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토미의 태그술사-36화 (36/57)

〈 36화 〉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꽃(2)

* * *

성벽 위로 향하는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어떤 방식으로 저 마물을 처리해야할지.

마법으로 잡는다면 편하겠지만, 병사들과 많이 얽혀있는 상황. 주변의 병사들까지 마법에 피해를 입을수도 있어서 함부로 마법을 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정해져 있다.

성벽에 오른 뒤 단숨에 날개달린 마물에게 뛰어든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 방패를 든 병사에게 공격하고 있던 마물은 내 속도에 반응할 수 없었다.

"하아압!"

다가서자마자 바로 마물의 목을 벤다. 괴성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가는 마물. 역시 블랙 미스릴 소드의 성능은 뛰어났다. 전혀 걸리적거림이 없이 깔끔하게 벨 수 있었으니까.

마물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자 곧 잿가루로 변해버렸고, 당연히 마석은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소환한 마물이라는 이야기.

"대, 대단해 ! 그런데 누구십니까?"

갑자기 나타난 나에게 병사가 물었다.

"라이오넬에서 급하게 지원 나온 부대입니다. 어차피 다들 곧 알게 될 테니 얘기하자면 전생자구요."

"저, 전생자!? 전설로만 전해 듣던 전생자님이!"

병사는 내 생각보다 더 크게 놀란 반응을 보여줬다.

"전생자님이 우리를 구하러 나타나셨다!"

"우오오오!!"

과거에 핌베르트 왕국을 구했던 전생자의 전설은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 없었나 보다. 전생자가 나타났다는 말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날개 달린 마물은 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다들 최대한 방패병에게 붙어 피해를 최소화하시고 무기가 통하는 마물을 상대하세요."

주변의 병사들에게 얘기하고 이 말을 듣지 못한 병사들에게도 전파해달라고 말했다.

"단백, 우리는 어떻게 할까?"

뒤따라 날 따라온 에린델이 입을 열었다.

"에린델은 되도록 안전한 위치에서 병사들을 엄호해줘. 그런데 저 단단한 피부를 가진 마물에게도 화살이 통할까?"

"마나집속탄으로 공격한다면 충분히 통할 거야."

"좋아. 그럼 이쪽 성벽은 에린델이 맡아줘. 비렌데도 다친 병사들 위주로 치료 부탁하고."

"알겠어. 주인."

"세키돌은 날 따라와."

"응, 대장님."

의외로 해야 할 말이 술술 나왔다.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나는 당연히 전쟁 경험은 없다. 하지만 군 생활을 할 때 전방의 부대에서 근무했었다. 그래서 국지도발이나 다양한 훈련을 겪은 적은 많았고, 분대장을 해본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는 느낌이었다.

'더럽게 가기 싫었었는데, 아예 쓸모없는 경험은 아니었나.'

성문을 기준으로 서쪽 성벽은 에린델과 비렌데에게 맡겼다. 나는 세키돌과 동쪽 성벽으로 달렸다.

동쪽 성벽은 서쪽 성벽과는 다르게 병사의 비율이 깨져있었다. 동쪽에는 나름대로 공수의 밸런스가 맞았지만, 서쪽은 방패병이 거의 없었다. 이미 한참을 버티다 다 죽은 것 같았다.

마물들의 공격을 막아주고 버텨줄 존재가 없다 보니 병사들은 더 쉽게 당하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

"세키돌. 네가 나보다 빠르니 최대한 멀리 있는 병사부터 구해줘. 마물을 죽이는 것 보다는 병사의 구출 위주로 부탁해."

"걱정 마, 대장님. 이따 봐!"

그렇게 말하고 달려가는 세키돌의 속도는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속도였다. 평소에 많이 자제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엄청난 속도. 그렇게 달려들어 손에 장착한 건틀릿으로 마물들을 날려버렸다.

나도 지체하지 않고 가까운 쪽의 마물부터 베어나갔다. 날개 달린 마물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개와 비슷한 모습의 마물이었다.

날개달린 마물과는 다르게 피부가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지만, 속도와 발톱의 파괴력이 상당해서 대부분의 병사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개와 비슷한 마물에게 물려 팔을 뜯긴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제기랄, 숫자가 너무 많아."

