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 292. 그란 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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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처음에 아버지께서 어떤 목적으로 자기를 이곳에 보냈는지 다 알고 계신 모양이었다.
현자님이니 당연하였다.
사랑 없이 하는 귀족 간의 정략결혼처럼 네가 원하는 것이 진정 나의 사랑이라면 나를 너에게 주마. 그러나 내 배경과 후광을 이용하지는 말라는 일종의 경고 담긴 말씀.
‘아니, 이건 시험인가?’
현자님의 의도를 한참 고민하는데 들려오는 현자님의 목소리, 현자님은 다시 한번 이전 내용을 강조했다.
“저만 딱 믿으시죠. 아내들이나 다른 사람들 모르게 저와 영애만의 비밀로 하면 되니까요.”
‘아, 경고가 맞는구나….’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현자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차가운 말을 비수처럼 날려대셨다.
가슴에 꽂히는 서릿발 같은 말이 로렐라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물들였다. 귀족으로 태어나 이런 말, 이런 관계 예상할 수 있었지만. 처음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든 사람에게는 결코 아니었다.
마음을 부정당한 로렐라인의 가슴은 갈가리 찢겼다.
그렇기에 로렐라인은 처음은 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지만, 자신은 그것과 다르게 현자님에게 진짜로 반했고, 그렇기에 현자님을 위해서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했노라 말하고 싶었다.
로렐라인은 자신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현자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그래서 그를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를 알려드리고 싶었다. 잘못하면 영지로 그를 유혹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현자님의 차가운 말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녀가 혼수로 준비한 그란 폴을 현자님께 언제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있다고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러셀님, 저. 부, 부끄럽지만 제가 이번에 그란 폴의 후,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러나 자기의 혼수를 단칼에 자르는 현자님의 말.
“일단 축하드립니다. 영애께서 앞으로 여 백작이 되실지도 모르겠군요.”
현자의 입을 통해 돌아온 말은 영지에는 관심도 없으니 네가 직접 여 백작이 되어 관리하라는 말이었다. 자기 아내들을 대할 때는 그렇게 다정한 모습이었는데 너무 차가운 현자님의 반응.
로렐라인은 부끄럽지만 한 번 더 현자님께 권했다. 아니,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후광과 배경을 원할지는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저도 그란 폴도, 다 현자님께 드릴 테니 부디…’
“예, 그러니 다른 분들께…”
다른 아내들께 알리고 저도 그 말석에라도 넣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하려 했지만, 현자님은 말을 자르고 차갑게 경고를 다시 해 해오셨다.
“그럼요!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저희 둘만의 영원한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영애의 명예를 위해서도 결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죠. 릴리아나 누님까지 셋만 아는 비밀 어떻습니까?”
현자님은 영지 따위로 자신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듯 더욱 차갑게 말씀하셨다.
‘그런 것이 아닌데…’
로렐라인은 북부에 있다는 겨울 한복판에 던져진 것 같았다. 몸서리쳐지는 차가운 기운이 목책 그늘에 선 자신에게 불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자님의 말씀은 정말 사랑만 원한다면 소원은 들어주겠지만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자신의 명예를 들먹거리며 사회적 매장까지 시킬 수도 있다고 위협하는 현자님. 릴리아나 언니는 옆에 있다가 같이 된서리를 얻어맞았다.
정부가 된다면 둘 사이의 연락을 맡으라는 현자님의 말씀.
현자님의 차가움에 정신을 못 차리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현자님께서 말씀하셨다.
“뭐 의심이 간다거나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실 테지만, 이미 저는 한 명에게 은밀한 도움을 주는 사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싫어? 싫으면 이미 정부도 있으니 꺼지라는 단호한 말씀. 쓰러질 것같은 정신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언니의 몸에 의지해 다리를 지지했다.
그런데 언니는 멍청하게 현자님의 말을 못 알아듣고 그걸 되묻고 있었다.
“뭐!? 진짜 러셀?!”
한심한 언니의 모습.
그리고 현자님도 언니가 한심한 듯 언니에게 말하는 듯 나에게 메시지를 전해오셨다.
“누나도 알잖아 로리엘. 어디 가서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영애도 제가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한쪽을 소홀히 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로리엘이라면 그 녹색 머리의 아름다운 엘프 수호자.
러셀 현자님은 말씀을 풀어보자면.
