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소녀들은 도시로 향하고
* * *
이세계로 오고 난 뒤 가장 푹 잔 날이었다. 아침에 더할 나위없이 상쾌하게 일어났다.
은근히 정든 노른을 떠나 수도 라이오넬로 향하는 날. 출발할 채비를 하고 파티원들과 함께 마을의 입구에 섰다.
입구에 서서 노른을 바라보니 아쉬움과 앞으로의 설렘이 겹쳐서 뭉클해졌다. 오랜 기간 머문 건 아니지만, 이곳에서 첫 경험도 하고, 전투에도 익숙해졌다.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었지.
"얼른 출발하자, 갈 길이 멀잖아."
나도 모르게 조금 오래 멈추어 서 있었는지, 에린델이 얘기했다.
'일이 다 끝나면 한 번쯤 놀러 와야지.'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그녀에게 대답했다.
"가자."
그렇게 라이오넬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
마왕군 소속의 마족인 케이션은 최근 고민이 생겼다. 하는 일이 계획대로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천왕 중 하나인 최면의 아프리의 종복이었다. 아프리가 직접 명령한 일인데,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걸 들키면 어떤 벌을 받을지 몰라 두려웠다.
'대체 누가 만티코어를 잡은 거냐고."
아프리의 명령은 공간 전이를 통해 핌베르트 왕국 곳곳에 몬스터를 소환하는 것이었다.
왕국 북쪽 전선에서 전면전을 펼치고 있지만, 아무래도 성벽과 마법진으로 방어를 제대로 갖춘 곳은 공략이 쉽지 않아 대치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변칙적인 방법을 통해서 왕국 침략을 쉽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케이션도 왕국 내부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몬스터를 준비했다.
하지만 왠일인지 보낸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만티코어와 키메라들에게 넣어둔 수정구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수정구를 통해서 만티코어가 모험가들을 학살하는걸 볼 수 있었는데, 그녀가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온 사이 수정구의 반응이 끊긴 것이었다.
새로 몬스터들을 보내면 되지만, 공간 전이 마법은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 거기다 왕국에 손해를 끼칠만한 몬스터를 보내야 하니 그런 강한 몬스터를 소환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아으 정말 짜증 나. 어떤 녀석인지 걸리기만 해봐."
케이션은 등에 달린 작은 날개를 부르르 떨며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누가 짜증 난다는 거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목소리. 최면의 아프리였다.
"헉. 아, 아프리님 어, 언제 오셨습니까."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케이션."
아프리의 심기는 좋지 않아 보였다. 사천왕들과의 회의가 그리 즐겁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아프리의 낌새를 눈치챈 케이션은 더더욱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아, 그, 그게 말이죠"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이틀 동안 방치플레이다. 강도도 높을 거야."
방치 플레이라 함은 아프리의 최면에 걸려 성감이 높아진 후 그대로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묶어 놓는 체벌이었다. 그녀는 전에 하루 동안 방치되어 정신이 나가기 직전까지 고통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틀 동안이라는 말에 그녀는 식은땀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아프리님, 만티코어가 누군가에게 당한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말은 누가 한 지 모른다는 얘기군?"
"네에."
"알았다. 하루다. 쉬면서 마력이나 채우도록."
"네?"
"체벌 기간을 말하는 거다. 멍청한 것."
누군지 알아 오라는 아프리의 말을 마지막으로 케이션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
노른에서 라이오넬로 향하는 어느 숲속 오솔길.
비렌데의 이동속도 증가 마법으로 상당히 빠르게 이동을 하고 있던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거 굳이 걸어갈 필요 있나? 텔레포트를 쓰면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만화나 소설을 통해 접했던 마법들이 이곳에선 구현 가능했다. 그렇다면 순간이동도 못할 건 없지 않겠냔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잠깐 멈춰봐."
갑작스레 꺼낸 내 말에 길을 따라 열심히 가고 있던 모두 궁금증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이 지도에 표시된 거리를 보면, 우린 최소 3일은 걸어가야 할거야."
"그건 출발하기 전에 말해서 알고 있어. 주인."
"3일 동안 노숙하는 건 불편할 거란 말이지. 마법을 활용한다 해도 침대를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강단백?"
"그래서 이몸께서 텔레포트를 써보겠다 이 말이야."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이동이라는 마법은 마법계에서 엄청난 고위마법이라는 인식이 있는 듯 하다. 사실 내가 저번에 쓴 리버스 그래비티도 현자급의 고위 마법인데,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대장님, 순간이동은 엄청 어려운 마법 아니야?"
세키돌 또한 놀라서 물었다.
"그 엄청 어려운 걸 제가 해냅니다."
곧바로 마나의 아지랑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 숲속이어서 마나가 충만했고 강한 아지랑이의 일렁임을 느꼈다. 같이 이동을 하기 위해 셋을 한 번에 끌어안았다.
