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령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번서가 새로운 노예가 되기 직전인 예하랑의 피를 증류하는 작업을 어느정도 마쳤을 때 였다. 대략 사시(12~14시) 쯤이었기 때문에, 번서는 간식을 겸한 육포를 먹으며 조교삼아 당여월을 희롱하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양순해진 이 새로운 노예의 귀여움도 그가 먼저 지배하는데 성공한 다른 애완노예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그녀를 조교하는 일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조교라 해도 별것은 아니다. 소변을 보는 것을 허락해 준 다음 당여월의 에쁜 가슴을 써서 자신의 발을 문지르게 하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발 뿐 아니라 다른 장소도 비비어 문지르게 하지만, 일단은 발부터다. 그 일을 하는 도중에 국무령이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다.
이즈음 번서는 여러가지 편리한 술법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 전서구도 그중 하나였다. 미리 주문을 써 둔 종이를 접으면 새가 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종이의 뒷면에는 미리 먹물이 담긴 뚜껑을 가진 휴대용 세필로 용건을 적는다. 도착한 새가 다시 종이로 변하면 주문 글자는 사라지고 후에 적은 글만이 남는 것이다. 이러면 환술을 쓸줄 모르는 번서의 노예들도 빠르고 편리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다.
" 상가집에 가족이 아닌 수상한 문사가 들어와 이틀째 묵고 있다는군. "
" 환희성교의 잔당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들은 보라색 수실 장식으로 서로를 구분했었습니다. 확인해 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
전서구를 다시 보내기 보다, 번서는 직접 행동하기로 했다. 당여월의 말대로라면 환희성교는 번서와 비슷하게 환술과 독(그리고 아마도 최음제)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일 것이고, 그의 노예들은 환술에는 저항이 있으나 아직 독이나 춘약(미약)에 대한 대비는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독 된다면 그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 저자는 남생(襤生)인데요?... 환희성교가 아니라 쾌락당이었던 자입니다. "
변장(당여월은 남장)을 하고 상가집을 방문한 번서 일행이 마당 한켠의 평상 위에 자리를 잡았을 때, 당여월은 상주 옆에 앉아 있던 문사를 즉시 알아보았다. 그가 좀 더 캐 묻자 원래는 비적짓을 하던 자였지만 쾌락당에 투신했던 자로, 무공 실력은 보잘것 없지만 사람됨이 비열하고 손속이 잔인해서 주로 인근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뜯는 일을 했다는 정보가 추가로 제공되었다.
" 환희성교랑은 연관이 없고? "
" 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독보다는 고문 전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쾌락당이 망하고 나서 살길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
하지만 번서가 한눈에 알아본 바가 있듯이, 노인을 죽음으로 몬 것은 상당히 강력한 지효성 독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앞뒤 정황을 끼워맞춰 보려는데, 번서에게 제공된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막 국을 들이키려던 당여월의 손목을 붙잡았다.
" 헛!... 맹세코 밑장 빼기 같은건 안했어요, 주인님. "
" 농담은 그쯤해 두고, 먹지 마라. 국물에 독이 들어 있다. "
전음으로 당여월을 멈춘 다음 화장실을 핑계로 일어선 번서는 집의 뒤편을 돌아 부엌 가까이에 몸을 숨기고 안을 엿보았다. 지극히 평범한 촌 아낙들이 지극히 평범한 방식으로 음식을 요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서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음식 재료들도 이상이 없어 보였다. 드나드는 음식상에서도 오직 국물이 있는 음식에만 독이 들어 있어 보였기 때문에, 마침내 번서는 물에 독이 들어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마을사람들 모두가 물에 독이 들어간 사실을 모르나보군...
" 실례합니다만, 물을 어디서 길어 오시는지요? "
음식을 나눠주고 있던 아낙에게 물으니 그녀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길어온다는 답을 해 주었다. 그길로 번서는 상가집을 나와 마을 한가운데 있는 공지로 향했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올린 그는 맛가 냄새를 통해 물에 독이 풀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심각한데, 누군가 우물을 오염시켰군. 가열하면 독성이 약해지겠지만 생으로 마시면 위험한 수준이야. 아마도 죽은 사람들은 우물물을 직접 들이켰나 보군. "
"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일까요?... "
" 알아내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지. "
마을사람들의 급사와 전직 쾌락당 관계자의 연관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둘이 한번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길로 상가집으로 돌아간 번서는 측간을 가려고 자리를 옮긴 남생을 화장실 앞에서 붙잡았다.
