 한가롭게 인사를 나눌
처지는 아니었지만, 상황으로 미루어 불취광개가 불시에 덤벼들 리
는 없었기 때문이다.
문공자의 입가에 고소(苦笑)가 피어올랐다.
원치 않았던 일.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문공자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살피던 송기무는 문공자가 마교의
일원(一員)이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성격이 괴팍
하고, 포악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사악한 무리의
진원이라는 마교의 교도였을 줄이야. 마교라 함은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흉악한 무리가 아니던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매만졌다. 지금껏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해와 달이 정화의 기운을 보태어 암천을 밝히니 이가 곧 법이니
라.”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구양철산의 질문에 대한 대꾸였다.
그러나 구양철산의 호목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준미한 청년이 암송한 구절은 총교단에서 파견된 교도가 교구에
나와 꺼내는 첫마디.
다른 이는 알지 못할지라도 교구를 책임지는 교사인 구양철산이
모를 리 없었다. 청년이 교단에서 나왔다 말하는 것임을.
객지에서 교단에서 파견된 형제를 만나는 것은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양철산은 한줄기 미소조차 얼굴에 떠 올릴 수
없었다.
자신 한 몸조차 건사하기 힘든 상황.
이제 약관을 넘어선 청년까지 보호해 줄 처지가 아니었다.
‘차라리 나서지 말지…….’
아무리 교단에서 나왔다하더라도 청년의 나이로 미루어 지금의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리 없었다. 독실한 신앙이 청년을 움직였음을
짐작치 못함은 아니었으나, 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난처하
게 만든 행동일 뿐이었다.
“클클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귀(小鬼)까지 합세를 했으니
이를 어쩌누?”
불취광개의 말에 문공자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귀가 누구를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오호라! 분수도 모르고 추접한 눈빛을 던지던 놈과 함께 있던
자로군. 네놈도 마교의 주구인 게냐?”
남궁세민의 외침이었다.
실상 불취광개가 있는 자리에서 그가 함부로 나설 배분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대세가, 그중 자신과 가문의 명성을 알리기 위해
서는 이쯤에서 중인의 시선을 한번 끌어줄 필요가 있다 생각한 것
이다.
“주둥아리만 살은 놈이군.”
문공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직한 한마디.
그 나직한 음성은 여지없이 남궁세민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남중세민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감히!”
얼핏 보아도 계집처럼 가냘픈 몸을 가진 자다.
태양혈이 튀어 나오지 않을 것으로 미루어 내공을 익힌 흔적도
없다.
게다가 전설 속 반로환동의 고수가 아니라면, 자신과 비슷한 또
래.
그간 자신이 만나왔던 소문만 요란한 마교도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 남궁세민은 검을 치켜세웠다.
문공자는 턱을 치켜든 채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문득 남궁세민은 그가 무공을 모르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주루 안으로 굴어 들어온 자는?
무공이 전무한 자가 자신보다 허우대가 큰 백의 사내를 저렇듯
패대기칠 수는 없는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남궁세민의 신형이
쏘아지듯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구양철산의 좌수가 앞으로 향했다. 남궁세민
이 총교단에서 나온 청년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남궁철산을 향해 날아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방향으로 미루어 불취광개의 수단이 분명했다.
구양철산의 얼굴에 난색(難色)이 떠올랐다. 불취광개의 공격을 무
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쾌속무비하게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것은 깨알만한 검은 환(丸)이
었다.
‘암기?!’
구양철산은 남궁세민을 향해 내밀던 손을 회수하여 허공에 장영
을 만들어 냈다.
불취광개가 던져낸 흑환(黑丸)의 숫자는 네 개.
소위 말하는 명문 정파의 수장이라는 자가 독(毒)을 사용할 리는
없었다. 구양철산은 진기를 잔뜩 손에 모아 하나하나 조심스레 환을
받아 내었다.
불취광개의 내력이 한껏 실렸을 터이니 그 위력이 대단할 것임을
의심치 않으며.
네 개의 환을 모두 받아낸 구양철산의 얼굴에는 진한 이채가 피
어올랐다.
환의 속도가 쾌속하긴 했지만 그에 비해 실린 경력이 매우 미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손안에서 말랑거리는 흑환은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황급히 환을 받아낸 구양철산의 시선이 날카롭게 불취광개에게
향한 후에야 흑환의 비밀이 밝혀졌다.