"꺅."
에린델이 조금 놀란 거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지도 속의 수도를 생각하며 무게감 있게 외쳤다.
"텔레포트 (Teleport)"
그리고 거짓말같이 아무 일도 없었다.
"."
모두 말을 잃고 날 빤히 쳐다봤다.
"아니, 이게 왜 안 되지? 하하."
"텔레포트는 쓸 줄 모르면서, 날 안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 거지?"
에린델이 쏘아보며 말했다. 물론 에린델의 부드러운 살결은 기분 좋았지만, 정말로 순간이동을 할 생각이었다.
"아니야. 나 강단백 그렇게 비겁하지 않아. 하고 싶으면 정정당당하게 한다고!"
정말 억울했지만 역시나 그녀는 믿어주지 않는 얼굴로 변태라며 놀리고 있었다. 아니, 변태가 맞긴 한데 그래도 이번엔 진짜 억울하다고.
텔레포트가 안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가지 가능성은 떠올렸다. 라이오넬이라는 도시는 내가 가본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명확히 위치를 떠올릴 수 없었다.
지도 속의 위치를 보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가본 곳이라면 되지 않을까?
"내 결백을 증명해주지."
나는 구슬을 일곱 개 모아야 하는 만화 주인공처럼 검지와 중지로 이마를 짚으며 다시 한번 외쳤다.
"텔레포트 (Teleport)"
그 순간 마치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듯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의식이 끊기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건 노른의 광장이었다. 늘 보던 익숙한 헤르메스의 간판과 분수대가 보였다.
정확히 내가 상상한 노른 광장의 위치로 텔레포트에 성공했다. 아무래도 내가 가본 적 있는 곳만 가능한 모양이다. 머릿속에 이미지를 선명히 그릴 수 있어야 되는 것 같다.
진짜 순간이동이 되다니, 어릴 적부터 꿈만 꾸던 마법을 쓸 수 있게 됐다니!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얼른 오솔길로 돌아가 그녀들에게 자랑해야지. 내가 갑자기 없어져서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렇게 곧바로 오솔길을 떠올리며 순간이동을 하려 했지만, 믿어주지 않을 수도 있기에 노른까지 다녀왔다는 증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저번에 맛있게 먹었던 노른 명물 빵을 산 후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강단백! 어디 갔었던 거야?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어."
돌아오자 모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노른에 다녀왔어. 자 이거 받아."
방금 구워진 노릇노릇한 빵을 건네주자 얼굴에 화색이 도는에린델.
"이건 그때 먹었던 노른의 빵 . 진짜 순간이동을 쓴 거구나. 대단해."
"이제 믿어주는 거지?"
"응. 근데 아깐 왜 안됐던 거야?"
"아무래도 가본 적 있는 곳만 가능한 모양이야."
앞으로 순간이동을 활용한다면, 효율적인 모험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단점은 있었다. 최대한 주변의 마나를 활용하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힘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마나가 드는 모양이었다.
순간이동의 단점까지도 알아냈고, 신나게 빵을 먹은 뒤 다시 라이오넬을 향해 출발했다.
****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 후 어두워질 때까지 열심히 걸었으나, 가려는 거리에 1/3밖에 가지 못했다.
'역시 3일은 걸리려나.'
비렌데의 헤이스트 마법이 아니라면 일주일은 넘게 걸렸을 여정. 충분히 빠른 속도긴 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시골 마을에 있을법하지 않은 몬스터를 만난 것도 그렇고 요즘 마왕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시롬의 말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살기 좋은 세계에 떨어진 건 확실히 아니고, 어쩌면 가장 위기인 순간에 오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낙천적인 성격 탓인지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이 세계의 위기를 내 손으로 없애고 영웅이 되는 것.
한번 태어난 인생, 명예로운 자리에 서서 삶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길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건 없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숲속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잘 준비를 했다.
"파이어 (Fire)"
가장 기초적인 화염 마법. 장작을 모은 뒤에 파이어를 써서 모닥불을 만들었다.
"오오~ 따뜻해. 고마워 대장님!"
세키돌. 이 아이는 작은 것에도 리액션이 커서 좋다. 귀여운 녀석. 한번 쓰다듬어줬더니 배시시 웃는다.
그렇게 모닥불을 만들고 바닥에는 노른에서 준비해온 천을 깔고 누웠다. 물론 이불용 천도 잊지 않고 덮었다.
그리고 잠을 청하려는데 비렌데가 입을 열었다.
"주인. 이대로 그냥 잘 거야?"
"자야지. 내일도 갈 길이 멀잖아."
"그건 그거고. 야외에서 자는 건 처음인데, 그냥 자기에는 아쉬운걸?"
은근슬쩍 내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비렌데. 역시 이 서큐버스는 음탕하다.