" 이보시오, 나좀 봅시다. "
" 무슨... 으헉!... "
팍!...
대사막 인근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당여월이 내공까지 실어 날린 칼자루의 일격이 명치에 박혔는데도 견뎌낸다면, 그자는 호체기공의 신일 것이다. 헛바람을 흘리며 휘청거리는 남생의 뒷덜미를 붙잡았을 때 그는 이미 졸도해 있었다. 기절한 그자를 담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국무령에게 짐짝 던지듯이 넘긴 번서는 곧이어 자신도 당여월과 함께 담을 뛰어넘었다. 그길로 가까운 숲으로 간 세명은 으슥한 바위 아래 자리를 잡고 남생을 깨웠다.
" 헛...당... 당여월?... "
" 그래, 오랜만이다, 남생. "
이제 번서의 애완 노예가 되어 코뚜레를 꿰고 있는 터라 면사 밖으로 눈만 내놓고 있었지만, 쾌락당 출신 답게 남생은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와 검집을 통해 당여월을 한번에 알아 보았다. 그녀는 검술 솜씨 만큼이나 손속도 모질기로 이름났던데다 남생 자신도 당여월이 축출된 사건에도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서, 곧바로 저승사자를 만난 듯이 공포에 질렷다.
" 죽...죽은줄 알았는데. "
" 이렇게 멀쩡하게 잘 살아 있지. 내게 하고싶은 말이 있을 텐데? "
" 그런건 없... 으헉!... "
옆구리로 날아든 당여월의 오른발 끝이 두치 넘는 깊이로 파고들면서, 남생의 허리가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위액을 게워내며 기침을 하는 남생의 어께 위로 다시 옆구리를 후린 오른발을 올려서 쇄골을 제압한 당여월은 왼손에 들고 있던 검집을 써서 그의 무릎을 지그시 눌렀다. 그 재빠르고 단호한 손속에는 번서도 놀랐을 정도다.
" 으아아아아!... 그, 그만, 말할게, 말 한다고!... "
" 진작에 그랬으면 필요없는 고통을 당하진 않았겠지? "
" 으으... 실은... "
번서가 [독]이라고 판별했던 것은 광물의 일종이었다. 혈석(血石)이라 불리우는 반투명한 붉은색 광물은 황국의 특산으로, 단단한 결정을 이루는 것은 보석으로써 가치가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갈아서 정제하면 이상적인 유약의 재료가 된다. 이 유약이란 도자기를 굽기 전에 발라서 광택을 내고 방수처리를 하는 중요한 약품으로 그 가치가 몹시 높다. 다만 이 혈석을 정제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물이 필요하고, 활석을 정제한 물은 독성을 띄게 된다. 섭취하면 호홉곤란이나 심각한 마비 증상을 수반하며, 장기간 섭취하면 심각한 병증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자산의 중턱에는 이 혈석 광맥이 있었던 것이다. 군수물자로 중요한 철은 말할것도 없고, 금은을 포함한 모든 광물을 채굴하기 위해서는 관부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허가를 받으려면 광물의 종류에 따라 세금을 내야 하고, 시시콜콜 조사도 받아야 했다. 또한 지금같이 피해가 예상되는 지역이 있다면 그 지역에 대한 이주나 보상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돈 많이 드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남생은 이 광맥을 밀채(謐采)하는 무리에 속한 정탐꾼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상가집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던 까닭은 마을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한 감시겸 협박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환희성교의 무리로 가장한 것도 그런 협박용이었다.
"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수는 없지. "
" 으으으... 제발 살려줍쇼... "
" 죽이진 않겟다. 하지만 너는 지금 네 무리에게 돌아가서 내 말을 전해라. 내일 아침까지 광산을 비우고 모두 퇴거하지 않으면 먼저 죽은자들을 부러워하게 될것이라고 말이다. "
남생이 불알에서 요령소리가 울릴 정도로 빠른 뜀박질로 도망치는 것을 지켜보며, 번서는 국무령을 시켜 그녀석의 뒤를 밟도록 했다.