콧구멍을 있는 대로 벌리고 검지로 코를 후벼 파는 불취광개.
이어지는 동작은 파낸 코딱지를 둥글게 뭉치는 것이었다.
구양철산의 이마에서 지렁이 같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고작 코딱지에 위협을 느끼고 교의 형제를 돕지 못했단 말인가?
불취광개의 어이없는 행동에 분개했지만 그의 시선은 황급히 총
교단에서 나온 형제에게 향했다. 어쩌면 남궁세민의 일수조차 감당
치 못하고 벌써 죽임을 당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윽고 구양철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남궁세민의 검이 벌써 수차례 휘둘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총교단에
서 온 청년은 여유 있게 그의 검을 피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에 걸쳐 남궁세민의 검을 피해낸 문공자의 손이 기묘한 각
도로 뻗어져 남궁세민의 손을 잡아갔다.
속도와 날카로움으로 미루어 결코 범상치 않은 금나(擒拿)의 수법
이었다.
남궁세민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손목을 회전해 자신을 잡아오
는 문공자의 손을 베어갔다.
비록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상대의 무공이 몹시 뛰어난 것
에 놀라기는 했지만 남궁세민은 곧 침착함을 회복했다. 상대가 빠른
신법(身法)으로 자신의 검초를 피해내고 있긴 했지만 승기를 잡고
있는 것은 자신. 이런 단순한 반격에 흔들릴 그가 아니었다.
맨손으로 검날을 잡을 수는 없는 법.
상대는 손을 회수하고 방어를 준비하거나 다음 공격을 쏟아낼 것
이다.
남궁세민은 진기의 흐름을 끊기지 않게 하여 회전하는 기세 그대
로 상대의 어깨를 벨 작정이었다.
바로 창궁무애검법의 절초!
그 순간 문공자의 손이 순식간에 아홉 개로 늘어나는 듯 보이더
니 자신의 검은 허공을 베고 헛되이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구양철산이 펼쳐 내었던 탈혼수 중 구룡탈혼의 수법이 문공자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남궁세민이 검을 뻗어냈다고는 하나 아홉 개의 장영 중 하나만을
없애고 뒤늦게 발출된 공세.
검이 닿기도 전에 장력에 부상을 당할 처지였다.
상대의 나이를 보고 무시하는 마음과 승기를 잡은 데서 비롯된
방심이 불러온 최악의 결과였다.
쇠도 부순다는 탈혼수는 남은 여덟 개의 장영을 하나로 합쳐 남
궁세민의 가슴으로 향했다.
위기일발의 순간!
“헛!”
명가의 후예라는 체통도 잊은 채 남궁세민의 입에서 헛바람이 튀
어 나왔다.
탈혼수에 격증되려는 그 순간 자신의 몸이 허공에 떠 뒤로 날았
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탈혼수를 피해내긴 했지만 남궁세민은 뒤로 당겨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어느새 불취광개가 남궁세민의 뒤로 다가와 그의 옷 덜미를 낚아
채 뒤쪽으로 던진 것이다.
남궁세민의 얼굴이 수치로 인해 시뻘겋게 물들었다.
“클클클……. 소귀의 손속이 꽤나 맵구나.”
불취광개의 웃음소리에 문공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쌍장
을 뻗어냈다.
자신의 싸움을 방해한 것에 대한 질책이라도 하듯이.
마치 나선을 그리듯 뻗어지는 쌍장에서는 위맹한 경력이 뿜어져
나왔다.
“좋구나.”
다시금 환상처럼 펼쳐지는 불취광개의 취팔선보.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며 그의 신형은 어느새 문공자의 장세를 벗
어나고 있었다.
문공자는 포기하지 않고 쌍장을 교차 시켜가며 맹렬한 공세를 펼
쳐냈다.
초식과 초식이 연결되고 변화가 변화를 보완하는 놀라운 장법이
었다. 탈혼수가 위맹함과 변화로 천하절기 중 하나로 꼽히는데 부족
함이 없건만, 문공자의 장법에 내포된 변화는 탈혼수를 능가하는 것
처럼 보였다.
“난화폭염수(亂花暴炎手)!”