그러는 동시에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아니, 동물의 소리라기엔 들어본 적 없는 소리.
"포위된 것 같아. 싸울 준비해."
에린델도 아직 자고 있지 않았는지 우리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바로 활을 집어 들었고, 세키돌도 허겁지겁 벗어뒀던 건틀릿을 장착했다.
"그르르륵."
기분 나쁜 울음소리. 놀(Gnoll)들이었다. 하이에나의 얼굴을 하고 이족 보행을 하는 괴물. 방망이와 철퇴, 뒤쪽에는 활을 든 녀석들도 있었다.
도구를 다룰 줄 아는 몬스터는 지능이 낮은 편은 아니기에 확실히 까다로운 존재다.
놀들이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다.
"블레싱 (Blessing)"
움직임을 포착한 비렌데가 신체 능력이 골고루 상승하는 축복을 걸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세키돌이 튀어 나간다.
가장 앞에 있던 놀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숙여 가볍게 피하고 놀의 명치에 주먹을 박아넣는다. 옆에 있던 놀도 철퇴를 내려치려 했지만, 그러기 전에 세키돌의 뒤차기가 놀의 머리에 명중했다.
순식간에 놀 몇 마리가 나가떨어졌다. 역시 세키돌은 엄청나게 빠르고 강하다.
하지만 놀들은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다. 족히 수십은 되어 보이는 놀 무리.
범위가 너무 넓지도 않지만 좁지도 않은 정석적인 마법을 썼다.
"파이어 볼 (Fire Ball)"
하지만 놀들은 이상하게 기민한 움직임으로 파이어볼을 피했다. 놀 정도의 수준의 몬스터에서 보기 힘든 움직임.
그들이 세키돌에게 쉽게 당했던 건, 놀이 느린 탓이 아니라 세키돌이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이었다.
에린델도 활을 쐈으나 마찬가지로 쉽게 피하거나 방패로 막았다.
"유도 화살을 써야하나 놀 치곤 너무 빠른데?"
게다가 뒤쪽에 있던 놀이 쏘는 화살도 상당히 날카로웠다. 비렌데가 축복마법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피하기 어려웠을 속도였다.
"잠시만, 실험해 볼게 있어."
저번의 슬라임 태그와 라이트닝 랜스를 합한 마법이 맘에 들었고, 또 태그와 마법을 결합해보려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이 마침 써보기에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Tag : ahegao]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동시에 화염구를 여러발 던졌다.
"아헤가이어볼!"
혀를 내밀고 눈을 까뒤집는 표정이 된 놀들. 보기에는 불쾌한 광경이지만, 그들의 시야가 사라졌기에 파이어볼은 직격했다.
"끼에에엑!"
괴성을 지르며 반절 이상의 놀들의 몸이 날아가거나 불탔다. 새로운 결합마법의 개발에 성공한 나는 씨익 웃으며 마력검을 뽑아 들었다.
남은 놀들에게 아헤가오의 효과가 남아 있기 전에 마무리하기 위함이었다.
무방비한 상태의놀들을 쉽게 베어 넘겼다. 에린델과 세키돌도 있었기에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마지막 한 마리. 마력검을 휘두르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태그의 지속시간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았다. 지금이 지속시간을 알아보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일부러 한 마리를 남긴 다음 족쇄 마법을 걸고 한참을 기다려보았다. 5분 정도가 지나도 아헤가오 태그는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놀.
10분 이상 지났을까 싶은 시점 그제야 놀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나를 공격하려고 바둥거렸다.
가볍게 목을 베어 마무리 해주고 생각했다.
'10분 정도인가? 생각보다 짧은데.'
이 정도의 지속시간이라면 여태 있었던 일 중 납득이 안 가는 게 몇 가지 있었다.
에리나, 비렌데, 카리나 이 세 명의 여자들과 섹스를 할 때 태그를 사용했었다. 하지만 분명 10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그녀들은 엄청나게 느꼈었다.
'태그의 효과도 있었지만, 다른 영향도 있었다는 건가.'
추측할만한 건 역시 성기의 크기. 전생하면서 엄청나게 커지긴 했지. 그리고 SS등급의 카리스마 또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동료의 영입과 섹스 모두 그 능력치의 영향을 받았기에 쉬웠다고 생각하는편이 합리적이다.
태그의 능력에 대해 조금 더 이해가 높아진것 같다. 고마운 놀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마석을 줍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강단백, 이상해 이 놀들 마석을 하나도 떨어트리지 않았어."
"자연 발생한 몬스터가 아닌 거 같아. 주인."
"역시 그런가. 이상하게 움직임이 빠르다 했어."
마석이 뭐냐고 묻는 세키돌에게 설명을 해주며 잠자리를 옮겼다. 파이어볼 때문에 엉망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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