" 그들이 내일까지 광산을 비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
" 두고 보는 것이다. 내 말에 놀라 밀채를 그만두고 도망칠 정도의 무리라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때는 마음대로 처분해도 괜찮은 무리라는 뜻이니 손에 인정을 두지 않아도 된다. "
말을 하면서 당여월 옆으로 다가간 번서는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 아아아... "
" 너조차도 기회를 얻었지. 그렇지 않느냐? "
언제나 그렇지만, 그녀의 주인님의 말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쾌감 때문에 몽롱한 상태에 빠져 입가로 한줄기 군침을 흘리며, 당여월은 정신없이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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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경의 병세가 호전되어 가는 동안, 내내 그녀의 간호를 맏았던 서봉과의 사이는 꽤 친밀해져 있었다. 서봉을 [언니] 라고 부르며 따르고 의지하는 경운경의 모습은 딱 그 나이 또래의 소녀로 되돌아 가 있었다.
" 이제 괜찮아진것 같군... 어디 좋은데 정착시키기만 하면 되겟어. "
경운경의 상세가 호전된 것을 확인한 번서가 선실로 돌아와 말하는 것을 들은 서봉은 번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녀도... 주인님의 애완 노예로 삼아 주시지 않으시나요? 이미 상공이라고 부르고 잘 따를 정도인데... "
" 그녀도 나도 황국의 권력에 의해 가족이 희생당한 피해자야. 동병상련하는 사이인 셈이다. 그런 처지에 있는 아직 나이도 차지 않은 소녀를 탐한다면, 그건 짐승 이하의 무언가일 뿐이지. "
그리고 아청법에도 걸릴테고.
마지막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서봉은 번서를 다시봤다는 듯한 눈치였다. 쓸데없는 오해를 했다는 죄목으로 잠깐 혼을 내 줄까 하다가 단념한 번서는, 그녀를 불침번 임무로 보내고 난 다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 목록을 정리해 보았다.
일전에 마왕성의 창고를 털어낸 덕분에, 번서의 재정상태는 제법 풍족해져 있었다. 금편 스무개가 든 돈궤는 몹시 무거웠지만 운반하느라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경도에서 최고로 호화로운 저택을 구입하거나 경도 최고의 기루를 드나들며 호사를 부린다 해도 몆년은 너끈히 지탱할 수 있었고, 평범하게 이대로 한세월 보낸다면 아마 삼대를 써도 다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외에도 자잘한 부수입들. 특히 예하랑이 몸에 걸치고 있던 패물들은 몹시 고급품이라 비싸게 받을 수 있었다.
돈을 버는 만큼이나 쓰는것 역시 중요하다. 경운경을 정착시키는 일도 돈을 값지게 쓰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합포 포구에 머무는 동안 번서는 그녀의 정착지를 고르기 위해 꽤 신경을 썼는데, 이 주변은 온통 산이라 장원이 들어서기에 적절한 땅도 아닌데다 나와 있는 매물도 없어서, 그는 강 건너편에 있는 가포(家浦)까지 가서 대리인을 세워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경운경의 상태를 자주 살펴보려면 되도록 포구에서 가깝고 사람이 자주 드나들어 비교적 안전하며 어떤 종류의 소출만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곳이어야만 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장소를 고르는 일이니만큼 그는 몹시 까다로웠다. 대리인이 보내 온 매물들의 상태가 적힌 서류들을 꼼꼼히 훝어보는 동안 해가 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날의 저녁식사 당번은 국무령이었지만, 그녀는 바깥 임무를 맏고 있었기에 당여월이 대신 했다. 경운경까지 데려와서 함게 식사를 하는 동안 번서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정착 계획에 대해 경운경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 저는 상공과 함게 하고 싶어요... "
" 고집을 피우는것은 좋지 않소 경 낭자. 내 여행은 윤숭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이건 위험한 정도가 아닐거요. 그리고 정말로 날 돕고 싶다면 안전한 곳에서 병을 이기고 경 낭자에게 알맞은 무공을 익혀 정순하게 한 다음의 일이지, 지금처럼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상태로 동행하고 싶다고 떼를 쓴다면 나를 돕는게 아니라 방해하는 셈이 되는 게요. "
구구절절히 옳은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다. 경운경은 풀이 죽었다. 하지만 번서는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을 알고 있었다.