숨 쉴 틈도 없이 계속해서 마물을 베었지만, 끝도 없이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나타나나 성 바깥을 확인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한여름에 땅에 떨어트린 아이스크림에 모여든 개미 떼처럼, 시꺼멓게 성벽 바깥을 물들인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개와 비슷한 마물들은 성벽 쪽으로 점프를 한 뒤 발톱으로 성벽을 찍어서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돌벽을 발톱으로 찍고 올라올 정도로 강력한 발톱의 파괴력. 점점 더 올라오는 숫자가 늘었고 위에서 열심히 잡아봐야 결국 큰 의미가 없었다.

마물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급기야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병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을 탓하긴 어려웠다. 나조차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으니까.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만들어내는 검고 기분 나쁜 어두운 물결은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성벽으로 올라오는걸 막아야 한다.'

잠시 멈칫할 정도로 놀란 나였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판단을 끝냈다.

"헬파이어 월 (Hellfire Wall)"

일반적인 불의 장벽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그보다 더 뜨겁고 큰 불의 장벽을 상상해서 성벽 앞에 마법을 펼쳤다.

닿으면 금세 불타서 몸이 녹아버릴 정도의 고온의 벽이 펼쳐졌지만, 마물들은 계속 성벽으로 달려들어 불타버렸고 더이상 성벽 위로 올라오는 마물은 없었다.

서둘러 서쪽 성벽 쪽에도 불의 장벽을 세웠고, 성벽 위에 남은 마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와! 대마법사 님이 나타나셨다!"

내가 엄청난 규모의 불의 장벽을 세운 것을 본 병사들이 그렇게 외치기 시작했고 큰 전력이 생겼다고 생각한 동쪽 성벽의 병사들도 사기가 올랐다.

더이상 성벽 위로 올라오는 마물이 없자, 도망치는 병사들은 없어졌다.

"라이오넬에서 왔습니다. 남은 병력끼리 뭉쳐서 조 단위로 싸우세요! 최대한 피해를 덜 입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외치고 고립된 병사들을 위주로 돕기 시작했다.

세키돌은 엄청난 속도로 마물들을 때려눕혔고, 나 또한 쉬지 않고 블랙 미스릴 소드로 마물들을 썰어버리자, 오래 걸리지 않아 마물을 전부 정리할 수 있었다.

헬파이어 월이 성밖에 깔린 이후도 한참 동안은 마물들이 계속 몰려들었지만, 성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걸 깨달았는지 더이상은 몰려들지 않았다.

"대장님. 끝난 거야?"

"응, 아마 한동안은 안 나타날 것 같네. 다치진 않았고?"

"물론이지. 세키돌은 튼튼해!"

세키돌과 합류한 후 에린델과 비렌데가 있는 서쪽성벽으로 향했다. 한참 걷자 성벽에 기대 쉬고 있는 그녀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린델! 괜찮았어?"

"조금 힘들긴하네. 단시간에 이렇게 마나를 많이 쓴 건 오랜만이라."

"고생 많았어. 비렌데는 어때?"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고 싶은데, 부상자가 끝도 없다 보니 나도 꽤 무리했어. 결국 광역치료 마법을 썼어. 근데 이게 또 마나 소모가 심각하거든."

지친다는 얼굴을 하고 한숨을 쉬는 비렌데.

"우선 지휘 막사로 돌아가서 상황에 대해 얘기 좀하고 쉴 곳을 얻어볼게. 가자."

곧장 동료들과 함께 지휘 막사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이는 광경은 처참했다. 다리를 잃어서 동료에게 부축받는 병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눈에 힘이 없는 병사 등. 처음으로 보는 끔찍한 광경에 마음이 심란했다.

"보고는 받았네. 대단하군. 당신 정말 전생자였군?"

지휘막사에 들어서자마자 리스티앙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믿지 않으셨던 겁니까?"

"솔직히 쉽게 믿을 수는 없지. 잘 모르겠지만, 병력을 모집하다 보면 이상한 허풍쟁이들도 많이 오거든. 조금 유명한 용병이었다고 자신이 뭐 드래곤을 잡았다느니 뭐니 하는 그런 부류들."

"그런데 여긴 마법사나 치유사는 없습니까? 성벽에 나가도 일반 병사들 밖에 없더군요."

나가서 싸우면서 가장 의아한 부분이었다. 이런 수준의 병력으로는 절대 마왕군에게 맞설 수 없을 것 같았다.

"많이 있었지. 지금은 다 죽었어. 그래서 후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며 싸워야 할 사람들이 다 죽었다니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전쟁에서 필요한 고급 인력들을 전부 잃어버리다니 납득이 가지 않았기에 그녀에게 되물었다.