불취광개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문공자가 펼쳐내는 장법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갑작스레 문공자가 장법을 거두며 턱을 치켜들었다.
“흥! 이처럼 냉기(冷氣)어린 난화폭염수를 보았소?”
불취광개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그러고 보니 열양진기(熱陽眞氣)가 없군.”
문공자의 얼굴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켈켈, 소귀야. 이 무공의 이름이 뭐냐?”
“…….”
“튕기지 말고 가르쳐주지 그러냐?”
불취광개의 얼굴에는 비굴한 기색까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중
인들, 특히 오대세가의 후예들은 어이가 없어했다. 어찌 무공초식의
이름 하나를 알기 위해 개방의 태상장로라는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흥! 스스로 알아내도록 하시오. 명색이 개방의 장로가……!”
“켈켈……. 알아내려면 못 알아 낼 것도 없지만, 그러려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나? 그러니 지금 알려 주게.”
불취광개가 아예 두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의 지병과도 같은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원하는 답을 알아내기 전까지 죽는 한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불취광개의 호기심이었다. 대부분 그런
소문을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터였다.
문공자의 주사 빛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우리를 보내준다면 알려주겠소.”
“켈켈켈, 생긴 대로 영악한 소귀구나. 오냐, 내 보내주마!”
“어르신!”
남궁세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찌 무공의 이름 하
나를 듣기 위해 악적을 놓아준단 말인가?
무공명이 궁금하다면 일단 제압을 해 놓고 털어놓게 해도 충분할
터였다. 남궁세민은 불취광개가 작정을 하고 오대세가의 후예들이
공을 세우는 것을 막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불취광개
를 부르는 그의 음성에는 불편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나 불취광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문공자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소귀야, 이제 말해라. 아해들은 내가 잘 타이르마.”
“우리라 함은 저기 구양형제도 포함되는 것이오!”
문공자가 불취광개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켈켈, 알아. 그러니 어서 초식 이름이나 말해라.”
문공자는 불취광개의 눈을 계속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
음술(傳音術)을 시행하는 것이다.
“....!”
불취광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도 잠시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안색을 회복한 그의 눈이 좁혀졌다.
“흠. 말년에 창안한 무공이라……. 대단한 것을 만들어 냈군. 좋
아, 아주 좋은 무공이야. 그나저나 소귀야! 너는 그의 제자인 거
냐?”
“흥! 어찌 그가 감히 내 스승이 될 수 있겠소?”
불취광개의 미간에 크게 찌푸려졌다.
십만 방도를 자랑하는 개방이었다. 수많은 기인이사들이 즐비하다
지만 정작 강호에서 개방을 인정하는 이유는 방대한 인원을 바탕으
로 한 정보력 때문이었다. 세상천지 널린 것이 거지였기에 개방에서
수집하는 정보의 양은 막대했다.
그런 개방의 태상장로인 불취광개였음에도 눈앞 꼬맹이의 정체가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개방의 이목을 벗어난 인물의 등장이란, 의
미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불취광개가 개방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닐
지라도 마교의 젊은 인물 중 이토록 뛰어난 무공을 구사하는 자가
있다면 자신이 모를 리 없을 터였다.
“그럼 우리들은 이만 가 보겠소. 구양교사, 갑시다!”
구양철산은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조차 힘들었
다. 그러나 총교단에서 나온 형제가 자신이 짐작한 것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자신이 지금 여기서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백의사내를 힐
끗 쳐다본 후 주루를 나섰다.
남궁세민이 발끈하여 나서려하다 불취광개의 노기어린 시선을 받
고 경동하지 못했다. 아무리 문파가 다르다고 하나 강호의 배분을
생각해 불취광개가 이미 내뱉은 말을 자신이 번복하기엔 무리가 있
었다. 자칫 남궁세가, 아니 무림맹과 개방과의 예기치 못한 문제를
만들 여지까지 있는 것이다. 그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문공자 일행이 주루를 벗어나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불취광개
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처음에는 너희와 함께 유람을 즐겨보려 했으나, 급한 볼 일이 생
겨 이 거렁뱅이는 가 봐야겠다. 강호에는 이상한 일들이 많으니 너
무 혈기를 내세워 나서지 말고 어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
을 거야.”
말을 마친 불취광개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늙은 비렁뱅이.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남궁세민의 혼잣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