" 내가 별일 없는 한 자주 경 낭자를 찾아서 안부를 확인할 것이오. "
" 정말이시죠 상공? "
두번을 더 확인해 오는 경운경에게 거듭 확언해 준 다음, 번서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그녀의 여자다운 수다를 들으며 즐겁게 식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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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교대를 위해 당여월을 보내고 난 지 반시진도 되지 않아서 국무령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하루종일 번서를 거의 보지 못해서 여러가지로 안달나 있던 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예로써의 그녀의 일과들을 점검해 주고 난 다음, 약간 아쉬워하는 그녀를 재웠다. 이는 서봉도 마찬가지로, 그날은 종이 인형 허수마비들을 대신 불침번으로 세우고 그녀를 일찍 재웠다. 내일 아침에 남생이 포하된 밀채꾼 무리들과 칼부림을 벌여야 할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경운경을 포함한 여자들이 모두 잠에 든 것을 확인한 다음, 번서도 운기를 하고 석매리와 갈천휘의 저작을 다시 한번 통독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은 눈부시다고 할만큼 날씨가 좋았다. 이른 아침 그를 깨운 것은 당여월이 보낸 전서구로, 거기에는 남생의 무리들이 퇴거할 기미가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인간에 대해 그리 높은 기대치를 가지지 않게 된 지가 오래인 번서는 실망하는 일 없이 그럴 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아침 식사의 준비를 위해 당여월을 불러 들였다.
노예들이 배설을 보이고 씻는 등의 일과를 끝마칠 동안 번서도 무장을 갖추었다. 경운경은 얌전히 배를 지키는 일을 맏았다. 또한 경운경에 대해서는, 그녀가 먹을 탕제를 미리 몆첩 달여놓은 다음, 늦어질지도 모르니 때가 되면 데워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노예들과 함께 배에서 내려 산을 향했다.
밀채를 하는 광산은 목책과 망루로 요새화되어 있었고, 경계가 몹시 삼엄했다. 그곳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계곡 맞은편 비탈에 있는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망원경으로 광산을 살핀 번서는 무장한 자의 수가 서른명은 족히 되는 것을 확인했다. 사냥꾼인지 총을 들고 있는 자도 두명 있었다. 이정도 인원이면 무공을 모른다 하더라도 위험할 수 있다. 좋은 도구와 효과적인 전술을 채택하고 지형의 이점에 기대면, 아무래도 무공만으로 불리함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할 수 없지.
시간은 많았다. 번서는 그대로 그 언덕에 자그마한 제단을 쌓고 주문을 외우며 하늘에 기원을 시작했다.
번서가 가진 안개의 술법은 두가지다. 시야를 차단할 뿐 아니라 행동을 제약할 정도로 끈적한 안개를 불러온다는 점에서는 두 술법의 효과가 같지만, 그 지속 시간 부터 차이가 난다. 주문만으로 불러오는 안개는 시전에 굉장한 집중력을 요구하는데다 기껏해야 반시진 정도만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단을 마련하고 하늘에 비는 기원제를 지내 불러오는 안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안개를 불러올 때 집중해야 한다는 점은 같지만, 주문을 읇고 제물을 태우는 의식을 치루는 정도에 따라 적게는 몆시진, 길게는 며칠이고 몆달이고 번서가 원하는 만큼 그 효과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발동되면 다시 제를 지내기 전까지 집중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 후자의 안개는 그것을 재료로 여러가지 다른 응용도 가능했는데, 그중에서도 번서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안개 속에서 갖가지 이매망량(?魅??: 도깨비와 요괴들을 총칭하는 말)을 불러내는 수법이었다. 다른 환술에서와는 달리, 이 이매망량은 실제의 안개를 재료로 [만든] 것이라 환상이 아니며, 때문에 당연하게도 실제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물론 피해를 받을수도 있지만, 공기나 다름없는 안개로 만들어진 것이니 흩어졌다 다시 뭉치면 그만이다.
" 솰라쏼라... "
번서의 주문이 이어지는 동안 광산의 입구로 안개가 짙게 깔렸고, 그 안개 속에서 반투명한 거대한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 으... 으아아 괴물이다!... "
쿠웅!...
" 히에에에!... "
쿠웅!...
콰지직!...