나는 이미 아름다운 엘프 수호자를 정부로 두고 있으니 아쉬울 게 전혀 없다. 하지만 네가 정말 나를 원한다면 그 엘프 수호자와 같은 위치로 삼아주마.
러셀의 말 한마디에 로랄레인의 위치와 가치가 결정되었다.
정부를 삼아주겠다는 러셀님의 말에 조금 욕심을 내었지만 생각해보니 러셀님의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는 상황.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엮이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가문은 현자님의 후광을 얻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것이 뻔하니 이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그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정실이나 첩실을 원했다니….’
로렐라인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며 러셀님을 향해 말했다. 비장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꼭 문 채로.
“역시, 제가 준비할 수 있는 것들로는 부족했나 보군요. 계속 욕심을 부리면 추한 모습만 보이겠죠? 그럼…. 이정도에서 만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저는 러셀님만 믿겠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로렐라인의 마음의 고백이었다.
‘그래, 정부라도 그의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거세한 병신이라도 하나 남편으로 세워두면 그의 핏줄이 그란 폴에 주인이 되겠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것이 되었다는 만족감에 빠져있을 때였다.
현자님의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마도 자신을 얻어서 기뻐하는 듯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만족해 주시니.
“그래서, 마음에 드신 남성분은 누구시죠? 이 현자 러셀이 선진 문물인 밀당이라는 것을 영애님께 전수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이상했다.
마치 내용이….
이상한 현자님의 말씀에 지금까지 대화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서릿발 같은 그의 말과 지금까지 대화의 모든 것이, 자신과 러셀의 착각이 만나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새끼가 진짜!’
로렐라인은 러셀이 정말 현자가 맞는지 조금 의심되기 시작했다.
“야!”
빼액 소리를 지르는 릴리아나 누님.
‘대체 누님이 왜 소리를 지르지? 설마? 하여튼 여자들의 질투는…’
소리를 지르는 누님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누님과 안 지도 훨씬 오래되었고 당장 급한 것은 나이가 더 많은 릴리아나 누님인데 자기는 두고 새파랗게 어린 영애의 결혼을 돕겠다고 했으니 누님이 당연히 서운할 것인데.
누님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음을 깨닫고 다급히 누님을 향해 말했다.
“누님, 설마 영애 님만 연애 상담해준다고 설마 질투? 하, 누님도 제가 좋은 남자 생기면 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쇼. 설마 내가 누님을 빼먹을까? 누님은 그냥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그냥 찍기만 하쇼 내가 아주 그냥 눈 감았다 뜨면 침대 옆에 사랑하는 남자 누워있게 만들어 드릴 테니 말이야.”
누님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내가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릴리아나 누님은 왠지 더 화를 냈다.
“야! 너 러셀 솔직히 말해! 너, 아내들 전부 네가 좋다고 고백하고 아내로 얻은 거 아니지? 여자들이 전부 먼저 고백해오고 그런 거지? 맞지?”
“어, 어떻게 그걸?”
갑자기 팩트로 조져오는 릴리아나 누님. 그리고 누님의 말에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
‘아니, 지금 그걸 왜 물어보는 거냐고!’
놀라 영애를 바라보니 영애의 눈빛도 서서히 불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한심하단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누님과 영애. 누님은 화가 나서, 이제 나만 믿겠다며 계약 의사를 밝힌 영애 앞에서 나를 개망신을 주고 있었다.
‘아니, 이분들이! 원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원래 자기 일은 어려운 법이라 그런 건데. 이런 걸로 불신의 싹을 틔우다니!’
나는 계약이 되자마자 파기되려 하는 상황에 다급하게 설명했다.
“아니, 이게 원래 자기 연애와 남의 연애는 다른 거라니까? 원래 다른 사람의 연애는 눈에 잘 들어오고, 자기 연애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 사람인 거야.”
내가 다급히 설명하자 릴리아나 누님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지? 자기 연애는 잘 모르는 것이 사람인 거지?”
“그럼 당연하지!”
“그래, 그러니까 러셀 너는 안 되겠네.”
“뭐?”
영문을 모를 말을 한 릴리아나 누님이 영애의 팔짱을 끼고 나한테 턱짓하자, 영애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러셀님, 아까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해요. 우리.”
그리고 둘은 총총히 여관 쪽으로 향했다. 그녀들이 사라지며 나누는 대화가 조금씩 귓가에 들려왔다.
[들었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 너도 그냥 밀어붙여!]
[고마워 언니! 연애는 언니가 더 현자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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