"마왕군에는 이상한 녀석이 있어. 마나를 다루는 사람들이 그 녀석만 나타나면 다 쓰러져버렸어. 마치 일부러 골라서 암살하는 것 같이 말이야."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인가요?"

"아니, 알게 됐어. 스스로 밝히더군. 마왕군 제1군단장 루시페르라고 말이야."

"루시페르!"

리스티앙의 말에 뒤에 서 있던 비렌데가 반응했다. 나도 기억이 난다. 비렌데가 몇 번이나 언급했었으니까. 잔인하며 만나기 싫은 마족이라고.

"아마 루시페르가 마나를 흡수한걸 거에요. 순식간에 마나를 흡수해가니 소유한 마나가 큰 사람은 쇼크사하게 되죠."

"그렇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리스티앙의 얼굴이 상당히 어두워졌다.

확실히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대규모로 마물을 막을 수 있는 마법사도 없고, 다친 병사들을 신속하게 치유 해줄수있는 힐러들도 없는 상황.

"병사들이 쓰는 무기로는 마물을 상대하기 어려워 보이던데. 화기는 없습니까? 총이나 대포 같은."

"있네. 다만 이젠 사용할 수가 없어."

리스티앙 대신 옆에 있던 안드레아가 대답했다.

"왜죠?"

"화약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야. 전쟁이 몇 년간 이어지다 보니 왕국 전체의 화약이 다 떨어졌어. 여러 군데에서 만들고는 있지만, 필요량에 비해 보급속도는 현저히 느리지. 현재 최전방에서는 화약이 다 소모된 상태야."

총체적 난국. 어쩐지 이 시대 정도면 충분히 있을 만한 무기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생각보다 핌베르트 왕국은 궁지에 몰려있었다.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드레이성에는 아직 화약이 남아있으니 그쪽으로 후퇴하는 걸 고려하고 있던 참이지."

화약이 있는 곳이라면 확실히 수비하기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이곳과 같은 상황이 될 것. 점점 전선이 밀리고 결국 핌베르트가 침공당할 뿐이다.

"후퇴가 임시적인 대책은 되겠지만, 결국 해결해주지는 못할 방법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다 같이 여기서 죽자는 건가?"

안드레아와 내 대화를 듣고 있던 리스티앙이 물었다.

"아뇨, 방법은 있습니다. 저는 최선의 수비를 할 겁니다."

"최선의 수비라면?"

"공격입니다. 결국 막기만 하다 보면 언젠간 뚫리죠. 우리를 공격할 대상을 없애는 게 정답입니다."

"그러다 루시페르가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거지? 듣자 하니 마법으로 마물을 막았다던데, 마법사는 그를 이길 수 없어."

"마법만이 제 무기는 아닙니다. 저는 히토미 마스터입니다."

"뭐? 히토미? 그게 뭐지?"

"아, 말실수입니다. 저는 전생자입니다. 다 방법이 있으니 절 믿어보시죠."

아리송한 표정의 리스티앙. 진지한 표정만 짓던 그녀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니 조금 귀엽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사령관님은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무례하다! 상관의 나이를 묻다니."

옆에 있던 안드레아 부관이 화를 냈지만 리스티앙은 괜찮다며 그를 자중시켰다.

"연세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야. 아직 20대라고."

"그렇다는 건 29세 시군요."

"나이가 젊다고 무시할 생각은 마. 이래 봬도 군 생활은 10년이 넘은 베테랑이다."

이세계에선 여고생일 나이대부터 군 생활을 한 모양이다. 대단하군.

"아무튼 이곳의 수비 대책을 마련한 뒤 즉시 공격할 생각입니다. 우선은 좀 쉬고 싶으니 마왕군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주시죠."

"본거지라고 할만한 곳의 정보는 없지만, 원래 지키던 라르디노 성 근처에 마왕군의 게이트가 있어. 거기서 계속 마물들이 소환되는 거 같고."

"좋습니다. 지도를 부탁드릴게요. 쉬는 건 어디서 하면 될까요?"

"지휘 막사 밖의 경비병에게 얘기하면 알려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다시 뵙죠."

그렇게 지휘 막사를 나와 쉴 수 있는 텐트를 안내받았다. 텐트 안의 간이침대에 누웠는데 손이 너무 끈적했다. 태연한척했지만 역시 첫 전투라서 상당히 긴장한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흘린 식은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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