도깨비들이 광산 입구에 둘러친 목책을 두들겨 부수는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나무를 깎아 만든 기둥을 이용해 조잡하게 세운 망루가 차례로 안개 속으로 쓰러지는 광경이 번서의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쓰러진 목책 사이로 끈적한 안개가 스며들었고, 마침내 광산 내부까지 완전히 안개에 뒤덮였다. 도망치든 도깨비와 맞서든, 밀채꾼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그 안개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는 동안, 번서는 노예들과 편안히 앉아서 기다렸을 뿐이다.
노예들 조차 번서가 그런 대단한 술법을 쓰는것에 놀라고 두려워하는 동안, 상황이 대충 정리되었으리라 판단한 번서는 다시 주문을 외웠고, 안개는 서서히 물러갔다.
번서는 안개가 완전히 걷히기를 기다려 노예들을 데리고 광산으로 갔다. 드러난 폐허 속에 이리저리 흩어진 밀채꾼들의 시체는 모두 스물일곱 구. 치우는 일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시체들을 뒤져 쓸모있는 것들을 수거하고 모두 한데 모아 쌓아놓고 불에 태우는 동안, 피투성이가 된 생존자들이 노예들의 눈에 뜨여 번서 앞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너무 공포에 질린 나머지 광산의 수갱으로 뛰어든 덕에 다리가 부러지는 등 엄중한 부상을 입었지만, 덕분에 번서가 불러일으켰던 죽음의 안개에 덮쳐지는 꼴은 면한 자들이었다. 모두 세명. 그중에는 남생과 밀채꾼들의 장부 관리자도 있었다.
" 밀채를 했다면 물건을 사 주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겠지. 너희와 거래하는 자가 누구냐? "
" ... "
번서는 두번 묻지 않았다. 먼저 죽은 자들을 부러워 할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여월과 서봉이 나서서 생존자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동안, 광산 내부를 뒤지던 국무령이 거래 장부를 가지고 왔다.
우드드득!...
뿌득!...
" 아아악!..., 말, 말할테니 제발 그만!... "
" 나는 기회를 줬고, 너는 받지 않았어. 두번은 없다. 그리고 나는 산자가 죽은자를 부러워하게 될것이라 미리 경고했었지. "
포로들은 팔다리가 부러진 채 발가벗겨졌고, 아직 남아있는 방책 밖에 못박혔다. 그들은 태양과 바람에 노출되고 기아와 갈증에 시달리며 끔찍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는 형식의 처형을 당하게 될것이다. 번서는 그 실행을 노예들에게 일임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을 통해 더러운 일을 그녀들에게만 전담시키지 않는다는 사실도 몸소 입증해 보였다.
죽어가는 포로들의 신음성을 음악삼아 즐기며, 번서는 장부를 검토했다. 누구와 얼마를 거래했는지를 약자로 표시해 준 터라 당장 거래자들을 알기는 어려웠지만, 수완이 좋은 자가 있었는지 꽤 여러곳으로 혈석과 정제한 혈석 가루를 팔고 있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다.
번서가 밀채꾼 일당의 거래 정보를 원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는 지금도 거액을 가지고 있지만, 돈줄을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보석이 나오는 광산은 누구에게나 쓸만한 돈줄이다. 다만, 번서도 이 밀채꾼들 만큼이나 대놓고 나설 수 있을 만큼 떳떳한 신세가 아니니 밀채 자체는 유지한 채 그 방법만 바꿀 생각이었다.
그가 밀채를 하기로 작심했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채굴한 혈석의 판로를 찾는 일이었다. 또한 이제 밀채꾼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니, 광산에서 일할 사람도 필요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번서는 목책에 나무 못으로 손발을 못박힌 채 신음하던 남생을 끌고 약수골로 갔다. 무슨 변고인가 싶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을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 모든것은 이자가 포함된 밀채꾼들이 마을의 우물에 독을 풀어서 생긴 일입니다. "
모든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댓가로 남생에게는 분노한 마을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형태의 [빠른 죽음]이 주어졌다. 그리고 남생을 패죽인 마을사람들에게, 번서는 몆가지 제안을 했다. 밀채꾼이 사라져 광산에서 일할 사람도 없으니, 농한기에 마을 청년들이 광산에서 일해 주면 밀채로 얻은 이득을 마을 사람들과 나누겠다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관아는 내내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관아에 알려 광산을 폐쇄시키는 것 보다 이쪽이 더 매력적인 제안일 것이다. 촌장 이하 마을사람들 모두가 번서의 제안에 응한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보자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로 해서 번서는 그동안 내내 신경쓰이던 존재인 경운경이 정착할 장소도 정할 수 있었다.
약수골 남자 중에 광산에서 일할 수 있을 만한 연배를 가진 자는 모두 열명. 그중에 여섯명이 밀채에 자원했다. 인원수가 부족한 감은 있었지만 사업의 시작은 크게 벌이지 않는 편이 좋은 법이다. 번서는 그들을 데리고 광산을 치우고 목책을 재건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부서진 목책에 못박혀 있던 밀채꾼들도 마저 죽여서 태워 버리고, 광석을 정제한 물을 담을 큰 구덩이도 몆개나 파내고 김장할 때 쓰는 아홉말 들이 옹기를 시진에서 사와서 몆개나 묻었다.
이는 인근의 지하수에 독을 푸는 것이나 다름없는, 혈석 가루의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폐수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번서가 죽인 밀채꾼들은 광석을 정제한 물을 그대로 광산 수갱에 버렸다. 때문에 약수골의 우물이 오염되었던 것이다. 광석을 정제하고 나오는 폐수를 땅에 묻은 장독에 부어 넣고 해로운 것들을 침전시킨 다음 물만 빼서 버리면, 손이 좀 가기는 해도 마을의 지하수를 오염시킬 일은 없을 것이다. 자원한 장정들에게 그 이치를 설명해 주니 작업속도가 몆배는 빨라졌다.
광산의 준비가 되는 동안 밀채꾼들의 인원수와 숙련도를 감안해 예상 산출량을 계산해 낸 번서는, 그 예상액을 바탕으로 예전에 밀채꾼들과 거래하던 자들을 찾아 다시 계약을 시도했다. 암호로 되어 있었지만 장부에 거래 날짜와 장소가 기입되어 있어서 그들과 접선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종류의 물건은 필요한 사람이 찾아 오는 법이다.
세금이 붙지 않으니 시세보다 싸게 파는데도 별 문제가 없었다. 번서는 약수골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의미에서, 남아있던 혈석 가루를 판 돈을 인부들과 반분했다. 다만 마을 사람들 전체와 나누어 가진다는 조건을 달아서다(물론 직접 일하는 그들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인무들이 은각 꾸러미를 들고 신이나서 마을로 돌아가고 나서, 번서는 경운경을 불렀다.
" 부르셨나요 상공? "
" 그래요 경 낭자, 낭자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소. "
경운경이 지금 병치레를 하고 있다고는 해도, 완전히 회복하고 나면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언행으로 보건데 사리에 맞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 영특하다 할만한 구석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광산을 경운경에게 맡겨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번서의 계획을 들은 그녀도 기꺼이 동의했다.
이후 경운경이 머무를 곳은 합포 포구에 팔려고 내놓았던 작은 저택이 되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2층 구조에 지하실이 딸린 튼튼한 기와집이었다. 편의를 보아 줄 하녀를 구하고 목수와 미장이를 사서 집을 새로운 목적에 알맞게 고치는 동안, 그녀는 번서가 준 광산 장부를 통해 광산을 운영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약수골 주민들, 특히나 밀채에 지원한 장정들과 혈석을 사줄 거래자들과도 안면을 틔웠다. 그들에게 있어 경운경은 번서의 대리인이었지만, 번서는 장차 그녀가 광산 주인이 되어줬으면 하고 바랬다. 나이로 보나 그 신세 내력으로 보나, 더이상 세상의 풍파를 겪지 않았으면 해서다. 물론 번서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기쁠 뿐인 그녀에게는 그런 의향을 숨겼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경운경도 병증에서 완전히 회복해서, 번서는 드디어 중주로 가기 위한 준비를 끝마친 셈이 되었다.
" 자주 들러 주셔야 해요! "
" 물른이오 경낭자. 매월 말일에 전서구를 써 보내는 것을 잊지 마시오. "
" 네 상공! "
경운경과 약수골 대표들의 배웅을 받으며, 번서의 배는 합포 포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